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 October 2007
JERUSALEM COLUMN
Israel Today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나사렛
파(초기 기독교), 열심당 등 다양한 종파 를 아우르던 1세기의 유대교가, 성전 파 괴 이후(70년)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한 랍비 유대교로 획일화된 과정은 이미 언 급한 바 있다. 국가를 잃고 전 세계로 흩 어진 디아스포라 상태에서 소수민족으 로 전락한 유대인들은, 랍비 유대교의 전 통을 보다 관료화/획일화시킴으로써 스 스로를 지키며 정체성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의 정신사도 살아있는 생물인지라, 랍비 유대교의 권 위에 도전했던 ‘반항의 역사’가 크게 3차 례 있었다. 첫 번째 반항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기독교’로서 이는 일찌감치 종파 에서 분리시켜 이교도와 같이 정죄함으 로써 탈무드주의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잔틴 제국 속의 유대인’을 다 룬 지난 칼럼에서 이 부분에 대한 언급 이 있었고, 기독교와 유대교의 도전과 응 전의 역사는 본 시리즈 칼럼의 대 주제 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자세한 설명이 수 차례 이어질 것이다. 두 번째 반항은 중 세 시대의 ‘카발라’로서 이는 이탈의 폭 이 너무 커서 잘라버릴 수도 그렇다고 삼 켜버릴 수도 없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이 는 중세 시대의 유대인을 다루며 자세히 논할 것이다. 세 번째 반항은 오늘 칼럼 에서 다룰 이슬람 시대의 ‘카라이즘’으로 써, 이는 카라이즘 교리의 장점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그 위험성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흔히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트 혁 명과 정확히 견줄 수 있는 카라이트 혁 명은 왜 일어났으며 급속도로 퍼지던 이 혁명은 어떻게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 있 었을까?
카라이트 혁명은 무엇인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불화와 무척이나 유사한 갈등이 이슬람 시대에 유대교를 산산조각낼 뻔했다. 탈무드의 신앙과 헬 레니즘의 이성주의는 이슬람 세계에서
마호메트의 관용 속에서 잘 융화되어 유 대 종교문학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정신 적 조화로까지 승화시키는 데는 실패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16세기 프로테스탄 트 혁명과 유사한 카라이트 혁명이 8세기 에 일어나 무려 700년간 그 세력을 떨쳤 다. 그러나 개신교와 카라이트 혁명의 큰 골격은 무척 흡사했지만 그 방향은 전혀 달랐다. 종교개혁기에 가톨릭은 신교도를
‘카라이트’라 부르며 이단으로 정죄한 것 이 그 유사성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라 할 것이다.
후스(1415)와 사보나롤라(1498)의 사 형이 루터의 도래를 예고했듯이, 랍비주 의에 반대한 2명의 가짜 메시아의 사망 은 카라이즘의 지도자 아난 벤-다비드의 출현을 촉진했다. 기
독교에서는 가톨릭 의 반대 개혁이 너 무 늦어 구교와 신교 의 최종적 분열이 불 가피했지만, 유대 랍 비는 카라이즘의 타 당한 개념들을 재빠 르게 수용하고 랍비 주의의 악습을 뜯어 고침으로써 카라이 즘의 늦지만 그러나 자연스런 소멸을 유 도했다.
카라이즘은 바벨 론의 도시 유대인에 항거하는 시골 유대 인의 저항에서 시작 되었다. 그들에게 탈 무드주의는 도시 랍 비들이 축적한 현학 적 지식의 축적에 불 과하며 해괴망측한 말장난 그 이상도 이 하도 아니었다. 카라 이트들은 탈무드의
복잡한 해석보다는 모세오경의 단순함과 명백한 의미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고, 탈 무드 랍비들은 대중들을 모세오경으로부 터 분리시키는 해악한 존재로 보았다. 히 브리어로 ‘읽다’를 뜻하는 ‘카라’에서 온
‘카라이즘’은 흔히 ‘성서주의’로 번역될 수 있다. 가톨릭의 비성서적 전통에 맞 서 ‘오직 성경으로’를 외치며 분연히 일 어난 프로테스탄트 혁명도 ‘성서주의’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사형을 당하며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한 후스와 사보나 롤라와 같은 선각자가 유대교에도 있었 으니, 이들은 카라이트의 출범을 알리는 모반의 역할을 감당한다. 신비 속에 싸여 후세에 이름도 전해지지 않은 첫째 인물 은 700년에 출현해 탈무드와 아울러 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