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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베 이나조·량치차오·신채호의 무사도·화랑도 수립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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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베 이나조·량치차오·신채호의 무사도·화랑도 수립 비교 연구*

11) 최 형 욱**

❙국문초록❙

근대 전환기 서세동점의 시기에 한중일 삼국의 민족주의·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우승열패·적자생존의 엄혹 한 시대환경 속에서, 전파자/가해자인 서구의 정신문화는 물론이고 수용자/피해자인 한중일자신의 정신문화 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대체로 민족주의적, 심지어 군국주의적인 경향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부국강 병을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을 찾고자 노력했다.

한중일 지식인들은 무엇보다 국민·국가 – 국민성·국가정신을 수립하고 유지하려는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 었다. 간략히 정리하면, 사회진화론 → 민족주의·계몽주의 → 국민성담론 → 국혼론의 사유흐름 속에서 이상 적 국민성을 모색하며 특히 상무정신을 고취하고자 했고, 이때 그 표상으로서 무사도·화랑도를 수립하고자 했다. 무사도·화랑도는 한중일이 전환 또는 위기의 국면을 맞아,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부터 만들어가며 이 를 어디로 어떻게 이끌고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지식인들의 해답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무사도·화랑도의 수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성과를 거둔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본의 니토베 이나조, 중국의 량치차오, 한국의 신채호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근대 전환기 또는 수난기에 국가를 부국강병 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진취적이고 강건한 리더십과 그것이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보편적으로 내면화되는 것 이었다. 이에 자국의 고대 역사·인물로부터 그 모범을 추출하여 정립하고, 자신들의 문학가·사학자·언론 인·교육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대내외적으로 선전·계몽하는 데 진력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그것이 이미 상당히 진행되고 이미 군국주의적 성과도 이룬 일본의 경우는, 무사도론을 통해 그 기제와 자신들의 성과 를 대내외적으로 설명하거나 과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한창 절실하게 필요성을 느낀 한중의 경우는 개념을 재구하고 계몽·선전하는데 힘썼다는 점이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무사도·화랑도론은 민족주의 기반 위에서 계몽주의와 군국주의를 결합시킨 산물로서의 한계가 있지만, 니토베·량치차오·신채호 등 선각자들도 한창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매몰 되어 전혀 여유가 없었고, 특히 량치차오·신채호의 경우는 국가적으로 참담한 수난을 당하는 입장에서 현실 적 고려가 우선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주제어] 무사도, 화랑도, 니토베 이나조, 량치차오, 신채호, 상무정신, 국민성

* 이 논문은 2016년 한양대학교 공자아카데미 학술연구비 지원으로 이루어졌음.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chw@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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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서 론

Ⅱ. 근대 한중일 무사도·화랑도 수립의 사유배경

Ⅲ. 근대 한중일 무사도·화랑도의 내용 및 논의의 전개

Ⅳ. 근대 한중일 무사도·화랑도의 의의 및 계몽노력

Ⅴ. 결 론

Ⅰ. 서 론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은 서로에게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주곤 한다. 근대 서세동점의 시기 에, 순서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피동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겪게 되면서, 전통의 계승과 서구의 수용 문제를 중심으로 유사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고, 또 다소간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한국보다 일 본·중국이 먼저 서구와 충돌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이나 관념들은 다시 한국에 또는 서로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중일의 지식인들은 격동의 전환기에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어디로 어떻게 이끌고 나가야 할지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했다. 특히 계몽·개화·유신·자강·애국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진보 성향의 지식 인들을 중심으로 전파자/가해자인 서구의 정신문화는 물론이고 수용자/피해자인 한중일1) 자신의 정신문화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고, 대체로 민족주의적, 심지어 군국주의적인 경향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부 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을 강구했다.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의 문장 가운데 그러한 문제의식 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부국강병 할 수 있으되, 현재 군은 강하나 나라가 아직 부유하지 못한 경우가 러시아요, 부국강병 할 수 있으되 현재 나라는 부유하나 군이 아직 강하지 않은 경우가 미국이다. 부국강병 할 수 있으되 현재 나라도 부유하지 못하고 군 또한 아직 강하지 못한 경우가 중국이다. 이 세 나라는 20세기 세계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들이다. 러시아가 장차 반드시 부유해지고, 미국군이 장차 반드시 강해질 것임은 어림짐작할 수 있는 문제다. 중국이 장차 빈약함을 종식시킬 것인지 아닌지는 확정하기 어려운 문제다.……(중국이) 빈궁하고 허약한 것은 반드시 어떤 마귀가 있어서 중간에서 훼방을 놓고 우롱하 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오직 마귀의 소재를 찾아 제거해야만 한다. 20세기의 무대가 장차 우리 국민 의 전유물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2)

1901년 12월경 발표한 글이다. 분명 민족주의, 심지어 군국주의적 한계성이 보이지만, 편협한 지배논리·

1)일본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일찍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전파자/가해자와 수용자/피해자의 입장을 이중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富國强兵」, 󰡔飮冰室自由書󰡕, 󰡔飮冰室專集󰡕 之二, 80(량치차오 원문의 인용은 󰡔飮冰室專集󰡕과 󰡔飮冰室文集󰡕으로 이루어 진 󰡔飮冰室合集󰡕, 北京中華書局, 1936年影印本을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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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주의라고 하기 보다는 향후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며 한 국가·국민의 지도자로서 일종의 자기반성 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성과 그에 따른 노력으로 도출된 중요한 해법 중 하나가 ‘무사도’의 수립이었다. 본론에서 자세히 논의하 겠지만, 량치차오는 당시 중국을 허약하게 만든 ‘마귀’ 즉 ‘부국강병’ 하지 못하게 한 원인에 대해 국민들의 정신문화가 나약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성이 열악한 점이며, 특히 국민성을 이루는 여러 속성 중 상무정신과 같은 강건한 속성이 결여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구 및 일본을 벤치마킹하고 동시에 중국 고대의 정신문화도 궁구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이상적 국민성 속성인 상무정신에 대해 상세히 논의하고, 그 표상으로서 ‘중국의 무사도’를 수립하고 계몽·선전했다.

비슷한 시기 국가가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감에 따라 한국의 애국계몽지식인들도 량치차오의 문제의식 을 공유했다. 특히 신채호가 량치차오와 마찬가지로 무사도에 해당하는 화랑도 수립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그 구현에 힘썼다.

일본의 경우는 고대로부터 무사도의 개념이 다양하게 변화발전 해왔고, 근대 전환기에 다시 적극 활용하여 국가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때문에 한중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 다고 볼 수 있으나, 민족주의·군국주의적 목적의식 하에 무사도에 큰 관심을 기울인 점은 마찬가지였다.

한중일 지식인들은 넓은 의미에서 같은 목적의식 하에 무사도·화랑도 관련 저술이나 창작을 하고 이를 통해 계몽과 교육에 힘썼다. 한중일에서 무사도·화랑도 문제에 노력을 기울이고 큰 성과를 보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본의 니토베 이나조, 중국의 량치차오, 한국의 신채호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근 대 전환기 또는 수난기에 국가를 부국강병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진취적이고 강건한 리더십과 그것이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보편적으로 내면화되는 것이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당시 그것이 이미 상당히 진행된 일본의 경우는 무사도론을 통해 그 기제와 자신들의 성과를 대내외적으로 설명하거나 과시하는 데 중점을 두 었고, 한창 절실하게 필요성을 느낀 한중의 경우는 개념을 재구하고 구현하는데 힘썼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제와 관련된 국내 기존 연구들 중에는 한중일 상호 관련성 연구 측면에서 특히 박찬승의 「근대 일본·중국의 ‘武士道’론과 신채호의 ‘花郞’론」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또 이로부터 계몽의 강렬한 목적 의식 하에 ‘중국의 무사도’ 수립을 체계적으로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한중일 간 관련성 면에서 일종의 중간 고리 역할을 한 셈이 된 량치차오의 주장에 대해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을 하고, 나아가 삼국 무사도·화랑도 수립 문제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중화권에서도 무사도·상 무정신 관련 연구가 많이 나오고 있으나, 동아시아담론의 틀 속에서 연구된 것은 찾기 힘들다.

이에 본 연구는 니토베 이나조·량치차오·신채호 3인의 논의를 중심으로, 근대 한중일 무사도·화랑도 수립의 배경·내용·의의와 관련성 측면 등에 초점을 맞추어 세밀한 연구를 하고자 한다. 본 연구를 통해 근 대 전환기에 나타난 한중일 삼국 문화담론 양상의 일단을 이해하고, 나아가 삼국의 근대적 변화에 존재하고 있는 상호 관련성 및 미세한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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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근대 한중일 무사도·화랑도 수립의 사유배경

근대 한중일 지식인들의 사유체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서구 사상으로는 무엇보다 사회진화론을 꼽 을 수 있다. 그들로 하여금 당시 우승열패·약육강식의 세계질서를 설명하고 나아가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하는 근본 기제로서 적극 수용되고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중일에서의 수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일본에서 진화론은 1880년 무렵 미국인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 발표된 지 약 20년만이다. 생물진화론 보다는 사회 진화론이 주류였고, 그 대표적인 학자는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1836~1916)였다. 유럽에서처럼 사회진화 론이 일본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 점이 중요하다.3) 일본에 군국주의에 입각한 천황제 제국주의 국가 존립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한중에서 사회진화론은 우선 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하는 명분과 이론으로서 수용되었다. 중 국에서는 1896년 옌푸(嚴復:1854~1921)에 의해 소개되었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를 번역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天演論󰡕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역자 자신의 평어를 통해, 역시 민족주의·계몽주의적 정치 의도를 피력한 점이 두드러진다. 양무운동·청일전쟁 등 경쟁에서 잇달아 실패한 현실에서 우승열패의 기제와 신화는 보수 세력에 대항하고 국민을 계몽하려는 維 新思潮에 ‘優勝’을 위한 변혁 추구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배경논리로 작용했다. 이에 중국에서 사회진화론의 전개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극복으로부터 출발하여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색채를 띤다. 특히 유신파의 탁 월한 계몽선전가인 량치차오에 의해 널리 전파된 점도 두드러진다.

한국은 아예 제국주의에 의해 국권을 유린당하는 처지에서 중국보다 더 피동적이고 파행적인 근대화의 과 정을 겪으면서 사회진화론의 영향도 더 크게 받았다. 역시 국가와 국민을 구원할 수 있는 이른바 민족실력양 성운동 등 계몽주의 및 민족주의적 사고의 형성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일본과 미국을 통해서도 수용되었 지만, 상당 부분 1900년대 초 󰡔飮冰室文集󰡕 등 량치차오의 저작을 통해서 수용되었다. 한중의 유구한 교류 전통, 동병상련의 현실, 량치차오가 조선에 대해 동정했던 점, 지식인들이 일어나 영어보다 한문에 능통했던 점 등이 작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4) 가토 히로유키의 󰡔人權新說󰡕도 번역·소개되었으나 조금 늦은 1908년 의 일이었고, 량치차오의 저작보다 반응이 크지는 않았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하고 나아가 제국주의를 선망하는 사유구조도 중국에 보다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97년 초 량치차오가 처음 조선에 소개된 이후,5) 그가 서구 학술사상을 수용하고 계몽의식을 고취한 수 많은 저술들이 언론에 소개되거나 번역·출판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량치차오의 주장에 공감 함은 물론 간접적으로 서구사상을 접하기도 했다. 申采浩·朴殷植·張志淵·洪弼周·周時經 등 계몽주의 성

3) 최기영, 󰡔한국근대계몽사상연구󰡕, 일조각, 2003, 20쪽 참고.

4) 최형욱, 「조선의 梁啓超 수용과 梁啓超의 조선 인식」, 󰡔韓國學論集󰡕, 45,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2009, 337쪽 참고. 5) 葉乾坤, 󰡔梁啓超와 舊韓末 文學󰡕, 법전출판사, 1980, 117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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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의 지식인들이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신채호(1880~1936)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량치차오처럼 역사 가·문학가·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학술·문학·언론 및 사회문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여러 저술을 통해 보면, 사상체계의 기반이 되는 사회진화론 및 연계선상의 민족주의·계몽주의 주장은 량치차오의 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아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위와 같이 한중일에서 가토 히로유키·량치차오·신채호 등을 중심으로 사회진화론이 성행하게 되었고, 다시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사회·문화 제 방면의 다양한 논의들이 제기되었다. 이때 사회진화론은 태생적 으로 민족주의·계몽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국민·국가의 역량을 강화하거나 열악한 상 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연히 국민의 국민성담론과 국가의 정신론(국혼론) 등 정신문화에 대한 논의가 상호 관 련 하에 전개되었다. 국민성·국혼은 국민·국가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국민성담론·국혼론은 상위의 민족주의·계몽주의와 연결되고, 궁극적으로는 다시 사회진 화론에 맥이 닿아있다. 한중일의 민족주의·계몽주의 성향 지식인들이 국민성·국혼에 대한 인식과 개조론 주장에 공력을 기울인 배경이다. 다만 리디아 리우가 ‘국민성의 신화’라는 개념 하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서 구 국가들은 제국주의의 팽창과 세계 지배를 해명하기 위해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하며 국민성담론 을 전개한 반면, 한중일은 근대 전환의 과정에서 뒤쳐진 국민국가 건설의 이론을 만들기 위해 수용하고 재구 성했다.6)

여기서 국민성(National Character)이란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성원 즉 국민들에게 공통되는 인성(人性:

Personality)·가치관·사고방식·행동양식·기질 따위의 특성을 가리킨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긍정적 하위 속성으로 애국심·독립심·모험심·진취성·인내력·근검절약성·이타심 등과 부정적 하위 속성으로 노예근성·기만성·이기심 등을 포괄한다. 일반적으로는 대다수 국민들이 공유한 성질 그 자체를 표명한 가 치중립적인 것들이라기보다는 일정한 시각과 의식이 개입된 대립적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서구는 우월의식 또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반면에 한중일은 정치적·계몽적 목적의식 하에 국민성에 대해 논의해왔다. 이에 한중일에서는 주로 각자 국민성의 여러 속성들 중에서 긍정적인 속성들을 강조하고 부정적 속성들을 배제하여 이상적인 국민성으로 개조하고자 했고, 이는 삼국 계몽주의운동에서 매 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때, 위와 같이 긍정적인 속성들이 많이 있지만, 특히 당시 민족주의를 넘어 민족 제국주의·군국주의 경쟁이 확산되던 세계정세 속에서,7) 강자는 강자대로 우위의 힘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 해, 약자는 약자대로 강자의 힘의 압박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한 대안으로서 ‘상무정신’을 강조했다. 국가를 지켜낼 수 있는 가장 강인하고 구체적인 국민성 속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중일에서 이 상무정신의 표상으로서 바로 무사도·화랑도8)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사실 무사도·화랑도 는 상무정신과 같은 층위에 있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량치차오의 경우를 예로 들어 간략히 정리해보고

6) 리디아 리우(), 민정기(), 󰡔언어횡단적 실천󰡕, 소명출판, 2005, 96~102쪽 참고.

7)신채호도 二十世紀의 世界는 軍國世界임을 한탄한 바 있다(「二十世紀新國民」, 󰡔단재신채호선생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219).

8) 화랑도는 한국에서 무사도에 해당하는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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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한다. 우선 그도 이 낱말들을 비슷한 개념의 것[무사도(또는 兵魂)=상무정신=국혼]으로 등치시키고 혼용 했으나, 심층적으로 보면 무사도는 軍士를 포함하는 사대부 즉 지도층이 지녀야 할 忠·義·勇 및 희생정신 등 도덕체계를 의미했다. 그 다음으로 이것이 일반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확산되어 보편적인 정신으로 발현되는 것이 상무정신이다. 또 나아가 이 상무정신이라는 국민성 속성이 애국심·희생정신 또는 굳센 의 지력과 같은 다른 강인하고 적극적인 속성들과 결합하여 국가의 정신문화로 작동하게 된 것을 국혼으로 여 겼다.9)

결국 한중일은 시대적 환경과 수요에 따라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받으면서 더불어 민족주의·계몽주의를 수용하게 되었고, 그 영향 속에서 국민성담론, 나아가 국혼론을 전개했다. 이 사유흐름 속에서 이상적 국민성 을 모색하며 특히 상무정신을 고취하고자 했고, 이때 그 표상으로서 무사도·화랑도를 수립하고자 했다. 무 사도·화랑도는 한중일이 19세기 들어 서구와 충돌하면서 전환 또는 위기의 국면을 맞아, 국가와 국민이라 는 개념부터 들여오는 상황에서 이를 어디로 어떻게 이끌고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지식인들의 해 답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Ⅲ. 근대 한중일 무사도·화랑도론의 내용 및 논의의 전개

1. 니토베 이나조의 일본 무사도

본고에서 주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 전환기 한중일에서 일정한 목적의식 하에 무사도·화랑도 수립 이 진행되었던 상황이다. 그렇지만 이전 시기에도 이미 무사도·화랑도라는 용어와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으 므로, 간략하게나마 그 논의 전개과정을 함께 살펴가며 새삼 수립되는 무사도·화랑도론의 내용을 고찰해보 고자 한다.

‘무사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국가는 일본이다. 일본에서는 고대부터 ‘무사’라는 직업과 신분이 존재했 었고, 중세를 거치며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에 따라 무사들의 정신문화 및 관습에 대한 인식도 있었지만, ‘무사도’라는 용어와 개념이 제기된 것은 근세 에도시대(1603~1867)부터였다.10)

이 무렵부터 무사도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간략히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논의된다.11)첫째, 유가적 ‘士道’ 즉 전투자의 자세 외에도 인의·충효 및 인문적 인격·교양을 함께 갖춘 일

9) 최형욱, 「량치차오의 󰡔中國之武士道󰡕 저술을 통한 이상적 국민성의 기획」, 󰡔중국어문학논집󰡕115, 중국어문학연구회, 2019, 315~317쪽 참고.

10) 윤영기는 일본 무사도의 정의에 대해, “일본의 긴 봉건사회 속에서 무사에게 있어야 할 생존방식으로서, 자연 발생적으로 배양되고 그때마다 시대에 적응해서 연마되고 이윽고 (rule)’처럼 굳어진 不文不言의 윤리도덕관 – 일본 고유의 수양 정 이라고 했는데, 平易하면서도 명확하다고 생각된다(「명치시대 무사도론에 관한 일고찰」, 󰡔일본어교육󰡕86, 한국일본어교 육학회, 2018, 173). 한편 근세 초기인 江戶 前期에 지어진 軍書 󰡔甲洋軍艦󰡕에 武士道라는 용어가 처음 보인다(윤영기,

「일본의 무사도를 말한다」, 󰡔일본학보󰡕9, 경상대 일본문화연구소, 2004,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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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전인적 리더십으로서 논의했다. 야마가 소코(山鹿素行)가 대표적인 인물로 그 이론화를 시도했다. 둘째, 구체화·협의적 개념으로, 전투원으로서의 명예 관념을 가리킨다.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해 용맹 하게 처신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 등이 주장했다. 셋째, 유가적 학문 소양을 중 시하는 가운데 충성·의리·용기·명예 등의 덕목을 위주로 하여 무사가 지켜야 할 예의범절·대인관계· 마음가짐을 말했다. ‘士’의 인문적 교양, 전인적 리더십 보다는 강한 ‘무사의 정신’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앞의 두 가지를 절충한 의견12)이라고 할 수 있다. 1720년경 다이도지 유잔(大道寺友山)이 주장한 바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일본의 무사도는, 근대 전환기에 봉건체제가 해체되며 무사계급도 소멸하게 되고, 무 사는 ‘무위도식’ 집단이라는 등 부정적인 평가도 상당함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갈 수도 있었다. 그 러나 무사도는 우승열패의 세계적 패권경쟁 상황을 맞이하여 이상적 국민성 속성인 상무정신의 표상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새롭게 부여받고, 오히려 ‘무사’를 넘어 ‘국민’ 속으로 들어가며 확대되어 되살아났다.

이렇게 근대 전환기에 일본에서 먼저 무사도가 국민적 정신문화 가운데서 발전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상 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82년 「軍人勅諭」가 포고되었는데, 군인의 덕목으로 忠節·禮儀·武 勇·信義·儉素를 강조함으로써 전대의 무사도를 계승했다. 또 국민개병제에 의해 국민 모두 입대하게 됨에 따라, 무사도는 곧 군인정신이 되고 나아가 국민도덕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며국제사회의 강자로 부각되자 서양인들은 무사도를 그 원동력으로서 인식하게 되고, 일본인 스스로 도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13)

이 시기 가장 먼저 체계적 논의를 하고 이후로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이다. 그는 근대 전환기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교육자·정치인이자 국제연맹 사무국 차장을 역임한 국제인이었다. 다만 국제인이라는 평가와는 모순되게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주장을 했고, 타이완 총독부에서 관료로 근무하기도 했다. 일찍 기독교를 수용하고 미국·독일에서 유학하는 과정에서 오 히려 일본의 정체성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특히 미국 교육의 원점에 기독교적 도덕이 있듯이, 이에 상응하는 일본의 도덕이 무사도라는 점을 서구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다.14)이에 1899년 미국에서, 1900년 일본에서 영문으로 󰡔武士道(Bushido: the soul of Japan, an exposition of Japanese thought)󰡕 를 발간했다. 영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무사도를 일본의 국가 정신(soul)이자 국민적 사상(thought)으로서 과시하고자 했다.

니토베의 󰡔武士道󰡕저술 목적은 분명 민족주의적 자긍심에 입각하여 서구인들에게 일본에도 서구의 기사도 와 같은 우수한 도덕적 규범이 있다는 점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일본 미화적인 성향을 벗어날 수는

11) 자세한 내용은 구태훈, 󰡔일본 무사도󰡕, 태학사, 2005; 우치다 준조(), 윤영기 외(), 󰡔일본정신과 무사도󰡕, 경성대학교출 판부, 2012; 박찬승, 「근대 일본·중국의 武士道론과 신채호의 花郞론」, 󰡔충청문화연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2012 참조.

12) 박찬승, 위의 논문, 75쪽 참고.

13) 윤영기, 「명치시대 이후의 무사도에 관한 일고찰」, 󰡔일본어교육󰡕22, 한국일본어교육학회, 2002, 140~147쪽 및 박찬승, 의 논문 76~77쪽 참고.

14) 우치다 준조, 앞의 책, 105~107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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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지만, 일본 무사도에 내재된 유가적 요소를 강조하고, 정신문화의 특수성 보다 보편성을 중시하는 경향 을 나타냄으로 인해, 이후 다른 일본인들의 무사도론보다는 덜 국수주의적으로 보인다.15)

자세히 살펴보면, 니토베의 무사도론은 앞에서 언급한 이전 시기 일본인 스스로의 무사도에 대한 인식 중 유가적 ‘士道’ 즉 전투자의 자세를 포함하는 전인적 리더십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무사’를 넘어 ‘국민’에 게 보편화시키기에 가장 이상적인 유형이기도 하다.

물론 니토베는 유가적 요소와 더불어 神道的·佛敎的 요소도 일본 무사도의 근원으로서 중시했다.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에서 주군에 대한 忠節, 선조에 대한 숭배, 부모에 대한 효행 및 자연에 대한 숭배를 통해 국토와 황실을 극도로 존중하는 정신을 갖게 했다고 주장했다. 또 불교로부터는 삶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가까이 하는 등 편안히 운명에 맡기는 평상심의 감각을 제공받았다고 여겼다.16)

하지만 무사도는 무엇보다 도덕규범으로서 형성된 것이므로, 윤리·도덕적 교의가 매우 중요하고 따라서 孔子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풍요로운 근원이 되었다. 게다가 니토베는 孟子의 민주적이고 설득력 있는 요소 들이 무사들을 감동시켰고, 陽明學의 知行合一이나 實踐躬行의 정신도 무사도 형성에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보았다.17)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니토베는 일본 무사도의 가르침으로서 義 즉 正義, 勇氣 즉 대담함과 인내, 그리고 仁·智·禮儀·眞實·誠實·名譽·忠義·克己 등을 제시했다. 아울러 그 가운데서도 智·仁·勇을 무사도의 골조를 지탱해주는 삼각대라고 강조했다.18)

한편 니토베의 󰡔武士道󰡕와 비슷한 시기에도 무사도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특히 조금 뒤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국제무대에서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될 무렵에는 그 논의가 더욱 활발했다. 근대 이 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시 세 가지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전통적 일본 무사도를 일본정신으로 부활시키자는 ‘화혼적 무사도론’, 둘째는 전투원의 용맹한 자세를 강조하며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황 도적 무사도론’, 전인적 리더십, 보편적인 사상에 초점을 둔 ‘보편적 무사도론’ 등이 있었다.19)니토베의 논의 는 세 번째 ‘보편적 무사도론’을 대표한다. 이 보편성은 무사도로 하여금 서양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기에도 더 유리했다고 생각된다.

2. 량치차오의 중국 무사도

중국의 경우, 19세기 들어서며 내적으로 봉건체재의 이완이 극에 달하고, 외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이 극심해지며 총체적 난국을 맞이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식인들은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변화를 모색

15) 당시 급격히 국가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어 가던 일본의 무사도 논의 흐름에서는 시류에 부합하지 않았고, 이에 배격되기도 했다는 평가도 있다(유불란, 메이지 부시도(명치 무사도)’론을 통한 동아시아의 자기 정체성 형성과정 재고」, 󰡔한국정치학 회보󰡕51, 한국정치학회, 2017, 10쪽 참고).

16) 니토베 이나조(), 일본고전연구회(), 󰡔武士道󰡕, 도서출판문, 2012, 30~32쪽 참고. 17) 위의 책, 33~37쪽 참고.

18) 위의 책, 38~106쪽 참고. 19) 박찬승, 앞의 논문, 79~80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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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洋務’‘維新’‘革命’의 흐름이 그것이다. 그중 유신파 계몽주의 세력의 대표가 량치차오였다. 그는 앞 서 언급한 사회진화론부터 국혼론 까지 이어지는 사유 속에서 무사도를 논의했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 및 일본을 벤치마킹하는 가운데 특히 망명지 일본에서 한창 활발히 논의되던 위 무사도론에 관심 을 가지게 되었고, 여기에 국수주의가 더해져 고대 중국의 역사와 인물로부터 상무정신의 표상으로서 ‘중국 의 무사도’를 수립해내고자 했다.

이때 량치차오는 ‘尙武’의 관점에서 중국과 서구 및 일본의 역사를 되짚어보았다. 중국은 중간에 秦始皇· 漢高祖·漢武帝·唐太宗 등의 성취에 힘입어 대외적으로 武威를 떨치기도 했지만, 대체로 주변 이민족들 특 히 몽고족·만주족에게 완전히 굴복했던 굴욕의 역사를 겪어왔다.20) 심지어 당시에는 제국주의와 군사·과 학·기술로 무장한 서구 백인종에게 차원이 다른 침략을 받게 되었는데, 이유는 중국에 상무정신이 결여되어 매우 문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서구의 일부 국가나 민족들, 예를 들어 스파르타·독일·러시아 및 같은 황인종의 일본 등은 상무로 흥성하여 세계에 우뚝 선 모범이라고 보았다.21)

이렇게 스스로를 성찰하고 타자를 학습하는 과정을 거친 후, 변법유신 실패 이후 일본에 망명해있으면서 일본 국민들에게 새롭게 수립되어진 무사도에 감명을 받아 ‘중국의 무사도’에 천착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서는 중국에게, 1904년 러일전쟁에서는 러시아에게 승리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정 해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승리의 원동력이 상무정신–무사도에 있다고 보고 󰡔中國之武士道󰡕 저술에 까지 이 르게 되었다.

한편, 위와 같이 량치차오가 상무정신-무사도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는, 중국에 상무정신이 결여된 원 인에 대해서도 자세히 분석하여 4가지를 제기했다. 요약하면, 첫째, 오랜 기간 국가 정세가 점차 통일의 방향 으로 안정화됨에 따라 ‘重文輕武’의 경향이 뿌리 깊어졌다. 둘째, 儒者들이 유교의 도덕주의에 대해 편파적· 편의적으로 해석하며 국민을 나약하게 만들었다. 셋째, 중국 역대 왕조의 霸者들은 武로써 창업을 하지만 자 신들은 제 2의 패자를 막기 위해 文으로써 국가를 경영하고 武를 억압했다. 이러한 覇道政治로 인해 국민들 의 豪氣가 제어된 부정적 현상이 발생했다. 넷째, 앞의 여러 요소들이 장기간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중국인들 에게 武를 경시하는 습관 및 풍속이 고착화되었다. 결국 국가·국민이 구조적으로 문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22)

1903년 3~4월에 발표한 「論尙武」에 위와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곧이어 1904년 11월 발표한 󰡔中國之武 士道󰡕를 통해 ‘중국의 무사도’를 구체적으로 수립하는 과정에서는, 중국 고대에도 春秋戰國·秦韓初期를 중 심으로 이미 고유의 무사도가 있었는데 도중에 희미해져버렸다는 주장을 펼치고, 이를 재구하고자 노력했다. 위의 논의와 연계시켜 보면, 량치차오는 중국이 문약해지기 시작한 것을 대략 진한 초기 이후 국가사회가 안 정되면서 부터로 보았고, 이후 중원을 점령한 사나운 이민족들도 결국은 맥없이 동화되어버렸다고 여겼다.

20) 󰡔新民說󰡕·「論尙武」, 󰡔飮冰室專集󰡕之四, 110~111쪽 참고.

21) 위의 책, 108~110쪽 참고. 량치차오는 스파르타의 상무정신을 특히 중시하여 19027~8월 󰡔新民叢報󰡕에 「斯巴達小志」를 발표한 바 있다.

22) 󰡔新民說󰡕·「論尙武」, 앞의 책, 112~115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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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 이전의중국 역사와 인물로부터 일련의 위대한 모범들을 찾아야 하고 또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적극 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언론·문화·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문화에 경도 되었던 량치차오가 추구한 ‘중국의 무사도’는 근대 일본의 몇 가지 무사도론 중 특히 니토베의 무사도론과 유 사한 점이 엿보인다. 특히 앞서 논의한 근대 이전 일본의 세 가지 무사도 개념 중에서 첫 번째인 유가적 ‘士 道’의 개념과 가장 가까워 보인다. 다만 량치차오가 니토베의 책을 참고했다는 명확한 언급은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당시 저술한 󰡔中國之武士道󰡕에서 “일본으로부터 들어와 통용되는 명칭을 취해 󰡔中國之武士道󰡕

라 제목을 지었다.”23)라고 하거나, “무사도라는 것은 일본의 명사이다.……그 이름이 典雅하며 함의가 매우 깊고 넓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한다.”24)라고 밝힘으로써 일단 일본 무사도론의 영향을 받았음은 명백하다. 그 리고 더 중요한 점은 이 저술에서 무사도를 주로 유가적 ‘士道’ 즉 무사의 자세를 포함하는 전인적 리더십으 로서 논의한 점을 통해 볼 때, 그가 특히 니토베로부터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량치차오는 󰡔中國之武士道󰡕에서, ‘중국의 무사도’를 표상하는 인물들로서 43개 그룹의 74인을 선정했다.

󰡔史記󰡕(32회 출전)·󰡔左傳󰡕(10회)·󰡔說苑󰡕(8회)·󰡔戰國策󰡕(4회)·󰡔晏子春秋󰡕(3회) 등 총 14종의 고대 전 적으로부터 이 인물들의 ‘武’를 비롯한 ‘士道’ 관련 사적을 뽑아 기술하고, ‘新史氏曰’25) 즉 ‘새로운 사학의 학 자가 말하거늘’로 시작하는 자신의 평어를 덧붙여 그 취지를 설명했다. 조금 더 살펴보면,26) 우선 상대적으 로 많이 알려진 인물들만 순서대로 열거해도, 孔子·安嬰·伍子胥·藺相如·毛遂·荊軻·張良·項羽·樊 噲 등등이 있다. 첫 인물인 공자를 필두로 하여 軍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중국 고대에 ‘士’ 즉 지도층에 존재했던 軍士의 자세를 포함하는 士道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또 그 가운데서 상무정신이 다 른 강인하고 진취적인 품성들과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발휘되었었음을 보이고자 했다.

이를 통해 보면, 량치차오가 내세우고자 했던 무사도의 덕목들은 勇猛함이나 무예의 뛰어남 차원에만 머 무르지 않는다. 忠·孝·義·勇·仁·智·禮·誠·名譽·廉潔·克己·犧牲 등등이었고, 특히 핵심은 智· 仁·勇27)이었다. 결국 ‘중국의 무사도’의 덕목들도 인류의 핵심적인 도덕 표준을 중심으로 하고, 몇 가지 적 극적이고 강건한 덕목들을 함께 설정하여 도덕체계를 구성했으며, 유가적 요소를 가장 중요한 근원으로 삼았 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니토베의 무사도와 일맥상통함도 잘 알 수 있다.

특히 공자를, 무사도를 표상하는 첫 번째 인물로 내세운 점이 의미심장하다. 󰡔中國之武士道󰡕에서 인물에

23) 󰡔飮冰室專集󰡕之二十四, 自敍 23. 24) 위의 책, 凡例 1.

25) ‘新史氏曰이라는 표현은 신채호도 사용한 바 있다(「大東帝國史叙言」, 필사본·성균관대학교 존경각본, 󰡔단재신채호전집󰡕3 역사,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2007, 196). 참고로 량치차오가 외국의 역사를 기술할 때는 外史氏즉 외 국의 역사가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26) 더 자세한 내용은 최형욱, 「량치차오의 󰡔中國之武士道󰡕 저술을 통한 이상적 국민성의 기획」 305~313쪽에 43그룹 전체의 사적과 그 취지 정리한 부분 참조.

27) 󰡔論語󰡕·「子罕」편과 󰡔中庸󰡕20장에 보이는 유가사상의 핵심 중 하나인 三達德이다. 량치차오는 이 세 덕목을 인류의 보편 적 도덕의 표준으로 보고, 이것들이 갖춰져야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爲學與做人」, 󰡔飮冰室文集󰡕之三十 , 108).

(11)

대해 기본적으로 시대 순으로 논의를 하면서도 공자만큼은 별도로 맨 앞으로 배치하고, “첫 머리로 옮겨 신 앙으로 삼는다.”28)라고 각별히 예우했다. 이는 니토베처럼 유가의 윤리·도덕적 요소를 가장 중시했음을 의 미한다. 또한 무사도의 최고 표상으로서 공자를 내세움으로써 중국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설득력을 제 고시키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구체적으로는 󰡔左傳󰡕과 󰡔史記󰡕를 통해 공자가 문약한 사상가가 아니라 군 사의 덕목들을 포함하는 士道를 고루 갖춘 전인적 리더였음을 나타내는 사적들을 찾아내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공자는 魯定公을 위해 주로 예법에 관한 일을 보좌하면서도 武에 관한 대비도 철저히 하고, 齊나라와 의 교섭에 있어서 용맹함과 철저한 사전 준비로 임해 침탈당했던 영토를 되찾았다는 점을 내세웠다.29)

일본의 경우는 역대로 무사도 개념이 변화·발전했고 관련 논의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온 데 비해, 중국 과 한국에서는 앞서 살펴본 여러 원인으로 인해 명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이에 량치차오는 공자를 비 롯하여 중국 역사상 무사도를 표상하는 인물들을 춘추전국시기와 진한 초기까지에서 선정했다. “漢 景帝·武 帝 이래로 무사도가 소멸되었다.”30)또 “중국의 무사도는 패국정치와 서로 비롯되고 종결되었다.”31)라는 등 의 언급을 통해, 중국의 정세가 통일의 방향으로 안정화되면서 무사도가 거의32) 소멸되었다고 보고 끝없는 유감이라고 한탄했다. 선천적인 결핍이 아니라 환경에 따른 후천적 박약 또는 소멸이므로, 당연히 복원할 수 있고 시급히 복원하자는 암시이기도 하다.

3. 신채호의 화랑도

중국보다 더 심각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한 한국의 개화·계몽 성향 지식인들도 량치차오 이상으로 절박 하게 ‘상무정신 – 조선혼 – 무사도’를 고취하고자 했다. 일본의 무사도론과 량치차오의 무사도론 모두 큰 공감 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위와 같은 량치차오의 논의는 속속 한국에 수용되며 상당한 영향을 미쳤 다. 그의 저술 중에는 중화주의·제국주의적 입장에서 한국에 대해 ‘속국’ 운운하는 언사나 지나친 비판도 있 었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멸망에 대해 그가 보인 일부 동정심의 표현이나 함께 제국주의 열강에 침략 당한다는 일종의 동지의식 등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량치차오가 여러 저술에서 일제의 조선에 대한 강권을 비판했던 점도 그의 논의를 쉽게 받아들이게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 지식인들은 1900년대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 언론매체나 저술 출판을 통해, 국가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문약을 타파하고 상무의 기풍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특히 신채호는 1910년대 후반 량치차오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고찰을 거쳐 한국적 무사도인 화랑도를 시급히 수립해내고자 했고, 또 시·소설 등 문학을 매개로 화랑도에 대한 선전에도 진력했다. 신채호는 일제의 강점에 대항하는 표상으로

28) 󰡔飮冰室專集󰡕之二十四, 凡例 2. 29) 위의 책, 1쪽 참고.

30) “漢景武以還, 武士道消滅.”(위의 책, 凡例 2) 31) “中國之武士道, 與覇國政治相終始.”(위의 책, 21)

32) 량치차오는 차후 漢初 이후의 역사에서도 무사도 표상 인물을 최대한 추출하여 속편을 발표하고자 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 (위의 책, 凡例 2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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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또 중국과 구별되는 國粹로서 화랑도를 국풍 즉 조선혼의 핵심으로 보고 적극 재구하고자 했으며, 이에 특히 중일의 무사도와 성격이 다른 점에 대해 주의했다. 󰡔朝鮮上古史󰡕·󰡔朝鮮上古文化史󰡕·「朝鮮歷史上一 千年來第一大事件」·「東國古代仙敎考」 및 「考古篇」33)등 일련의 史的 논설을 통해 관련된 논의를 했고, 󰡔꿈 하늘󰡕 같은 소설작품에도 자신의 주장을 담아냈다.34)

신채호와 달리, 1920년대 식민지 한국에서는 일부 일본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화랑도의 핵심을 무사적 정 신에 두었으나, 그 원류를 무리하게 일본의 무사도 등 외적 요소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그러한 맥락 에서 화랑도는 일본의 무사도와 같은 것이므로 조선인들도 그 정신을 살려 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선전에 악용하기까지 했다.35) 아울러 해방 이후에는 화랑도가 일부 학자들에 의해 다분히 남한의 전체주의적 국가 권력 창출을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에 동원됨에 따라 학술적 연구를 심화시키는 데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했다. 신채호가 량치차오와의 관련성 속에서도 특히 한국 화랑도 고유의 특성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문화적 으로 국민을 계몽시켜 일제에 대항하고자 했던 점에 대해 심층적인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제 신채호의 화랑도 수립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하고자 한다. 기존 연구나 필자의 이전 연구를 통해 보면, 언급했듯이 신채호가 무사도–상무정신과 관련해서도 특히 량치차오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론되지만, 그 영향관계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평소 민족주의 성향에 더해 國粹를 중시한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된다. 또한 구체적인 내용면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당시 화랑도 수립의 배 경·목적·의의 및 구현노력 측면에서의 기본 논리는 량치차오의 무사도론과 유사성을 보인다.

우선 량치차오가 중국에서 후천적 원인으로 무사도의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데 대해 안타까워하고 시급 히 복원하자는 의지를 피력한 문제의식이 신채호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신채호가 화랑에 관해 논의한 저 작 중에는 의론문이나 역사 저술들뿐만 아니라 독특하게도 󰡔꿈하늘󰡕이라는 1916년 작 史談體 소설도 있다. 史書들을 참고하여 지었다고 밝힌 이 소설36)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신라의 진흥대왕이 더 큰 이상과 넓은 배포로 폐될 것을 덜고, 美와 굳셈을 더 보태어 화랑사의 신 기원을 연 고로, 永郞, 南郞의 교육이 사해에 퍼지고, 斯多含, 金欽春 등 소년의 피 꽃이 역사에 빛내었

33) 「考古篇」은 󰡔天鼓󰡕라는 잡지 제1권 제1호에 실린 문장이다. 󰡔天鼓󰡕는 신채호가 1921년 북경에서 발행한 잡지로 1호에서 7호까지 발간되었다. 한문과 백화문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논설과 독립운동 기사, 고대사를 비롯한 한국사에 대한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考古篇」의 필자는 志神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대종교에 입문한 이후 지신을 필명으로 사용한 점에 미루어 그가 필자임이 확실하다(최광식의 해제, 󰡔단재신채호전집󰡕5신문·잡지, 「해제」 ⅸ~ⅺ쪽 참고).

34) 박은식도 신채호 못지않게 상무정신 고취에 힘썼던 인물로, 󰡔西友󰡕의 주필을 맡으며 량치차오의 여러 저술들을 번역·소개 했다. 특히 일본의 大和魂’, 중국의 中國魂과 같은 맥락의 大韓精神을 주창하고, 그 기초로서 상무정신을 고취하여 문약을 탈피하자고 강조했다. 이때 상무정신의 표상이 되는 자국 영웅에 대한 역사교육을 강조한 점은 량치차오가 󰡔中國之武士道󰡕

를 저술한 취지와 일치한다(박은식, 「大韓精神의 血書()」 및 「文弱之弊는 必喪其國」, 󰡔白巖朴殷植全集󰡕5시문, 동방미디 , 2002, 370~377쪽 참고).

35) 신채호·박은식 외에 1920년대 이래 한국 및 일본 학자들의 화랑도론에 관한 개요는 박찬승, 앞의 논문, 72~73쪽 참조. 36) ‘에서 너무 사실에 가깝지 않은 시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그 가운데 들어 말한 역사상의 일은 낱낱이 󰡔고기󰡕

,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나 󰡔고려사󰡕나 󰡔광사(廣史)󰡕나 󰡔역사(繹史)󰡕 같은 속에서 참조하여 쓴 말이니 독자 여러분이 시여, 섞지 말고 갈라 보소서.”라며 역사 관련 주장은 史書에 근거했음을 밝혔다(󰡔꿈하늘󰡕, 동광출판사, 1990, 9).

(13)

나니, 비록 사대주의의 노예였던 김부식으로도 화랑 이백 명의 아름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일을 찬탄함 이라. 그 뒤에 문헌이 없어졌으므로 어떻게 쇠하고 어떻게 없어짐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37)

신채호가 자세히 논의한 바는 없지만 유교 등 漢文化가 성행하게 되면서 화랑도가 멸절되었다고 언급한 것38)으로부터 진일보한 추론을 해볼 수 있다. 앞서 량치차오가 중국에 상무정신이 점차 결여되어진 원인으 로 제기한 것들 중 특히 ‘유교 도덕주의에 대한 편파·편의적 해석과 그 발전이 武를 경시하고 文弱을 고착 화시켰다’고 본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중국에서 무사도의 소멸은, 유교에 대해 ‘나약하거나 느슨하지 않았던’ 공자 시기 원래의 전면적인 문무겸비 모습과 달리, 후세의 천한 儒者들이 굳셈을 모범으로 삼지 않고 유약함을 모범으로 삼아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등 편의에 따라 도덕주의로만 해석해온 데 따른 결과인 것이다. 신채호는 이러한 유교사상이 속성상 한국의 화랑도도 저해했을 것으로 여겼고, 근본적으로 중국문화 가 한국의 國粹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상황이 매우 안타까웠을 것이다. ‘사대주의’나 ‘노예’39)같은 언설을 통 해 그 원망을 짐작할 수 있다.

󰡔꿈하늘󰡕이나 다른 역사 저술들에서, 신채호의 화랑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은 그것이 무사적 성격과 더불 어 종교적·문화적 성격을 내포하고, 나아가 ‘국풍’의 주류였다고 본 것이다. [화랑도:‘무사적 성격, 전투자 의 자세’ + ‘종교적·문화적 성격 포함 = 전인적 리더십 즉 士道’ → ‘국풍 = 국혼(국가정신)’으로 승화]의 구 조로 정리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신채호의 논의구조는 사실상 니토베나 량치차오와 유사성을 갖게 된다. 다만 종교성 문제에 있어서, 량치차오는 무사도의 정신적 근원으로서 유교40)외에 다른 요소를 제기하지 않 았고, 니토베는 유교와 신도·불교를 함께 중시했던 데 비해, 신채호의 경우에는 화랑도의 모든 출발점으로 서 仙敎라는 민족 종교를 특별히 강조한 점과 외래 종교에 대해서는 반감을 표한 점이 두드러진다.

자세히 논의하자면, 량치차오가 무사도의 표상으로 74인의 인물을 내세우고 그 사적을 기술한 것 중에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종교성이 크지 않다. 유교가 현세주의적이고, 그의 계몽주의 철학인 ‘新民 思想’도 기본적으로 현실주의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반면에 󰡔中國之武士道󰡕에 서문을 써 준 楊卓이라는 인물은, 일본 무사도의 종교성과 관련하여, 중국에서는 이미 행해지지 않는 공자의 ‘誠意正心’,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道’를 중시하는 유교의 진정한 현세주의를 온전히 수용하고 불교의 생사관도 융합하 여 무사도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41) 신도 요소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종교적 요소가 비교적 중요함을 말하 고 있다.

신채호의 화랑도론에서는 그 기원부터 멸절에 이르기까지 시종 종교와의 관련성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해 보인다. 그는 화랑의 근원으로 누차 仙敎를 제기한 바 있다. 우선 선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다.

37) 위의 책, 45.

38) 본고 뒷부분에서 자세히 논의.

39) 다른 판본에는 拜華奴라고 되어 있으나, 결국 같은 의미이다(󰡔꿈하늘󰡕, 전자책, 한국저작권위원회, 2017, 29).

40) 공맹의 가르침을 비롯한 유가사상이 종교화하여 중국인들에게 내세관이 없이도 종교적 감화력과 안전감·영원성을 제공하 게 된 기제에 대해서는 辜鴻銘(), 김창경(), 󰡔중국인의 정신󰡕(전자책), 예담차이나, 2004, 55~96쪽 참고.

41) 󰡔中國之武士道󰡕, 앞의 책, 楊序 9쪽 참고.

(14)

東史를 閱하건대, 仙敎는 東國古代에 盛行한 者라. 當時 書籍이 散缺하여 其源流를 考키 難한 故로, 或者는 是를 支那 道敎의 東入한 者로 認할 而耳나, 左右로 參互하건대 此가 東國에 固有한 者요, 支那 에서 來치 아니한 證左가 實多하도다.42)

1910년 3월 신문 논설로 발표한 「東國古代仙敎考」라는 글의 첫 대목이다. 한국 선교가 중국의 선교 즉 도교와 무관하게, 도교 전래 이전부터 존재했던 한국 고유의 종교임을 강조하고, 이어서 그 근거를 자세히 논증했다.

중요한 것은 ‘事君以忠, 事父以孝, 交友有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이 선교의 신앙 조건 중 일부라고 본 점이 다.43) 화랑도에 도덕적 덕목들을 제공해주는 근원이 되기에 적합하다. 물론 유교나 불교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고대 동양사회를 지탱했던 보편적 도덕 덕목들이므로 그 적절한 조합은 고유 종교의 강령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를 중심으로 한 선교에 대한 신채호의 추론은 이러하다. 선교는 ‘創立의 祖’로서 桓因·桓雄·檀君 三神 (三聖)을 세우고, ‘實在의 人’이 아니라 ‘抽象의 神’으로 받들었다. 기독교의 ‘三位一體’나 불교의 ‘三佛如來’와 같은 개념이다. 삼국시대에는 선교도들이 불교·마호메트교처럼 靈山이나 동굴에서 東明王·乙支文德·金庾 信 등을 받들며 ‘心術’을 수련하기도 했다. 이들 외에 주요 인물로 愚溫達·金欽純·金仁問·官昌·金令胤· 金歆運 등 名將이나 국가 지도자들이 있어 성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선교는 羅末麗初에 불교가 크게 성행함에 따라 경쟁에서 뒤져 결국 멸절했다. 교리의 조직이 정밀하지 못했거나 설교가 당시 시세나 인심에 맞지 않는 등의 연유로 우승열패의 이치에 따라 도태되었을 것으로 보았다.44)

신채호의 선교에 대한 논의는 󰡔꿈하늘󰡕에도 보인다. 을지문덕의 입을 빌어, 國祖 단군이 태백산에 내려와 제반 제도들을 제정하고, 三部五戒로 윤리를 세우고 三郞五加로 교육을 맡게 했는데, 이것이 한국의 ‘종교적 무사혼’의 시초라고 주장했다. 한국 상무정신의 중요한 특성으로서 ‘종교적 무사혼’을 내세운 것이다. 삼국시 대에 이르러서는 그 연계선상에서 고구려의 仙人, 백제의 蘇塗, 신라의 花郞이 정립되고 활약했다.45) 이에 화랑은 선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 기반 상무정신의 표상이자 그 인재·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선교가 불교·유교 등 타종교의 성행에 밀려 위축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화랑도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워 지는 구조였다.

위의 논의로부터 신채호의 화랑론이 ‘민족주의 – 국수주의 – 종교적 무사혼 – 상무정신 – 화랑’의 맥락에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 무렵 저술한 󰡔朝鮮上古文化史󰡕에서도 선교와 무사도를 동일시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무릇 四仙은 數千年 國粹의 精神中心이오, 武士의 魂이라 할만한 新羅 仙郞인 南郞 述郞 永郞 安詳

42) 신채호, 「東國古代仙敎考」, 󰡔단재신채호선생전집(별집)󰡕, 앞의 책, 47. 43) 위의 책, 49쪽 참고.

44) 위의 책, 49쪽 참고.

45) 󰡔꿈하늘󰡕, 앞의 책, 14~15쪽 참고.

(15)

郞 四人이니,……‘花郞’의 별명은 ‘國仙’이라 하며 ‘仙郞’이라 하고, ‘高句麗 皁衣’의 별명은 ‘仙人’이라 하 며, 󰡔三國遺事󰡕의 花郞을 神仙之事라 하엿슨즉, 新羅의 花郞은 곳 高句麗의 皁衣에서 나온 者요 󰡔高句 麗史󰡕의 ‘平壤者 仙人王儉之宅’은 곳 仙史의 本文이니, 檀君이 곳 仙人의 始祖라. 仙人은 곳 우리의 國 敎이며, 우리의 武士道며 우리 民族의 넉시며 精神이며 우리 國史의 ‘’이어늘……대개 花郞은 檀君

부터 나려오든 宗敎의 혼이오 國粹의 중심이어늘, 다만 羅末麗初에 儒敎徒에게 殘滅을 當하야 그 歷 史를 알 수 업게 되얏도다.46)

화랑의 근원은 단군을 시조로 삼는 한국의 國祖信仰 선교인데, 선교는 곧 무사도요, 조선혼이요, 국수의 정화라는 주장이며, 따라서 화랑은 한국 무사도와 조선혼의 표상이 된다.

1922~1924년 무렵 저술한 󰡔朝鮮上古史󰡕에서는 위와 연결되는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花郞은 一時 新羅 勃興의 原因이 될  안이라, 後世에 漢文化가 跋扈하야 事大主義派의 思想과 言 論이 社會의 人心 風俗 學術을 支配하야 왼 朝鮮을 들어 支那化하랴는 판에,  이를 反抗 排斥하여 朝鮮이 朝鮮되게 하야 온 者는 花郞이다.47)

화랑은 무사도로서 신라 발흥의 중요한 동력이었고, 나아가 이후 중국 문화에 맞서 조선의 정체성을 고수 할 수 있게 한 국수 중에서도 정화였다고 본 것이다.

신채호는 이러한 화랑도의 구체적 덕목에 대해서도 史實의 궁구를 기반으로 한 󰡔꿈하늘󰡕에서 개괄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名號는 시대에 따라 변하였으나 정신은 한가지로 전하여 모험이며, 상무며, 가무며, 학식이며, 애정 이며, 단결이며, 열성이며, 용감으로 서로 인도하여 고대에 이로써 종교적 상무정신을 이루어, 지키면 이기고, 싸우면 물리쳐, 크게 나라의 국광을 발휘한 것48)

한국적 무사도인 화랑도는 종교적 상무정신이며, 그 내용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덕목들로는 상무뿐만 아니라 모험·가무·학식·애정·단결·열성·용감 등이 있다. 량치차오가 말한 이상적 국민성 속성들이 포괄된 점 과 더불어 학문·예술의 수양을 강조한 점이 두드러진다. 량치차오나 니토베보다 더 전인적인 리더십의 함양을 추구했다고 평가된다. 󰡔朝鮮上古史󰡕에서는 구체적인 수련 내용이나 실천 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논의했다.

선배를 신수두 壇前의 競技會에서 아 學問을 힘쓰며, 手搏, 擊劍, 射藝, 騎馬, 덕견이, 금질 씰 흠 等 各種 技藝를 하며, 遠近 山水에 探險하며, 詩歌와 音樂을 익히며, 共同으로 一處에 宿食하며, 平 時에는 患亂救濟, 城郭 道路 等 修築 等을 自任하고, 亂時에는 戰場에 나아가 죽음을 光榮으로 알어 公

46) 신채호, 󰡔朝鮮上古文化史󰡕, 󰡔단재신채호전집󰡕3역사, 앞의 책, 231·233·243.

47) 신채호, 󰡔朝鮮上古史󰡕, 󰡔단재신채호전집󰡕1역사,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2007, 114. 48) 󰡔꿈하늘󰡕, 동광출판사, 1990, 45.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