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문명은 서유럽 문화의 뿌리다. 로마제국에서 모더니 즘까지 서유럽 문화는 그리스 문명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를 반복했다. 사람들이 그리스 문명에서 주목한 건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였다. 하지만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 간의 이성과 합리주의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그리 스는 어떤 철학과 사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단지 그리 스 신화의 배경이 됐다. 이런 전환의 시간에 니코스 카잔차 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는 「그리스인 조르바」
(1946)를 비롯한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을 쓰고 공공복지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 두 차 례 지명됐다. 1902년 아테네 대학에 입학한 뒤 카잔차키스 는 그리스를 순례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에 대한 심서를 이렇게 썼다.
“나는 젊은 여인의 얼굴에서 노파의 얼굴을 읽으려는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리스라는 이 름의 노파 얼굴에서, 이제는 사라져 버린 소녀의 생기와 젊 음을 다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이 끝 날 즈음, 내 눈은 그리스로 가득 찼다. 투쟁을 방불케 하는 그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인식, 그리스의 업적은 아름 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이었다는 깨달음이었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옮긴이의 말(453쪽)
인간을 위한 집, 신전(神殿)
나의 그리스 여행이 이런 복잡다단한 흐름을 확인하기 위 함은 아니었다. 그저 쪽빛 지중해와 작렬하는 태양에 빛나 는 신전들을 직접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스 문명에서 신 들은 서로 사랑하며 자주 다퉜고 심지어 질투도 했다. 신들 은 초월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인간사를 대표하는 유형에 가 까웠다. 신전을 지을 때도 신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 리스 신전은 신이 머물거나 현현했기 때문에 지은 집이 아 니라 그리스인들이 신을 머무르게 하기 위해 지은 집이었 다. 그곳에서 그리스인들은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이며, 때에 맞춰 올림픽 경기를 개최했다. 그들에게 신전은 생활 과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의 수많은 신전은 신 의 흔적이 아닌 그리스인들의 흔적인 셈이다.
그리스 신전을 대표하는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은 아 테네 어디에서나 보였다. 파르테논 신전으로 다가가자 ‘판 아테네 길(Panathenaic Way)’이 고대 아고라에서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까지 연결돼 있었다. ‘판아테 네 길’은 그리스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들을 연결하는 이동 경로이자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된
그리스 신전 중 가장 유명한 파 르테논 신전
아테네를 상징하는 도시의 축이다.
하지만 아테네에서 고대의 흔적은 현대의 급격한 도시화 로 만들어진 급조된 모습과 병치돼 있을 뿐 어떤 관계도 이 루고 있지 않다. 고대 유적은 건물의 잔해로 남겨져 있고 그 외 부분에는 무미건조한 시멘트 건물만 도열해 있다. 도시 패턴에서도 고대 유적은 반복되는 블록 사이에 고립된 영역 으로 남겨져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흔적 이후 약 1500 년간의 흔적은 증거인멸을 위해 누군가 급하게 잘라놓은 영 상처럼 아테네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척박한 풍토를 이겨내기 위한 합리적 이성
아테네 외 다른 지역의 고대 유적지를 찾아가는 동안 펼쳐 지는 그리스의 풍토는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세계사 시간 에 배운 풍요로운 땅에서 문명이 발생한다는 공식을 그리스 문명에는 적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리스인들 은 얼마 남지 않은 나무마저 잘라 사용했고 그 결과 기원전 8세기 전후에는 토양이 파괴되어 식량조차 얻을 수 없는 척 박한 땅이 됐다고 한다.
결국 그리스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밖으로 눈을 돌렸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스 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중시했고 자연 현상에서 신의 역할 을 배제한 채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리스인 들이 만들어낸 문명은 이전의 여러 문명들과 달랐다. 그리 스와 가까운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경우만 봐도 문명은 절대 권력의 엄혹한 통제하에 발전했다. 모든 사고와 사상은 왕 문학과 공간 16
과 종교 아래 있었고 이를 발현한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었 다. 고통스러운 현세를 잊기 위해 내세 사상이 발달한 이유 도 이 때문이었다. 반면, 그리스에서 인간은 신이 정한 운명 에 맞섰다. 심지어 신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 부단히 노력했고 그중 몇 명은 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그리스인들의 능력은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 한 뒤 일어난 분열과 로마제국으로의 편입 과정을 겪으면서 고대 아고라와 주변 아테네의 도시풍경 고대 아고라의 판아테네 길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유적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유적과 아크로폴리스
두뇌 유출로 인한 사회 공동화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 현 학자를 동경했던 로마제국의 오현제(五賢帝)가 아테네에 하 드리아누스 도서관을 짓고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완공한 이유도 그리스로 사람들을 다시 모으기 위함이었다.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쓴 가장 희망찬 작품
그리스의 영광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1453년 난공불락 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면서 그 리스가 속한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고 1832년 런던 의정서가 체결되기 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그사 이 그리스의 지식인들은 서유럽으로 대거 이주해 르네상스 를 비롯한 여러 문명의 기반이 됐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은 계속됐다. 심지어 제1차 세 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국왕과 총리로 그리스 정계가 분열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에는 이탈리아 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곧바로 독일군에게 전 국토를 점령당했다.
이때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아이기나(Aegina)1) 섬에 감금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겨울 50만 명이 사망하는 대기 근이 덮쳤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카잔차키스 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쓰고 희곡 「붓다」를 퇴고했으며, 「일 리아스」를 현대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인물이 등 장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화자로 그의 친구가 “대가리에 잉 크를 뒤집어쓴 채 종이를 씹으면서 얼마나 더 있겠다는 것 인가?”(10쪽)라고 조롱할 정도로 책과 글에 파묻혀 사는 서 생이다. 두 번째 주인공은 “냉소적이면서도 불길같이 섬뜩 한 강렬한 시선”(16쪽)으로 처음 만난 화자를 쳐다보는 알렉 시스 조르바다. 화자에게 조르바의 첫 인상은 “헌털뱅이 같 은 친구”, “뱃사람 신드바드” 같았다. 소설은 화자와 조르바 가 크레타에서 갈탄광 채굴 사업을 벌이는 7개월간의 이야 기를 담고 있지만 구성이 탄탄하지는 않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쓰기 전인 1914년 카잔차키스는 아 토스산에서 벌목사업을 했었다. 그리고 벌목꾼 요르기오스 조르바스라는 인물을 감독관으로 고용했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집필 과정을 “조르바의 죽음에 푸닥거 리”를 하는 행위에 비유했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소설 속 화 자는 카잔차키스 자신을, 조르바는 조르바스라는 실제 인물 을 상정해 두고 글을 썼다고 짐작할 수 있다.
카잔차키스는 아이기나 섬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 라봤을 에게해를 소설 속 화자를 통해 “바다, 가을의 따사로 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裸身)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 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해 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라고 묘사 했다. 그리고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
1) 그리스의 아티카반도와 펠로폰네소스반도 사이에 도리아인이 세운 도시 국가. 해상 무역을 크게 발전시켜 아테네의 경제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기원전 7세 기 중반에 그리스 최초의 화폐를 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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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를 헤쳐나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쉬 천국에다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좋아한다.”(26쪽)라고 밝혔다.
훗날 카잔차키스의 아내 엘레니 사미우(Eleni Samiou)는 힘 들고 기아의 시기에 카잔차키스는 가장 유쾌한 작품을 썼다 고 회고했다.
아폴론적인 인간과 디오니소스적인 인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두 주인공 간의 대화는 상반된 성격 만큼이나 언제나 격하게 충돌한다. 비가 오는 날 화자와 함 께 산책하던 조르바는 울타리 곁에 갓 핀 수선화 한 송이 를 꺾으며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 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화자가 읽은 책에는 뭐라고 쓰여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화자는 조르바가 즐겨 쓰는 표현 을 사용하며 “악마나 물어가라고 합디다. 당신 말마따나.
딴 건 없어요.”라고 답한다. 그러자 조르바는 화를 내지 말 라는 당부와 함께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 를 면할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니까……. 우리가 당신을 제대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140쪽)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둘 간의 충돌은 대개 화자가 조르바의 인생관과 삶의 방식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끝난다. 대표적으로 조르바가 책에 쓰여 있는 조국이라는 그 엉터리 수작을 모 두 믿느냐고 반문하며,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 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라 고 말했을 때, 화자는 조르바를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화자 와 달리 조르바는 “살과 피로 싸우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 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330쪽)처 럼 보였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이성을 중시하며 규범에서 벗 어나려 하지 않는 화자는 그리스 문명에서 아폴론적인 인물 을 상징한다. 반면 충동적이고 나의 믿음에만 집중하며 지 금 당장을 즐기려는 조르바는 디오니소스적인 인물이다. 아 폴론Apollon은 태양의 신이자 이성의 신이다. 디오니소스 Dionysus는 포도주의 신이자 기쁨과 황홀경의 신이다. 그리 스 문명을 대표했던 아폴론은 제우스(Zeus)와 레토(Leto) 사
이에서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와 쌍둥이로 태어났 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의 아내 헤라(Hera)의 방 해로 아이를 낳을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던 레토는 정처 없이 바다를 떠다니던 바윗덩어리였던 델로스(Delos)에서 쌍둥이 남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았다. 이후 델로스 는 바다의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성지가 됐다. 청년이 된 아폴론은 델포이(Delphi)에 도착해 그곳을 지키고 있던 큰 뱀 피톤(Python)을 화살로 죽이고 신전을 세웠다. 아폴론 의 신전이 있는 델포이는 아테네인들의 존경을 받는 그리 스 최고의 성지가 됐고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델포이를 찾는다.
반면, 아폴론의 고향 델로스는 그 위치조차 알고 있는 사 람이 드물다. 델로스는 해외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휴 양지인 미코노스(Mykonos)에서 배를 타고 30분을 더 들어 가야 한다. 관광 성수기 때 미코노스는 우리에게 이온 음료 와 에어컨 광고로 익숙한 그리스 섬의 풍경을 보여주지만 그리스 섬의 전형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미코노스
태양의 신이자 이성의 신 아폴론의 고향 델로스
델로스는 고대 유적이 돌무더기처럼 쌓여 있을 뿐이다. 그 러나 기원전 5세기 델로스는 델로스 동맹의 본부로 3만 명 이 거주했던 에게해 최고의 도시였다. 그리스의 신전이 신 의 흔적이 아닌 인간의 흔적이라면 델로스에 있는 아폴론 신전도 기원전 15세기 델로스에 정착해 전성기를 이룩한 미 케네2)인들의 염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돌무더기만 남은 델로스의 풍경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가 의심받기 시작 한 이후 서양 철학에서 물러난 그리스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
카잔차키스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삶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 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확실하게 알고 있 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 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93쪽)
끼기도 했다. 하지만 극심한 고난의 시기에 쓴 「그리스인 조 르바」에서는 장폴 사르트르나 알베르 카뮈와 같은 실존주의 자들의 영향이 느껴진다. 사전에서 정의하는 실존주의는 19 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이나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개인 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지식 인들과 예술가들이 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과 실증주 의에 반대한 이유는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발견한 이성과 합리주의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강대학교 김욱동 명 예교수는 실존주의가 “추상적이고 거창한 체계적인 철학 이 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지칭하 는 편리한 꼬리표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적하며, “실존주 의는 먹물 냄새 풍기는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땀 냄새 물씬 풍기는 구체적이고 극적인 삶에 대한 견해이자 태도”라고 설명했다(김욱동 2018).
화자가 죽은 부불리나(Laskarina Bouboulina)를 잊었느 냐고 조르바를 몰아세우자 조르바는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 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394쪽)라고 답한다. ‘조르바주의(Zorbatism)’라는 단어가 있 을 정도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조르바 의 인생 철학에 빠져든다. 그리고 몇몇은 카잔차키스의 고 향 크레타(Creta) 섬을 방문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적 힌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과정 을 통해 그들은 삶의 굴레에서 해방된 자유를 찾고자 한다.
하지만 카잔차키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현재의 삶 을 자유롭게 살아가라’라기보다는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며
‘비록 꽃길이 아니더라도 당신에게 주어진 지금의 삶을 묵 묵히 살아가라’이다.
2)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반도 동북쪽에 있던 고대 도시. 미케네 문명의 중 심지로 번영하였다. 19세기 말기에 슐리만이 그 유적을 발굴하였다. 아가 멤논의 왕궁, 분묘지가 있다.
참고문헌
니코스 카잔차키스. 2009. 그리스인 조르바(신판 5쇄). 파주: 열린책들.
김욱동. 2018. 조르바를 위하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삶과 문학. 서 울: 민음사.
크레타 섬에 있는 카잔차키스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