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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상의 자원이 미탐사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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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대지·경이의 땅, 아르헨티나

우리나라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에 이어 남미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로, 스페인어권 국가 중에서는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국토 면적은 278 만㎢로 세계 8번째이며, 한반도의 12.5배, 남한의 28배에 달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278만㎢ 이외에 피자조각 모양으로 잘라낸 남극 대 륙 일부(96만㎢)와 본토 남동쪽의 섬 말비나스(영국명 포클랜드, 1만2천㎢)가 추가로 포함된다. 다만, 현재 남극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1959년 체결된 남극조약으로 유예되 어 있으며, 말비나스 섬은 영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영토에 관해 주목할 것은 안데스 고산지대를 제외하면 국토 대부분이 끝 없는 평원이고, 세계 3대 곡창지대인 팜파스가 국토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주변 지역의 옥토만도 약 70만㎢로 남한 면적의 일곱 배에 달해, 국토 대부분이 산지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천혜의 농업 환경을 갖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1880년경부터 곡물과 축산물의 유럽 수출을 크게 늘려나갔고, 이를 통 해 이후 반세기에 걸쳐 눈부신 국가 발전을 이뤄냈는데, 그 바탕에는 드넓은 옥토와 초지가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서 파타고니아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초지에 방목되는 소는 약 5,200만두로, 인도, 브라질, 중국, 미국에 이어 다섯번째이며, 아르헨티나 인구 (4,450 만)보다 그 수가 많다.

아르헨티나 100페소 지폐에는 Julio Argentino Roca 장군의 초상과 <사막의 정복 (Conquista del desierto)>이라는 그림이 앞뒤로 인쇄되어 있다. 이 그림은 1870년대말 당시 원주민 인디오들이 살고 있던 팜파스 및 파타고니아 지역을 정복하는 Roca 장군 을 묘사하고 있다. Roca 장군은 <사막의 정복> 작전을 통해 아르헨티나 중남부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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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차지하는 광활한 지역을 국토에 편입하고 안데스산맥을 기준으로 칠레와의 국경 을 자리 잡게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최소 천여 명의 원주민이 죽고 15,000여명이 거 주지를 잃게 되었으며 상당수가 안데스 너머의 칠레로 쫓겨가게 되었다. Roca 장군은 이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었으며, 영토 확장을 통해 20세기 초 아르헨티나가 세계 적인 경제부국으로 부상하는 초석을 놓았으나, 일각에서는 Roca 장군에 의해 행해진 사막의 정복 작전을 원주민에 대한 과도한 조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지방을 비행기로 여행하다 보면 맑은 날에는 끝없이 광활한 평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 점 야산도 없고 구릉지도 없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의 평원이다.

작은 영토에다 그마저 70%가 산지인 한국 사람들에게 아르헨티나는 경이의 땅인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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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의 백인 국가

아르헨티나에는 “멕시코인은 마야인들로부터 왔고, 페루인들은 잉카인들로부터 왔 으며, 아르헨티나인들은 배를 타고 왔다"는 말이 있다. 아르헨티나가 토착 인디오가 아닌 이민자의 나라라는 말이다. 물론 아르헨티나에도 서양의 신대륙 발견 이전부터 다른 남미국가와 마찬가지로 인디오가 살고 있었으나, 19세기 수차례의 대토벌에 의 해 사실상 백인국가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저술가이자 대통령을 지낸 Domingo F. Sarmiento는 1845년 아르헨티나 를 문명화하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럽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1850-1930년간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600만명이 넘는 유 럽계 이민자가 아르헨티나에 유입되었다.

당시 유럽은 전쟁과 사회적 불안, 빈곤 등 위기가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헨티 나와 미국 등 신대륙은 유럽인들에게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돌파구였다. 1914년 당 시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독일, 프랑스 및 이탈리아를 상회하고 있었고, 이전 40 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나라였다. 만화영화 엄마찾아 삼만리

는 이민 시대의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상황을 엿볼 수 있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 은 아르헨티나에 가정부로 간 엄마를 찾아 나선 이탈리아 소년이었다.

1800년 당시 20만명이 안되었던 아르헨티나에 이러한 대규모 유럽 이민은 백인인구 비중을 크게 높이는 결과를 낳았으며, 오늘날 아르헨티나 인구는 97%가 백인 또는 메 스티조(출처 : CIA factbook)이고 흑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 그 많던 흑인은 어디로 사라졌나

2010년 인구총조사에서 인구 4,100만명중 15만명만이 흑인(아프리카계 아르헨티나인) 이라고 응답하여 그 비중이 0.36%에 그쳤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1587년부터 아 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거래되기 시작하였으며, 1800년에는 당시 인구 187,000명 중 흑인이 69,000명으로 36%를 차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흑인 인구 급감에 대해 2000년대 들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학자들은 독 립전쟁과 1860년대 파라과이와의 참혹한 전쟁에서 많은 흑인들이 최전선에 배치되어 사망하고, 남성 흑인이 줄어들어 흑인 간 자녀 출산이 급감한 점을 그 이유로 설명하 였으며, 콜레라와 황열병이 창궐했을 때 부유한 백인들이 대거 주거지를 옮긴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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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보건 위생이 열악한 흑인 주거지에서 피해가 컸다는 연구도 있다. 유럽을 지향 하는 아르헨티나인의 정서상 흑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사실을 드러내려하지 않고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도 그 이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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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로 만들어진 나라

아르헨티나는 1876년 이민법을 제정하여 이민자에게 입국시 식량과 숙소를 제공하고 구직을 지원하게 하는 등 적극적 이민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이후 대규모 이민이 유 입되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 무렵 냉동기술 발달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유럽 으로 가는 배에는 소고기가 채워졌고, 돌아오는 배는 수많은 이민자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1850년부터 1930년 기간 중 아르헨티나는 660만명의 이민을 받아들였는데, 2,700만의 이민이 유입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이민을 많이 받아들인 국가였다. 이민 급증으로 1895년 400만명이었던 아르헨티나 인구는 1914년 790만명으로 증가하였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식민지였으나 국민 구성은 스페인을 앞서 이탈리아계가 최다로 약 2,500만명에 이르며, 스페인계가 1,600만, 프랑스계가 600만, 아랍계(주로 레바논과 시리아)가 450만, 독일계가 360만을 차지한다(일부 중복). 이는 이탈리아 통일 후 경제 난을 겪던 시기와 아르헨티나의 급격한 경제성장기가 맞물려 많은 이탈리아인이 이민 을 선택한 영향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영향은 건축과 음식은 물론 성급한 운전습관 에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남미의 파리라고 할 정도로 건축 과 예술 부문에서 프랑스의 영향이 컸으며, 지금도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프랑스 를 동경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아르헨티나 이민은 2015년에 50주년을 맞아 역사가 길다고는 할 수 없 으나, 현재 약 3만명의 동포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온세와 아베쟈네다 지역을 중심으 로 거주하고 있다. 한인들은 페론 전 대통령이 가난한 노동자를 위해 무료로 나눠준 연립주택촌(일명 109촌)에 정착하였으나, 의류업을 통해 유대인 상권인 온세 지역을 한인상권화 하는 등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1939.1.4자 동아일보 「5대양 6대주 가는 곳마다 조선인」 제하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총독부) 외무부에서 재외 각 기관을 통하야 조사집계한 재외 조선인의 분포 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은데 일본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65만명 이외에 ... 큐바 370, 묵 서가(멕시코) 52, 알젠틴 2, 영국 23...”.

즉, 조선 총독부에서 1935년 재외기관을 통하여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아르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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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2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민은 현재 공식화된 1965년 최초 영 농이민에 앞서고, 1956년 반공포로 출신 7명의 아르헨티나 입국에도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 보도에는 이들이 누구이며 언제 어떠한 이유로 아르헨티나로 이민하 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이밖에 유대인 인구는 약 20만명으로 라틴아메리카 최대 규모이며, 이스라엘 밖에서 는 찾아보기 힘든 코셔(유대인 음식 규율)를 준수하는 유대인을 위한 맥도널드 햄버거 매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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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없는 교육제도

아르헨티나 사회보장제도는 미주인권협약 서문‘인간의 기본적 인권은 특정국가에 소속됨으로써 부여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성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 는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나, 세계적인 경제력을 자랑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엔 국가 예산이 충분히 뒷받침 되지 못하여 서비스의 질이 낮아지고 있다.

아르헨티나 교육제도는 각 지방정부 주관 하에 시행되고 있어 각 주마다 차이가 있 긴 하지만, 유치부(2~5세), 초등부(6~12세), 중등부(13~17세), 대학교육으로 구분되며, 유치원 5세 과정부터 중등까지 총 13년이 의무교육이다. 국적과 체류신분을 떠나 모 든 어린이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음을 법률로 명시하고 있어 국공립학교는 유치원부터 대학 과정까지, 심지어는 ‘꼴로니아(Colonia)’라 불리는 여름방학 캠프도 무료이다.

한정된 교육재정으로 무상교육을 제공하자니 단점 또한 만만치 않다. 정원을 초과한 반 편성, 교과서 없는 수업, 교사들의 잦은 파업으로 인한 수업 결손 등이 그것이다.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두 개의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도 많다. 수업은 과제물의 연 속이며 과제물은 언제나 학생의 수준을 뛰어 넘는다. 그 결과로 약 50%에 달하는 학 생들이 중도탈락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학생들은 자기주도적 학습법을 터득한다. 많은 과제물을 해결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면서 책 제목만 보고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정보 분석력과 협업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르헨티나가 아직까지 남미 최고의 교육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사립학교는 스페인어 학교와 이중 언어 교육을 진행하는 학교(Bilingue)로 나뉜다. 이 중 언어 학교는 오전에는 스페인어, 오후에는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데, 수업료가 비 싸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보낸다. 사립학교는 거의 모든 면에서 공립학교와 상반된 다. 교사 자원이 충분해 선생님과 1대1 공부를 할 수 있고, 교재도 다양하다. 과제물 은 늘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내준다. 교외에 자체 운동장도 갖춰 수영, 럭비, 필드 하키 등을 필수로 가르친다.

아르헨티나 교육현장에는 경쟁이 없다. 성적표에도 석차가 없다. 단지 자신의 성적 (점수)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아이들 역시 친구의 성적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들 지도 않는다. 단, 유급제도가 있어 기준 이하의 점수를 얻었을 경우 연말에 재시험을 치르게 되고, 재시험에서도 낙제하면 다음 해 3월에 다시 재시험을 치르고 그마저도 안 되면 유급 처리되거나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설령 그런 과정을 거쳐 학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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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게 되더라도 학부모들은 그 사실을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점수가 미달일 때 아이 수준에 맞는 학교로 하향 조정해 전학을 시킨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엔 선행학습을 위한 과외가 없다. 또한 이곳의 교육 현장에는 유난 스럽게 ‘협동’과 ‘나눔’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이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교 육 방법이 그룹별 학습이다. 아이들은 그룹별 협동학습을 통해 수다스러울 정도로 자 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과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방법, 상대방의 의견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는 방법 등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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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게도 무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

노벨의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는 아르헨티나 의료 수준은 높은 편 인데, 공공 의료기관, 직장 의료보험, 사립 의료기관으로 크게 나뉜다.

공공의료기관은 각 지방 및 국가 보건부 산하기관이며, 국립병원과 제1차 진료기관 은 모든 국민들에게 무료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공공의료기관은 주로 저소득층이 이용하고 있으며, 응급진료, 구급 수송 등 모든 비용을 국가 예산에서 충당한다. 전국 에 약 1,200개의 보건소가 동 단위로 설치되어 있고, 지역별로 대규모 주립․국립 병원 이 위치해 있어 해당지구의 보건을 책임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무료 보건시스 템은 부족한 예산으로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한계가 있어 시설의 낙후, 열악한 환경, 진료시기의 장기화 등의 단점이 있다.

사립 의료기관은 사립 종합병원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가입자에게 매달 일정 한 보험료를 받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약 200여개의 의료보험회사가 운영 중인 데 60%가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市에 있다. 한국처럼 의무적으로 월급에서 공제하 는 국민건강보험(obras social), 보험회사에서 자체 병원 없이 다른 개인병원과 가입자 를 연결해주는 건강보험 (예:OSDE), 그리고 각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건강보험 (예:독일병원) 등이 있다. 직장의료보험(Obras Sociales)제도는 1970년대에 노동자, 여행 자, 연금자를 위해 설립되었으며, 각 노동조합이나 자영업자 및 고용주들은 이 제도에 가입해야 한다. 수혜자인 근로자들은 해당 의료기관에서 본인은 물론 직계 가족 모두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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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1억 2천만톤의 곡물 생산지

아르헨티나의 비옥한 팜파스 지역 대두 농장

아르헨티나의 비옥한 팜파스 평원(약 750,000㎢)은 미국의 프레이리 옥수수 경작지대,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와 더불어 세계 3대 곡창지대이자 식량창고로 불릴 만하다. 아르 헨티나는 기본적으로 농산물 강국이다. 곡물생산자는 항상 국제곡물동향을 예의 주시 하면서 수출지향적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4대 곡물은 대두, 옥수수, 밀, 해바라기이다.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의 옥 수수 수출국, 세계 3위의 대두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대두는 아르헨티나 곡물생산량 의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아르헨티나 주요 곡물 생산현황

※ 출처 : 아르헨티나 농산업부

아르헨티나 농업은 자본집약형이며, 기업형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는 전체 고 용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기업농이었으며, 현재도 전체 고용의 약 7%선을 유지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농업 비중은 1959년 GDP의 20%였으나, 오늘날은 7% 이내로 줄었

구분(단위 : 백만톤) 2015-16 2016-17 2017-2018(e)

대두

생산량 58.8 55.0 37.8

소비 47.6 45.3 45.5

수출 9.1 7.2 2.5

옥수수

생산량 39.8 49.5 43.3

소비 17.2 19.1 20.3

수출 21.6 25.6 7.8

생산량 11.3 18.4 18.5

소비 6.3 6.7 6.8

수출 8.5 12.8 12.3

해바라기

생산량 3 3.5 3.5

소비 2.9 3.3 4.4

수출 0.3 0.08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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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산물 수출액(대두유 등 1차 가공품 포함)은 총 수출액의 60%

에 이른다. 농림축산업에 이용 가능한 토지는 1억7천만ha(총면적 2억7800만ha의 60%) 으로, 그중 4천만ha는 곡물․사료작물 경작지 및 조림지, 9천만ha는 방목지 등으로 활 용되고 있다. 나머지 4천만ha는 활용이 되지 않고 천연임지 상태로서, 최근 방목지를 곡물경작지로 개간하는 사례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현재 전체 아르헨티나 농장의 10-15%를 외국인이나 외국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 수출 농업 인프라는 비교적 잘 구축되어 있다. 주요 가공시설은 대두유, 해바라기 기름 및 올리브유 등 식물성 기름 가공시설과 밀 제분시설이며, 수출품에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산물 가공시설을 증설중이다. 특히 10여개 기업이 보유한 대두가공시설은 그 규모가 세계적인 수준이며, 연간 25백만 톤의 대두를 대두유 및 바이오 디젤로 가공하여 수출한다.

로사리오항, 산로렌소항 등 파라나강 유역에 수출 농업 인프라가 발달해 있고, 이들 항구에는 8만톤 규모의 곡물 운반선까지 접안할 수 있다.

곡물중 아르헨티나 최대 수출 품목인 대두는 직파농법 도입, GMO 종자 사용 등으로 영농비 절감과 기계화 영농이 가능함에 따라 경작이 계속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대두농업 확대로 목축업이 축소되어 전체 소 사육두수가 2008년 약 5750만두에서 2011년 약 4,600만두까지 감소하기도 하는 한편, 대두작물 연작피해와 더불어 지력이 약화되는 문제도 발생하였다.

아르헨티나 농산물은 현 정부 들어 수출세 폐지 또는 점진적인 축소로 가격 경쟁력이 강화될 전망이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농가에 대한 영농자금 지원은 브라질과 유사하나,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달리 팜파스라는 비옥하고 평평한 초원지대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율은 24%대로서(연 1,600만톤 수입) OECD내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식량안보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어 있다. 또한, 곡물 메이저(ABCD : ADB, Bunge, Cargill, Dreyfus)와 일본상사가 세계교역량의 74%를 과점 하고 있는 현상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도 강구해야 하며, 그러한 차원에서 아르헨티나 와 농업협력을 추진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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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로를 수출하는 나라

지난 2009년 네덜란드 정부는 6,000억원 규모에 이르는 80MW 연구용 원자로 '팔라스 (PALLAS)' 건설사업의 국제경쟁입찰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나라의 한국원자력연구원 (KAERI)과 세계적 원자력 기업인 프랑스의 아레바(AREVA) 등이 입찰 경쟁을 벌였으 나, 아르헨티나의 인밥(INVAP, Investigaciones Aplicadas SA)이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

*되었다.

* 네덜란드는 2009년 연구용원자로 입찰에서 아르헨티나의 INVAP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하였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사업을 미루어오다가 INVAP으로 확정함.

원자로 수출이 주요 강대국들만의 사업영역이라는 일반의 인식과 달리 연구용 원자로 부문에서는 아르헨티나가 시장을 주도해 왔다. 아르헨티나는 1997년 이집트의 ETRR-II, 2004년 호주의 OPAL 사업에 이어 2014년 브라질 RMB 설계 등의 실적을 갖 추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연구용 원자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원자력 분야에서의 오랜 기 술 개발과 연구에 따른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1960년대에 이미 바릴로체의 연구센터 에서 자체 원자로 기술을 개발한 바 있다. 아르헨티나는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1970년대 초에 INVAP을 설립하였으며, INVAP은 지금까지도 아르헨티나 원자력 프로 그램의 중심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INVAP은 국가원자력위원회의 지도하에 자 국은 물론 알제리, 페루 등 제3세계 국가들의 소형 원자로를 제작해 왔다.

1980년대 초 아르헨티나는 국제사회의 아르헨티나 연구용 원자로에 대한 연료 공급 중단에 대비한다는 명분하에 우라늄 농축 시설을 운용하였다. 또한 에너지 및 원자력 안보 차원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채굴 가능한 천연 우라늄을 사용하는 원자로인 중수로 를 채택했으며, 중수(重水)의 자체 공급을 위해 중수생산 기업(ENSI)을 1989년에 설립 하였다.

아르헨티나는 이론적으로 폭탄에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우라늄 농축에 근접한 9개 국가에 분류되고 중남미 국가중 브라질과 함께 핵보유 능력을 가진 나라로 평가받아 왔으나, 1968년에 만들어진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에는 1990년대 초까지 참여하지 않았다. 실용적 친미 성향의 메넴 정부(1989-1999) 집권기인 1995년이 되어서야 아르 헨티나는 NPT 가입을 정식 비준하여 핵 관련 활동을 국제 통제 및 사찰기구에 공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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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상의 자원이 미탐사된 땅

바까무에르따 쉐일오일 시추현장

세계8위 영토 대국인 아르헨티나의 해안선은 4,989km이며, 칠레(6,691km 접경), 파라과 이(2,351km), 브라질(1,263km), 볼리비아(942km) 및 우루과이(541km)와 접경하고 있다.

세계적인 자원 전문잡지인 Mining Journal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세계 6위의 광 물자원 보유국이며 광업투자 기회에 있어서는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미개발 자원대 국이다. 특히 칠레와 국경을 이루는 안데스 산맥지역에 다양한 광물자원을 보유하 고 있다. 광업개발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약 70만㎢에 달하는데, 이중 70% 이상이 미개발지라고 한다.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납, 아연, 은, 주석 등 광물이 다량 매장되어 있고, 그 이외에 붕산염, 리튬, 칼륨, 동,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네우껜 분지 바까무에르따(Vaca Muerta: ‘죽은 소’라는 뜻) 지대는 북미를 제외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세일 지대로 알려져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2013년 확인된 매 장량은 석유 162억 배럴과 천연가스 8.7조㎥이며, 확인 매장량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바까무에르따 발견으로 아르헨티나는 중국에 이어 세계 셰일 가스 매장량 2위, 셰일 오일 매장량 4위를 차지하고 있다1).

아르헨티나는 지질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 많은 잠재성을 가진 자원부국임에도 불구하 고 광업 발전이 늦었다. 그 이유는 광업진흥법이 칠레보다 한참 늦은 90년대에 제정 되어 외국기업의 투자가 활성화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광업투자 법이 1993년에 제정됐다. 광업투자법은 30년간 채굴보장, 탐사 및 채굴 비용에 대한

1) “아르헨티나 23개주 자원 현황”, 외교부, 2015년 12월 개정판, 11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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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감면, 가속감가상각 허용, 채굴을 위한 자본재 수입 지원, 부가가치세 감면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2003년에는 자원개발 광구의 입찰권을 주정부로 이양하였다.

최근 다시 일련의 법제 개정이 이루어졌고, 시장 친화적인 마끄리 정부 출범 후 2016 년 2월에는 광업수출세(가공광물에 5%, 비가공광물에 10%) 폐지도 이루어져 그만큼 비즈니스 기회가 증대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광산물 확보를 위한 외국인 투자가 지 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는데, 2015년 아르헨티나 광산물 수출금액은 200억 달러에 이르 렀다. 아르헨티나에서 광물 분야는 2014년 기준으로 GDP의 0.6%, 수출의 5.4%를 차지 하며, 투자규모는 13.16억불로 직간접 고용규모는 77,000명에 이른다.

부존 광물자원이 매우 부족한 우리나라는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필요 한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숙명처럼 되어 있다. 해외자원 확보 다변화 차 원에서 아르헨티나는 중요한 협력 대상국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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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해방자 산 마르틴 장군

호세 프란시스코 데 산마르틴 마토라스(José Francisco de San Martín Matorras, 1778.2.25 ~ 1850.8.17.)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장군으로 흔히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으로 불리우며, 당시 스페인 지배를 받고 있던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 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성공시킨 인물이다. 산 마르틴 장군은 시몬 볼리바르와 함께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영웅이자, 아르헨티나 국민의 아버지로 높이 추앙받고 있다.

산 마르틴 장군은 1778년 아르헨티나 코리엔테스 州에서 태어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유년기를 보낸후 스페인 군대에 입대하여 영국군, 프랑스 군대와 싸우면서 군사적 경 험을 쌓고 남아메리카 독립 운동가들과 접촉을 시작한다. 아르헨티나 독립운동에 투 신하였던 산 마르틴 장군은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공격하고 이어 페루를 독립시 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정규군도 아닌 식민지 치하의 의용군을 이끌고 고산병을 이기려고 마늘과 양파를 씹으면서 안데스 산맥을 넘었다고 한다.

산 마르틴 장군은 챠카부코 전투(1817.2.12.), 마이푸(1818.4.5)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 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를 해방자로서 환영하고 칠레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한 산티아고 시민들을 뒤로 하고 산 마르틴은 페루 독립을 위해 노력한 끝에, 1821.7.28에 리마에서 페루의 해방을 선포하고 '페루의 보호자(Protector Of Peru)'라는 호칭을 얻어 페루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독립에도 불구하고 곧 스페인 지배하에서 감추어졌던 극심한 지역 적 불균형이 드러나게 되었다. 내륙의 연방주의자들(보수적인 지주나 도시 노동계급에 의해 지지를 받던)은 지방 자치제를 지지한 반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단일주의자들 (유럽의 수도, 이민, 사상들이 유입되는 것을 환영하던 대도시 거주자들)은 부에노스아 이레스의 중앙 집권제를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산 마르틴 장군은 자신의 모든 정치적 입지를 포기하고 은퇴하여 딸과 함 께 유럽으로 건너갔고, 영국 런던과 벨기에 브뤼셀을 떠돌며 쓸쓸하게 중년을 보내면 서 도중에 몇 번 귀국을 시도했지만 아르헨티나 정치 지도자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끝내 실행되지 못했다. 1830년 벨기에의 네덜란드 독립 전쟁 때는 혁명군 지도자로 참가할 것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하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이후 1848년 다시 불 로뉴쉬르메르로 낙향한 다음 2년 후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사후 188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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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모습은 아르헨티나 5페소 지폐에 새겨져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었 다. 그를 기린 해방자 산마르틴 장군 훈장(Orden del Libertador San Martín)은 아르 헨티나에서 가장 영예로운 훈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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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세계적인 경제 부국

19세기 말, 유럽에서 산업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국민소득이 늘어나자 식량 수입 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식량수출도 크게 늘었으며, 1877년 부터 냉동육 수출까지 가능해지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고도성장의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중앙정부 통치력이 확립되고 보수주의 세력이 국가자치당을 중심으로 정권을 확보하게 된 1880년대 이후부터 수십년 동안 아르헨티나는 비약적인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이러한 결과로 1차 세계대전 발발 시 아르헨티나의 1인당 국민소득은 독일과 베네룩스 3국 등의 수준과 같았고,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및 스위스보다 높았다.

19세기부터 당시의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을 주요 무역 파트너로 둔 아르헨티나는 1869 년 이후 연평균 6.5% 이상의 경제성장을 보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대서양 연안국 도시 중에서 뉴욕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되었다. 1911년 아르헨티나 대외 무역량은 캐 나다보다 많았고, 미국의 1/4 이상 수준에 도달하였다. 경제적으로 아르헨티나는 아마 와 옥수수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었고, 양모는 제2위, 육우와 밀은 제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독립 100주년을 맞게 된 1916년을 계기로 세계 3번째 지하철 개통, 호 화스러운 국회의사당과 Colon 오페라 극장 건축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음을 알렸다.

이러한 경이로운 성장세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1916년, 그리고 1930년 정권이 바뀌 어 야당이었던 혁신당(뿌리당)이 먼저 집권하고 쿠데타를 통해 다시 보수주의 세력이 집권하게 되지만 식량수출을 중심으로 한 경제구조 자체는 큰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 었다. 1930년 대공황 이후 경제가 과도하게 수출에 의존해왔다는 반성에 따라 수입대 체산업이 확대되기도 하였으나, 큰 구조적인 변화는 없었다.

페로니즘이 등장한 1940년대 중반까지 상황을 정리해 본다면 아르헨티나는 70년 가깝 게 지속 성장해 온 국가로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극히 힘들었던 10% 미만의 문맹률을 자랑하였다. 또한, 1947년 노벨의학상을 배출할 정도로 우수한 의료시스템을 갖추었으며, 국민의 평균수명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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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이 있었던 미국과의 관계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곡물 생산의 보고로 연간 3억 인구의 식량을 생산했고, 전국 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쇠고기를 통해 유럽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아르헨 티나는 1880년 이후 1930년대까지 세계적인 경제력을 구가할 수 있었고, 그야말로 태 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 영국을 위시한 유럽국가들이 아르헨티나 곡물을 수입하였 으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중심의 국제질서에 순응하며 국부를 쌓았다.

1926년부터 아르헨티나산 곡물과 육류를 수입해 가던 미국이 유럽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자 미국과 아르헨티나는 곡물 수출 경쟁국으로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 다. 1930년대 전 세계에 경제공황이 불어 닥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미국이 국 제정치 및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세계경제가 1차 상품에서 2차 및 3차 상품 중심으로 옮겨가는 등 국제환경이 급변하자, 對미국 비우호정책을 유지하던 아 르헨티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아르헨티나가 2차 세계대전시 연합국에 가담 하지 않음으로써 미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은 유럽국가들로 하여금 마 샬플랜에 의해 지원되는 자금을 아르헨티나 곡물 수입에 사용치 못하게 함으로써, 미 국과의 관계 소홀이 아르헨티나에게는 실질적이며 결정적인 손실, 나아가 전반적인 아르헨티나의 경제 침체를 가져왔다. 당시 아르헨의 소수 대지주들은 드넓은 기름진 땅에서 생산되는 곡물로 넘쳐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하고 유럽의 부유층과 귀족들과의 교류만을 경쟁적으로 고집했고, 가진 재산을 흥청망청 소비하면서 천문학적인 재산을 재투자 보다는 소비하는 데 급급했다. 이는 미국과 유럽자본이 아르헨티나로 들어와 각종 기간산업에 투자되는 모순을 낳게 하였다.

페론 대통령 정부가 등장한 이후 아르헨티나가 외국자본의 국유화 정책을 광범위하게 추진 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미국은 페론을 좌파로 분류, 경원시 하기까지 하였다. 1976년 집권한 군부 독재세력들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적 구도를 통해 미국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말비나스 전쟁에서 보인 미국의 친영국주의 적 태도에 실망하게 되었다.

까를로스 메넴 정권하에서는 미국에 적극적인 협조를 제공하였으며, 특히 경제적으 로도 대미의존도 역시 심화하게 되었다. 1989.9월 메넴 대통령의 미국 방문 및 1990.12 월 미국 부시 대통령의 아르헨티나 답방을 계기로 양국관계는 급속히 개선되는 분위기를 보였다. 1991.4월 아르헨티나가 만성적 인플레이션 해결책으로 아르헨티나 페소를 동 가로 미국 달러에 연계시킴으로써(태환 정책) 미국정부의 경제정책이나 뉴욕 증권시장 의 이자율 움직임이 그대로 아르헨티나 경제에 파급효과를 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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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초 이래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약 20억 불의 차관을 공여 받는 대가로 동 기구의 국내 경제정책 간여권을 인정한 이후, 경제정책에 있어서 대미 의존도가 더욱 심화되었다. 아르헨티나는 메넴 대통령 시절인 1998년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협력 국 가로까지 인정받았는바,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 아닌 국가에 전략 적 협력 국가 지위를 인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을 정도였다.

2003.5.25 중도좌파인 키르츠네르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 다. 합동군사훈련 참가 미군에 대한 특권면제 부여 거부, 아메리카 자유무역지대 (FTAA)를 둘러싼 이견 표명 등 과거와 달리 미국과 거리를 두는 외교정책이 추진되었 으며, 중남미 반미 선봉장인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의 협력을 강화함에 따라 미국 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양상을 노정하였다. 특히, 아르헨티나 정부가 2011.2월 연방경찰 의 특수훈련을 지원하기 위해 에세이사 국제공항에 착륙한 미군 군용기에서 미신고 무기 와 장비를 압수(동 수색을 티메르만 외교장관이 직접 참석, 지휘)하면서 미국과 신경전을 벌 이기도 하였다. 페르난데스 정부는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보다는 중국,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하는 추세를 보였는데, 아르헨티나 각계에서도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아르헨티나와의 새로운 협력 관계 발전을 위해 2016.3월 이루어진 오마바 대통령의 방문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16년 만의 방문이었다. 마끄리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아르헨티나 독재 시절 과거사에 대해 정직함과 투명함으로 대처함으로써 역할 을 다하겠다고 밝히고, 쿠데타 발생 40주년을 맞아 아르헨티나 독재 정부에 대한 비 밀문서를 모두 해제하기로 하였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2016.8월 아르헨티나 방문 시 오바마-마끄리 대통령간 ‘더러운 전쟁’ 관련 기록 공유 합의에 따라 기밀해제분을 전달하였다. 현재 마끄리 정부는 페르난데스 정부의 중국과 러시아에 편중된 외교활동 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인식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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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니즘에 대한 평가

페론 대통령은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인물이며,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관심을 여전히 받고 있다. 아울러, 페로니즘은 아르헨티나 사회와 정치를 움직이는 중요한 이데올로 기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지만 페론과 페로니즘에 대한 아르헨티나 국민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양분돼 있다. 다수 국민, 특히 빈곤 계층은 페론 시대에 대한 향수를 지우 지 못하고 있는 반면, 식자층을 중심으로 그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에비타와 페 론, 그리고 그들이 남긴 페로니즘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으며 아르헨티나를 망친 주범이라고 단정한다.

페론 자신에 의해 ‘정의주의’(Justicalismo)로 명명된 페로니즘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 상, 복지증진, 고용 증대를 통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강대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주권’을 확립하며, 자립 경제기반 확충으로 ‘경제적 독립’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1940년대 후반기 페로니즘의 정치경제적 전략은 원활히 작동되었다. 2차 세계대전 기 간 동안 늘어난 외환보유고와 전후의 수출 증대로 수입대체산업화에 필요한 자본재를 들여올 수 있었고, 농산물 수출에 따른 이익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장악하여 산업에 투자함으로써 경제성장과 고용증대가 달성되었다. 임금인상과 사회보장 지출 확대로 산업생산품에 대한 국내수요도 증대하여 소비도 촉진되었다.

임금 인상과 사회적 소득 이전은 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과 여성들의 지위 개선을 가 능하게 함으로써 일반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는데 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호무역 을 통한 국내시장 보호와 국내자본가 육성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연스레 연결되 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으로 기 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전략이 가진 한계는 194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952년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 1955년 군사쿠데타로 연결된다. 곡물 가격 하락으로 수출은 줄어 드는데 반해 늘어난 국내소비와 산업화에 필요한 설비와 중간재 수입 증가는 외환위 기를 초래하였다. 경제성장 둔화와 재정수입 감소를 해결하기 위한 화폐발행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으며, 정치적 반대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통령 권한 강화 와 언론 탄압 등 권위주의적 모습의 지속은 군부마저 페론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면서 권력 기반을 약화시켰다. 미국은 유럽이 미국, 캐나다 및 영연방 국가에서 생 산되는 곡물을 수입하도록 하게 함으로써 아르헨티나를 더욱 위기로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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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에도 불구, 페론집권 시기인 1949년에서 1976년까지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2%가 증가하였으며,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많은 산업투자를 단행했고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되었다. 연금제도와 휴가, 상여금, 무료의료혜 택 등 사회보장 제도가 생긴 것도 페론의 업적이었다. 페론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 자가 아닌 자본주의 사상을 지녔지만 소득의 재분배에 심혈을 기울여 소수에 몰린 부 를 다수에 재분배하는 데 기여했다. 이 기간동안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60%를 차지 했던 극빈서민들이 전체 국가소득의 33%를 분배받았으며, 그때까지 소작인들과 대지 주로 구분되던 아르헨티나에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페론은 몇몇 대 지주들에 편중된 부를 서민들에게 분배, 60%에 가까운 중산층을 만들어 당시 세계에 서 가장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1955년 군사 쿠데타로 9년간의 페론 정권은 일단 무너졌으나 페로니즘은 정권 붕괴 이후에도 존속하였고 이후 가장 강력한 반정부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1955년에 집권 한 군사정권이 화합보다는 배제에 치중하고 노동계층의 물질적 기반과 조직에 전례 없는 손실을 줌에 따라 노동자의 편에 서는 페론을 마치 민중의 지도자처럼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페로니즘은 1955년 이후 노조를 중심으로 오히려 확산되는 조짐마저 보여 준다. 페론의 1972년 귀국, 1973.9월 대선 당선은 페로니즘의 재기를 확실히 보여 준 예라 할 것이다. 이후 페로니즘은 1976년 비델라(Videla) 장군의 군사 쿠데타, 뿌리당 정권(1983-89) 등장과 함께 사라진 것처럼 보였으나, 1980년대 말의 초인플레 등 경제 위기후 페론당 메넴의 대통령 당선, 2000년대 초반 국가부도 사태 후 키르츠네르의 2003.5월 대통령 당선을 통해 곧바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였다.

페론당은 안정된 정치조직이 아니다. 이는 페론당이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지도자 들을 흡수하여 이념적 동질성을 갖지 못하였고, 강력한 대응세력이 없어 페론당을 응 집시킬 만한 동인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페론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지도력으로 당내 좌·우익을 모두 리드하였으나 내재하였던 이념적 차이로 그의 사후 당의 분열이 초래되었다. 또한 페로니즘은 이념적 동질성보다는 야망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도약 기반으로 활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합집산과 집안 싸움으로 계속 비춰진다. 정치학자 들은 아르헨티나 정당들의 무이념성으로 대통령이 정당의 구심역할을 하게 되고, 이 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소프트 파워로서 남편의 권력이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것은 에바 페론의 도움이었다. 에바 페론은 빈곤층을 지원하고 노동운동을 열정적으로 추진함으 로써 남편의 통치를 도왔는데, 후안 페론이 정치에 초점을 맞췄다면, 에바 페론은 ‘헐 벗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디어를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남편을 도와 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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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 선거전에 뛰어든 에바 페론은 확신에 찬 연설과 미모로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냈 으며, 그 뒤에는 ‘에바 페론 재단’을 통해 병원 12곳과 학교 1,000여곳 그리고 수많은 양로원을 설립함으로써 노동자와 빈민들은 그녀를 ‘성녀’로 떠받들게 되었다.

개인의 이기심을 넘는 사회적 책임과 미래에 대한 비젼 공유를 도모했던 페로니즘은 페론의 퇴장 이후 기반을 잃고 공동체 의식의 상실과 정부에 대한 신뢰감 부재속에서 도덕적 타락(정부의 정책을 교묘히 피하거나 탈법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만 챙 기는 관행)과 발전의 동력을 확보하기 보다는 분배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역행적인 모습을 낳게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조차 페론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소 다르긴 하지만 현재 많 은 서민들은 여전히 페론 대통령을 서민과 노동자의 복지향상과 사회정의 실현을 위 해 노력한 정치지도자로 기억하고 있으며, 아직도 페론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탄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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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

말비나스는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12,173㎢의 면적에 주위의 776개 섬 으로 이루어진 군도다. 영국으로부터는 12,000km 떨어져 있다. 아르헨티나의 티에라델 푸에고 섬의 북동쪽으로부터 400km 정도 떨어져 있어 양국 영유권 분쟁 대상이 되어 왔으며, 1982.4 양국간 전쟁 발발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양국간 갈등으로 명칭 도 영국은 포클랜드, 아르헨티나는 말비나스로 각각 부르고 있다. 영국은 주민들의 ' 자결권'에 따라, 주민들의 의사에 의해 포클랜드 제도의 귀속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 하고 있는 반면, 아르헨티나는 말비나스의 ‘역사적 승계성’이라는 근거 하에, 스페 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말비나스도 같이 승계했다고 하는 등 양측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현재 말비나스 군도에는 3,0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영국에서 이주해 온 영국계로 영국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주민들은 연안 어업허가와 원유 및 천연가스 개발 등으로 선진국 국민 이상의 고소득 생활을 하고 있는 가운데 말비 나스 연해의 풍부한 어족자원이나 원유 및 천연가스 매장 등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주 요 관심사로 다시 부상한 것이 말비나스의 현재 모습이다.

말비나스가 분쟁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은 이 섬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기인하고 있 다. 1690년에 영국인이 이 섬에 상륙한 이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섬의 주인이 프 랑스, 영국 및 스페인으로 바뀌었다.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한 후 스페인령 말비나 스 군도를 계승하였다고 하면서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반면, 영국은 1833년 이 섬을 재점령한 이래 지금까지 180년 이상 실효적 지배를 해오고 있다. 영국에 의한 지배 기간중에 약소국 아르헨티나는 최강국 대영제국을 상대할 수 없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후 전 세계적인 탈식민지화 추세에 따라 1946년 아르헨티나가 다시 말비나스 제 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된다.

1965년 유엔총회는 식민지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결의 2065/XX)를 채택하였으나, 영국 계 주민들이 대다수였던 말비나스 제도 주민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했 다. 1973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말비나스 제도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였으며, 유엔총 회는 양국이 분쟁해결을 위한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할 것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영 국과 아르헨티나는 회담을 시작하였다. 이후 1982년 2월까지 꾸준히 협상이 지속됐으 나, 영국으로서는 이 협상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고, 1982년 3월, 아르헨티나 외무부 는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 않다며, 협상이 신속히 진행되지 않으면 더 이상 협상할 수 없고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이라고 공식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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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이 섬을 불법점거하고 있다며 말비나스 제도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배경에는 영국의 소극적인 협상 태도 와 아르헨티나 갈티에리 군사 정권 유지 목적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 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말비나스 군도가 180년 이상 영국의 실효적 지배하에 놓여 있을 지라도 예나 지금이나 아르헨티나 땅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러한 믿음 하에 많은 민간인들이 자원하여 말비나스 전쟁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전쟁이 끝난 지 30여년이 지나고 있지만, 지금도 아르헨티나인들에게 는 말비나스라는 용어는 애국심의 상징이 될 정도로 말비나스 군도(Islas Malvinas) 문 제는 현안으로 남아 있다.

전쟁이 시작되자 군부독재를 규탄하기 위한 시위는 말비나스 공격을 지지하는 행사로 바뀌었지만 아르헨티나 군부의 잘못된 판단(미국이 자신들을 적극 지지할 것이며 영 국의 대응은 소극적일 것)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으며 온 힘을 다하여 맞선 영국에 아 르헨티나는 6월 4일 ‘조건 없는 정전과 항복’을 선언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아르헨티나의 말비나스 무력점령 관련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처리과정에서 미국을 비롯 한 10개국이 영국 입장에 서서 찬성하였으며, 스페인을 비롯한 4개국이 기권하고 파 나마만이 결의안에 반대하는 등 말비나스 전쟁은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아르헨티나가 유럽국가가 아니라 중남미국가임을 명확히 인식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갈티에리 군사정부가 반공을 내세우고 미국과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음에도 불 구하고, 미국이 영국 편에 섬으로써 미국에 대해서도 불편한 감정이 누적되는 결과를 낳았다.

1989년 평화적 정권 교체로 대통령에 당선된 메넴은 시장 개방과 자유 무역 정책 추 진에 따라 말비나스 제도 인근에서의 어업권과 같은 문제들을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영유권 문제와 같은 민감한 문제를 별개로 처리한다는 정책(sovereign umbrella)을 구 사하면서, 1990년 영국과 국교정상화, 어업 보존에 관한 공동 성명 및 1996년 공동유 전지역 개발 등의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자원과 영유권 이슈가 서로 분리되어 진행되던 말비나스 문제는 2003년 키르츠네르 정부 등장과 뒤를 이은 페르난데스 정부 들어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키르 츠네르 좌파 정부는 동 문제를 국가 자존심 회복의 단초로 인식하고 강력한 영유권 회복 드라이브를 구사하였으며, 2007년 영국과의 협력 선언 파기로 대립의 절정에 이 르게 되었다. 이후 석유 등 말비나스 인근 자원과 관련한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공방 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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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 출범한 마끄리 정부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면서 영유 권 주장은 견지하되, 대결은 자제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 문제 해결을 도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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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전쟁’

1955년부터 1983년까지의 기간은 모두 8차례의 군부쿠데타가 발생할 정도로 아르헨티 나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으며, 그중에서도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의 통치는 통칭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잔혹하고 억압적이었다.

1976년 집권한 비델라 정권이 ‘국가재건과정(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이 라는 미명하에 행한 탄압행위로 인해 동 기간 중 약 3만명의 시민들이 실종되었으며, 많은 시민들이 억압통치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좌익 게릴라 척결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반체제 성향의 사회·노동운동 가,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추적·납치·살해 행위가 '콘도르 작전' 이름하 에 행해졌다. 1970~80년대 남미를 암흑의 시대로 몰아넣었던 시대적 환경과 2003년 기밀해제된 미국 외교문서에서 드러난 미국 행정부의 묵인이 ‘더러운 전쟁’의 중요한 배경의 하나로 작용했다고 사가(史家)들은 평가한다.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인권 단체인 ‘5월광장 어머니회(Asociación Madres de Plaza de Mayo)’는 ‘더러운 전쟁’이 진행되던 1977.5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부에노스아이 레스 대통령궁 앞에 위치한 5월 광장 탑 주위를 돌면서 실종된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 고 군사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는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 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아르헨티나는 국제사회에서 인권 문제에 있어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2015.12월 부에노스 시의회에 이어, 2016.6월 연방하원이 북한 인권상황을 규탄하는 선언(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983년 군정종식 이후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된 라울 알폰신은 1976-83년간 강제 납 치 등으로 사라진 실종자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13명으로 구성된 ‘실종자 국가위원 회’(Comision Nacional por la Desaparicion de Personas)를 설치했다. 동 위원회는 총 50,000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발간하였고, 1984.9월 이를 요약한 ‘더 이상 안 돼(Nunca Mas)' 제하의 스페인어로 된 결과문서를 만든 데 이어 사법기관이 실종자 국가위원회 조사 자료들을 법적인 관점에서 시급히 조사, 점검하고 확인할 것을 촉구하는 권고문을 채택한다.

알폰신 대통령은 1983년 취임 후 검사들로 하여금 1970년대 군정당시 반인륜 범죄자 들을 기소하도록 독려하였는데, 이에 따라 1985-86년 기간 중 호르헤 비델라(종신형), 라몬 깜뽀스(25년), 로베르또 비올라(17년), 에두아르도 마세라(종신형), 미겔 에체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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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23년) 등 많은 군부 인사들이 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군부세력이 이에 강력히 반 발하여 사회적 긴장이 야기되자 알폰신 대통령은 고위 군부인사들의 인권범죄 책임을 제한하는 국민 화합법(La Ley de Punto Final) (1986년) 등의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동 법은 공표 이후 60일 이내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을 경우 군정관계자를 상대로 한 재판이 계속될 수 없음을 규정하는 등 사실상 반인륜범죄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또한, 명령복종 처벌 불가법 (La Ley de Obediencia Debida)’(1987년)은 상 관의 명령을 받았거나 또는 강제에 의해 취해진 행동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군복무 당시 인권유린 범죄를 처벌치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메넴 대통 령은 국가 화합차원에서 1989년 및 1990년 39명의 군부 인사들을 포함 총 289명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실종자 국가위원회’의 권고에도 불구, 가장 중요한 사법적 심판은 일부 군장교의 반발과 정부 방침의 일관성 부재,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등 경제 사정 악화 등으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정치적 타협이라는 비판속에서 용서와 화해를 통한 사회통합의 초석으로 삼기에는 부족하여, 정부의 진상 규명 의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과거사 규명 작업을 우선 정책과제로 삼은 키르츠네르 대통령 집권 이후 상황은 바뀌 었다. 2003.8 의회가 알폰신과 메넴 정부의 사면법이나 사면령 폐기를 천명한데 이어, 2005.6월 대법원 전원재판부는 상기 2개의 사면법이 국제인권조약에 위배됨과 아울러, 반인륜범죄의 사법처리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동 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아 울러, 과거 2개 사면법에 따라 유리한 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일사부재리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정함으로써, 인권유린을 자행했던 300-400명의 군 관계자 들에 대한 처벌의 길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군부독재의 주역 비델라는 1985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나, 군부의 반발을 우려한 메넴 전 대통령에 의해 1990년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2010년 살인·납 치·고문 등의 혐의로 다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군사 독재 시절 조직적으로 이루어 진 ‘아기 납치(구금되거나 사형당한 반정부 운동가들의 아기 5백여 명을 납치해 군 장 교 가정에 강제로 입양)’에 연루된 혐의로 추가로 징역 50년 형을 선고받아 사실상 종 신형과 다름없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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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랄리토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인 Simon Kuznets는 각국의 경제성장을 연구한 후 세상에 4가 지 종류의 국가가 있는데, 그것은 선진국, 후진국, 일본 및 아르헨티나라고 말했다.

Kuznets가 1985년에 사망했으니 아직 살아 있다면 일본을 한국으로 바꿨을지 모르겠 지만, 아르헨티나처럼 한때 부국이었다가 반세기가 넘는 침체기를 겪은 나라를 찾지 는 못했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에게 아르헨티나는 특별한 나라이다. 외환위기, 하이퍼인플레이션 (Hyperinflation), 환율 페그제(Peg system), 뱅크런(Bank run), 디폴트(Default), 보호무 역, 수입대체, 수출관세, 민영화와 국유화 등 경제학 교과서에서 다루는 특별한 사례 들을 아르헨티나라는 한 나라에서 모두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정치적으로 여섯 차례의 쿠데타와 좌우를 교차하는 페로니즘을 겪고 경제적으로 산 전수전 다 겪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다면, 은행에 맡겨둔 내 돈을 내가 마음대로 찾을 수 없게 된 코랄리토(corralito), 즉 예금지급 제한조치일 것 이다.

아르헨티나는 1989년 연 물가상승률 5,000%에 달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페소화를 달러에 1대 1로 고정시키는 태환조치를 시행한 바 있다. 정부는 태환 정책 을 지탱하기 위해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달러를 끌어들였다. 달러에 고정된 페소로 국민들은 수입품을 값싸게 살 수 있었지만, 수출이 감소하여 실업이 증가하고 1999년 에는 외채 규모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경제 위기가 악화되자 2001년 아 르헨티나 시중은행에서 뱅크런이 발생하였으며, 이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2001.12.3 은 행계좌를 동결하는 ‘코랄리토’ 조치를 단행하였다. 은행 인출은 주당 250페소로 제 한되고 달러화 예금은 페소화로 전환됐다. 시민들의 분노와 폭력 시위 속에서 대통령 은 사임하고, 2001.12.23 아르헨티나는 대외부채 상환을 중단하는 디폴트를 선언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코랄리토’를 경험한 아르헨티나인들은 달러를 선호하고 은행 에 돈을 맡기기를 주저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침대 밑에 숨겨둔 달러만 다 모아도 외 채 문제는 한 시름 놓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2016년 마끄리 정부가 진행한 자금 양성화 조치도 침대 밑 달러와 해외 보유 자산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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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2001년 외채 상환을 중단하는 디폴트를 선언한 뒤, 2005년과 2010년 협상에서 채권단의 93%와 원금의 4분의 3을 탕감받는 채무조정에 합의했다.

그러나 엘리엇매니지먼트 등 소위 ‘벌처(vulture) 펀드’로 불리는 투자사들은 아르 헨티나 채권 일부를 헐값에 매입하여 채무 조정에 합의해 주지 않고, 미국 뉴욕지방 법원에서 아르헨티나 정부를 상대로 소송전을 벌였다. 또한 2012년에는 채권을 전액 보상받기 위해 가나에 정박해 있던 아르헨티나 군함 3척을 압류하기까지 하였다.

크리스티나 정부는 이들과의 합의를 거부함에 따라 아르헨티나는 2014년 7월 돈이 있 어도 기술적으로 외채를 상환할 수 없는 기술적 디폴트에 빠지게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2015.12월 마끄리 대통령 정부 출범 후 재협상에 나서 엘리엇 매니지먼 트 등 투자사들과 합의하였는데,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들이 액면가 20%에 채권을 매입 하여 10배에서 15배에 이르는 수익을 얻었다고 보도하였다. 엘리엇은 과거 삼성물산 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하는 과정에서도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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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츠네르 대통령 부부의 12년 집권

네스토르 키르츠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즈 키르츠네르 부부대통령이 집권한 12년 (2003.5.25~2016.12.09)에 대해서는 ‘성공한 12년’이라는 평가도 있으나, ‘잃어버린 12년’

내지는 ‘낭비한 12년’이라는 엇갈린 평가가 널리 존재한다.

2003년 이후 네스토르 키르츠네르 집권 5년 동안의 경제 성장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 다. 2005.2.25 외채에 짓눌렸던 아르헨티나는 76.15%의 참여율로 채무 구조조정을 성 공리에 마감하였으며, 2005.12.15 외채 전액 상환을 선언하였고, 2006.1월에는 IMF 채 무 98억불 상당을 중앙은행 보유 외화로 상환하였다. 고용 확대로 실업이 감소하였고, 2002년 40%에 달하던 소비자 물가도 2004년 이후 거의 한자리 수로 유지되었다. 이어 진 크리스티나 대통령의 당선은 정치안정과 경제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재선을 포기하 고 부인에게 기회를 준 남편의 후광이 컸으나, 또한 여성의 지위 향상, 페론당에 대한 굳건한 지지, 에바 페론 이미지의 오버랩 등으로 국민의 지지 확보에 영향을 주었다 는 평가도 있다. 물론 크리스티나의 정치적인 경력과 능력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임에는 틀림없으며, 뛰어난 언변과 능숙한 대인관계로 인기가 높았던 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 부부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부부가 정 상적인 선거로 연속하여 대통령에 선출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키르츠네르 부부 대통령은 군사정권 동안 ‘더러운 전쟁’을 주도한 인권탄압 관련자를 처벌하고,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강하게 반대하는 경제정책을 추구하였다.

미주자유무역지대를 거부하고 메르코수르 회원국과 협력을 강화하며, 특히 브라질과 경제협력관계를 맺으면서 라틴아메리카 주변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산아제한과 동성애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키르츠네르 부부대통령이 남미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최우선 외교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미국 및 유럽 제국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차베스 前 베네수 엘라 대통령과의 밀착 및 아르헨티나 중산층 및 빈곤층에 팽배해 있는 반미 정서를 자극함으로써 미국과는 지속적인 갈등 관계를 노정하였다. 네스토르 대통령은 경제위 기 극복을 위한 수출 증대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중국을 중심으로 대아시아 수출(특히 콩 등 농산품)을 늘리면서 아시아 지역과의 통상협력 증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크리 스티나 정부도 이러한 정책 기조를 유지하였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영국 관할 하에 있는 말비나스 제도 반환을 위해 외교적 강수를 고집하였으며, 2008년 인플레이션 억제를 내세워 농축산물 수출세 인상을 시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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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인 시위와 야당의 반대에 막혀 좌절되는 상황을 겪기도 하였다.

수출세 인하 요구 등에 따른 농업계의 반정부 시위와 내수중심/보호주의 경제정책 실 패로 인한 경제 침체 등으로 크리스티나 정부는 정치적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또한 키르츠네르 부부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 대통령 측근 실력자들 사이에 만 연된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등으로 국민들의 지지가 축소되어갔다. 그러한 사회분위기 를 타고 보수우파 마끄리 후보중심의 ‘변화연합(Cambiemos)’이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 의 표심을 움직여 2015.12월 보수우파 정권 창출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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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는 흔히 ‘남미의 파리’로 불린다.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의 후손이 대부 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건축 양식이나 문화 전반에 있어서도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남미의 정취 보다는 유럽의 향기를 더 크게 느 끼게 된다.

□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1946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플라자 데 라 레푸블리카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이 기념탑은 높이가 67m, 바닥의 넓이 는 49평방미터에 이른다. 오벨리스크는 아르헨티나 건축가 알베르토 프레비쉬가 디자 인하고 코르도바 주에서 나는 하얀 돌로 만들어졌으나, 2005년에 기후재해로부터 보 호하기 위해 아크릴페인트를 덮어 새로이 보수하였다.

오벨리스크 표면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겪어 온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이 적혀져 있 으며, 내부로 들어가 206개의 계단을 오르면 꼭대기까지 갈 수 있는데 이곳에서 네 개의 창문을 통해 아름다운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이 모이는 상징적 장소가 되어 왔다. 시민들은 축구 경기 승리를 축 하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며, 정치적 혹은 사회적 항의 운동을 벌이기 위해 모이기 도 한다.

□ 푸에르토 마데로

푸에르토 마데로는 고급 다이닝과 파티로 유명한 강변지역으로, 미니멀리즘을 지향하 는 세련된 지역이다. 원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지저분하고 낙후된 지역 중 하 나였던 이곳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인접한 곳에 새로이 항구를 건설하며 슬럼화 되었 다가 아르헨티나 연방정부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정부가 함께 한 도시재생사업을 통 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맨해튼’으로 자리 잡았다.

거대한 규모의 상업․주거중심지가 된 이 지역에는 산책로, 요트장, 영화관 등 다양한 레저시설이 들어서 있다. 푸에르토 마데로는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한데 이는 아름다 운 일몰과 평화로운 분위기, 세련된 레스토랑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다른 어떤 지역 보다도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 때문이다. 관광 명소로도 유명한 이곳에서는

‘여인의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온 관광객들을 항상 볼 수 있다.

□ 7월 9일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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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대로는 1911년 알베아르 대통령에 의해 건설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상징하는 도로로, 폭이 144m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넒은 도로로 알려져 있다. 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중심 대로로, 그 중심에는 오벨리스크가 솟아 있으며 콜론극장,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등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대표하는 상징물들이 인접해 있다.

□ 콜론극장

콜론극장은 중남미 내 가장 큰 규모와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르헨티나의 대 표적인 오페라하우스이다. 1908년에 건립된 후 2007년부터 3년에 걸친 재건 과정을 거쳐, 아르헨티나 독립 200주년을 맞이한 2010년 5월에 지금의 시스템으로 재개관하 였다. 극장은 르네상스, 아테네, 독일과 프랑스 양식이 합쳐진 혼합 양식으로 건축되 었으며, 당시 건축자재는 대부분 프랑스 등 유럽에서 직접 공수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산 대리석과 프랑스제 스테인드글라스, 베니스 모자이크 등을 사용하여 완공된 콜론 극장은 그 역사성과 대표성을 인정받아 1989년에 국립역사기념물로 지정, 부에노스아 이레스의 랜드 마크가 되었으며,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장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오페라 하우스는 총 2,487석(입석 포함 3,000명 수용 가능)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다.

공연과 좌석에 따라 티켓 가격은 천차만별인데 가장 비싼 좌석과 가장 싼 입석의 가 격 차이는 30배까지 나기도 한다. 그러나 콜론극장은 세계에서 5위 안에 드는 훌륭한 음향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가장 상층부의 입석에서도 소리만은 완벽한 음향 으로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유명한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콜론극장에 서 공연했을 당시, “이 극장은 너무 커다란 결점이 있다. 음향이 너무 완벽하기 때문 에 내 음악이 완벽하지 않으면 금방 관객에게 들통 나 버리게 되는 것이다.”라고 극 찬한 일화가 있다.

콜론극장은 전속단체로 오케스트라와 발레단, 합창단을 두고 있으며 수준 높은 교육 프로그램으로도 유명하다. ISA(Instituto Superior de Arte)라고 불리는 이 교육기관은 콜론극장이 요구하는 수준 높은 아티스트를 양성하기 위해 무용, 오페라 성악과 연출 등 다양한 코스를 마련하여 국제적으로 명성 있는 무용수, 성악가 등으로부터 직접 사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극장은 이러한 인프라를 통해 주로 오케스트라, 발 레, 오페라 공연을 상연하지만 부속 예술 실험 공간인 콜론극장 실험센터를 운영하며 음악극, 콘서트, 연극, 아동 오페라, 영상 상영 및 강연, 컨퍼런스, 워크숍 등 다양한 활동을 선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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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는 한-아르헨티나 수교 50주년을 맞아 국내 아티스트 최초로 성악가 조수미 가 콜론극장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2013년에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솔로 리사이틀을, 2015년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부에노스아이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있었다.

참조

관련 문서

보통 부에 노스아이레스에서 칼라파테로 출발하는 왕복

□ 사무국에서 AMIS의 개요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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