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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적 정치적 목적성을 가진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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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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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_2018.12.10 심사기간_2019.01.01-16 게재확정일_2019.02.01

좌파적 정치적 목적성을 가진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연구 - 정통 좌파를 대변하는 AIZ 게재 작품을 중심으로 -

A Study on John Heartfield’s Photomontage with Left-wing Political Objectives - focused on works published in the pages of AIZ representing the orthodox left -

오병희, 광주시립미술관

Oh, Byung Hee_Gwangju museum of art

차례 1. 서론

2. 바이마르 정권 초기 정치적 예술 활동(1920-1928) 2.1. 정치적 목적을 가진 베를린 다다

2.2. 정통좌파 언론 AIZ를 통한 활동

3. 세계대공황 이후 사민당, 나치스 비판 시기(1929-1932) 3.1. 바이마르공화국의 사민당 비판(1929-1931)

3.2. 나치스 대두에 대한 투쟁(1932)

4. 독재 저항과 사회주의 실현(1933-1938) 4.1. 히틀러 독재에 대한 저항(1933-1935) 4.2.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창작(1934-1938)

5.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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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적 정치적 목적성을 가진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연구 - 정통 좌파를 대변하는 AIZ 게재 작품을 중심으로 -

A Study on John Heartfield’s Photomontage with Left-wing Political Objectives - focused on works published in the pages of AIZ representing the orthodox left -

오병희, 광주시립미술관

Oh, Byung Hee_Gwangju museum of art

요약 존 하트필드는 1910년대 후반부터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베를린 다다에서 활동한 예술가다. 1918년 독일공산당 (KPD)에 가입한 하트필드는 독일의 정치와 사회에 관한 독일공산당의 노선에 따른 작품을 제작하여 당대의 현 실을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하였다. 하트필드의 정치적 목적으로 제작한 235개의포토몽타주를 1930년부터 1938년까지 좌파 사회주의 잡지 AIZ(노동자 화보신문)에 게재하였다. 이러한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자본주 의에 관한 비판과 히틀러가 집권한 극우 정권인 나치 파시즘의 본질에 관해 독일공산당의 노선을 대중에게 인 식시키려는 정치적, 사회적 의도를 가진 선동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하트필드는 독일공산당 당원으로서 당의 노선에 따른 포토몽타주를 제작하여 바이마르공화국 집권당 사민당과 나치스에 관하여 비판하였다. 본 연구에 서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의 정치적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바이마르공화국 정권시기, 극우정당 성장기, 나치스 의 집권기로 나누고 독일공산당의 노선변화에 따라 작품을 분석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중도파 바이마르공화국 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에 관해 좌파적 입장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바이마르공화국이 세계대공황으로 붕괴되면서 극우정당이 대두되는 시기로 독일공산당의 주적인 나치스를 비판하고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를 지향하는 히틀러와 나치스 집권자들에 관해 풍자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공산주의자 하트필드가 사 회주의 사상과 연관된 소련과 노동자에 관한 작품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작품을 제작한 시기이다.

하트필드의 정치적 성격의 포토몽타주는 소련과 독일공산당의 노선에 따라 중도좌파 정권, 극우 나치스를 공격 하여 프롤레타리아와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다.

John Heartfield is an artist who has contributed to the political Berlin Dada movement since the late 1910s. A member of the German Communist Party (KPD) since 1918, Heartfield expressed his thoughts by creating art based on a critical eye for German politics and society. Between 1930 and 1938, Heartfield published 235 works of photomontage in the Socialist magazine, Arbeiter-Illustrierte-Zeitung (AIZ, meaning Laborer Illustrated), with a political purpose. Such works by Heartfield had propaganda qualities, and were socially and politically meant to raise the public’s awareness of the true nature of far-right, Nazi Fascism, as well as to criticize Capitalism. A member of the German Communist Party, Heartfield criticized the reality of his time with works following his party lines. This study has classified his photomontage works into three periods: the period of the Weimar Republic; the growth period of the ultraright party; and the period of the Nazis’ rise to power. The first of these periods is characterized by the artist’s criticism of the Capitalist system from a leftist point of view, and concerns the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of the moderate Weimar Republic. The second period is set against the fall of the Weimar Republic due to the global economic depression, and the rise of Nazi Fascism;

and is marked by the artist’s criticism of the totalitarian system of Nazism, and his opposition to war, in his satire of contemporary figures such as Adolf Hitler. The third period sees the Communist Heartfield presenting the Soviet Union and the laborer in a positive light.

Photomontage which is political messages of John Heartfield used to aim of finality about proletariat and the Soviet Union what built Socialism with snark to Nazi Fascism and leftist followed the Soviet Union also German Communist Party.

중심어

독일공산당 노동자화보신문 바이마르공화국 나치스 사회주의 포토몽타주

ABSTRACT Keyword

German Communist Party AIZ

The Weimar Republic Nazis

Socialism Photomontage

(3)

1. 서론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 1891-1968)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군에 징 용되어 1916년까지 군에서 복무하였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에 고무된 하트필드는 1918 년 12월 독일공산당(KPD)에 가입한다.1) 독일공산당 가입은 하트필드에게 중요한 작품창작의 기준이 되었으며 독일공산당의 정책 노선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으로 포토몽타주를 제작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하트필드가 급진 좌파를 대변하는 AIZ2)의 표지 에 게재한 포토몽타주는 독일공산당의 노선에 따라 사민당과 나치스 등을 비판하고 투쟁하는 대상으로 비판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공산당 노선의 변화를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하트필드가 기고한 포토몽타주를 독일공산당의 정책과 투쟁 대상의 변화에 따라 시기구분 을 하여 작품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트필드 작품에 관한 선행 연구는 2013년 윤희경의 「메스미디어를 통한 ‘작용적’ 미술로서 의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가 있다. 이 연구에서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작업을 당시 좌파 예술가들 사이에서 발전된 작용미학이론과 연관하여 연구하였다. 특히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 제시대의 새로운 예술작품’을 통한 대항문화의 형성의 대표적인 범례로 포토몽타주로 보고 하트필드의 작품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2017년 조한렬의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에서 사진과 텍스트-읽기와 보기」는 AIZ에 수록된 포토몽타주가 사진에 텍스트를 결합하는 방식 을 사용하는 이유에 관해 연구하였다. 이를 통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사진 이미지와 텍스 트를 함께 읽어 작품을 해석 하는 방법에 관해 논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위의 논문을 참조로 저항문화로서의 포토몽타주와 텍스트와 이미지를 함께 읽는 해석으로서의 하트필드 이론을 참고로 공산당의 정치적 이용물로서 작품이 제작됨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기본 전제는 하트필드가 1918년 12월에 독일공산당에 가입하고 공산당 등 정통좌 파를 대변하는 공산당에서 활동한 것에 주목하였다 작품을 분석함에 있어 독일공산당의 정책 으로 중도 사민당, 극우 정당 등 반대파에 대한 저항과 투쟁으로 포토몽타주를 이용한 사실을 알아보고자 한다. 독일공산당 당원인 하트필드가 정통 좌파잡지인 AIZ의 표지에 기고한 포토 몽타주는 정치사회에 관한 독일공산당과 소련 코민테른 노선에 따른 공산당의 정치노선을 반 영을 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급진 좌파 잡지인 AIZ에 하트필드가 기고한 포토몽타주는 독일공 산당의 투쟁 대상인 바이마르 공화국과 독일 나치스에 관한 노선의 변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작품의 내용은 독일공산당을 대변하는 잡지의 표지에 투쟁 대상을 대중에게 함축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하트필드의 AIZ에 기고한 작품의 시기 구분을 바이마르 공화국을 주도 하는 사민당과 파시즘 형성에 대한 경계 시기, 나치스 대두에 따른 나치스 실체를 알리는 시기,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작품을 제작한 3시기로 작품을 나누어 분석 연구 하였다.

하트필드 작품의 첫 번째 시기는 사민당이 주도하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작품으로 독일 공산당의 정적인 바이마르공화국의 제1당 사민당을 비판한 작품이다. 특히 1929년 세계대공 황이 이후 좌우대립이 심각해지고 공화정을 옹호하는 사민당 등 중도 세력이 몰락함에 따른 공산당의 약진을 알리는 작품이다. 동시에 나치 파시즘이 등장함에 따라 이를 사민당과 같은 파시즘 정권으로 비판하는 작품을 AIZ 표지에 기고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1932년 나치스의 대두에 따른 독일공산당의 주적인 나치 파시즘에 대한 비판과 경계, 나치를 옹호하는 자본과 재벌에 관해 비판하는 작품이다. 세 번째 시기는 망명 후 반파시즘과 친 소련적인 포토몽타주 를 제작한 시기이다. 하트필드는 1934년 망명 이후부터 포토몽타주를 통해 소련을 지지하였 으며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묘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촉구하는 내용의 사회주의 체제

1) 독일공산당(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은 1918년 12월 29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스파르타쿠스단의 마지막 전국회 의 결과에 의해 창립되었다. 11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다양한 좌파 혁명그룹들이 스파르타쿠스단과 통합하게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와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의회주의에 대해 그들은 다른 생각 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공산주의적 평의회 민주주의로 대체하고자 했다. 1919년 이래 그들은 레닌이 이 끌고, 나중에는 스탈린이 이끌었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구성원이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F 2) 노동자화보 신문 AIZ는 Arbeiter-Illustrierte-Zeitung의 약자로 본 글에서 하트필드가 기고한 잡지를 AIZ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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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옹호하는 정치적인 내용의 작품을 제작한다.

이 글에서는 정통좌파 AIZ의 표지를 위해 제작한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가 정통좌파의 지침을 실은 목적성을 가진 정치적 작품이라는 사실을 밝혀 보고자 한다.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당대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관한 독일공산당의 노선을 반영하고 있으며 당시 독일의 정치적 사건에 관한 독일공산당의 사회에 대한 투쟁의 대상이 나타나 있는 목적성을 지닌 작품이다.

본 연구에서는 하트필드의 독일공산당의 정책을 반영한 정치적 작품을 시기별로 연구하여 하트 필드의 포토몽타주가 대중을 선동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예술임을 고찰해 보겠다.

2. 바이마르 정권 초기 정치적 예술 활동(1920-1928) 2.1. 정치적 목적을 가진 베를린 다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은 종전 직후 1918년 빌헬름 2세 황제를 폐위시키고 1919년 독일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3)이 집권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을 공 포한다. 독일은 1919년 베르사유 강화 조약 후 많은 영토와 모든 식민지를 잃었으며 군대의 감원이 시작되면서 많은 의용군 병사들은 자신의 위치를 위협을 느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1920년 3월 13일 카프와 뤼트비츠의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즉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독일의 중도 좌파 정당인 사민당의 바이마르공화국은 극우의 정적이었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하는 다른 세력은 독일공산당이었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를 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바이마르 정부는 무자비한 탄압하였다.

1920년 카프 쿠데타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은 극우와 극좌와 적대관계가 형성된다. 카프 쿠데 타 이후 정부는 베를린에서 퇴거하고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사회민주당은 군사 독재를 막기 위해 총파업을 지시한다. 쿠데타 후 카프가 수반이 되었으나 정부 주요부서의 관리들이 카프의 명령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쿠데타 세력을 저지하는데 공헌하였다. 쿠데타 이전 의 노동조합은 정치투쟁을 배제하고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을 집중해 사회민주당 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카프 쿠데타 이후 노동조합은 과거의 관행과는 다르게 정치행동에 나선다.

노동조합은 정치적으로 총파업을 중지하는 조건으로 많은 각료들을 경질시켰으며 수상바우어 가 물러나고 사회민주당의 외상 헤르만 뮐러가 수상이 된다. 당시 루르 지방은 광산지역으로 노동자 중 독립사민당과 공산당의 세력이 강하였다. 급진 좌파들은 총파업을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할 좋은 기회로 생각하여 노동자들이 무장을 갖추고 적군을 조직하여 주둔군을 공격하였 다. 주둔군은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대부분 철수하고 공산당은 루르지방의 중요도시 에센 에서 정권을 수립하고 뮐러 내각에 대해 적군에 대한 국가적 승인을 요청한다.4)

이러한 격동기에 하트필드는 1918년 12월에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18년부터 1922 년까지 베를린다다에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으로 강한 색채를 띠고 바이 마르공화국을 비판하는 미술이 독일 베를린 다다이다. 다다운동은 사회적 혼란 속에서 전통을 거부하고 예술장르의 해체와 융합을 시도하며 기존 관념들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베를린 다다 가 활동한 독일에서는 공업화, 합리화, 소비주의가 일어나는 기간으로 신문, 영화, 잡지 등의 대중 인쇄 매체가 함께 성장을 하였다. 베를린 다다 작가들은 도시에서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신문, 엽서, 광고 같은 대중매체의 이미지들을 잘라내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난 정치적 풍자 이미지를 만들었다.5) 이러한 포토몽타주는 이미지의 전복을 통해 사회를 비판 할 수 있어

3) 19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창당한 독일의 정당으로써 독일사회민주당 또는 줄여서 SPD라고도 한다. 창당 초기와 나치스 치 하에서 불법정당으로 규정되어 정당 활동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내부 노선투쟁을 겪은 뒤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 고 대중정당으로 바뀌었다. 1878년부터 비스마르크 정부에 의해 불법정당으로 탄압을 받았지만 1890년 독일사회민주당으로 이름 을 바꾸면서 합법정당이 되었다. 1914년 전시공채 투표문제에 따른 갈등 때문에 사민당, 독립사회민주당, 스파르타쿠스단으로 분 열되었다. 이후 더 급진적인 세력은 독일공산당(KPD)을 창당했고, 사민당과 독립사회민주당은 재통합했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잠시 집권하였지만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오인석, 『바이마르공화국의 역사』, 한울, 1997.

4) 오인석, 『바이마르공화국의 역사』, 한울, 1997, pp.153-154.

5) 노버트 린튼(Norbert Lynton)은 포토몽타주 용어를 베를린 다다의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가 창안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노버트 린튼, 『20세기 미술』, 윤난지 역, 도서출판 예경, 1993,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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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좌익 계열에 있었던 예술가들이 사용하였다.

베를린 다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 측면에 호소하고자 한 독일 표현 주의에 반대하는 맥락에서 등장했다. 베를린 다다는 미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융합하려는 표현주의에 저항해서 반미학의 모델을 구축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에서 등장한 베를린 다다는 독일에서 전례가 없던 명백하게 정치화된 아방가르드 기획으로서 하트필드와 조지 그로스(1893-1959) 등 몇몇 회원은 1919년 1월 1일 창당한 독일 공산당(KDP)의 당원 이기도 하였다.6) 하트필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징용되어 2년간 군 복무 를 마치고 전역 후 베를린에서 조지 그로스를 만난다. 그리고 1916년부터 1917년까지 하트필 드, 헬무트 헤르츠펠데(Helmut Herzfelde), 조지 그로스(George Grosz)는 반전, 반체제, 반예 술의 기치 아래 출판회사인 『노이엔 유겐트』(Neue Jugend)를 만들었다. 하트필드는 1918 년 그로스,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한나 회흐(Hannah Höch) 등과 함께 베를린 다다 그룹을 결성하여 1922년 베를린 다다가 해체되기까지 활동을 한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포토몽타주를 누가 발명했는가에 대한 문제로 신랄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로스는 정치적 검열을 피할 계책으로서 자신과 하트필드가 그 기법을 발명했다고 주장 한다. 또 다른 설명에서 그로스는 발명시기를 조금 이르게 계산하면서, 1915년이나 1916년경 그들이 전선에서 만들어 보낸 우편엽서에서 이 기법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하우스만과 회흐 또한 자신들이 포토몽타주 기법을 발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1918년 중반, 휴가 도중의 하루를 그 발명시기로 호텔의 주인이 황제와 황제의 역대 조상들이 있는 사진에다 주인 자신의 얼굴을 붙여 넣은 것을 본 순간에 스치듯 그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7) 독일공산당원 하트필드를 비롯한 베를린 다다 예술가들은 급진적 정치성향을 띠었으며 마르 크스-레닌주의와 결합하면서 예술을 통해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1919년 1월 공식적으로 출범한 독일공산당은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혼란기로 문화정책에 관한 뚜렷한 방침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독일공산당 기관지인 『적기』(Rote Fahre)의 편집장 알 렉산더(Gertrud Alexander)는 예술이 갖는 선전으로서 역할을 강조하였다.8) 독일 공산주의 지식인들은 노동계급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파시즘의 변장한 형태로 인식했을 때 바이마르 공 화국은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대중을 선동하였다.9)

하트필드 등 급진적 정치 성향을 지닌 베를린 다다 예술가들은 예술이란 선전의 도구였으며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권력을 잡을 수 있는 도구로 작품을 활용하였다. 베를린 다다는 독일공산 당과 연관되며 베를린 다다를 주도한 하트필드는 정통 좌파 예술가였다. 베를린 다다이스트 작가들이 신문사진 등을 결합하여 만든 작품은 독일 대중들이 바이마르공화국 자본주의 정책 에 대한 반발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달성하려는 사회적 자각을 일깨우려 하는 정치적 목적성 을 지니고 있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신문에서 잘라낸 표제나 기사 등 당시대의 재료를 사용하여 콜라주를 만들었으며 그 재료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의미를 파괴하는 방식을 채택하 였다. 기존의 간행물에 나오는 정치지도자들의 사진이나 광고들을 이용해 이미지의 전복을 통해 존재의 위선과 멍청함이 드러나게 했다.10) 이러한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의 작품은 정치적 이며 비판적 요소가 강하게 부각되었고 “대중을 자극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베를린 다다의 초기 포토몽타주는 특이한 오브제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개성적 미술작품이라 는 전통적인 지위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트필드는 이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포토몽타 주로서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초점을 맞춘 포토몽타주를 시도했다.11) 베를린 다다 시기 존

6) Brigid Doherty, “The Work of Art and The Problem of Politics in Berlin Dade,” October 105, Summer, 2003, p.82 7)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오진경 역, 한길아트, 2001, p.128.

8) 고유경, 「노동자문화운동의 목표를 둘러싼 바이마르 시기 독일 사민당과 공산당의 논쟁 - 아마추어 연극과 영화의 사례를 중심으 로」, 『한국서양사학회』68, 2001, p.98.

9) 신일범, 「바이마르 문화고」, 『바이마르공화국 연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9, p.248.

10)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오진경 역, 한길아트, 2001, p.128.

11) 돈 애즈, 『포토몽타주』, 이윤희 역, 서울: 시공사, 2003, pp.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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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필드는 신문과 잡지 등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를 오려내어 합성하는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텍스트를 넣어 바이마르공화국에 관해 비판하였다. 1999년 2월에 제작된 <모두가 그 자신의 축구공><그림 1>은 혁명 활동을 촉구하고 있다는 이유로 출판 즉시 압수를 당했다.12)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축구공”이란 헤드라인 옆에 축구공의 몸통을 가진 정치인의 이미지가 등장 하고, 하단엔 펼쳐진 부채 안에 당대 권력자들의 사진이 “누가 가장 예쁜가?” 라는 문장 아래 몽타주하였다.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와 언어가 공존하고 있는 형태로 당대 권력자들과 사민당 정치인의 아름다움을 논하면서 풍자하였다.

하트필드는 베를린 다다시기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중도좌파 정권인 바이마르공화국의 체제 를 비판하는 작품을 제작한다. <이윤이 추구되는 사회><그림 2>는 단편적인 사진들을 직접 적으로 병렬하였다. 한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있는 장면과 미인대회를 대비시켜 보여주었으며, 그 위에 달러화를 뿌려 놓았다.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작품으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1848)13)과 작품을 연결할 수 있다. 작품과 관련 있는 「공산당 선언」은 다음과 같다. ‘부르 주아는 모든 민족에게 망하고 싶지 않으며 자본주의 양식을 채택하라고 한다. --- 즉 부르주 아가 되라고 강제한다. 부르주아는 농촌을 도시의 지배에 종속시키고, 이와 마찬가지로 미개국 과 반미개국은 문명국에, 농업국은 공업국에 동양은 서양에 종속된다. --- 부르주아의 성장, 상업의 자유와 세계시장, 공업생산과 이에 따른 생활 조건의 평준화와 함께 민족 간의 차이는 없어질 것이다.’ 라고 선언하였다. <이윤이 추구되는 사회>는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달러 를 그리고 상업 자본주의에 의해 인간이 상품화되는 미인대회를 나타냈다. 작품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통 받는 노동자이며 더 넓게 보면 미국자본에 종속된 독일로 볼 수 있다.

1928년 공산당이 발행한 『사슬에 묶인 이탈리아』의 표지로 쓰인 하트필드의 1928년 <파시 즘의 얼굴>은 베를린 다다의 초기 포토몽타주 미학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 다. 중앙에 무솔리니의 머리와 해골이미지를 합쳐놓았으며 좌우에 중산모를 쓴 부르주아 자본 가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고관대작 이미지 파편들은 교계와 재계 권력들의 결탁을 명시하며 하단 좌우에 병치된 쓰러진 민중은 파시즘의 해골이 가져온 치명적 결과를 알리는 작품이다.14)

2.2. 정통좌파 언론 AIZ를 통한 활동

존 하트필드는 1930년부터 1938년까지 좌파 사회주의 잡지 AIZ(노동자 화보신문)에 235개 의 포토몽타주를 게재하였다. AIZ는 공산주의자로 국제노동자국제조직의 수장인 빌리 뮌제베 르크(Willi Muenzenberg)에 의해 1924년에 창간되었다. 초창기는 베를린에서 출간하였으며 나치 집권 이후에는 프라하에서 발행하였고 1938년 파리에서 단 한 호만 내고 폐간된다. 정치 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하고 반파시즘을 내걸었으며 절정기 때 오십만 부 가량 유통되었다.15) 하트필드는 좌파 사회주의 잡지 AIZ에 1930년부터 1938년 잡지가 폐간되기까지 235개의 포토몽타주를 게재하였다.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정통 좌파의 정책을 반영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을 비판하고 나치의 파시즘에 관한 투쟁을 목적으로 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신문은 대중매체 중 가장 강력한 언론기관이었다. 1928년 독일 전역에 서 3,356종의 일간지가 발행되었고, 그 중 147종이 베를린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발행부수가 적어 10만부 이상의 일간지는 26종에 지나지 않았다. 보수적 우익세력인 알프레드 후겐 베르크는 1916년 발행부수 40만부로 전국 최대를 자랑하던 울스타 인사의 일 간지 『베를린 모르겐 포스트』를 인수하고 많은 통신사를 통해 신문에 자료와 정보를 제공함 으로써 막강한 언론을 이끌었다. 좌익 신문으로는 정열적이고 진취적인 공산주의자이자 국제 노동자구제조직의 수장이었던 빌리 뮌첸베르크가 발행하는 AIZ가 대표적이다. 공산당 및 영 화배급사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던 이 신문에는 브레히트와 하트필드와 같은 좌익 지시인들이

12)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오진경 역, 한길아트, 2001, p.135.

13) 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8년 2월.

14) 조주연, 『현대미술강의』, ㈜글 항아리, 2017, p.203.

15) 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역사』, 반성완 역, 지와 사랑, 2000, p.266.

<그림 1> <모두가 그 자신의 축구공>, 1919. 2. 12.

<그림 2> <이윤이 추구되는 사회>,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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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하였다. 독일공산당 당원 하트필드 정치적 내용을 전달하는 포토몽타주는 AIZ에 기고하 면서 알려졌다.16)

AIZ의 기고 내용은 독일공산당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독일공산당의 교육과 문화정 책이 실천적 국면으로 전환되는 시점은 1925년 7월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0차 전당대회부터 기고한다. 이 대회에서 문화사업의 ‘선전·선동화’라는 원칙이 표면화되었는데, 이는 탤만이 당 중앙위원회를 장악하면서 이루어진 공산당의 ‘볼셰비키화’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변화를 대변하는 것이 비트포겔이 10차 당 대회 직전 『적기』에 세 차례 걸쳐 연재한 「프롤레타리 아 투쟁문화」라는 글이다. 글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존재를 인정 하고 투쟁적 성격을 강조하였다.17)

독일공산당의 방침과 투쟁의 대상으로 AIZ에 기고한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바이마르공화 국을 비판하였으며 나치독일의 모순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다. 1928년은 독일공산당 문화운동의 전환점이 되는 시점이다. 이 시기부터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좌선회’

노선에 따라 사민당 계열의 문화조직에서 분리되어 나와 독자적인 문화조직을 건설한다. 같은 해 4월 아마추어 극단의 연합체인 독일노동자연극동맹 정기총회에서 볼프가 행한 “예술은 무 기이다!”라는 제목의 강연은 예술의 선전적 기능을 강조하는 공산당의 문화정책을 압축한다.

하트필드의 AIZ 표지 포토몽타주는 독일공산당(KPD)과 연결되어 있으며 독일공산당의 정책 을 반영한다. 이 시기 AIZ의 편집 방향은 독일공산당의 정책에 따라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 (SPD)과 파시즘을 공격하고 고립시키기 위한 사회적 힘과 당 사이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 었다. 하트필드가 기고한 AIZ 포토몽타주는 독일의 정치적 상황에 관한 독일공산당의 정책을 충실히 반영하여 사민당과 파시즘을 공격하는 정치색이 강한 작품을 제작한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 후, 하트필드는 나치를 피해 체코 프라하로 망명한다. 그 후 하트필드는 독일 파시스트들의 프라하 점령이 임박해오자 영국으로 망명하였으며 1950년 동 독으로 돌아가 1968년 사망할 때까지 동독에서 활동하였다. 망명시기에 AIZ에 나치의 만행과 실체를 담은 포토몽타주를 발표한다. 이와 같이 하트필드는 AIZ를 통해 독일의 사민당과 이 후의 나치스를 공격하였으며 망명 후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한다. 이러한 하트필드의 AIZ 기고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옹호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독일파시 즘과 중도 좌파의 정책에 관한 저항과 비판의 목적성을 지닌다.

3. 세계대공황 이후 사민당, 나치스 비판 시기(1929-1932) 3.1. 바이마르공화국의 사민당 비판(1929-1931)

바이마르 공화국을 주도한 정당은 중도좌파계열의 사회민주당이었으며 사민당 정권에 반대하 는 정당은 빼앗긴 영토를 회복을 주장하는 우익 민족주의자와 소비에트공화국을 원하는 공산 당이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 여파로 독일경제가 무너졌으며 실업자가 급증하게 되면서 좌우 익 대립 등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가중된다. 금융공황은 산업공황으로 이어져 1932년 독일의 실업자가 600만 명이 되었으며 독일의 농업도 공황에 의해 가격이 떨어져 피폐해진다. 이런 혼란기에 좌우익 대립이 심화되면서 1928년 12석였던 극우정당인 나치스가 1930년에 104석 으로 제2당이 되었으며 극좌 정당인 공산당은 81석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공화제를 옹호하 는 중도정당들은 몰락한다. 이후 1932년 나치스가 제1당이 되었고 그 여세로 1933년 1월 히틀러가 수상이 된다. 그 해 2월 국회의사당 화재가 발생하고 이를 좌파의 소행으로 간주하면 서 사민당과 공산당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긴급명령이 내려진다. 긴급명령을 계기로 히틀러의 독재가 시작되었으며 6월에는 중산계급의 정당이 해체되고 7월에는 국가사회주의노동당이 독일의 유일 합법정당임을 선언하였다.

독일공산당은 투쟁 문제에 있어 파시즘과 사회파시즘, 히틀러당과 사회민주당이 형제라는 관

16) 오인석, 『바이마르공화국의 역사』, 한울, 1997, p.235.

17) 고유경, 「노동자문화운동의 목표를 둘러싼 바이마르 시기 독일 사민당과 공산당의 논쟁-아마추어 연극과 영화의 사례를 중심으 로」, 『한국서양사학회』68, 2001,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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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동일시하였다. 즉 1932년 이전에는 사민당, 나치스를 독일공산당의 주적으로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하트필드는 독일공산당의 노선에 따라 사민당을 비판하고 파시즘을 경계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1929년 5월 베를린에서 사민당 지도부 휘하 의 경찰과 공산당 시위대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18)

이러한 사민당이 주도하는 의회를 비판하는 작품이 1929년 작품 <잠자는 국회><그림 3>이 다. 공화정을 옹호하는 중도 세력이 주도하는 독일의회의 나태함과 자만심을 공격하였다.

1929년 월가의 주가폭락 이후 독일경제가 파탄되는 시점에서 제1당인 사민당 등 중도정당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극좌와 극우의 공격을 받은 중도정당은 쇠퇴하고 이 후 1930년 선거에서 극우 나치스가 104석의 제2당이 되고 극좌 공산당도 부상한다. 독일 공산주의 지식인들은 노동계급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파시즘의 변장한 형태로 인식했을 때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라 져 버릴 것이라고 대중을 선동하였다.19)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을 촉진하는 의도의 바로 공산당의 정책에 의해 1929년에 제작된 <잠자는 국회>는 사민당 등 중도계열의 정당의 무능 력함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사민당을 공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을 촉진하는 의도의 작 품이다.

1928년 코민테른20)을 통해 러시아 이외에 가장 강력한 독일공산당(KID)이 러시아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공산당(KID)은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협력을 거부하게 되었으며, 중도 좌파정당인 사민당을 노동계급을 배반한 ‘사회주의 파시스트’라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노선에 따라 하트필드는 1931년 <SPD 정당의 위기><그림 4>에서 사민 당(SPD)을 무서운 호랑이 얼굴로 비유해 경계하여야 하며 중도좌파인 사민당이 노동자를 위 한 당이 아니며 사회파시즘이라는 공산당의 당 정책을 반영한 작품이다.

3.2. 나치스 대두에 대한 투쟁(1932)

독일공산당이 사민당과 나치스를 동일시 보는 관점은 1931년 말 이후 점차 변화된다. 1932년 5월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나치의 파시즘을 공산당의 투쟁대상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베르너 히르쉬는 1931년 11월 『인테레카』에서 독일공산당이 히틀러의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스)에 공격의 주방향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글에서 볼 수 있다. 1931년 말과 1932년에 사회민주당 대신에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에 주 타격을 둘 것을 요구하는 그룹이 독일공산당 지도부 내에 형성하였다.21)

또한 독일공산당을 대표하여 코민테른에 파견되었던 피크가 1932년 2월 중앙위원회 총회에 서 행한 발언은 이러한 독일공산당의 정책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한다. “코민테른은 독일의 정세를 매우 심각하게 평가한다.” “우리는 공산당의 격렬한 투쟁 없이도 독일에서 파시즘이 권력에 올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지 못한 채, 당이 파시 스트에 의해 격퇴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총회는 “비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반파 시스트 대중투쟁에 끌어들임에 있어 유연하게 대처할 것”을 강조했다. 바로 나치와 나치 테러 집단에 반대해 실질적으로 투쟁하고자 하는 부르주아 조직과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22) 독일공 산당원인 하트필드는 급진 좌익계통의 대표적인 신문 AIZ에 나치스에 반대하는 반파시스트 대중투쟁을 위한 목적의 포토몽타주를 게재하였다.

하지만 극좌와 극우의 격렬한 투쟁기간에 좌파사민당 지지자조차 공산당에 부정적이었고 독 일 내 자유주의 성향 지지자나 독일 내 80%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은 나치스를 선택한 사람

18) 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 역사』, 반성완 역, 지와 사랑, 2000, p.245.

19) 신일범, 「바이마르 문화고」,『바이마르공화국 연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9, p.248.

20) 1928년 코민테른에서 제시된 내용 중의 하나로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적극적 세력(소 연방 및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적 노동운동) 과 제국주의 세력 사이의 투쟁전선이 만들어지고 있다. --- 식민지. 반식민지의 혁명적 해방운동은 점점 소연방의 깃발 아래 결 집하게 되어 있으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동맹하는 것 이외에 세계 제국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이 승리하는 것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혁명운동에 대하여(테제)」, 코민테른 제6회 대회(1928년 9월 1일),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자료집』, 1995.

21) 홍성곤, 「독일공산당의 “반파시스트 행동”」, 『역사와 경계』27, 1994, p.122.

22) W. Pieck, Gesammalte Reden und Schriften 4, Berlin, 1961, pp.424-426.

<그림 3> <잠자는 국회>, 1929.

<그림 4> <SPD 정당의 위기>, 1931.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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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많았다. 1932년 11월 선거에서 공산당은 89석을 차지하지만 나치는 그때 196석으로 제1당 이 된다. 하트필드는 1932년 히틀러에 의해 주도되는 나치스의 대두에 관해 비판하는 내용의 작품을 AIZ에 기고하였다. <자본주의가 만든 최고 상품><그림 5>은 「어떤 직업이라도 좋 다」라는 플레카드를 들고 있는 실업자와 베일을 입은 신부가 서 있다. 1932년은 공황의 여파 로 독일노동자의 42퍼센트가 실업자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자가 되는 상황에서 러시아혁명을 따르자고 주장하는 노동자들의 생각을 유도하는 작품이다.

1932년 5월 24일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투쟁의 대상이 나치스가 된다. 이 총회에 서 사회민주당과 나치스의 사회적 구성이 다르며 사회민주당과 나치스의 사회적 구성은 다르 다. 이러한 사실은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적 지향에 필요하다.”23)고 보고 히틀러와 나치 스가 주적으로 투쟁의 대상이 된다. 1932년 <슈퍼맨 아돌프 히틀러 : 금을 삼키고 깡통소리를 낸다><그림 6>는 히틀러의 척추가 돈으로 묘사된 포토몽타주이다. 1932년 슐라이덴 수상이 좌익까지 포함된 연립내각을 구성하려 하자, 철강업자들과 금융가들은 나치스에 대한 지원이 야말로 자본주의의 전복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히틀러는 1932년 1월 루르지방 연설에 서 이러한 자본가의 지원을 얻기 위해 기업의 이익을 존중하고, 노동조합을 규제할 것, 자신이 집권하면 재무장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트필드는 자본가와 중공업계의 자본과 결탁된 나치 정권을 비판하였으며 다수의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와 결탁한 나치스와 히틀러의 실상 을 알리고 있다.

<히틀러식 경례의 의미 : 내 뒤에는 백만장자들이 있다><그림 7>는 히틀러가 경례에 답하는 손의 뒤쪽에 히틀러보다 훨씬 큰 사내가 있다. 히틀러에게 경례를 하는 것은 이들 거대 자본가 들에게 충성의 경례를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사람은 히틀러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재벌(자본주의)을 가리키는 것이고 히틀러와 재벌의 밀월 관계를 고발한 작품이다. 파시스트 정권의 수립에는 은행가 등 자본의 힘이 있었다. 1933년 1월 4일 은행가 쿠르트 폰 쉬르더의 주선으로 쾰른에서 파펜과 히틀러가 만나 파시스트 정부의 구성에 대해 합의했다는 사실을 통한 밀원 관계가 증명되었다.24) 나치스는 근본적으로 군소정당으로 2%의 득표율을 37%로 불리고 300만 돌격대를 키우느라 단시간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본가들은 정치자금을 대며 나치와 손을 잡았으며 최소한 300만 마르크 이상을 1933년 3월 선거전까지 히틀러를 지원하였다.

4. 독재 저항과 사회주의 실현(1933-1938) 4.1. 히틀러 독재에 대한 저항(1933-1935)

1933년 히틀러는 집권과 동시에 의회를 해산한다. 그리고 선거를 불과 1주 앞둔 시점에서 네덜란드 출신 사회주의자를 통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벌였으며 공산당을 용의자로 몰았다. 나치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이 후 선거에서 의회의 44.5%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한 다. 곧 바로 히틀러는 수상에게 모든 입법권을 넘기는 ‘수권법’을 제안하고 사민당과 공산당의 반대 속에 필요한 2/3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하여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를 얻었으며 좌파들을 체포, 반대를 차단하였다.

1933년 2월에 발생한 국회의사당 방화사건과 관련 된 작품으로 <사형집행인 괴링><그림 8>이 있다. 국회 방화사건을 공산당이 주도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이후 독일공산당은 국회의사 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금지되었다. 작품에는 뒤에 불타고 있는 국회가 있고 피가 묻은 옷과 도끼를 든 괴링이 악을 쓰고 있는 잔인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괴링은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무임소(無任所)장관이 되었고 이어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다. 괴링은 관료와 경찰의 나치 화를 강행하였고, 국가비밀경찰과 강제수용소 등을 만들어 공산당 등 반대파들을 체포 학살하 였다. 도끼를 든 잔인한 모습 뒤의 불타는 국회는 국회 방화 사건의 주동자가 공산당이 아닌 괴링이 꾸민 일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23) 홍성곤, 「독일공산당의 “반파시스트 행동”」, 『역사와 경계』27, 1994, p.128.

24) 홍성곤, 「독일공산당의 “반파시스트 행동”」, 『역사와 경계』27, p.145.

<그림 6> <슈퍼맨 아돌프 히틀러:

금을 삼키고 깡통소리를 낸다>, 1932. 7. 17.

<그림 5> <자본주의가 만든 최고 상품>, 1932.

<그림 7> <히틀러식 경례의 의미 : 내 뒤에는 백만장자들 이 있다>, 1932.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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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통해서 어두움으로>(그림 9)는 1933년 5월 10일 베를린과 여러 대학에서 행해진 사 상 탄압을 나타낸 작품이다. 뒤 쪽에는 제국의사당이 화염에 쌓여있으며 앞 쪽에는 불타는 책 더미 옆에 나치의 선전상인 괴벨스가 특유의 연설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문이 발행되던 날, 베를린 오페라 하우스 광장과 그 밖에 다른 대학 도시들에서는 학생회가 주동이 되어 책이 불살라진다. 이 때 불살라진 책들은 주로 바이마르 문화를 드높였던 책과 유태 지식인들이 저술한 책들이다. 이 책들은 청소의 대상이 되어 화염에 내던져졌다. 제국의회가 불타는 장면 을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독일의회의 하나의 큰 축이 되는 좌파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이다.25) 또한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으로 반대 정당을 제거하고 이를 확대해 사상 탄압이 가해 진 것임을 보여준다.

1933년 6월 바이마르 공화국을 주도하던 중도좌파 정권인 사민당이 해산되었으며 사민당의 많은 간부들은 집단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살해된다. 이 후 부르주아 정당들은 자진해서 해체하고 1933년 중반 경 국회는 나치스만 남게 된다. 그 해 11월 <정의의 여신상>

은 얼굴을 천으로 둘러싸 보이지 않고 기울어진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의 모습을 나타냈다. 이러한 자유의 여신상을 통해 독일이 정의와 법에 따르지 않는 사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괴링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생각되는 국회방화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등 좌파 세력을 체포, 학살하는 현실을 풍자, 비판하였다. 1933년 11월 <전체의 독일>은 독일 지도자 중의 하나요, 반유태계 신문인 스튜르메르의 편집자인 줄리어스 스트라이쳐가 군복을 입고 발아래 낭자한 피를 무시하고 태연하게 서 있다. 나치가 피를 통해 설립된 정권이고 피에 의해 성장한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정부임을 나타내는 정치적 의도를 가진다.

나치스의 탄압에 의해 체코로 망명한 하트필드는 독일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전개에 관해 비판 하는 포토몽타주를 제작한다. 1934년 작품 <변신, 에베르트, 힌덴부르크, 히틀러><그림 10>에서 하트필드는 바이마르 정부가 파시즘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 령 에버트를 유충으로 다음 대통령인 힌덴부르크를 번데기로 묘사하였으며 히틀러를 독나방 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중도좌파인 사민당이 주도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 파시즘의 근원 이며 결국 나치가 지배하는 국가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상적으로 마르크스 사관에서 보이 는 역사발전의 단계와 같은 진화론적인 세계관이 나타나며 독일공산당이 1930년대 초까지 사민당을 사회파시즘으로 나치스를 파시즘으로 본 관점이 나타난다.

1932년 6월 1일 성립된 파펜 정부에서 파펜은 히틀러 파시즘을 위한 관리인의 위치에 있었고 독일의 파시즘을 심화시켜 나간 인물이다. <파펜경의 사냥길>(1934)에 1934년 10월 헝가리 에 전독일 국가 동맹가입을 권유하는 특사로 파견된 파펜의 모습이 나타난다. 탱크를 사냥개처 럼 표현하고 그가 찬 완장은 에른스트 룀과 SA을 제거한 1934년 6월 30일 대량 숙청을 기념 한 모습을 익살스럽게 풍자하였다. 1935년 <만세! 버터를 먹는 시기는 끝났다><그림 11>

는 독일이 극우 전체주의,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괴링이 함부르크에서 가졌던 연설에서 “철은 항상 한 국가를 튼튼하게 하고 버터와 라드(돼지기름)는 사람들은 뚱 뚱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소재로 하트필드는 작품에서 가족들이 철을 먹고 있는 모습 으로 히틀러의 사진을 가족들의 식사하는 벽에 걸어 히틀러의 우상화를 보여준다. 나치는 괴링 을 1936년 경제책임자로 임명하였으며 강철공장을 세워 4년 이내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준비를 하였다.

4.2.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창작(1934-1938)

1934년 이후 하트필드는 소련과 공산당을 지지하는 정치적인 작품을 제작한다. 소련에 대한 지지를 반영한 작품은 1928년 코민테른 6회 회의에서26) 세계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식민지, 반식민지의 혁명적 해방운동은 점점 소련연방의 깃발아래 결집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

25) 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역사』, 반성완 역, 지와 사랑, 2000, p.266.

26)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혁명운동에 대하여(테제)」, 코민테른 제6회 대회(1928년 9월 1일),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자료집』, 1995.

<그림 8> <사형집행인 괴링>, 1933. 9. 14.

<그림 9> <빛을 통해서 어두움 으로>, 1933. 5. 19.

<그림 10> <변신, 에베르트, 힌덴부르크, 히틀러>, 1934.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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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관련된다. 이에 따라 독일공산당 당원 하트필드는 망명 후인 1934년부터 소련군을 해방군 으로 인식하였으며 소비에트의 업적을 홍보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1934년 11월 1일 AIZ 특별호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의 주인><그림 12>은 새로운 인간 으로 노동자를 묘사하였으며 새로운 세계의 주인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소비에트 세계임을 보여준다. 하트필드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기대를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에서 찾으려 하였 다. <레닌주의의 실현>(1934)은 1923년 1월 28일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은 레닌의 정신적 유산의 법정 유언 집행자이고 레닌이즘의 해설자라고 정식 추도식에서 연설하였다. 스탈린의 연설은 레닌 숭배의 기본이 되었으며 작품은 레닌을 계승 한 스탈린에 관한 지지와 연결된다.

1935년 <자살자의 소원 성취><그림 13>는 소련의 적군파에 관한 특별 주제를 다룬 AIZ의 뒤표지에 게재되었으며 스탈린의 말을 인용하였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존재하며, 우리는 평 화를 위협할 원인을 방어하며, 그러나 침략하지 않는다.” 소련군을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모습 으로 묘사하고 이에 대항하는 나치의 선동대장 요셉 괴벨스(Josef Goebbels)를 작고 왜소하게 나타냈다. 작품의 텍스트에 “이런 타락한 열등한 인종은 저리로 가버려.”라고 막으면서 외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나치의 파시즘이 소련의 해방군에 의해 패망하게 된다는 내용의 정치적 선전의 목적을 가진 작품이다.

1935년 9월 5일자 <생산 계급의 통일전선만이 평화를 보장한다>에서 두 명의 사람과 손을 잡고 있는 소련의 적군파를 영웅적인 이미지로 전면에 부각시켰다. 작고 비굴한 모습의 군복을 입은 사람을 자본주의와 파시즘을 상징한다.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1928년 코민테른에 언급 한 민족 자본가로 제국주의와 지주 동맹체제에 대항하는 반제·반봉건투쟁의 중요 동맹세력과 손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는 사회주의의 체제의 근간인 노동자와 농민을 상징적 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하트필드는 독재자이자 파시즘 정권이며 작품을 제작 할 시기인 1934년에서 1938년까지 2,000만 명 이상 학살한 스탈린을 지지하는 정치적 작품을 제작하였다. 망명 후 하트필드의 작품제작의 목적이 사회주의에 입각한 선전용 도구로 포토몽 타주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5. 결론

이 글은 정통 좌파적 관점에서 하트필드가 AIZ에 기고한 정치적 목적의 포토몽타주에 관하여 연구이다. 하트필드는 정치적 색채가 강한 베를린 다다 예술가로 현실참여적인 작품을 제작한 다. 그리고 독일공산당(KPD) 당원으로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가는 격변 기 독일 사회에 관한 정치적 목적의 포토몽타주를 좌파계열의 신문인 AIZ에 기고하였다. 하트 필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마르 정권이 성립되고 이후 중도 공화정을 옹호하는 사민당 의 등장, 중도공화정을 옹호하는 사민당의 등장, 좌우익의 대립, 나치 파시즘이 전개된 시기에 독일공산당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파시즘을 반대하는 정책을 반영하는 AIZ에 기고한 포 토몽타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하였다.

1918년 독일공산당에 가입한 하트필드가 AIZ에 기고한 포토몽타주는 독일공산당의 정책방향 의 변화와 관련된다. 바이마르 정권시기 최대 정당인 사민당이 노동자의 당이 아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정당으로 보고 비판한 것은 소련과 독일공산당의 정책에 의해 중도 좌파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1924년 창립된 좌파 신문에 기고한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바이마르 공화국 에 대한 비판과 좌우이념의 대립, 사민당과 나치스의 대두에 관한 비판,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 전체주의에 대해 독일공산당의 당 정책을 반영하여 공격하는 선동(프로파간다) 성격의 정치 적인 작품이다. 하트필드는 정치적 이념을 대중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포토몽타주를 이용 하였으며 사상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글은 독일공산당의 노선의 시기별 정책변화와 연관하여 AIZ에 기고한 하트필드의 작품을 3시기로 나누어 분석하여 포토몽타주가 지닌 정치적 의미에 관해 알아보았다. 첫 번째 시기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우익 쿠데타 발생, 노동분쟁 등 좌우익 대립이 심각한 시기에 좌파적 입장에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부에 관해 비판한 작품이다. 극좌계열의 AIZ에 기고한 내용은

<그림 12>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의 주인>, AIZ, no 44, 1934.

<그림 13> <자살자의 소원 성취>, 1935. 9. 26.

<그림 11> <만세! 버터를 먹는 시기는 끝났다>, 1935. 12. 19.

(12)

공산당원인 하트필드가 독일공산당의 이념에 따른 선전과 선동을 목적으로 한 작품이다.

두 번째는 세계대공황 이후 공화정을 옹호하는 중도 좌우연합정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 하고 나치스가 등장한 시기이다. 이 당시 하트필드는 히틀러와 나치스에 관해 비판하고 나치와 이를 옹호하는 우익자본과 재벌에 관해 그 실체를 알리는 작품을 통해 전체주의 독일로 가는 독일의 상황을 알리고 비판하였다. 세 번째는 1934년부터 나치의 박해를 피해 체코로 망명 후 제작한 작품으로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이 시기 나치스 전체주의와 히틀러 독재에 관한 비판적 포토몽타주를 제작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소련 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의 지지와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묘사하는 등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의 작품을 AIZ에 기고한다.

본 연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근현대사의 역사적 사건과 하트필드의 작품을 독일공 산당의 노선과 연관하여 분석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성격을 띤 베를린 다다에 참여한 하트필드가 정통 좌파 잡지인 AIZ에 기고한 포토몽타주는 독일공산당의 노선을 반영 한 정치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제작한 이유는 공산주의자 하트필드가 자신의 사상과 독일 공산당의 노선에 따라 중도경향의 독일사민당 정권과 파시즘의 대두에 관해 비판하고 공격하는 작품이다.

이를 통해 하트필드는 정통좌파의 사상을 실현하고 독일공산당의 정적인 중도 공화정 정부인 사민당을 전복하고 정통 좌파의 사상의 실현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향하였으며 이를 실현 하기 위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나치스가 등장한 시기에는 히틀러와 나치스의 정치적 공격을 통해 시민들과 지식인들이 최대 공산당의 정적인 나치스에 관한 반대와 본질을 알리기 위한 작품을 목적이다. 망명 후에는 하트필드의 사상인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작품을 제작한다.

결론적으로 공산주의자 하트필드가 포토몽타주를 제작한 목적은 소련과 독일공산당의 노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권력을 잡을 수 있는 정치적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AIZ에 기고한 작품들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의 새로운 정권인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중도 좌파 정권인 바이마르공화국을 공격하는데 있었다. 이 후 공산당과 극우의 공격으로 쇠퇴해진 바이마르공화국을 대신하여 극우정권이 대두되자 공산당의 최대 정적인 나치스를 공격하는데 포토몽타주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하트필드는 체코 망명 후에는 소비에트연방과 프롤레타리 아의 혁명을 지지하는 포토몽타주를 제작하여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즉 하트필 드의 포토몽타주는 독일공산당과 소련의 지침을 따른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대중적 선전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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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