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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여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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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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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한층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또한 지난날 잘못 을 반성하고 내 남은 인생의 목표를 계획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으 면서 성장한다는 말을 모토로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내 자신과 싸워가며 오늘도 하루하루 보람차게 열심히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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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이제 스물다섯. 대학생이 된다는 설렘과 함께 분주하게 찾아온 나의 이십대도 어느새 꺾여버렸다. 2013년도 벌써 완연한 봄 날씨에 접어든 요즘, 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을까?’만약 이처럼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면, 분명 내 인생은 지금 봄에서 여름으로 가고 있다.

2012년 2월, 경남 진주. 진눈깨비가 추적이던 기본군사훈련단에서 부모님과 여동생, 사랑하는 여인에게 손을 높이 흔들며 훈련 잘 받고 오겠노라 인사하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때만 해도 마치 훈련소가 군대의 전부일거라 생각하던 나였는데, 어느덧 자대에 온지도 1년이 넘었고 병장진급을 바라보고 있다. 때가 온 것일까? 자대의 사계절을 다 겪으니 남은 군 생활도 훤히 보이고, 주위를 둘러봐도 선임보다 후임이 훨씬 더 많아 웬만하면 눈치 볼 것 없는 요즘이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이곳이 내 집이요, 내가 가장 잘 아는 곳이 돼버린 나. 그래서일까, 선임들이

최우수상

내 인생,

봄에서 여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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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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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 동안 꼭 한번은 온다는 그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권태’(倦怠)이다.

하루 종일 우수에 찬 눈빛으로‘나가고 싶다’를 중얼거리며 이상한 행동을 하던 선임들의 모습을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생각에 잠긴다. 우울하고 지루하고 발가벗은 나 자신과 마주하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으름과 싫증의 시기, 권태. 하지만, 이 시기동안 나는 뜻밖의 매력적인 선물을 받았다. 바로‘나 자신에 대한 생각들’이다. 한창 배우고 적응하던 이병, 일병 때는 뭔가 깊이 생각할 여유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상병을 달고 정작 여유가 생겼을 때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이 두려웠다. 이미 군대 안에서 보낸 1년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입대 전의 마음가짐은 잊고 타성에 젖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이 권태에 감사한다. 마치 작가‘이상’이 극권태(極倦怠) 속에서 진지한 자아성찰의 수필『권태』를 쓸 수 있었던 것처럼, 하루하루 나 자신과 마주해야했던 이 시기를 통해 비로소 진지하게 차분히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입대를 선택했던 나의 결심과 내가 군대에서 얻어가고자 했던 것들, 어느새 잊고 있었던 초심, 그리고 나의 인생.

군 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루비콘 강. 언제부턴가 텔레비전에서는‘루비콘 강을 건너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한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그 강. 비록 뭐 특별할 것 없을 스물다섯인생이지만 나도 이 강을 건넌 적이 있다. 바로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한 것이다. 2008년, 멀쩡히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새로운 꿈에 도전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나는 사람 한 명 누우면 가득 차는 고시원에서 재수시절을 보냈다. 아무래도 철없던 나이에 챙겨주는 이 하나 없이 홀로 고시원에서 지내다보니 살이 더 빠져 키176cm에 몸무게 50kg 체중미달사유로 4급 판정을 받게 되었다. 4급 판정 이후‘신의 아들’

내 인생, 봄에서 여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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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칭해지며 주변 또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정작 입시준비에 여념이 없던 터라 군복무문제가 피부에 당장 와 닿진 않았다. 재수실패로 이듬해 삼수까지 하게 된 나는 비로소 07학번에서 10학번 새내기가 되었고, 긴 입시 탓에 막연히 언젠가는 가겠지 했던 군복무에 대해 진지 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학년이 끝나가던 2010년 겨울이다. 그런데, 이전까진 적당한 시기에 공익으로 가면 되겠지 하던 군대였는데, 이상 하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원한다면 현역으로 복무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50→54kg. 3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예전 몸무게를 되찾은 나는 재검을 받는다면 현역 급수가 나올 것이었고, 재검을 받지 않는다면 4급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남들에게는 없는‘선택권’이 주어진 것이다. 이 후 몇 개월 간 심히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또래 친구들은 내가 입시준비를 하는 동안 이미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서 사회에서 나보다 몇 년 빨리 앞서나가고 있는 상황인데, 그 좋다는 공익을 포기하고 굳이 현역으로 갈 필요가 있을까? 몸도 약한데 괜히 군대 가서 다치지나 말고 공익근무하면서 돈도 모으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자기개발에 힘쓰는 건 어떨까? 등 뒤쳐진 시간에 대한 조급함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더군 다나‘안 갈 수 있으면 절대 가지마라, 미쳤냐? 제정신이 아니다’등 설득 안 당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분명 현실적인 문제만을 생각한다면 누가 봐도 공익근무를 선택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항상 맘에 드는 선택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누가 봐도 비합리적인 선택이지만 나 자신에게 만큼은 후회 없고, 속 시원하고, 맘에 드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바로‘비합리적인 선택이지만 거기서 내가 발견한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오랜 고민 끝에 난 결국‘후회 없고, 속 시원하고, 맘에 드는’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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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현역복무이다. 이 선택에는 오랫동안 만나온 친구들의 영향이 컸다.

‘나라는 우리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넌 너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돼.’

북한으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웠던 2010년, 군복무중인 친구들이 해준 말이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 그것은 아직 사회에만 있었던 나에게 신비 로운 것이었다. 그것도 가장 빛나는 청춘의 시간을 바쳐야하는 경험해 보지 못한 숭고함. 고등학교시절까지만 해도 다 같이 철없던 동갑내기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입시를 준비하던 2년 동안 친구들은 군복무를 하면서 뭔가 내가 모르는 무형의 가치들을 많이 배워온 느낌이었다. 대한 민국의 평범한 남자로 태어나 현역으로 입대하여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전역하고 다시 사회로 나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내 친구들을 보면서, 현역 복무를 통해 우리나라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한 신체와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남자의 의무이자 멋진 특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축하드립니다. 3급으로 현역 입영 대상자입니다.’2011년 여름 경기지방 병무청 신체검사실 컴퓨터 모니터에 위와 같은 말이 쓰여 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렇다. 결국 고민 끝에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비록 나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적, 경제적 여건은 공익근무보다 열악하겠 지만, 앞으로 찾아올 여러 경험들을 통해 나의 삶을 밝혀줄 무언가를 배워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체검사를 다시 받은 그날, 나는 소중한 지인들 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안보내도 될 거라 생각했던 아들을 막상 군대에 보내려니 서운함과 대견함을 느낀다던 부모님. 속상하지만 오빠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며, 자기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려준다던 여자친구. 제정신이 아니라며 그렇게 반대하더니만 막상 재검 받고 오니까 정말 잘했다고 술자리까지 마련해준 육해공 예비역 친구들.

내 인생, 봄에서 여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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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대한민국 공군 현역병으로 입대한지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내 소신으로 입대 한 만큼, 주변에서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후회 안 해?’그들은 분명‘엄청 후회해’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질문 이겠지만, 난‘오길 잘했어’라고 대답한다. 물론 일말의 후회도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가족이 크게 아프고 힘든데 신경써주지도 못할 때, 정말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그녀와 크게 싸웠을 때 내가 공익근무를 하고 있었 다면 상황이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하며 눈물을 삼킨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내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틋함, 나에게 주어졌던 자유에 대한 소중함, 국가와 안보에 대한 책임감,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회성 등 이미 군대에서 많은걸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생 살이 안찔 것 같던 나였는데,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운동으로 50→54→62kg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달성하면서 내가 갖고 있던 가장 큰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현역 복무는 나에게‘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갔다 오는 군대를 억지로가 아니라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었던 특별한 기회를 통해,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며 대한민국의 떳떳하고 건장한 남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멋진 계기’이다.

어느덧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절대 적은 나이도 아닌 반오십을 지나 치며 학창시절과 길었던 입시, 대학생활로 이루어졌던 내 인생의 봄도 가고 있음을 느낀다. 군대를 기점으로 초록물결 뻗어나가는 푸르른 여름이 이제 곧 올 것이다. 꿈틀대는 여름을 위해, 난 이제 이런 깨달음을 준‘소중했던 권태’를 딛고 초심으로 돌아가 남은 군 생활을 마무리 하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는 값진 시간,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정리해보고 앞으로의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알찬 시간, 훌륭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큰 꿈을 키워나가는 뜨거운 시간. 바로 지금이다. 내 인생, 봄에서 여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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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세 번의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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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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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기세가 채 꺽이지 않아 무덥던 가을의 문턱... 고3시절, 공부에 대한 의지가 부족해 결국 재주생활 -ing 중 이던 2009년 9월. 대한민국 성인, 20살 남성이라면 꼭 받는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난 병무청으로 향했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앞으로 있을 신체검사에 대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국방의 의무? 현역? 공익? 아직은 멀고 먼 후의 이야기라 생각하며, 재수학원을 정당하게 하루 빼먹었다는 것에 기뻐하며 이번 주 무한도전은 무슨 내용일까에 대해서만 궁금해하며 생각하고 있었다.

병무청에 도착하여 간단한 신원확인을 하고 들어간 곳은 바로 병무청, 인성검사실! 압도적인 문항 수에 대다수의 인원을 질리게 만든 인성검사를 간신히 끝마치고, 숨 돌릴 틈 없이 환복한 뒤, 신체검사장에 들어섰다. 나라 사랑 카드를 만들고 몸무게 측정, 키 측정부터 순서대로 시작된 신체검사 에서 내 바로 앞에 앉아서 검사를 받던 사람이 체중으로 4급 판정, 공익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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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신체검사장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 것을 느끼게 된 것은..

나는 이전까지는 신체등급에 대하여 크게 생각을 안 하고 있었고, 어차피 대다수가 공익판정 못 받는 거 별다른 기대감(?) 없이 신체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검사를 받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지만 누군가가 내 눈 앞에서 4급 판정을 받으니 왠지 모르게‘혹시 나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사람이 너무 부러워지게 되었다.

뒤에서 검사 차례를 기다리며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공익판정에 대한 열망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의 신체등급을 신경 쓰게 되었고, 중간중간 가끔씩 나오는 4급 판정을 보게 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신체등급 4급, 5급을 받고 싶다는 검은 욕망의 아우라를 풍기기 시작했다.

이전에 자신에게 있던 모든 병명들을 이야기 하는 것은 물론이요, 일부러 안색을 안 좋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 일부러 다리를 저는 사람, 파스냄새 풀~풀 풍기며 허리에 손을 올리는 사람 등 신체검사장은 갑작스런 경쟁(?) 구도에 올라섰다.

그렇게 신체검사가 진행되던 중 안과 검사차례가 왔다. 평소에도 눈이 많이 좋지 않던 나는 내심 안과 질환 4급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4급이 나오겠어?’라는 생각을 갖고 기대하며(!)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경 벗으시고 시력 잽니다. 0.1, 0.1... 옆 정밀진단 쪽으로 가주세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대다수의 안경을 쓴 사람들이 정밀진단을 받기 위해 기계 쪽으로 향했다. 군의관님은 눈의 굴절도를 일일이 체크하셨고, 검사를 받던 사람들 모두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며 다음 검사로 넘어가게 되었다. 기대하고 고대하던 내 차례... 나는 기계 앞에 앉아 검사를 받았고, 잠시 후... “이거... 음.. 이 안약 좀 눈에 뿌리고 10분 뒤에 다시 검사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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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시력 측정 위해서 동공 확장시키는 안약이니까, 1주일 정도 강한 빛은 못 볼거에요.”라는 군의관님의 말을 듣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상한 안약도 눈에 넣고, 10분 뒤 다시 검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서..설마 4급? 공익? 내가 바로 신의 아들??!’이라는 생각과 함께 기대하며 기다렸고, 10분 뒤 나에게 날아온 등급은 역시나 4급이었다.

[2009년 9월 7일. 민병훈 90XXXX-1XXXXXX, 안과질환 굴절도 이상‘4급’]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을 풍기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쪽으로 우겨넣으며, 안약 때문에 눈은 엄청 부셨지만, 그런 것 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서 바로 휴대폰을 꺼내 친구들과 가족 등에게“나 4급 이야.. 공익 떴어!.”라며 군대에 안가도 된다는 안도감과 자랑을 표현하며 내심.. 아니 외심(!) 기뻐 하고 있었다.

“앗싸! 내가 바로 신의아들이다!! 공익이다!!”

그렇게 첫 번째 9월, 난 공익근무로 판정이 났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나의 모습을 느끼며 스스로도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그‘군생활에 대한 압박감.’이란 놈에게서 자유를 얻었다.

2010년 1월.

절친한 교회 형, 세호형이 첫 휴가를 나왔다. 12사단 이기자 부대에서 복무 중이던 그 형은 군대에 가는 것을 많이 싫어했으며, 놀기 좋아하고 좋게 말해서 자유분망한, 직설적으로 말하면 날라리 기질이 다분하던 형이 었다. 군대 가기 전 많은 걱정을 했고, 또한 많은 걱정을 받던 형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신병위로외박을 나온 형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키 180. 작지 않은 키긴 했으나 몸무게 95kg의 압박으로 인해 몸의 살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삐져나오던 모습의 형이 몸무게 70kg!의 멋진

세번의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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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또한,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놀기 좋아하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공부에 마음을 갖고 그토록 하기 싫어하던 재수를 생각하는 등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내가 형에게 가장 처음 한 말은“나 4급임. 공익임. 하하핫.”이었다. 군대 에서 고생하고 있을 형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형은“야 임마.

사내새끼가 한번쯤은 군대 다녀와야지. 그런걸 자랑하고 있냐.”라고 답했다.

예상외의 전개였다. 형이 나를 부러워하면 나는 군대 안간다며 자랑하며 놀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형은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군 입대를 추천 했으며, 내 입장에서는 같이 철없이 놀던 한 살 위의 형이 왠지 모르게 성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형의 모습을 통해, 나는 군생활 이란 것이 그저 몸 망치고, 시간 낭비 하는 곳이 아닌, 육체적,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자 계기가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깨닫게 되...기 까지는 안했지만, ‘군대란 곳이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닌가 보구나.’정도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서게 되었다.

2010년 9월.

두 번째 9월. 지금 내 눈 앞에는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대구지방병무청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군 권유와 왠지 모르게 당당한 군필자들의 모습에서 보아온 군대에 대한 긍정적 생각이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많이 커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후회하기도 싫었다. 고3시절과 재수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못해서 후회하고 있던 내가 이젠 너무 싫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에도 나란 놈은 극한의 상황에 집어넣어야지만 변화되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 군대라는 상황에 집어넣어 나를 좀 멋지게 발전시키고 싶다면 이렇게 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아버지의

“80년 인생 이라는 길에 비교했을 때, 군 생활 2년은 단 한 걸음의 발자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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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작은 발자국 하나가 너의 80년 인생의 밑받침이자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다.”라는‘어디선가 들어본 듯 하지만, 아버지가 직접 생각하셨다고 우기시는 명언.’을 계기로 다시금 병무청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나는 당당하게! 병무청 신체검사장으로 들어가서 재검사를 요청했고, 군대에 가고 싶어 재검사를 받으러 왔다는 나의 말에 직원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작년 나에게 4급 판정을 안겨주었던 안과검사실로 안내해 주었다. “꼭! 가고 싶습니다!”라는 뭐 광고의 멘트처럼 외칠 용기는 없었 지만, “음.. 애매한데..? 작년보단 규정이 조금 강화 됐는데도 좀 그렇네?

학생 어떻게 할래?”라는 군의관님의 말씀에“어떻게... 안 되나요..?”라는 말로 부탁드려 커트라인에 걸쳐있던 나의 눈을 3급. 현역판정을 받고야 말았다.

현역판정을 받고 나오던 나의 심정은‘매우 기뻤다..’ 라면 진실이 아닐 것이다. 까놓고 얘기하자면 군에 대한 압박감이 제로였던 자유로운 상황 에서 이제는 군대라는 곳에 가야하는구나 라는 약간의 압박감이 생기자 군대에서 변화될 내 모습에 대한 기대보다도 힘들어질 나의 2년이란 시간이 머릿속에 자꾸 떠올라, 후회감이 들 수 밖에 없었다.

2011년 9월!

세 번째 9월이 드디어 찾아왔다.

논산훈련소에 들어가며 가족과의 눈물겨운 이별을 마치고 입소대대에서의 생활과 훈련소 28연대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입소대대와 훈련소 때의 일들은 너무 힘들고 적응하기 어려웠다. 이런저런 사소한 것에서 부터 통제를 받아야했고, 난생처음 불침번이라는 것을 서봤으며, 어색한 군복과 아직은 어울리지 않는 전투모, 무거운 전투화를 신고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모르게 사이

세번의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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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군인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훈련소 수료식 날!

살도 제법 빠졌고, 어두침침하던 성격도 많이 밝아졌다. 면회를 오신 부모 님과 동생은 바뀐 나의 모습을 보며 대견해 하셨고, 나도 다른 사람을 통해 보게 된 내 모습에서‘인간 민병훈, 많이 성숙해졌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11년 10월 30일. 자대 전입 4일 차. 유격훈련을 가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버리 신병이었던 나는 그저 하늘같은 선임들이 하라는데로, 시키는데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선임들의 눈에 이등병의 행동이 눈에 차겠는가? ‘X새끼, X발’욕도 많이 듣고, 핀잔도 많이 들었다. ‘아 씨.. 그냥 공익이나 가버릴껄.. 왜 현역와서 이래야 하지?’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 군번이었던 선임의 충고와 보살핌 아래,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일병이 되었고, 선임들과 많이 친해진 내 모습이 보였고, 중대의 막내가 아닌 후임을 가르쳐주고, 관리하는 계급이 되었다. 선임들의 욕과 핀잔은 욕과 핀잔이 아닌 충고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들의 다소 거친 충고가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까지 군생활을 잘 할 수 없었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많은 것도 배웠다. 참을성, 인내심, 절제 등은 기본이요, 밖에서는 거의 해보지 않았던 삽질, 도색, 시멘트 작업 등의 기술도 배웠다. 훈련소 때부터 있었던 여러 훈련들도 있다. 기본적인 제식훈련, 눈물 콧물 다 짜던 화생방, 폐를 압박해 오는 3KM 구보, 각개전투, 야간행군... 모든 근육이 뒤틀리는 것만 같은 유격체조... 빌어먹을 위장막과 지휘소를 치는 RCT, 너무너무너무, 한번만 더 너무 추운 혹한기..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 하고 싶었던 수많은 훈련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훈련들을 마치면서 나를 돌아보았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몸도 좋아지고, 성격도 점점 밝아지고, 일도 잘 못할 것 같던 놈이 이젠 한 사람의 인력도 충분히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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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들었을 때. ‘아, 그 때 세호 형을 바라보던 내가 이제는 세호형처럼 멋지게 변해가는구나’라는 것을 크게 느낄 수 있었다.

강철(鋼鐵)은 연철(連綴)을 수도 없이 불로 달구고 망치질하며 담금질을 해야지 만들어 진다고 한다. 연약하여 부러지기 쉬운 연철이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필요없는 불순물들을 태워, 쉬이 부러지지 않고 그 형체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강철로 변하여 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에 와서 이러한 것을 마음 속 깊이 느낀다. 싫은 일에 대한 내색이 심하던 내가 표정 관리, 절제를 배우게 되었고, 낯선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을 매우 꺼려하던 내가, 낯선 이에게 쉽게 부탁 할 수 있게 되었다. 운동하는 맛을 느끼게 되었고, 여러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에서 보다 나은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군대라는 담금질을 통하여서 말이다.

군대는 나 자신을, 사람을 담금질 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사회에서 배울 수 있는 것 또한 많다. 어쩌면 전공을 배움은 나의 삶에 있어 더욱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체험과 경험은 80년 인생 중 대부분의 생활 에서 배우고, 경험할 수 있지만, 군 생활이라는 것은 인생에 단 2년. 이 짧은 시간 속에서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곳, 군대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

의지와 끈기, 사회성, 리더쉽, 절제 등 사회생활에서도 사람을 사귐에 있어도 꼭 필요한 것들을 쉽게 습득할 수 있다.

어느새 병장이 되었다. 전역을 앞두고 지금까지 했던 군생활을 되돌아 보았을 때, ‘시간 안간다, 시간 아깝다..’등등의 소리는 그 당시에만 이다. 군에서 배운 것들이 너무도 많고, 이것들로 인해 많은 발전을 했다.

휴가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인 전역자의 허세라 생각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생각 으로는, 나의 경험으로는 군대라는 곳은 나태함과 게으름에 찌들어 있는 현재 20대 청년들에게 충고어린 채찍질로써 꼭! 한번쯤은 겪어야 하는 곳

세번의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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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생각한다. 나태한 나를 깨울 수 있는 것이다.

군대, 나에게 많은 것을 준 곳. 남은 2개월의 군생활. 그리고 남은 60 여년의 사회 생활. 내가 이곳에서 배운 것들을 발판삼아 더욱 연마되어 가는 내가 될 것이다.

전국의 군필자들과, 현역병, 그리고 입대예정 장정들이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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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저는 국군수송사령부 32전장이동통제대 3반 소속 운전 병으로서, 전라남도 광주 3 1사단에 파견되어 당당한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는 일병 고명원입니다. 과체중과 고혈압으로 공익판정을 받았지만,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수년간의 고군분투와 방황을 극복하고 다시 현역 판정을 받아 자원입대를 하였습니다.

<133Kg 청년, 군인이 되다!>

2009년 무더위가 한창 기승이던 7월, 병무청 신체검사장에는 몸에 맞는 검사용 옷이 없어 입고 왔던 청바지와 티를 걸치고 자신의 몸마저 가누질 못해 대열에서 벗어나 앉아 있는 유독 눈에 띄는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저울마저도 거부한 133Kg의 몸무게와 고혈압과 심장병을 앓고 있는 신이 버린 청년! 바로 20살의 저였습니다.

우수상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 군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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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명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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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검사를 받으러 온 인원들 중 저를 제외한 모두는 신체등급 1~3급을 받았으나 저만 4급 판정을 받고 공익으로 분류되었습니다. 현역 입대를 희망했던 터라, 신체검사를 담당하시는분께 현역판정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고도 싶었으나 제 몸도 못 가누는 절 잘 알기에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병무청 가기 전날, 부모님은 제가 군대에 간다고 하니,“너도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듬직한 아들로 성장해 주어 정말 고맙다.”라고 말씀하셨는데,

4급이라니...

나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무작정 현역판정을 받기 위해 체중감량에 몰입하였지만 무리한 단식과 의지부족으로 체중감량에 실패했고, 오히려 전보다 체중이 증가하는 역효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또한 3차례의 동맥경화, 심장병(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 으며, 결국‘군대 갔다 와야 사람대접 받나, 몸이 아파서 공익이라는데, 왜 그렇게 군대에 집착 하는가’라는 절망과 회의감에 빠져 자포자기 하고 말았습니다.

어느덧 나이는 23살이 되었고, 친구들은 대부분 전역하여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하루하루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무살에 공익판정을 받았을 때 이를 받아들이고 성실히 살면서 자기개발을 하며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 정말 나를 위하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익으로 간다면 나 자신과의 약속을 깨는 것이고, 부모님의 기대도 져 버리는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2012년 7월, 제 생애 있어서 가장 보람된 일이자 멋진 승부가 있던 달입니다.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하고, 저는 현역판정을 받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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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주 다이어트계획을 세웠습니다. 5주 동안 물 이외에는 섭취를 금했고 남은 3주 동안 야채만 먹었으며 8주 동안 매일 15km를 걸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행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두 달도 채 안되어 25kg을 감량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체중감량에 성공한 저는 신체 검사를 다시 신청했고, 현역 3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입대 신청을 했습니다.

입대일이 정해진 날,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지난 4년간의 시련과 방황이 모두 해소된 느낌이었습니다. 부모님의 근심도 사라졌고 저는 그동안의 갈등, 고민을 다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입대하였 습니다.

<현역 군 복무를 갈망하다>

4년간에 걸쳐서 이토록 군 입대를 희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 습니다.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습니다. 스무살에 공익 판정을 받기 전부터 전 심각한 고혈압을 앓고 있었고, 부모님께서 늘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현역판정을 받기 위해 체중감량을 하고 혈압을 낮춰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는 아들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와 같은 또래들처럼 현역으로 입대하여 성실하게 군 복무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효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릴 적부터 신체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들 앞에 서는 것을 매우 꺼려해 왔습니다. 군 복무기간동안, 저보다 나은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장점을 배우고 누구보다 더 당당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능동 적으로 대처하는 모범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훈련을 통한 체중감량과 남들처럼 굴곡 있고 탄탄한 몸을 만들어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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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변화된 저를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사나이로 태어났다면 한번쯤은“저는 군인입니다.”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진짜 군인이 되다>

입소식이 끝나고, 당당하고 절도 있는 자세로 훈련병의 하루일과를 시작했습니다. 훈련소 6주는 정말 길게 느껴졌습니다. 입대 전 사회 에서 체중감량을 하고 왔지만 훈련을 받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매일 아침 시작되는 뜀걸음은 저에게 있어서 지옥이었 습니다.

입대한지 1주차, 1차 체력 측정을 받았습니다. 측정 종목에는 순서 별로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뜀걸음이었습니다. 팔굽혀펴기를 하기에는 팔 힘이 부족했고, 윗몸일으키기를 하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 웠습니다. 그리고 뜀걸음을 하기에는 체력이 턱 없이 부족했습니다.

예상대로 저는 불합격했고, 체력단련을 위해 남들이 쉬는 매주 주말 마다 분대장들에게 쉴 새 없이 뜀걸음을 받았습니다.

2주차, 2차 체력 측정 뜀걸음에서는 조금이라도 경쟁자들을 물리 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고 처음으로 꼴찌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종목 불합격이라는 부끄러운 결과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행군이 있었습니다. 어깨위의 20kg 군장은 너무나 무거웠고, 고혈압으로 인해 심한 두통과 매스꺼움, 어지럼증이 심했습니다.

빈혈로 인해 제 의지와는 다르게 행군 중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같이 행군하던 전우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습니다.

저는 혼자 논밭에 앉아 있었고, 저를 걱정하시는 소대장님과 중대장님, 그리고 저를 구조하러 온 구급차량만 보일뿐이었습니다. 중대장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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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포기하고 의무대에 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온 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다리는 후들거렸습니다. 하지만 전 절대로 열외 되기 싫었고, 이 악물고 일어나서 군가를 부르며 행군했고 무사히 행군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3주차훈련에 접어들었습니다. 1주차, 2주차 때와 마찬가지로 3차 체력 측정이 있었습니다. 2주간의 훈련 속 에서‘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전보다 강해진 체력으로 측정을 받았습니다. 3종목 팔굽혀 펴기, 윗몸일으키기, 뜀걸음 중 2종목 팔굽혀펴기와 뜀걸음은 불합격 했지만 행군으로 단련된 체력과 인내력은 윗몸일으키기를 무려 50 개나 하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3차 체력 측정도 불합격의 결과를 받았지만, 점점 변해가는 제 자신을 보면서 자신감이 늘어갔고 자존 감이 생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스스로 저를 판단하는 눈높이가 높아졌습니다. 입대 전에는 미리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설정했다면, 3주차부터는“일단 하고 보자, 나도 할 수 있다”라는 마인드가 생겼 습니다. 열심히 하고 노력하는 저를 주위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시선 으로 보았습니다. 전 생각했습니다.‘정말 군대오기 잘했다. 앞으로도 어떤 조건과 상황이 주어지든 나는 해낼 수 있다.’열정적으로 변한 제가 저 스스로도 대견스러웠습니다.

얼마 후 4주차 화생방 훈련이 있었습니다. CS탄을 전부 터뜨린 그 곳은 정말 지독할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가스가 피부에 닿는 순간 화끈거렸고 방독면을 벗자마자 가스가 호흡기로 들어와 버틸 수 없는 고통에 저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고혈압 외에도 심장병(심근경색)을 앓고 있는 저는 심한 호흡곤란으로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조교님들은

‘딱 3분만 버티면 된다.’라고 하셨는데 제게 그 3분은 3시간처럼 느껴 졌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지금까지 잘해왔다, 많이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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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지만 조금만 더 참자 난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버텼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화생방 훈련은 끝났습니다. 마치고 나오니 눈물 때문에 얼굴이 젖었고, 콧물은 가슴까지 흘러내렸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추한 모습이었겠지만 전 이토록 힘든 훈련을 버틴 제가 자랑스러 웠습니다.

또한, 군대를 오기위해 4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던 그 모든 과정이 정말 보람되게 느껴졌습니다.

5주차 훈련으로 숙영과 종합각개전투를 받았습니다.

숙영은 하루 밤을 깊은 산 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는데 자는 내내 너무 추워 여러 번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온 몸에 한기가 돌았고 손과 발은 동상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따뜻하고 안락한 집 생각이 하염없이 떠올랐습니다. 숙영 끝난 날 바로 종합각개전투를 하러 갔습니다.

눈 바닥에 엎드려서 포복 전진하다가 무릎과 팔꿈치를 다쳤고, 숨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습니다. 하지만 훈련 1주차부터 4주차까지 많은 시련을 견뎌 낸 저는 강한 체력을 갖출 수 있었고 5주차 훈련을 수월 하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6주차, 마지막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4차 체력 측정에서는 3종목 모두 합격했습니다. 팔굽혀펴기를 50개로 가볍게 통과, 윗몸 일으키기를 60개로 통과, 뜀걸음은 40초를 남겨두고 힘들게 합격했 습니다. 그 결과, 저는 유급되지 않았고 모든 훈련을 완료 할 수 있었 습니다.

<훈련소 수료식>

수천 명의 훈련병들이 수료식에 참석해있었고, 훈련병들 뒤 객석에는 그들의 부모님과 친구들이 와 있었습니다. 집을 떠나와 40여일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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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재회하니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훈련받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훈련받는 동안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 하나 때문에 타지에서 맘 고생한 어머니를 생각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어머니와 아버지를 꼭 안아주었습 니다.

‘부모님 전 잘 있습니다. 훈련 잘 받았고 이제 모든 훈련을 마쳤 습니다. 전 이제 당당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부모님 건강하시고 늘 사랑합니다.’

6주간의 훈련은 저를 멋지고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만들어 주었고,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제 군 생활에 있어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된 것입니다.

<운전병으로써 느끼는 자부심>

저는 운전병으로 31사단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자대배치 받기 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자원입대를 한 만큼, 최전방 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후방으로 배치를 받아서 실망감이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제 업무가 자랑스럽습니다.

운전병으로서 병력과 화물을 수송한다는 것에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운전함에 있어 탑승한 인원이 목적지에 잘 도달하고 중요한 화물을 운송하는 것에 운전병 임무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차량을 정비합니다. 언제 어디로 배차를 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차량 일일 정비를 철저히 하여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운전병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나가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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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운전병으로 왔을 때 제 운전 실력은 매우 미숙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시동을 꺼먹고 영외운전은 시도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단 에서 시간 날 때마다 매일 운전교육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운전 실력이 매우 향상되었고, 운전병으로서 임무를 잘 수 행하고 있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군 복무해 나가면서 점점 더 향상시켜 나갈 것입니다.

<군복무 다짐>

군 입대 전 저는 사회에서 좁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대를 하면 좀 더 폭 넓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군대에 와보니 전국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보면서 제 인간관계와 제 사회성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 니다.

또한, 군대 사회는 구성원 모두 갈등을 대화로 원만하게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화가 나면 제어가 안 되서 사람들과 갈등을 많이 빚었는데, 군대에 와서 인내력과 대화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군대에도 잘못된 점들은 있습니다. 군대에 먼저 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신의 잘못된 점들을 후임이 이해하도록 시키는 것을 봐왔습니다. 먼저 군 생활에 적응한 선임이 이제 막 전입 온 신병 에게 자신에게 맞추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전 다짐했습니다. 제가 선임이 된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겠다. 비록 나는 간부가 아니고 병사에 불과하지만, 후임이 들어온다면 지금보다는 자기 의견을 내세울 수 있고 모든 일에 있어서 선-후임 간에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겠고 다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나보다 모자란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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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는 좀 더 관심을 갖고 먼저 온 선임으로써 후임이 자대에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제가 처음 자대에 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분위기는 삭막했고 누구 하나 말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제게 말을 걸어주었 습니다. 지금도 옆에서 같이 업무를 봐주시는 선임이십니다. 제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가르쳐 주었고 가끔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혼도 내셨습니다. 하지만 일과시간이 끝나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셨고 군 생활에 있어서 고충이나 갈등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이 분을 보면서 전 다짐을 했습니다. 후임에게 공과 사를 똑바로 하는 선임이 되겠다. 업무는 냉철하게! 일과 시간 이후 개인적인 시간에서는 살가운 선임이 되겠다고 항상 다짐했습니다.

공익에서 현역으로 온 것에 대해 전 늘 자부심을 가지고 군 복무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왜 공익에서 현역으로 와서 힘들게 사냐고 의구 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당당하게 군 입대를 했고, 일반인들과 대등한, 아니 오히려 더 나은 군 복무를 하여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것입니다.

입대 전 현역 판정을 받기 위해 4년간 노력한 것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군 생활, 사회에서 다 하지 못하고 온 학업, 신체적 결함, 내성적인 성격, 부족한 인간관계를 이 곳, 군대에서 모두 개선해 나갈 것입니다.

저는 군 입대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군인 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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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학력 미달로 신체검사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책가방 끈도 짧아서 단체 생활도 오래하지 못하였습니다. 처음 솔직한 심정 으로는 군대를 가지 않는 다는 게 기뻤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국방의 의무를 해야 되지만 저는 대한민국 국방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었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중학교 검정고시를 보았습니다. 2012년 4월경에 시험을 치르고 병무청에 전화를 걸어 군대에 가고 싶다고 하며 자원 입대를 신청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원입대 신청을 하고나니 주위 시선이 좋지 만은 않았습니다. 입대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굳이 자원 입대를 하면서까지 군 생활을 하려고 하냐라는 말들을 많이 들었 습니다. 그래도 저는 다른 사람 시선을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입대

장려상

사나이 태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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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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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로 태어나서

하게 되었습니다. 입대하기 전 군대는 단체 생활도 맛 볼수 있고 새로운 사회생활이였기에 기대도 많이 하였습니다. 정말 군대를 가게 되면 새로운 남자가 될 수 있었기에 새롭게 태어난다는 마음 으로 다짐했습니다. 11월 20일 39사단에 입대를 하게 되었고 처음 입대를 했을 당시에는‘이곳이 군대인가?’, 앞으로 1년 9개월 동안 계급사회에서 적응을 해야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지만 동기들하고 말을 편하게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데 말을 놓아서 서먹서먹하였고 때론 속으로 싸움이 일어날 수 있겠다...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단지 저 혼자 만의 생각이었습니다. 훈련병 생활을 하면서 전우애도 느낄 수 있었고 전우조 활동을 하면서 부족한 점을 서로서로 채워가고 힘들 때마다 전우를 생각하면서 훈련병 생활을 견뎌 냈습니다. 훈련병 생활을 하다 보니 느낀점이 아주 많았습니다. 군대는 개인활동이 아닌 단체이기 때문에 절대 홀로 견뎌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아서 괜히 자원입영 했다며 후회스러울 때도 있었 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국방의 의무를 마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 북한과 상황이 좋지 않아 전쟁이 일어나려고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도 우리나라 우리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남자가 될 것입니다. 훈련소를 마치고 1117공병단 191대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습 니다. 훈련소의 모든 훈련을 마치고 뿌듯한 마음이었습니다. 군대는 인생에서 딱 1번 하기에 어차피 1번 하는거 이왕 군대 자원입대를 하게 되니 열심히 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대에 적응 할 시기쯤 혹한기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추운 혹한 기를 드디어 받게 되었습니다. 훈련소에 숙영을 할 때 사용했던 텐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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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 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야전공병이라 지뢰 및 철조망 폭파를 하고 난뒤 장간 조립교라는 어마어마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리를 만드는 일인데 다리가 무너지면 지나갈수 있게 만드는 일이 었습니다. 여러 병사들과 힘을 합치며 하나하나씩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다치는 일이기 때문에 정신을 가다듬고 무거운 것들을 하나둘씩 옮겼습니다. 장간 조립교가 시작 되면서 한순간 한순간이 긴장되었습니다. 24시간 작업 끝에 장간 조립교가 완성 되었습니다. 완성이 되니 드디어 끝이다 하며 마음속으로 정말 뿌듯하였습니다. 혼자서 절대 해내지 못할 일이였습니다. 단체 생활 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혹한기를 해내면서 전우애를 한층더 느꼈습니다. 또 마지막 훈련인 행군이 있었습니다. 40km거리에 20kg정도의 군장을 매고 12시간 정도를 행군하는 것입니다. 자대 오기전 훈련병때 한번 해봤는데 정말 힘 들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행군은 굳게 마음먹으며 출발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단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행군을 마친 느낌은 정말 표현하지 못 할 정도로 흐뭇했습니다. 간혹 물집이 잡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행군을 오래 하면서 다리 아픈 고통을 참으며 포기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포기를 하지 않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힘들면서 왜 굳이 참고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짧은 생각 이었 습니다. 모두가 같이 하는것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만약 군대를 오지 않았더라면 단체 생활도 해보지 못했었을 테고 많은 것을 배우 지도 못 했을겁니다. 군대를 왔기에 한층 성장해가면서 앞으로의 병역 생활이 기대될 정도로 하루 하루 깨달음을 얻어가는 것 같습 니다. 군대를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많았습니다.

어차피 군대 자원 입대 할 것이었다면 조금 더 빨리 중학교 검정고시를 마치고 자원입대를 했을 텐데...라는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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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병영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래도 군미필자들을 위로 삼아 병역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또 다른사람들은 단체 생활을 학교에서 해봤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중학교 중퇴후 단체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전우들과 어울려 평소에 못하는 것들을 군대에 와서 다 해보고 갑니다. 저는 고등학교 과정을 아직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군대에서 일과가 끝나면 개인정비 시간을 줄여 시험공부 준비도 했었고 취침시간을 활용해 연등실에서 시험공부를 준비하곤 했었습니다. 사회에 있었더라면 솔직히 놀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을 겁니다. 군대라는 곳이 정말 내게 필요한 곳이라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군대를 오지 않고 사회 생활에서 돈을 모아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저축을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돈이 많이 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병영 생활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추억들이 많습니다. 전우들과 힘을 모아 힘든 일을 해쳐나가면서 묶인 매듭을 풀곤 합니다. 저는 앞으로‘전문 하사’의 길을 생각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영생활을 마친뒤 하사라는 계급으로 또다른 사회 생활을 겪고 싶으며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남자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군대에 오고 싶지 않은 사람 들이 많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게 말하고 싶습니다.

군대라는 단체가 힘은 들지만 전혀 두렵지 않고 대한민국 남자에게 좋은 기회가 될것이라고 말입니다. 혹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당연히 국방의 의무를 해야 하는데 왜 굳이 면제를 받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군대는 곧 새로운 사회 생활이기도 하며 많은 것을 배우는 곳인데 면제를 받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면 한번 부딪혀 보는 것도 결코 나쁜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대한민국 남성 누구나 군대를 오지 않는 법이 있더라도 저는 군대에

사나이로 태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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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군대에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자랑 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 근래에 북한이 미사일도 발사하고 연평도 포격사건도 일으켰습니다. 북한 때문에 우리나라가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군이 사망 하는 이런 사태를 보고 많은것을 깨달았습 니다. 요즘에도 북한은 도발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 난다면 군인으로써 저의 본분을 다할것 입니 다. 군대를 면제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군대는 저를 변화시키게 해준 곳이고, 좋은 선·후임, 또 전우들과 함께 많은 것들을 배우게 해 준 고마운 곳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번뿐인 1년 9개월 동안 많은 것들을 배워 갈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아직까지 부족한 점이 많습 니다. 그래서 군대는 제게 꼭 필요한 곳입니다. 하루 하루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을 것이고 우리나라 군대라는 곳에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병영생활 5개월째 현재까지는 배울점이 너무 많고 아직 남은 공부도 하고 싶고 사회에서 떳떳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 니다. 조금씩 조금씩 노력하며 정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남은 병영생활을 통해 얼마나 많은것을 배우고 얻어 갈지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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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저는 경상북도 구미의 한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 습니다. 그 고등학교는 전직 군인이 설립한 학교로, 모든 교칙이 군대와 비슷했습니다. 매일 아침 기숙사 앞에 모여 점호 후 운동장 구보를 하였고 저녁엔 각 호실장들이 군대의 분대장들처럼 저녁 점호를 취하였습니다. 심지어 이젠 군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악질 부조리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 학교를 다니며 저는 자연스 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군대도 이럴까? 정말 군대 가기 싫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저에게 병무청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통보였습니다. 이제 겨우 군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에게 진짜 군대를 가라는 소식은 정 말 끔찍했습니다. 저는 통보를 받고도 계속 신체검사를 미루다 결국 2010년 여름 인천의 병무청에서 뒤늦게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장려상

군대 나의 인생 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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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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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는 키 171cm에 몸무게 125kg의 초고도 비만이었습니다.

신체검사 받으러 가는 길, 검사를 받는 동안,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저는‘어떻게 해서든 군대에 가지말자’‘군대 가서 뭐 배울 게 있겠어?’

‘나는 분명 살이 많이 쪄서 공익을 갈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 덕분이었는지 각종 복잡한 검사들이 다 끝난 뒤 저는 진짜로 4급 공익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군대를 안가도 되는 구나!’‘정말 다행이다!’병무청 밖을 나오면서 저는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 아는 선후배 등 모든 지인들에게 제가 4급 공익판정을 받은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형들은‘군대 한번쯤은 가 봐도 좋은 곳이다, 공익근무 하며 배우는 것 보다 현역으로 입대하여 배우는 것이 훨씬 너의 사회 생활에 이득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해주었고, 군대를 아직 안 간 후배나 친구 그리고 군 복무중인 친구들은 그저 부럽다는 상반된 말을 하였습 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제 말을 끝까지 들으시지도 아니하시고 노발대발 하시며‘공익가면 사회 낙오자다. 배울 것 하나도 없다. 만약 공익을 가면 넌 내아들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제게 말씀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는 군대를 안가도 된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기에 아버지의 말씀을 흘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되어 경상북도 경산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게 되었 습니다. 과수원 농사를 하던 저희 집안의 일을 하며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상헌아 아버지는 너가 절대로 공익 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공익을 간다면 너는 사회에서 잘 성장할 수 없을 것 이다. 지금 너의 몸 상태로서는 이도저도 되지 않는다.”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에게“공익가서도 충분히 성공할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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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지금부터, 공익가서도 살은 빼면 된다”등 아버지께 해서는 안 되는 말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과수원 일을 마친 후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익으로서 2년 동안 편하게 복무 할 것 인가, 육군 군인 으로서 21개월동안 공익보단 힘들게 군 생활을 할 것인가에서 수 일간 많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샤워를 마친 후 팬티만 입은 채 우연히 전신 거울 앞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왠 거울 안에 집채만한 동물 한 마리가 들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저는 그날 부로 운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예 운동이라곤 하지 않던 저는 줄넘기, 마을주변 뛰기 등 유산소 운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몸무게가 125kg 이었던 저는 처음 운동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숨도 많이 차고 운동을 오래 못하는 저질 체력이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루에 줄넘기 50개씩, 달리기 2분씩 늘려가며 나름대로 운동계획을 세워 살을 빼기 시작하였습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였던지 조금만 운동을 하여 도 하루에 1kg 씩 빠지는 제 모습을 보며 흐뭇했습니다. 그리고 110kg 이 된 저는 어느 TV채널에서 군대 관련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는데 그 프로그램에 보이는 군인들은 몸도 좋고 정신력도 남달라 보였습니다.

시청 후 저는 군대를 가면 더 멋진 몸과 더 향상된 체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바로 아버지께 찾아가서

“아버지, 결심했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살 빼서 군대 가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는“대견하다 이제야 우리 상헌이 답구나 아버지는 너가 자랑스럽다”라고 말씀을 해주셨고 저는 용기를 얻어 더욱 더 군대를 가고 싶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2011년 상반기가 되었고 110kg의 몸무게를 가지고 재 신체 검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 4급 공익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군대 나의 몸과 인생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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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I 수치가 35가 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BMI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35가 넘으면 4급 판정을 받는다는 사실도 몰랐기에 청천벽력과 같은 결과였습니다. 다시 한번 공익 판정을 받자 저는 제 자신에게 오기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난 군대를 꼭 가겠다.’‘살 빼서 꼭 현역 제대를 하겠다.’라는 다짐을 하였고 신체검사 이후로 현역 입대라는 목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 꾸준한 운동을 통해 2011년 11월 98kg을 만든 저는 BMI 수치를 계산해보았고 3급 현역 판정을 받을 수 있는 수치가 되었습니다. 저는 무척이나 기뻐 바로 병무청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전화를 하자 병무청 에서는 신체검사를 받은 지 지정된 개월 수가 지나지 않아 재검사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12년에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보를 받은 저는 절망했습니다. 원래부터 저는 마음먹은 일을 달성하지 않으면 찝찝해하는 성격으로서 전화로 대화하는 것 보단 직접 찾아가서 대화를 해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구의 한 신체 검사장을 찾았습니다. 저는 담당 직원분께“이러이러한 이유로 군대를 꼭 가고 싶은데, 기간이 아직 되지 않아서 신체검사를못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다시 신체검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라고 묻자 담당 직원분은“어쩔 수 없습니다. 정해진 규율이기 때문에 이 기간이 지나고서야 다시 신체검사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저는

“알겠습니다. 그럼 내년에 받으러 오겠습니다.”라고 한 뒤 절망감에 축 처진 어깨로 신체검사장 밖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체검 사장 밖을 나온 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휴대폰에 전화가 왔습니다. 아까 그 신체검사장 담당직원분이었습니다. “꼭 다시 신체검사를 받고 싶으세요?”라고 묻자 저는“꼭 받고 싶습니다. 몇 개월 이라도 더 빨리 군대를 가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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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직원분이“그렇다면 다시 한 번 올라와보실래요?”라고 하며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전화를 끊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신체검사장으로 빠르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재신체검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3급 현역 판정이 나왔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가장 자랑스러워 하실 아버지께 제일 먼저 전화하여 3급 판정 받은 소식을 알려드린 뒤“이 모든 일은 아버지의 조언이 없었 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라며 감사를 표현했고 아버지 께서도“장하다 우리아들 자랑스럽다”하시며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 및 선후배에게도 현역으로 입대하게 되었다고 말하자 군대를 다녀 온 선배, 형들은“그래 가보면 좋은 곳이다. 네가 이제 사람이 되었구나.

많이 배워서 와라”등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11월에 바로 입영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는‘체력이 국력이다’

라는 말을 들은 바 있어 1월 3일까지 입대준비 하는 동안 그 동안 해왔던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 관리 하였습니다.

드디어 1월3일, 306보충대로 입대한 저는 1사단 신병교육대대로 입소 하였습니다. 어느 날 신병들이 한 곳에 집합하였고 건강소대에 들어 가고 싶은 병사는 거수하라고 하여 저는 바로 지원 하였습니다. 입대 전 건강소대에 대해 이미 알아보았고 허약하거나 비만인 병사들을 특별 관리 해주는 소대라고 알고 있던 저는 더 열심히 군 생활해보자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저는 98kg에서 85kg까지 13kg을 감량하고, 교육 성적도 30% 안에 들어서 신병교육대대 중대장에게‘강한 남자’라는 표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2신교대 등 모든 신병 교육 수료를 마친 뒤 자대에 전입 온 후 전투프로 및 특급전사에 대해 교육 받았고, 그날 부터 특급전사를 목표로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3km 달리기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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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체력은 전투프로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기본, 정신전력 등 모두 합격을 받아 2012년 8월 일병에 전투프로를 취득 하였습니다.

전투프로로 인하여 군 생활에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원칙으로는 2013년 1월 상병 진급을 해야 하지만 전투프로를 획득함으로서 2012년 12월에 1개월 조기진급을 하였습니다. 현재는 특급전사를 목표로 체력 단련 및 정신전력 병기본 등을 숙달 하고 있으며 특급전사를 획득하여 병장도 1개월 조기진급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군대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125kg에서 현재 83kg 까지 42kg을 감량 시켜 주었으며 체력, 정신력 등 모든 능력을 향상 시켜주는 군대를 안 왔으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면서 내 몸, 정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며 더 긍정적이고 목표지향적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으며, 저 같이 체중으로 인해, 기타 다른 사유로 인해 현역입대 판정을 받지 못한 장정 들은 다시 한번 용기와 오기를 가지고 이 시대의 애국자, 미래의 리더가 되기 위해 현역으로 입대하여 군 복무 할 것을 강력 추천 드리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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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일로영일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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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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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7년 봄, 20살을 갓 넘겼던 나는 여느 누구와 다르지 않게 징병신체검사를 받게 되었다. 대다수의 건강한 이들과는 달리 병사용진단서와 수년간의 진료기록과 함께...

그랬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발병한 강박증과 우울증 때문에 꽤나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왔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그 증세가 특히 심해져서, 공부에 좀처럼 몰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업에 대한 흥미가 넘치고,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 하던 나였지만, 괴로운 정신상태 속에서는 성과를 내기가 어려웠다.

결국 나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뒤로 한 채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말았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병원 치료는 계속 받았지만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재수를 하면서도 공부에 집중을 하기 어려웠고 극심한 불면증 탓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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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태에서는 군대에 가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겠다’

평소 군대는 꼭 현역으로 가겠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보였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증빙 서류와 함께 징병검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4급 보충역 처분을 받게 되었지만, 나는 더욱 깊은 무기력함에 빠지게 됐다.

‘남들 다하는 현역복무마저도 못할 만큼의 몸 상태라니...’

그 당시 학업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서 종종 자괴감을 느끼곤 했지만, 새삼 보충역 처분을 받게 되니 내 처지가 서글퍼졌다. 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치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3의 요인 때문에 간절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게다가 그것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가진 심리적 문제가 나에겐 그러했다. 언제쯤 사라질지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괴로움. 나를 꽁꽁 얽어맨 채 운명의 수레바퀴를 정반대방향 으로만 돌릴 녀석. 이 때문에 공부 뿐만 아니라 군복무마저도 내가 의도 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글펐다.

이후로 고된 시간을 오래 보내며 열심히 시험공부에 매진했지만, 생각 만큼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남들보다 꽤나 늦게서야 그나마도 원치 않는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비록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마음껏 탐구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대학생활은 오랜 고통에 짓눌려 있던 내게 약간의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고된 수험생활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꾸준히 병원 치료를 받으니 점차 병이 호전되는 게 느껴졌다.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가니 해결하지 못한 병역 문제가 문득 떠올랐다. 과거 4급 보충역 판정을 받은 만큼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할 수 있었다. 공익근무요원은 여유시간이 많기 때문에, 복무를 하면서 치료와 자기계발에 주력한다면 궤도를 벗어난 삶을 원점으로 돌리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란 판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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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 하지만 막상 그리 생각을 하고나니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마음이 괴로웠던 건 평소 내가 품고 있던 포부 탓 이였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치나 외교 현안에 관심이 많았고, 우리나라의 어려웠던 과거와 발전된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보곤 했다. 더 나아가 국가의 리더가 갖춰야 할 자질이 무엇일까 고민해보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의 자원입대에 대한 일화를 접하게 되었다.

트루먼은 지독한 근시 탓에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지만, 군인으로서 조국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시력검사표를 전부 다 외워버렸고, 덕분에 군인으로서 임관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애써 조국에 봉사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올곧은 자세는 내게 무척이나 인상 깊게 다가왔다. 결국 나 또한 훗날 군복무를 하게 된다면, 국가를 위해 반드시 현역복무로서 헌신하자고 마음먹게 됐다. 하지만 과거 받은 보충역 판정으로서는 나의 그런 다짐을 실현할 수 없었다.

공익근무요원을 주저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자존의 문제였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심리적 고통에게 굴하지 않고 노력 하는 자세에 있어서만큼은 내 스스로에게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병에 무릎 꿇고 공익근무요원을 하게 된다면, 스스로에 대해 크게 실망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존을 포기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오랜 고민을 한 끝에 재신체검사를 받고 현역 복무를 하겠다고 결단을 내리게 됐다.주변 사람들은‘나이도 많은데 사서 고생하는거 아니냐’

‘공익근무요원을 하면서 공부하는게 낫지 않겠냐?’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깊은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당시에 내 상태는 완치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호전된 상태였고,

일로영일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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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없었다. 재신체검사를 받은 끝에 3급 현역 복무 대상 판정을 받을 수 있었고, 바로 입영 신청을 해서 2011년 3월 21일로 입대일이 정해지게 됐다.

큰 결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막상 군 입대를 앞두고 보니 걱정만이 앞섰다. 스물넷이란 나이는 입대 나이로서는 너무나도 많게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 또한 여전히 경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상태 였다.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슬며시 들었다. 그런 초조한 내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시간은 지나갔고, 결국 입대일에 논산훈련 소에 입소하게 됐다. 입소 후 소속 중대의 중대장님은 나를 따로 불러 과거 내가 앓은 질병에 대해 물어보며 이런 저런 걱정을 하시는 듯 했다.

남들처럼 현역복무를 하고 싶어서 입대했는데 관심 사병으로서 특별 관리를 받는다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다른 훈련병들만큼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모든 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여전히 스트레스에 취약했던 탓에 쉽게 피로해지고 불면증으로 밤을 새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약해질때마다 이 악물고 버텼다. 항상 열심히 하려 했던 덕분인지 여러 교육훈련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낼 수 있었다. 특히 매주 했던 체력검정에서는 성적이 꾸준히 올라서 마지막 주에는 무척이나 준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5주 훈련을 모두 마치고 다른 훈련병들과 함께 이등병 계급장을 다는 순간, 가슴 속에서 벅찬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아픈 몸을 이끌어가면서 내 의지의 힘으로 다른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힘든 과정을 수료 했다는 게 너무나도 감격스러 웠다. 5주 교육 수료 후에 내가 받은 주특기는‘암호체계관리’였다.

암호체계관리는 기밀을 유지해야하는 그 직무의 특성상 엄격한 신원조사를 거친 이들에게만 부여된다. 소수만이 선발되는 특기를 받게 된 것도 기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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