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李埈熙) 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저자 (Authors)
박찬호
출처 (Source)
대중음악, 2018.11, 195-203 (9 pages)
Koren Journal of Popular Music, 2018.11, 195-203 (9 pages)
발행처 (Publisher)
한국대중음악학회
The Korean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Popular Music
URL http://www.dbpia.co.kr/Article/NODE07566999
APA Style 박찬호 (2018). 이준희(李埈熙) 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대중음악, 195-203.
이용정보 (Accessed)
저작권 안내
DBpia에서 제공되는 모든 저작물의 저작권은 원저작자에게 있으며, 누리미디어는 각 저작물의 내용을 보증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 습니다. 그리고 DBpia에서 제공되는 저작물은 DBpia와 구독계약을 체결한 기관소속 이용자 혹은 해당 저작물의 개별 구매자가 비 영리적으로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위반하여 DBpia에서 제공되는 저작물을 복제, 전송 등의 방법으로 무단 이용하는 경우 관련 법령에 따라 민, 형사상의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Information
Copyright of all literary works provided by DBpia belongs to the copyright holder(s)and Nurimedia does not guarantee 연세대학교
182.225.62.***
2019/02/21 20:27 (KST)
대중음악
특별기고
이준희
(
李埈熙)
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1)박찬호(朴燦鎬)
서울에서 걸려온 뜻밖의 전화
따르릉~ 따르릉~
2003년 이른 봄 어느 날, 오전 10시경에 머리맡의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즈음은 밤늦게 가게 문을 닫고,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를 쓴 후에 새벽에 귀가를 했었다. 목욕하고 잠을 청하기 위해 한잔 마시면서 재방송되고 있던 연속시대극을 보며 잠자리에 들던 나 날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귀’에 오랜만에 한국어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박찬호 선생님이십니까? 저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이준 희라고 합니다.”
* 이 글은 박영산 전 고려대 연구교수님이 교정 및 수정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에서 번쩍 깨어났다.
‘응! 서울대 대학원생이 내게 무슨 용무지…….’
“잡지에 연재하신 기사 중에 ‘레인보우 레코드’라는 레코드사가 나오 는데, 이 회사에 관한 자료의 출전을 가르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간단한 일이었다.’
‘레인보우 레코드’는 1947년 아니면 1948년 봄에 서울신문 지상에 광고가 실렸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공교롭게도 기록을 찾지 못했다.
1992년 11월, 필자는 졸저 한국가요사 1895∼1945(현암사, 1992) 의 한국어판 간행을 계기로 23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1993 년과 1994년 설날에는 번역을 하신 당시 청주대 영문학과 안동림(安東 林) 교수에게 신년 인사를 하러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으로 찾아갔 었다. 그때 안 선생께서 1945년 이후의 속편을 잡지에 연재하면 좋겠 다고 권유해주셨다. 필자는 속편에 대해 이미 시도해본 바가 있었지만 자료 부족 등으로 그만둔 채 오랜 시간이 지나갔었다. 게다가, 격동의 시대를 산 한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써나가는 것은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또 민족교육을 받은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우리말을 독학으로 배웠기 때문에 한글로 원고를 쓴다는 것 자체가 두렵기도 하였던 것 이다.
일단은 사양했지만 2년 연속해서 권유해주신 안 선생의 마음을 헤 아려, 조용히 다시 도전해보았더니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서울에 유학 중이던 딸을 통해 안 선생에게 원고를 일부 전달 하고, 1995년 봄부터 월간 오디오지에 연재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는 고행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고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는 필자 의 앞에 가로놓인 벽이 너무 높아서, 1999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마 무리를 하지 못한 채 연재는 중단되었다.
‘레인보우 레코드’의 광고가 실렸던 서울신문은 마침 나의 사촌 형 이 근무했던 정부계의 신문사다. 형은 1965년부터 30년 동안 근무하 고 있었고 판매국 부국장 자리에 있었다. 서울시청 주변이라는 좋은 입지에다 도쿄(東京)신문사와 주니치(中日)신문사의 서울지국이 같이 있어, 필자는 한국에 갈 때마다 찾아갔었다. 그리고 형에게 부탁해서 자료실을 안내받아 서울신문 마이크로필름을 열람했었다.
광고가 실린 날짜는 본고를 집필 중인 2017년 9월에 겨우 알 수 있었다. 다른 자료에 섞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1949년 11월 28일’부 로 기록되어 있었다. 내 기억과는 1년 이상의 차이가 났다. 기억이라 는 것이 얼마나 애매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준희 씨는 결국 아메리카에서 발행된 재미동포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레인보우 레코드’는 재미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 였다.
그 일은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다시 이준희 씨한테 전화가 왔다.
“저는 남인수 팬클럽 사무국장을 하고 있습니다. 소장하고 계신 레코 드에서 남인수가 부른 곡목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것이었 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조금 망설여졌지만, 흔쾌히 받아들였다. 70분 CD-R로 4장, 돌아가신 사이토 초지(齋藤晁司) 선생의 부인에게 사들 인 SP 레코드를 중심으로 하고 내가 가진 SP와 LP 레코드를 카피해서 보내주었다.
그 후, 이준희 씨로부터 고맙다는 전화가 왔고, “우리들도 모르는 노래가 몇 곡이나 들어있었습니다. 팬클럽에서 함께 들었는데 모두 기뻐했습니다”라고 감사의 말을 해주었다.
주경환(朱景煥) 선생, 그리고 이준희 선생을 처음 만나다
그해 8월에는 강원도 원주에서 두툼한 시집 한 권이 배송되었다.
조명암 시 전집(趙鳴岩詩全集)이었다. 보내주신 분은 작사가 조명암 의 차녀인 조혜령(趙惠灵) 씨 남편 주경환(朱景煥) 선생이었다.
나는 1993년 5월부터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야키니쿠(燒肉) 가게
‘장수원’을 운영하고 있다. 11년이 지난 2004년 10월에 직원들과 함 께 첫 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가족 모두 전라북도 장수에 가서 선친의 묘소를 찾아가 성묘를 했다. 장수는 한국에서 가장 추운 지대로 알려져 있고 명산물인 돌 외에는 내세울 만한 산업이 없었다 (지금은 한우와 사과가 유명하다). 그래서 지나는 길에 석재공장에서 돌 솥비빔밥용 그릇을 구입하여, 광주의 우체국에서 항공편으로 일본 집 에 보냈었다.
서울로 돌아간 이튿날, 주경환 선생을 만나 뵈러 혼자 원주로 향했 다. 청량리역에서 구입한 차표엔 ‘노약자’라고 인쇄되어 있었는데 반 액 할인된 요금이었다. 중앙선을 타고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서 내려선 원주역에는 역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 선생과 만난 다음 주 선생의 차로 선생 댁으로 가서 조혜령 여사 와 인사를 나누었다. 한참 동안 조명암 선생의 이야기와 음반, 노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조 여사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1942년에 발
표된 <낙화유수>라고 했다.
조 여사가 직접 지어주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서울에 살고 있는 이준희 씨에게 연락하여 내일 서울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내일 은 볼일이 있어 지방으로 가 있으니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지방이냐고 다시 물어보니 “KBS 원주 방송국에 일이 있어서 원주로 가야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지금 원주의 주경환 선생 댁에 있습니다. 내일 낮에 방송국 앞에서 만나지요.”
우연이야말로 ‘인지(人智)를 초월한 힘’이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본고 표제를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한 이유가 거 기에 있다.
다음 날 우리는 치악산 산책을 즐긴 후 그 길로 KBS 원주 방송국으 로 향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이준희 씨의 첫인상은 학자답게 안경이 잘 어울리는 호감이 가는 청년이었다. 내외분과는 趙鳴岩 詩 全集 출판 관계로 이미 아는 사이였던 것 같았다. 점심을 같이하면서 잠시 환담을 나눈 후, 필자는 혼자 서울로 향하고 이준희 씨는 내외분 댁으 로 갔다. 서울에서 가족들과 합류한 필자는 함께 동대문 밤거리를 즐 겼다.
다음 날 아침은 먼저 나고야로 돌아가는 가족들을 배웅하고, 그다 음 날은 나도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이준희 씨에게 다시 연락하여 다 음에 꼭 재회할 것을 다짐하며 이별 인사를 고했다. 그랬더니 “지금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과 같이 있습니다. 출발 시간에 늦지 않도록 전송할 테니 합정역 앞으로 와주세요”라고 권유해주었다.
약속한 장소로 찾아가 보니, 몇 년 전에 나고야로 찾아온 적이 있는 야마우치 후미토(山內文登: 후에 臺灣大教授)라는 청년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당시 ‘가요 114’란 회사를 운영했던 김광우 씨를 소개 받았다. 또 당시 서울대학교 강사였던 장유정 씨(현 단국대학교 교수)도 소개받았다. 장 선생은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대중음악 분야로 문학박 사를 받았다고 했고, 그 학위논문을 주셨다.
속편과 개정판 간행을 즈음하여
2006년 1월 어느 날, 이준희 씨에게 연락이 왔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가수 이난영의 묘를 고향인 목포로 이장하기로 결정되어서, 3월 에는 기념행사도 하고 CD를 제작하기로 기획하고 있는데, 음원을 제 공해주시길 바란다는 요청을 했다. 목포엔 언젠가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에, 곧 CD-R 3장으로 정리해 보내주었다.
어느덧 행사 당일이 다가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셔틀버스로 김포 공항으로 가서 국내선으로 광주공항에 도착한 다음, 목포행 버스로 갈아탔다(버스 안에서 휴대폰을 빌려주신 아저씨를 만난 일도 잊을 수 없는 고마움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날 밤에는 호텔에서 이준희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속 편의 구상과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예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외나무다리>라는 노래가 속편에 들어가 야 하는지 물어봤다. 몇 년 전에 TV로 처음 들었는데, 관객들이 함께 콧노래로 따라 부르던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준희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들어가야지요”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애창곡이었던 노래를 가요사를 쓰고 있으면서 도 모르고 있었다. 평소에 ‘숨겨진 애창곡도 소개하지 않으면 내가 쓰는 의미가 없지’ 하고 호언해온 자신의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나고야로 돌아와서 한동안 고민한 끝에 속편을 단념하 기로 마음먹었다. 이준희 씨에게도 편지를 보내 내 뜻을 알렸더니 곧 답장이 왔다. “1980년까지의 가요통사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꼭 성사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그런데, 그해 10월 30일 저녁, 안동림 선생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속편은 완성되었나요? 10분 후에 ○○출판의 박 씨라는 편 집자한테서 연락이 갈 터이니, 잘 상의해서 계약하세요”라는 말씀이 었다. 안 선생이 강남에서 성북으로 이사가신 후로는 오랫동안 뵙지 못하고 있었는데, 속편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편집인 박 씨에게 전화가 오기까지 시간적 여유 가 없으므로, 시급히 이준희 씨에게 연락을 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모 든 일을 맡기겠으니 협력해달라”고 요청하자,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숙원이던 개정판도 실현되다!
그날부터 두 달 반 동안 원고를 다시 총 검토해서 이듬해 1월 중순 에 서울로 보냈다. 동시에 이대로 진행된다면 전편의 개정판도 함께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2007년 3월, 이준희 씨가 나고야의 우리 집을 찾아왔다. 오 사카 근교 센리(千里)에 있는 국립민족학박물관(國立民族學博物館)에서 열리는 (1945년 이전의) 동아시아 레코드 음반에 대한 심포지엄에 초청
을 받아 일본에 온 것이다(며칠 후, 필자도 참가). 그때 필자는 그간 급히 가필 수정한 전편의 개정판 원고를 이준희 씨에게 넘겼다. 생각지도 않은 ‘부담스러운 선물’에 당혹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이준희 씨가 서울로 돌아간 후, 편집자 박 씨를 만나 원고를 넘겼다 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연락이 없다 고 했다. 마침 필자가 서울을 가게 되어 박 씨를 만나 물어보니, “이 책은 내가 직접 편집을 맡고 싶었는데, 다른 출판사로 옮기게 되어 아쉽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서, 그냥 원 고를 돌려받았다. 아무래도 필자와 이준희 씨가 모르는 차원의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선생께 여쭈어보았더니, ○○사 측에서 인세 문제로 필자에게 너무 불리한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화가 난 안 선생이 거부해서 결국 백지 화되었다고 했다. 안 선생은 미안한 마음에 필자에게 연락을 못했던 것 같다.) 그날, 박 씨와 헤어지고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진옥섭(陳玉燮) 선생 에게 연락을 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진 선생의 저서 노름마치가 나 오기 직전이었는데, 동명으로 기획하여 반향이 컸던 공연무대에서 들 려준 음악을 편집하여 만든 前無後無ⅠⅡ CD-R 2권을 주셨다. 이때 진 선생에게 이준희 씨를 소개했고, 이것이 두 분의 첫 만남이었다.
○○사에서 돌려받은 원고는 마침 이준희 씨의 대학 후배가 설립한 출판사 미지북스에서 간행해주기로 했다. 그로 인해 이준희 씨는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개정판 원고는 현암사판 책을 복사해서 수 정할 부분을 빨간색 볼펜으로 가필한 것이었기 때문에, 책 한 권 분량 의 원고를 직접 교정보며 컴퓨터 자판으로 쳐야만 하는 결과가 되었 던 것이다.
게다가 수정한 부분이 복잡하게 끼워져 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
국가요사 자료연구의 이름난 존재가 된 이준희 씨가 적절하게 배치하 고,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수정해준 곳도 여러 군데이다.
2009년 3월 18일에 한국가요사 1(1894~1945)과 한국가요사 2 (1945~1980)가 시리즈로 간행되었고, 그날 밤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진행은 이준희 선생이 사회를 보고, 후반부는 진옥섭 선생이 맡았다. 나고야, 도쿄, 아키타 등지에서 온 친구들과 이중훈(李重訓) 영남대 교수를 비롯하여 약 60명의 선생들이 참석해주 었으며, 주니치신문 서울지국 후쿠다(福田要) 기자가 쓴 관련 기사가 나고야에서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날 필자는 안동림 선생께 “15년의 숙원이 이제야 이루어 졌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