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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화유산과 생활민속 1)

박태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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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근대화와 탈근대화

한강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제1한강교(한강대교) 일대의 넓은 모래밭에서 종달새를 쫓아다니며 겅정거렸던 일이라든가, 무더운 여름철 동대문에서 전동차 로 갈아타고 뚝섬유원지로 찾아가 해수욕과는 묘미가 다른 강수욕을 즐기던 일 들이 우선 떠오른다.

1960년대에 경제개발5개년계획 추진과 함께 한강개발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강변 풍경이 엄청나게 변모하는 것을 목도하며 어리둥절해하던 기억도 새삼스럽 다. 한강의 도시화·산업화는 당면한 국토건설의 과제이기는 하였으나 아쉬운 점 도 없지 않았다고 회고하게 된다. 가령 여의도는 처음에는 시민공원의 녹색공간 으로 존치시킬 계획이었으나 자본권력이 이를 방관하지 아니하여 원래의 방침을 변경시켜 한국의 맨해튼이 되게 한 것이었다고 한다. 시민공원으로 계속 남아 있 었다면 어떠하였을까 반문해보게 된다. 서울 나름의 트라팔가(런던), 시테 섬(파 리)과 같은 광장과 녹색공원이 당연히 한강변에 마련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 방 및 강변도로(당시의 김현옥 시장은 윤중제라는 신조어를 붙이기도 하였다) 토목공사 가설의 필요성에 따라 밤섬, 저자도(닦섬), 뚝섬 등이 사라져버린 것은 일단 한강 문화자원의 손실이었다고 회상하게 된다. 시민들의 접근권과 조망권 을 차단하고 흐트러뜨린 강변도로라든가 아파트촌의 난립에 대해서는 여러 관찰

1) 이 글은 국토연구원에서 기획·편찬한 「강과 한국인의 삶」에 기고하였던 원고를 요약·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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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도 오늘에는 갖게 된다.

한성부에 속하는 한강에 대해서는 특히 경강 (京江)이라 하였는데, 이처럼 경강인 한강의 인 문학은 특별한 바가 있었다. 동호(東湖)-노량 진-서강(西江)으로 내려가는 한강은 그 문화지 형이 서로 다른 특성을 지녔다. 동호는 남한강·

북한강 상류로 통하는 내륙 수운의 강항을 이 루었고, 노량진은 삼남대로와 영남대로 육로 도 선장의 교통 요지였으며, 이와 달리 서강은 한 강 하류 삼각주에서 임진강을 만나 조강(祖江) 을 이루고 강화만을 끼어 서해 바다로 나가는 해 운의 항구로 번성하였다. 내륙 수운으로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등에 이르는 산간오지까지 왕래 할 수 있는 고속도로 구실을 하고, 전국을 엮어 놓은 9대로의 중앙지대를 엄호하여 문자 그대 로 경강의 정치·경제·군사 문화특구를 형성 케 하고, 여기에 서해 바다를 열어놓아 전국의 물산을 집산시키고 중국·일본 등의 해양진출 과 왕래를 원활하게 하였던 한강이었다. 한강은 이처럼 내륙 오지와 전국 교통로, 해양로의 모 든 혜택을 서울에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국토문화에 관심을 가져온 처지에서 살필 적 에 안타까운 현상이 있다. 서울강인 한강이 베 풀어온 국토 풍요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정작 서 울 시민들이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 론 한강의 문화유산을 어찌 지속가능하게 계승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소홀하기만 했 던 지난 시대의 개발 우선주의에 대한 반성적 성 찰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거 룻배, 나룻배, 너벅선, 판옥선 통행의 과거시대

로드맵을 새롭게 작성해볼 필요가 있게 된다. 정 작 오늘에 이르러서는 경강인 한강이 거대한 콘 크리트 숲의 미로(迷路)처럼 되어 어선, 세곡선, 관선, 병선들이 드나들며 온갖 혜택을 누리게 하 던 수리(水利)의 풍요를 놓치게 하는 바가 있다.

첨단기술로 조형(造型)되는 오늘의 한강은 야경이 불야성을 이루어 대단히 화려하고 윤택 한 미래도시의 풍광을 펼쳐놓고 있지만 메갈로 폴리스 한강 예찬만으로는 되레 헛헛하기 이를 데 없는 점도 있는 것이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수도들을 순력해보지 않은 이들이라 할지라도 서울강 한강이 단연 빼어나다는 것을 충분히 실 감하게 되기에 묻지 않을 수 없다. 근대화의 젖 줄이 되어온 한강정치경제주의 차원과는 달리 산업화의 소란을 견뎌내며 훼손되기도 했던 한 강인문주의의 특성을 어찌 발휘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질문해보아야 한다. 압축개발시대 산업 화의 중심지였던 한강, IT 첨단기술로 관리되는 유비쿼터스의 한강 자랑에는 정녕코 누락된 요 인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공해오염이 방지되는 자연생태의 한강, 시민문화가 꽃을 피우는 생활 문화의 한강을 되찾아 살려내야 한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슈트라우스)이라 든가 스메타나의 음악 몰다우강처럼 국토의 얼 과 넋을 지켜온 한강,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맑은 영혼을 노래하는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 리 시편에 나오는 파리 센강에 못지않아야 할 서울의 한강, 곧 한강 문예주의 기틀이 과연 어 떠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노벨문학상 을 받은 「드리나강의 다리」(이보 안드리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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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이슬람교도, 유태인들이 함께 거주하며 갈등과 화해를 거듭하는 대 하 서사문학이었고, 러시아 혁명의 빛과 그림자를 폭넓게 담아낸 「고요한 돈강」

(숄로호프), 그런가 하면 평생토록 미시시피강을 떠나지 않고 이 강과 고락을 함 께하며 「미시시피강의 생활」,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작품을 남긴 마크 트웨 인을 떠올린다.

이에 한 문학인으로 송구하기 이를 데 없다. 정치인의 한강, 경제인의 한강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인문·문예의 한강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문화예술인의 줄 기찬 탐구, 끈질긴 문예캠페인이 전개되었어야 마땅한데 구차한 변명을 내세울 나위도 없이 직무유기를 해온 것이 아닌지 깊이 반성해보아야 할 바가 있기 때 문이다.

그린웨이의 한강, 청사(靑史)의 한강

한강 개념도는 남한강을 본류로 하고 북한강을 지류로 삼는 지리부도로서 작성 된다. 태백산 줄기의 검단산에 있는 검룡소가 가장 먼 거리에 놓여 있으니 한강 본류의 시원지가 된다고 근대지리학은 측정하지만, 역사를 통해서는 줄곧 오대 산의 우통수를 발원지로 이해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전통지리학의 개념도도 무시 할 바는 아니다. 검룡소 발원의 골지천은 정선 아우라지 일대에서 대관령-배나 드리-송천으로 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나고 다시 나전 일대에서 우통수로부터 오 대천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끌어들여 이윽고 조양강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어 천(漁川)은 화암약수와 몰운대의 정선 소금강을 갈무리하면서 뒤미처 조양강에 합류되는데 이로부터 천하절경을 이루는 영월 동강의 곡류가 된다. 다른 한편으 로 오대산 쪽의 속사천과 치악산 쪽의 주천강이 합류된 평창강은 영월 땅으로 들 어서면서는 서강이라고 개명되어 단종애사의 사연이 서려 있는 청령포로 흘러내 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강과 서강은 합류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맞게 되는 데, 이로부터 비로소 (남)한강이라는 본 이름을 획득한다. 복잡다단한 최상류 일 대의 여러 갈래 수계(水系)는 오늘에 이르러 문화기행 답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 수려한 경관을 체현해볼 수도 있게 되었다.

북한강의 발원지는 남쪽의 오대산 - 설악산 일대와 북쪽의 금강산 일대에 걸쳐 있는데, 먼저 제2지류가 되는 내린천의 족보부터 거슬러 올라보면 북한 강-남한강이 똬리의 형세를 이루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내린천은 오대산 북쪽 산록이 되는 계방산의 계방천과 자운천, 방대천을 끌어모으게 되는데, 이는 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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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흡사하다. 더구나 내린천은 엉뚱하게 북류 하여 남류하는 오대천과 상반되는데, 북한강과 남한강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을까. 내 린천은 마중물의 형세를 보이면서 인제의 소양 강에 합수되는데, 강원도 내륙산간지역을 드렁 칡처럼 얽히게 하는 북한강의 산전수전(山戰水 戰) 경관이 이로부터 본격화된다.

북한강의 본류는 금강산 일대에서 발원되는 금강천이 월남하여 평화의 댐-파로호를 거쳐 춘천댐으로 내려오는 물줄기가 된다. 소양강댐 건설로 국토 최대의 인공호수 소양호가 생겨난 것처럼 춘천댐 공사로 인해 조성된 인공호수 춘 천호에도 관광자원을 활용하는 인프라 시설들이 차츰 정비되어 새로운 명소로 각광을 받는다. 의 암댐으로 생겨난 의암호, 팔당댐이 만들어낸 청 평호는 호반도시 춘천의 지형지리를 바꾸었거니 와, 관광개발 바람이 불고 있는 북한강의 또 다 른 지류 풍광명미의 홍천강도 뒤처져 청평호로 들어오는 강이다.

운명적인 만남이라 해야 할지, 두 사랑의 맺 음이라 해야 할지 두물머리라 부르는 양수리 (兩水里, 양평군 양서면) 일대가 남한강과 북한 강의 합수머리를 이루게 되는데, 이로부터 한강 은 장강대하의 본색을 발휘하는 만큼 그 뱃노래 곡조를 달리 부르도록 한다. 한강수타령은 어 떠한 민요인가? 5음계 굿거리장단이고 양산도,

경복궁타령과 함께 입창(立唱, 선소리)에 드 는 경기민요라는 것이 한강수타령이라는 노래 에 대한 사전적인 풀이다. 사설이 활달하면서 다 양하고 다채로운데, 서울 한강 중에서도 노들강

한강수라 깊고 맑은 물에 수상선 타고서 에루화 뱃놀이 가잔다

(후렴) 아하 아하 에헤야 에헤야 어허야 얼싸함 마 둥게 디여라 내 사랑아

조요한 월색은 강심에 어렸는데 술렁술렁 배 띄 워라 에루화 달맞이 가잔다

한강수라 맑고 맑은 물은 주야장천 흘러서 노들 (노량진)로 흐르고 흐르네

양구 화천 흐르는 물 소양정을 감돌아 양수리를 거쳐서 노들로 흘러만 가누나

정선 영월 흐르는 물 단양팔경 감돌아 여주 벽절 (신륵사) 지나서 노들로 흘러드누나

노들강변 봄버들 경치가 좋아서 좋았나 물 길러 간 처녀들 맵시가 좋아서 좋았나

앞강에 뜬 배는 낚시질 거루(거룻배)요 뒷강에 뜬 배는 님 실러 가는 배란다

노들에 버들은 해마다 푸르른데 한강을 지키던 님 지금은 어디 계신가

한강수 푸른 물아 너는 어찌 늙지 않어 만고불변 한결같이 흐르는데

아하 아하 에헤야 무정할손 사람만이 늙는구나.

농업경제시대의 서울 한강수가 산업경제시대 를 거쳐 지식정보경제 단계에 이르고 있는 엄청 난 환경변화 속에서 경기민요 한강수타령이 잊 어버린 노래, 어쩌면 잃어버린 노래가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함에도 이 민요의 잊어버 림, 잃어버림의 상실된 문화콘텐츠의 콘셉트 를 새롭게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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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수타령에는 이 강물과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 누리는 삶이 스며 있고 녹 아 있으나 오늘의 서울 시민에게 한강수는 더 이상 삶터의 바탕이 되고 있지는 않 다. 한강이 생활 바깥으로 빠져나가서 마치 타인의 강처럼 되고 만 것을 우선 확 인해보게 되는 것이다.

사설의 한 대목에 나오는 것처럼 한강을 지키던 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묻지 않을 수 없고, 한강수 푸른 물은 만고불변 한결같이 흐르는지 어떠한지 지속가 능한 한강과 불가능한 한강의 상관관계를 새롭게 정립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민요에 나오는 건강한 서민정신의 한강을 지식정보시대의 중요한 문화자원으 로 재출력하고자 한다면 과연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

습수(濕水) - 산수(汕水) - 열수(洌水)

정약용은 소내(召川), 마재(馬峴), 또는 두릉(杜陵)이라 부르던 강변마을에서 태 어나 성장하고 서울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한 후에 온갖 영욕을 겪으면서도 고향 의 생가와 원림을 유지하였으며 아울러 고향에서 작고하여 묻혔는데, 그의 75년 생애의 전체 과정은 이러한 한강 또는 경강(京江)의 정치경제지리학 내지는 정신 문화지리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의 재세 시에는 소내 고향이 경기도 광주 군 초부면 마현리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가 된다.

정약용은 열수(洌水), 또는 열초(洌樵)라는 호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그의 고향에 대해서는 열상(洌上)이라 부르곤 하였는데 이는 열수의 강 언덕이란 뜻이었다. 그 자신은 다산(茶山)이라는 호보다는 열수라는 호를 더 선호한 쪽이었는데, 75년 생애 중에서 강진 다산 땅은 18년 유배지의 애환을 아로새기 게 했던 것이었으나 마재 본가의 열수야말로 전 생애에 걸친 것이었다. 열수는 덕소 - 팔당-양평 일대의 한강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오늘에는 이러한 명칭 자 체가 생소하기만 하다. 박람강기의 그는 어떠한 근거에서 두물머리 아랫녘의 한 강을 열수라 지칭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충실히 고증하고 열심히 답사를 다녔다.

정약용은 배를 타고 경강, 남한강, 북한강 일대를 누구보다도 줄기차게 탐방하 였고, 평생에 걸쳐 한강 기행시편들과 기행문들을 다수 남겼는데, 노년에 쓴 산 수심원기(汕水尋源記)라는 그의 산문을 소개해본다. 산수(汕水)라 부르는 강의 근원을 밝혀보고자 한다는 논술인데, 산수란 곧 북한강을 가리킨다. 그는 1818 년에 강진 유배에서 풀려나 마현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춘천 북한강 일대를 두 번 찾았다. 1820년 음력 3월에는 형 정약현과 함께였고, 그의 나이 62세이던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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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심원기를 집필했다.

그는 산수심원기에서 북한강에 대해서는

산수(汕水)라 표현하고, 남한강은 습수(濕 水), 그리고 양수리에서 두 강물이 합류하여 그 의 고향 남양주 마현으로 흐르는 한강 본류에 대 해서는 열수(冽水)라고 하였다.

그는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의 조선전(朝 鮮傳)에 조선에는 산수(汕水)와 습수(濕水), 그 리고 열수(洌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증하면서, 열수는 한강 본류를 지목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인한다. 산수와 습수 두 물이 용진 (龍津)의 서쪽에서 모이는데, 산(汕)이란 산곡 (山谷)의 물을 뜻하고, 습(濕)이란 원습(原濕) 의 물을 뜻하므로 북한강이 산수이고 남한강이 습수이며 두 강물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용진 서 쪽)부터 열수라 불렸다고 밝히면서 그의 집이 있는 열상(洌上) 일대의 문화역사지리를 규명했 다. 정약용의 글에 나오는 용진 서쪽은 대체로 오늘의 두물머리 일대를 지목하는 것이 분명한 데, 현재의 행정지명으로는 양평군 양서면 양수 리와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또는 송촌리를 잇 는 강나루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정확한 위 치는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기에 따라 물줄기가 달리 흐르고 나루 의 위치도 변하곤 하였으며 갈수기에는 걸어서 강을 건널 수도 있었기 때문에 수로의 길이 여럿 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두 용진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조운 수로가 여러 군데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라 한다.

흔히 아무리 늦어도 늦은 것이 아니라 말한

의 서로 다른 물의 성질이라든가 온도, 습도 의 차이 등을 측정하고 체험하는 21세기 버전 의 녹색생명문화단지를 조영해볼 수 있기를 기 대한다. 여기에 정약용의 또 다른 기록이 보탬 이 될 것이다.

정약용은 1819년(순조 19) 4월 15일부터 형 과 함께 충주에 있는 선산 묘소에 참배하기 위 해 남한강 뱃길 여행을 다녔고, 다음 해에 아들 학연과 함께 두 번째로 북한강 춘천 선상 유람을 했던 것인데, 이를 계기로 남한강 시모음 75수와 북한강 시모음 25수의 창작 시편을 엮어 「귀전 시초(歸田詩草)」라는 시문집을 꾸몄다. 이 시집 의 첫 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감회를 밝혔다.

지난해에는 황효수 가에 있던 사람이(去歲黃驍 水上人)

금년 봄에는 다시 녹효수 가에 왔나니(綠驍水上 又今春)

이어서 스스로 주석을 달아놓았다.

황효는 여주(驪州)이고, 녹효는 홍천(洪川)이 다. 그래서 남쪽(남한강)을 황효수라 하고 북 쪽(북한강)을 녹효수라 한다.

효(驍)는 날랜 말을 가리킨다. 따라서 녹효 수는 녹색 말처럼 달리는 강물이고 황효수는

황색 말처럼 달리는 강물이 된다. 녹효수(녹색 강)는 홍천강이고 황효수(황색 강)는 여주 여 강의 별칭이라는 것이었으니, 오늘에 이를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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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긍·납득할 수 있을까? 북한강-남한강은 물의 성질이라든가 온도와 습도의 차이만 아니라 산악의 강, 평야의 강으로 수질마저 격차를 보였다는 것인데, 이에 관한 과학적인 실측 조사가 이루어지기를 당부해본다.

정약용의 습수-산수 고찰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다른 고전도 있다. 안정복(安 鼎福)은 정약용보다 50년 전에 태어난 윗세대에 속하는데, 「동사강목」 부록 하 권에서 열수고(考)라는 논문을 통하여 열수가 한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고 고증한다(다만 그는 洌水가 아니라 列水라고 기록한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 분려산(分黎山)이 있고 거기 에서 열수(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점제(黏蟬)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는데 수로 의 길이가 840리이고, 또 열구현(列口縣)이 있는데 열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어 귀에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내지에 수원(水源)이 800리가량 먼 것이 없는데, 한수의 수원이 가장 멀어 그 잇수가 800여 리가 충분히 되니, 열수는 바로 지금 의 한수인 것이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요약한다. 한강의 수원이 하나는 강릉 오대산에서 나오 는데 그것이 남강이고, 다른 하나는 회양(淮陽)의 말휘령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북강이다. 「사기」에는 습수와 산수가 합쳐서 열수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강 상류의 남강과 북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탄열현, 열구현에 대 해 고증한다. 탄열은 아마도 남강-북강이 만나는 용진 일대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하지만, 열구(列口)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구려의 혈구현 (穴口縣)은 지금의 강화(江華)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에 비정시켜 열구는 강화 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열수의 탐구, 그리고 산수와 습수의 필드 스터디는 가능 여부를 떠나 오늘에 활용될 수 있는 실사구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 할 수도 있을 터 다. 그러함에도 국토문화지리의 콘텐츠 진흥을 위해서는 이러한 전통시대의 한강 개념도 탐구가 소중한 문화유산의 값어치를 지닐 것이라고 확언해두고자 한다.

한강 문화자원과 문화인프라

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 따라라는 주제의 테마기행, 북한강의 흐르 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의 문예기행을 기획해본 적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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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이라는 인기 없는 내용의 학술답사를 꾸며 보기도 했다. 한강은 한강스페셜 정보를 엄청 나게 저장해두고 제공해주려 하는데 이를 출력 시켜 받아내려는 이가 드물었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하지만 탈산업문명-지식정 보문명의 전환기에 새롭게 전향(前向)해야 하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한강 문화지도를 새롭게 작 성해보고자 하는 요구와 의욕이 확산될 것이다.

한강 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 연구가 요청된다. 암사동, 미사리, 수양개의 선사유적 등은 1960년대 이후에 새롭게 발굴되거나 본격 적으로 조사·연구되고 있지만,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문화 동력이 충원될 필요가 있다.

삼한시대에는 한강 일대가 마한 54국의 근거지 를 형성하여 부족사회에서 국가사회로 이행되는 데, 이 또한 역사적 상상력을 통한 접근에 의존 하게 되는 쪽이다. 원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왕경(위례성)이 자리 잡게 됨에 따라서 한강문 화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더구나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에 백제의 한 수위례성을 함락시키면서 북한강 일대는 물론 남한강 중상류 지역까지 장악하는데, 이때 한강 이 역사의 중심 무대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특히 남한강의 충주 일원에 국원성을 세우는데, 그때 까지는 주목을 받지 못하던 장소에 이러한 지명 을 붙여 산성과 도성을 쌓았다는 것은 정치군사 지리학의 요충지 발견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앞서 장수왕은 427년에 압록강 의 국내성에서 대동강의 평양 안학궁으로 왕도 를 옮기는데, 남한강의 국원성 건설은 곧 압록강

록강-대동강-한강이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아틀라스 한국사의 진전임에 틀 림없는데, 미래 코리아 블루오션의 문화원형으 로 이를 고찰해보아야 한다.

역사문화지리학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지 만 충주-여주-양평의 한강문화지리학이 제대 로 조명된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 한의 한강, 백제의 한강, 고구려의 한강, 신라의 한강으로 주인을 바꾸어가던 시절은 물론이려니 와 조선후기의 경강상인들에 의한 한강 상업 번 성에 관한 것들도 현지조사를 통해 문화복원을 기획해보아야 할 것이다.

한강의 문화유산, 문화자산, 문화자원…….

한강 문화자원 개발에 앞서 한강 문화자산의 실상이 어떠한가에 대한 확인이 선행되어야 하 고 한강에 대한 문화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 나 문화자산·문화자원 개발과 활용에 관해서는 문외한의 처지이므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논급 하지 않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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