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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건국과정과 도읍지 위치에 관한 문헌연구-지양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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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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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읍지 위치에 관한 문헌연구

지양미

*

44)

Ⅰ. 머리말

Ⅱ. 부여의 건국 과정과 시기

1. 선행연구사 검토 2. 부여의 건국 과정과 시기

Ⅲ. 부여의 도읍지 위치

1. 북부여 도읍지 위치

2. 동부여(가섭원 부여) 도읍지 위치

Ⅳ. 맺음말

국문요약

부여는 단군조선 붕괴이후 열국시대를 이끈 중심 국가였으나, 사 료의 부족 등을 이유로 그 실체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한 편이다.

특히 각 부여의 건국과정에 관한 문헌을 분석함에 있어서 학계에서 는 서로 다른 견해로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제대로 정리된 것

* 인하대학교대학원 융합고고학과 박사과정

(2)

이 거의 없다. 글쓴이는 사료 분석을 통해 부여 건국과정과 도읍지 위치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었다. 하나는 ‘북부여’, ‘동부 여’, ‘졸본부여’, ‘남부여’ 등 나라 이름에 ‘부여’를 많이 선호했었다는 것은 중심이 되는 ‘부여’가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서로가

‘부여’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른바 원조경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다. 다른 하나는 동부여 건국은 북부여에서 정변이 일어났음을 의미 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는 건국시 기의 차이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졸본은 북부여와 졸본부여 그리 고 고구려의 건국초기 도읍지로 그 위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환인 이 아니며, 동부여 도읍지 가섭원은 오늘날 개원 부근이라는 점이다.

주제어 :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 머리말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

1)

로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를 연결하 는 이른바 열국시대의 중심국이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큰 나라였던 단군조선의 해체는 위만의 등장으로 급물살을 타게 되었 고, 조선의 많은 거수국들이 군웅할거 하는 열국시대가 되었다. 그 중심에서 가장 큰 힘을 가졌던 부여는 고구려에 복속되기까지 약 9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史料의 부족과 반도사 관으로 인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 른 견해로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제대로 정리된 것이 거의 없

1) 고구려의 <廣開土太王陵碑文> :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

삼국사기

≫ <백

제본기>“臣의 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臣與高

句麗, 源出扶餘)”

(3)

다고 하겠다. 수천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헌들은 대부분 당대가 아닌 후대에 완성이 되었고, 그 다음 후대에서 기록들을 옮기 는 과정에 오탈자가 나오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에 따라 첨삭이 가해 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료(史料)에서 행간의 숨은 뜻을 제대로 읽 어내는 것이 역사연구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존의 부 여사 연구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여에 관한 여러 문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나라 이름 에 대한 실재성 여부다. 부여에 관한 문헌기록을 보면, ‘대부여’, ‘부 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남부여’

2)

등이 있다. 문제는 각각 의 부여가 존재했는가 아니면 한 두 곳의 부여를 여러 이칭으로 표 현한 것인가에 따라 여러 주장들이 있다. 만약 여러 부여가 존재했다 면, 당시에 ‘부여’를 많이 선호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이는 서로가

‘부여’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른바 원조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부여의 건국시기와 위치에 관한 문제가 있다. 이 역시 여러 부여의 존재에 대한 인정 여부에 따라 건국시기와 위치가 다르 게 해석된다.

마지막으로 대외관계인데 이 또한 여러 부여에 대한 인정 여부에 따라 각 부여간의 관계 및 부여 이 외의 국가 간의 관계가 다르게 이 해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다양한 문헌 기록

3)

을 비교 검토하여 부여의 건국과정과 건국년도를 밝히고, 아울러 그 중심 도읍지 위치를 추정

2) 백제가 개명한 국호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3) 한국 역사학계에서 인정하고 있는 부여 관련 문헌들은 단편적인 기록만을 전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이

≪前漢書≫나 ≪通典≫의 기록을 재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일각에서 연구되고 있는

≪北夫餘紀≫

만이 북부여의 역사를 자세히 전하고 있다. 그런데 ≪북부여기

를 싣고 있는

≪桓檀古記≫

에 대해서는 위서논쟁이 있으나 이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 여기서는 참고 자료로 인용하고자 한다.

(4)

하여 부여에 관한 여러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자 한다.

. 부여의 건국 과정과 시기 1. 선행연구사 검토

부여사 연구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우리 역사의 한 축으로 서 연구되기 시작하였는데, 대부분 북부여와 졸본부여의 건국과정을 잘 못 이해하고 있어 혼란만 가중 시켰다. 특히 일부 실학자들의 잘 못된 지리고증은 일본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했고 지금 까지도 부여사 연구의 정확한 고증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노태돈박경철송기호에 따르면 부여는 예맥(濊貊)의 한 동아리 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기원전 3∼2세기 송화강 유역을 중 심으로 건국되었으며, 고조선과 병존하였고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고 구려가 출현할 때까지 예맥문화권을 지탱하는 핵심적 세력이었다고 한다. 북부여는 탁리국 출신의 동명집단이 중심이 되어 길림지방을 그 중핵지로 기원전 3∼2세기 말 경 국가를 형성, 기원 후 4세기 중 반 경 농안(農安) 지방으로 그 중심지를 이동, 이후 494년까지 존속 한 바 있는 ‘부여’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동부여는 고구려 건국 당초부터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기원 후 285년 선비 모용외의 제1차 부여 강습(强襲)으로 부여(‘북부여’)의 일 부 핵심 지배집단이 옥저 지방으로 망명 건국한 나라로서, 410년 고 구려 광개토왕의 군사행동에 의하여 공멸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4)

4) 박경철, 새로운 부여사상(夫餘史像) 정립을 위한 몇 가지 과제, 선사(先史)와 고대(23), 177쪽.

(5)

이기동은 부여를 만주에서 최초로 형성된 국가로 보았고, 그 지배 층은 맥족이며 건국신화를 근거로 북방에서 송화강 유역으로 남하하 여 예족의 땅에서 건국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여는 농업사회로 변화하면서 자체 방어능력을 상실했고, 5부 연합 체제를 극복하여 중 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5)

조법종은 부여를 기원전 2세기경 이전부터 494년까지 현재의 북만 주 지역에 존재한 예맥족 계통의 국가로서 고구려 백제의 모체

6)

보고 있다. 주로 문헌에 나오는 건국신화를 분석하였는데, 󰡔논형(論 衡)󰡕 길험편(吉驗篇)」의 기록을 바탕으로 북방 계통의 고리국 출신 인 동명 집단이 그 곳에서 세력 갈등을 겪다가 송화강 쪽으로 남하 하여 정착하면서 그 곳에 있던 예족을 중심으로 부여를 건국한 것이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릉비>에 나오는 북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 부여를 뜻하므로 북부여를 고리국(또는 탁리 국)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부여 관련 기록은 고구려 주몽의 건국과 연결되어 부여의 역사성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신화를 설명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하였다.

7)

윤내현은 부여를 지금의 롼허(灤河) 상류 유역에 있던 고조선의 거 수국(巨帥國)으로 이들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원래의 부여지역과 구 별하기 위해 북부여라 하였다고 한다. 북부여는 󰡔사기󰡕 「화식열전 연(燕)은 북쪽으로 오환⋅부여와 접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지금의 허베이성 북부와 내몽고자치구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서주(西周) 시대 이래 연나라의 동북경계가 난하였음을 근거로 진시황제가 중국 을 통일한 기원전221년 이전부터 연나라의 동북부에 있는 롼허 상류 유역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59년에 주민들과 함께 동쪽으

5) 이기동, 한국민족사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연구37, 2005.3, 8-9쪽.

6) 조법종, 신화가 들려주는 부여건국 이야기,고조선 단군 부여, 동북아역사재 단,2007.129쪽.

7) 같은 책, 130-133쪽.

(6)

로 이동한 북부여의 해부루왕은 송화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토착인 들을 규합하여 지금의 지린성 북부에 위치한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동부여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8)

고구려 역시 요서 지역에 있던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한무제의 침 략으로 고구려의 주민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하 동부 유역에 거주하게 되었고, 환인지방에서 토착민들을 규합하여 기원전37년에 졸본에 도읍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9)

2. 부여의 건국 과정과 시기

1) 북부여

북부여 건국에 관한 대표적인 기록은 󰡔삼국유사󰡕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전한서󰡕

10)

에 선제(宣帝) 신작(神爵)3년 임술년 4월8일에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홀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 고 왕이라 하며 국호를 북부여라고 했다.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 하고 아 들을 낳아 부루라 했는데, 해(解)를 씨로 삼았다. 왕은 이후에 상제의 명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에 도 읍을 세우고 졸본부여라 했는데 바로 고구려의 시조다.

11)

위 기록은 북부여와 동부여 그리고 졸본부여의 건국 과정을 함축

8) 윤내현⋅박성수

이현희 공저, 새로운 한국사, 집문당,2005년,120쪽.

9) 같은책, 128쪽.

10) 중국 전한의 역사를 기록한 책.전 120권.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로, 후한의 반고(班固 : 32∼92)가 82년(建初 8) 무렵에 완성했다

11) 󰡔三國遺事󰡕

北夫餘條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

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募漱 生子名

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

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

(7)

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해모수는 홀승골성에서 북부여를 세웠고, 그의 아들인 해부루는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으며, 동명제가 세운 졸 본부여가 고구려의 시조라고 한다. 그리고 북부여의 건국시기를 한 나라 선제 신작3년 임술년(기원전 5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근거로 제시한 󰡔전한서󰡕에는 위와 같은 기록이 없다. 󰡔고기󰡕는 지금 전하지 않으므로 󰡔전한서󰡕의 기록 여부가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전한서󰡕 어디에도 북부여 건국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 여 북부여 건국 과정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전하는 󰡔북부여 기󰡕

12)

에는 임술년

13)

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해모수 집권 말기에 위만 의 망명요구(기원전 195년)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북부여가 건국된 임술년은 기원전 239년이 된다. 북부여 건국에는 두 가지 의문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건국시기인 임술년이 언제인가라는 점으로 이 는 훗날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출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사서 의 기록으로 북부여의 건국 시기는 약 200여년의 차이가 난다. 그런 데 󰡔삼국유사󰡕에서 근거로 제시한 󰡔전한서󰡕에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기록에 대한 신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삼 국유사󰡕에는 ‘전한’이 아닌 ‘전한서(前漢書)’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전 한서󰡕에 근거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된 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삼국유 사󰡕가 조선 후기에 중찬되는 과정에서 생긴 오기(誤記)이거나, 다른 하나는 일연이 집필과정에서의 오류일 가능성이 그것이다. 지금으로 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북부여 역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적 어 놓은 󰡔북부여기󰡕의 임술년(기원전239년)이 사료적 가치가 더 높다 고 본다. 이와 관련된 주몽의 출생 기록은 뒤에서 논하겠다.

두 번째는 왜 부여가 아니고 북부여인가라는 점이다. 북부여나 동 12) 고려말의 학자 范樟(?∼1395)이 저술하였다.

13)

≪北夫餘紀≫ “始祖檀君 解慕漱 在位四十五年 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

望之苦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

(8)

부여, 심지어 남부여까지 부여라는 이름 앞에 방위를 붙여서라도 ‘부 여’를 선호했다면, 원조 격인 부여가 있었음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원 부여의 존재가 얼마나 크면 서로가 그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이름을 빌어다 썼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단서는 󰡔단군세기󰡕에 있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기원전 425) 3월 큰 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께서는 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 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버렸 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아, 마침내 3월 16일 단을 쌓아 하 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이름을 대부여라고 고 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 불렀다.

14)

단군이 다스렸던 조선은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변경했고, 기존의 국명이었던 조선을 삼한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한이 조선 으로 승격되었고 그 위에 ‘대부여’는 최고의 상징적 가치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반대로 지방 정부인 삼한의 권한이 중앙 정부였 던 조선의 권한만큼 커졌다는 의미가 된다. 즉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으로 통치체제의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 때 가 조선이 개국한지 1908년이 된다. 󰡔삼국유사󰡕 등의 사료에서 ‘단군 이 1908세에 산으로 들어갔다’

15)

는 기록과 일치한다. 즉 단군왕검이 열었던 ‘조선’의 역사는 그 시점에서 끝이 났고, ‘대부여’의 역사가 시 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여는 여전히 단군의 나라였고 강화된 지방 권력을 이용해 세력을 잡은 해모수는 민심을 잡기위해서라도 단군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북부여’를 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부여 14)

≪檀君世紀≫“四十四世檀君 丘勿 在位二十九年 丙辰元年三月大水浸都城賊 大亂丘勿率兵一萬往討之賊不戰自潰 遂斬于和沖於是丘勿爲諸將所推乃於三 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 于藏唐京改國號爲大夫餘改三韓爲三朝鮮”

15) 󰡔三國遺事󰡕

古朝鮮 “壇君乃移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9)

는 단순한 국명 이상의 의미를 내포 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북부여라는 이름을 통해 ‘북’쪽에 위치한 북부여의 기준점 ‘장당경’이 된다. 즉 장당경은 북부여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북쪽에는 중앙정부의 통제권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동부여

동부여의 건국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유사󰡕

동부여에 나온다.

부여왕 해부루……국상 아란불이 말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 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 히 도읍을 정 할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 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16)

두 사서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위 구절은 북부여에서 정변이 있었음 을 말해주고 있다. 기존의 왕을 밀어낼 정도로 힘을 가진 자가 등장 했으나, 신구 세력 간의 권력 이동은 무력적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다음과 같 이 전한다.

16)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扶餘王解夫婁……其相阿蘭弗曰日者,

天降我曰將使

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宜五穀, 可都

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

子解慕漱”

(10)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 들고, 날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익지 않으 면, 갑자기 그 왕을 책망하는데, ‘혹 바뀜이 마땅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17)

이것은 부여의 대표적인 정치문화의 행태로 왕의 권한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흉작은 치명적 상황으로 백성의 왕에 대한 신뢰지지기반가 없다면 민심은 이반되었다는 것이다. 부여의 이 러한 정치문화적 특징을 감안했을 때, 북부여에서의 해부루의 축출 은 민심이 이미 신진 세력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해 ≪삼국사기≫는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는 표 현을 통해 당시의 지지도를 나타내고 있다. 즉 해모수는 북부여를 세 운 사람이고, 해부루는 그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해모수라 칭 하는(自稱 解慕漱)’ 자에게 밀려났다는 것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에 버금갈 정도의 인물로 북부여의 중흥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일부에서 ‘자칭 해모수’를 진짜 해모수로 해석하여 스스로 역사 논리의 오류에 빠진 경우도 있었다.

󰡔북부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재위 22년, 제재위 27년

계유 원년(B.C.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13년이다.

…… 일찌기 북부

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 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 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18)

17) 󰡔三國志󰡕

卷三十 <魏書東夷傳> “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 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18) 󰡔北夫餘紀󰡕

五世檀君 高豆莫(一云豆莫婁) 在位二十二年 “在帝位二十七年癸酉

元年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北夫餘衰漢寇熾盛慨然有濟世之志至是卽位於

卒本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

(11)

해부루를 밀어낸 새로운 정치세력이 고두막이라는 것이다.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에 의해 세워진 북부여는 위만의 망명(기원전 195년) 과 다음해 위만의 배신으로 북부여의 서쪽 지역에 위만조선이 세워 졌다. 위만조선은 북부여와 한(漢)나라 사이에서 통교를 방해했다는 기록

19)

으로 미루어 북부여는 무역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역이 원할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국가 재정 등에도 영향을 미치 게 되고 건국 된지 1세기 만에 국가의 위상도 쇠퇴해졌을 것이다. 이 때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하였는데, 기원전 108 년의 일이다. 한나라는 이어 북부여의 국경을 침략하였고, 제대로 방 어하지 못한 북부여 왕실 보다는 고두막의 활약에 민심이 기운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해부루 일행은 북부여의 동쪽에 있는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이주하 여 동부여를 세웠다. 이 때가 기원전 87년이다. 이렇듯 국내에서는 조선->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의 변화가 있었지만, 한나라는 위 만조선에 가로 막혀 그러한 변화를 알지 못했기에 모두 ‘부여’로만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졸본부여(고구려)

졸본부여는 주몽이 세웠고 고구려로 나라 이름을 바꿨다. 이에 앞 서 동부여의 왕이 된 금와는 우발수에서 만난 임신한 유화 母子 거두었으나, 나중에 살해 위협을 느낀 주몽은 동부여를 탈출하였다 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유사󰡕 고구려는 전하고 있다.

󰡔통전󰡕

20)

에 의하면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에 북부여로부터 동남방으로 19) 󰡔三國遺事󰡕

衛滿朝鮮 “위만은 왕위를 아들에게 전했고 이후 손자 우거(안사

고는 손자의 이름이 우거라고 했다.)에 이르렀다. 진번과 진국이 글을 올려 한나라 천자를 알현하려 했으나, 우거가 길을 막아 전하지 못했다.(안사고는 진은 진한을 말한다고 했다)(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

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12)

나와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홀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써 성을 삼았다.”했으며, 󰡔고기󰡕에는 이르기를 “주몽이 부여로부 터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곳 인 듯하다.

21)

그런데 󰡔통전󰡕에는 북부여가 아닌 부여

22)

로 나와 있어 󰡔삼국사기󰡕

의 기록과는 다르다. 이는 김부식이 「광개토태왕릉비」에 새겨진 문 구와 혼동을 했거나 중찬과정에서 잘 못 기록 한 것 같다.

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그 연원은 북부여로부터 나왔다.)

‘出自北夫餘’를 북부여에서 살다 나온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 으나 이는 잘못 해석한 것이다. ‘出自’는 ‘출신, 탄생, 연원, 근원’을 의 미한다. 그런데 주몽신화와 󰡔논형(論衡)󰡕 길험편(吉驗篇)」

23)

에 나오 는 동명왕 신화

24)

가 매우 유사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북부여의 20) 당(唐)나라의 재상 두우(杜佑: 735∼812)가 편찬한 제도사(制度史). 200권. 766

년에 착수하여 30여 년에 걸쳐 초고(初稿)가 완성되고, 그 후에도 많은 補筆 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1) 󰡔三國史記󰡕

「雜誌」地理4 高句麗

“通典云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本 似一處也”.

22) 󰡔通典󰡕

卷第一百八十六

“朱蒙棄夫餘,東南走渡普述水,至紇升骨城,遂居焉,

號曰句麗,以高為氏”

23) 중국 후한(後漢: 25∼220)의 왕충(王充)이 서기 87∼88년에 편찬한 사서이다.

24)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王欲殺之. 婢對曰:「有氣大如鷄子, 從天而下, 我故有 娠

.」.

後産子, 捐於猪溷中, 猪以口氣噓之, 不死. 復徙置馬欄中, 欲使馬藉殺之, 馬復以口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 令其母收取

,

奴畜之, 名東明, 令牧牛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掩淲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渡. 魚鼈解散, 追兵不得渡. 因都王夫餘, 故北夷有夫餘國焉. 東明之母初

姙時, 見氣從天下. 及生, 棄之, 猪馬以氣吁之而生之. 長大, 王欲殺之, 以弓擊水,

魚鼈爲橋. 天命不當死, 故有猪馬之救命. 當都王夫餘

,

故有魚鼈爲橋之助也.

(13)

5대 단군인 고두막이 ‘스스로 동명’이라 불렀다는 기록 때문에 고두 막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

25)

는 󰡔위략(魏略)󰡕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옛날 북방에 고리국이 있었다.-탁리(槀離)를 후한서에는 색리(索離)라고 기록하고 주(注)에서는 색의 발음은 탁(度洛反)이라고 하였다. 󰡔통전󰡕에는 탁리(槖離)로, 󰡔양서(梁書)󰡕에는 고리(櫜離)로 기록하였는데 고구려라고 할 때의 고려(高麗)가 아니다. 󰡔수서(隋書)󰡕에는 고려(高麗)라고 하여 같은 나 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 못이다.

26)

고리국은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탁리나 색리로 적었으나 모 두 같은 나라이며 고구려와는 다른 나라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논형󰡕에는 동명왕의 출신지를 탁리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두 신화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유사점/차이점 주몽 신화 동명왕 신화 출신지 북부여(임신), 동부여(출산) 북이 탁리국

어머니 하백녀 유화 탁리국왕 시녀

아버지 자칭 해모수 천기(天氣)

탄생모습 난생 난생

재능 뛰어난 활솜씨 뛰어난 활솜씨

어린시절 학대 학대

탈출과정 엄수(삼국유사), 엄호수(삼국사기)

물고기, 자라교(橋) 엄표수 물고기, 자라교

도착지 졸본 졸본

건국 고구려 부여왕

25)

淸 건륭43년(1777)에 황제의 명령으로 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고대부터 17

세기 초까지의 만주 역사를 정리한 관찬사서이다.

26) 󰡔滿州源流考󰡕

魏略

“昔北方有槀離之國 接 槀離 後漢書作索離 注云 索音度洛

反 通典作

고리

梁書作櫜離 非高句麗之高麗也 惟隋書 直作高麗 合爲一國 誤”

(14)

두 신화는 공교롭게도 출신지와 부모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흡사하 게 구성되어 있어 동일 인물로 보거나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모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서로 다른 인물로 이해하는 추세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27)

는 주몽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 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기원전 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릉(弗陵)의 원봉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 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28)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증손자인 불리지가 유화와 혼인하여 주몽 을 낳았는데 이 때가 기원전 79년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고구 려의 건국시기가 기원전 37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주몽은 40대 초반 의 나이에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22세로

󰡔삼국유사󰡕에는 12세로 기록하고 있어 건국시기에 대해 많은 시차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고구려 건국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몽은 ……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 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29)

27)

李貊

(1455∼1528)이 저술하였다.

28) 󰡔高句麗國本紀󰡕

第六

“槀離郡王高辰解慕漱之二子也沃沮侯弗離支高辰之孫也

皆以討賊滿功得封也弗離支嘗過西鴨綠遇河伯女柳花悅而娶之生高朱蒙時則壬

寅五月五日也乃漢主弗陵元鳳二年也弗離支薨柳花 率子朱蒙歸于熊心山今舒

蘭也

(15)

주몽은 전혀 연고가 없는 곳에서 고구려를 세운 것이 아니라, 아들 이 없던 부여왕의 눈에 띄어 둘 째 사위가 되었다가 정권을 이양 받 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김부식 이 주(注)에서 밝히고 있다. 󰡔북부여기󰡕 역시 비슷한 내용이 있다.

계해 2년(기원전 58)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 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 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의 나이가 23세였다.

30)

그런데 󰡔북부여기󰡕에서는 주몽의 즉위년이 기원전 58년이라고 했 다. 󰡔삼국사기󰡕에서는 기원전 3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고 그 때 주 몽의 나이가 22세였으므로 기원전 59년은 주몽이 태어난 시점이 된 다. 고구려의 건국시기에 대해 이렇듯 사료마다 다른 기록을 전하지 만, 여기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다. 역사 기록에서 1∼2년의 오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원전 58년(59년)과 기원전 37년, 그리고 20대의 나이에 즉위했다는 점 등이 모두 두 사서에서 거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런 가능성을 제시해 본다. 주 몽은 기원전 79년에 태어나서 부여왕의 사위가 되어 20대 초반에 졸 본부여왕으로 즉위했고, 40대 초반인 기원전 37년에 국명을 고구려 로 변경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러 사료에서 고구려가 초기에 졸본 부여였음을 전하고 있고, 오로지 “고구려⋅백제신라”라는 삼국의 역사만을 집필한 김부식의 입장에서도 고구려 이전의 부여국은 자연 스럽게 배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북부여는 주몽의 즉위 이후 사실 29) 󰡔三國史記󰡕

「百濟本紀」 “朱蒙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扶餘王無子只有三女子

見朱蒙知非常人以第二女妻之未幾扶餘王薨朱蒙嗣位生二子”

30) 󰡔北夫餘紀󰡕 “癸亥二年冬十月帝崩高朱蒙以遺命入承大統先是帝無子見高朱蒙

爲非常人以女妻之至是卽位時年二十三”

(16)

상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5가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구려의 5부 족 가운데 초기에는 소노부가 왕을 내었으나, 얼마 뒤 계루부에서 적 통을 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한다. 고구려는 주몽이 새롭게 만 든 나라가 아니라 주몽과는 혈연관계에 있는 북부여의 터전 위에 세 운 나라다. 따라서 고구려는 북부여를 큰 조상으로 모시고 후손으로 서의 예를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으로 북부여는 역사 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동부여가 ‘부여’의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 부여의 도읍지 위치

우리 역사, 특히 고대사에서 지명이나 위치의 문제는 지금도 끊임 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분야로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 는 것은 없고, 다만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확 충해 나가고 있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나라의 수도를 가로지 르거나 국경을 나타내는 강의 경우 그 위치에 따라 역사의 범위와 판도가 달라지는 주요 변수가 된다. 현재 우리의 상고⋅고대사에서

‘요수(遼水)⋅패수(浿水)⋅열수(列水)⋅약수(弱水)⋅압록(鴨綠)’ 등은 아직도 연구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 가운데 부여의 위치와 관련해서

‘약수’와 ‘압록’은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기존의 연구에서 ‘약수’를 송 화강으로, ‘압록수’를 지금의 압록강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비정할 객관적 근거는 없으며 ‘압록’을 지금의 압록강으로 단정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글쓴이는 문헌 연구를 통하여 각 부여의 도읍 지 위치를 추정하고자 한다.

(17)

1. 북부여 도읍지 위치

1) 선행 연구 검토

이미 언급된 󰡔삼국유사󰡕 「북부여」에 의하면 해모수는 홀승골성에 서 북부여를 세웠고, 그의 아들인 해부루는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으 며, 동명제가 세운 졸본부여가 고구려의 시조라고 한다. 이를 통해 북부여의 초기 도읍지가 홀승골성임을 알 수 있다. 이 홀승골성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해 졸본과 같은 지역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북부여의 도읍지는 ‘졸본’이 된다. 글쓴이는 이전의 논문

31)

서 이것을 입증하였다.

그런데 졸본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기존의 통설은 ‘번시(本溪)’, 즉 오늘날 중국 ‘요녕성 본계시 환인현’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학자들의 주장이 아무런 검토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일본학자들이 한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말기부터 1900년 초이다. 그런데 그들은 치밀한 학문적 근거를 바탕으로 연구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한국사를 재단하였다. 그 연구 중에서 중점 사업으로 추진했던 것이 고구려 도읍지에 관한 비 정이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그들의 선학인 토리이 류 조(鳥居龍臧), 이마니시 류(今西龍), 세키노 등의 연구 업적을 중심으 로 고구려의 도읍을 비정하였는데, 일부에서 다른 견해가 제기되기 도 하였지만, 지금까지도 큰 문제없이 시라토리의 학설이 견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32)

시라토리의 주장 이래로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도 31) 지양미,

문헌에 나타난 북부여 도읍지 위치 연구

」, 국학석사학위논문, 국제

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2011.

32) 복기대,

「高句麗

도읍지 遷都에 대한 재검토」북방문화연구소3회 학술대회,

‘한국에서 고구려 도읍지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 대부분 이 일본학자들이 비정해놓은 연구 결과를 활용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약 간의 위치 이동을 제시하거나 과거에 비정한 위치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제 사하는 정도이다. 중국의 경우도 큰 차이는 없다. 1990년대 이전에는 전문적

(18)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재검토는 되지 않았고, 일부 지역에 대해서만 의 문을 갖는 정도가 전부였다.

33)

한국학계에서 이 지역이 고구려의 첫 도읍으로 확정된 데에는 이 병도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병도는 그의 󰡔삼국사기󰡕 역주본에서 환 인을 고구려 초기 도읍으로 비정하고,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 였다.

호태왕비(好太王碑)에는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성산(西城山)이라 하고, 졸본의 주에는 위서를 이끌어‘지홀승골성’(승홀골의 전도인 듯)이라 하였으니, 졸본은 바로 졸홀(솔골)⋅승홀골(솔골)의 이칭으로 볼 것이며, 고 구려 최초의 수도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 환인에 비정한다. 그러면 졸 본천은 환인을 흐르는 혼강(古名 마자수)을 별칭한 것으로 본다.

34)

이 주석에서 이병도는 글자를 바꿔가며 뜻을 통하게 만들었고, 심 지어는 ‘환인이 저명한 곳이라서 고구려 도읍에 비정 한다’고 하였다.

이병도의 이런 주장은 어찌된 일인지 단 한 번도 재검토되지 않은 채 앞에서 말한 일본학자들이 주장한 환인 도읍설을 더 확고히 해주 었다.

35)

그리고 이병도는 초기 부여의 위치를 타당한 논거 없이 송화강 유 역으로 비정하여 오늘날 까지도 역사학계는 물론 고고학계에서도 그 곳에서 발견된 유물유적을 모두 부여의 것으로 규정짓게 되었다.

우리학계는 1980년대 말까지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이통하(伊通河)

인 고구려사 전공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일본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33) 이병도,

「高句麗 東黃城考」,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1992년(중판발행),

370-373쪽.

34)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박문출판사, 217쪽 (주해5 참조).

35) 복기대,

「高句麗

도읍지

遷都

에 대한 재검토

북방문화연구소3회 학술대회, 6-7쪽.

(19)

유역의 농안(農安), 장춘(長春) 일대라고 보아 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 및 우리 학계는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제 문헌 사료 등을 참작하여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길림시 일대로 파악하고 있다.

36)

특히 길림시 송화강 동쪽 기슭의 동단산(東團山) 및 남성자 (南城子) 유적의 발굴 결과

37)

를 토대로 이 지역을 부여 초기 혹은 전 기 부여의 도성 소재지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다.

38)

이와 같이 기존 학계에서는 부여와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여겨왔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부여의 위치에 관한 기존 학계의 주장은 송화강 유역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과 중국학 계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의 옛 문헌에는 북부여의 초기 도읍지 와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가 같음을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부여와 고구려의 중심 위치와 관련하여 두 가지 가능 성을 제시할 수 있다. 즉 기존에 알려져 있는 두 나라의 초기 도읍지

-오녀산성과 송화강 유역 중 하나가 잘못 알려진 곳 이거나, 아니면 두 곳 모두가 아닌 제3의 새로운 장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런데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로 알려져 있는 환인(오녀산성)과 북부여 발생지로 알려져 있는 길림(송화강 유역)이 비정되기까지의 과정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 논거가 명확하지 않다.

39)

그렇다면 문헌 기록을 토대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제3의 장소를 찾아 볼 수 있다.

36) 박경철,

「우리에게 부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고조선⋅단군⋅부여󰡕,동

북아역사재단(2007),126쪽.

37) 기원전2세기∼기원후4세기 때의 것으로 보이는 城址

聚落

유적 및 상류층 의 묘지 등이 다량 발굴되었다.

38) 박양진, <고고학에서 본 부여>, 󰡔한국고대사연구󰡕 37, 한국고대사학회(2005), 57-58쪽.

39) 󰡔삼국지위지동이전󰡕,부여조에 “부여국은 현도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접하고...북쪽에는 약수가 있다.(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

高句麗, 東與邑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고 하였는데, 이병도씨는 약수를

오늘날의 송화강으로 규정하였으나,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20)

2) 문헌에 기록된 졸본의 위치

󰡔삼국유사󰡕 고구려조에 졸본을 추정할 수 있는 지명이 나온다.

저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입니다. 동생들과 놀러 왔을 때 한 남자가 나 타나 자신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웅신산(熊神山) 아래 압록(鴨 ) 가에 있는 집으로 유혹하여 사통하고는 저를 버리고 떠나가서 돌아오 지 않았습니다.

40)

여기에서는 ‘압록’과 ‘웅신산’

41)

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한국역사학 계에서는 이곳을 지금의 압록강과 백두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 데 󰡔삼국유사󰡕 원문에서는 분명히 ‘鴨綠邊室……’ 이라고 나와 있는 것을 거의 대부분의 번역서에는 ‘압록강’ 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조 선 후기 학자들도 대다수 비슷한 입장이다. 그러나 ‘압록’은 강(江)일 수도 있고 어느 지방일 수도 있다.

42)

다만, 고구려가 있던 시기에는 압록수라고 불렸던 마자수가 있었는데, 고구려에서 가장 큰 물길

43)

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모수와 유하가 만난 장소가 압록이라는 것은 두 사람의 생활 반경 역시 압록에서 멀지 않은 곳일 가능성이 있다.

압록이라는 명칭은 시기별로 이동하였고, 고구려시기의 압록수가 지 금의 ‘요하’라는 사실은 여러 논문

44)

에 의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해모 수와 유하가 만난 곳은 요하 부근이 된다.

40) 󰡔삼국유사󰡕고구려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

帝子解慕漱 誘我於態神山下 鴨綠 邊室中知(私)之 而往不返.”

41) 󰡔북부여기󰡕에는 ‘雄心山’으로 나온다.

42) 발해의 서경 압록부는 地方名이다.

43) 󰡔通典󰡕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이다...고구려에서 제일 큰 물길이다.(馬訾水則

移反一名鴨綠水…高麗之中,此水最大)

44) 고광진⋅최원호

복기대,

시론 ‘장백산’과 ‘압록수’의 위치 검토」, 󰡔선도문화󰡕

13권, 국학연구원,2012.8.; 고광진,

고구려시대 압록수 위치연구

」, 국학석사

학위논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2011.; 지양미,

문헌에 나타난 북부여 도읍지 위치연구」, 국학석사학위논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2011.

(21)

한편, 졸본의 위치에 대한 또 다른 단서를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는 졸본 위치를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계에 있 다”

45)

하고, 삼국사기는 󰡔한서지(漢書志)󰡕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과의 거리가 3천6백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 로서 무려현(無慮縣)이 있었으니 바로 주례(周禮)에 이른바 북진의 의무려 산이며, 대요에서 그 밑에 의주를 설치하였으며, 현도군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리를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이 셋인바, 고구려가 그 가운데 하나 이다.”라고 하였은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홀승골과 졸본이 란 것이 아마 한나라 현도군의 경내이며,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 인 듯하니, 󰡔한서지󰡕에 이른바 현도군의 속현으로서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 인가 한다.’

46)

위 기록을 통해 세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요나라에서 요동군 무려현에 의주를 설치했다. 둘째, 요동군과 현도군은 서로 멀 지 않은 곳에 있었다. 셋째, 현도군의 고구려현에 졸본이 있었을 것 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요나라 동경 의 서쪽이며 요나라 의주 경계에 있는 고구려현을 졸본 위치로 추정 하고 있다. 요나라 동경은 오늘날의 요양(遼陽)이다. 요나라 의주는 의무려산 아래 설치하였으므로 오늘날 북진(北鎭)에 해당된다. 요나 라 동경의 서쪽이며 의주 경계에 현도군이 있고 그 안에 있던 고구 려현이 졸본이라 했으니,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위치는 요하 서 쪽에 있는 북진과 의현(義縣) 부근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매우 낙후

45) 󰡔三國遺事󰡕,

「북부여조」,“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46) 󰡔三國史記󰡕, “漢書志云 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鎭醫

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菟郡, 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 高句麗是

其一焉.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本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京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 高句麗是歟.”

(22)

되어 있지만 그 위치는 교통의 요충지로 좋은 도읍지의 조건을 갖추 고 있다고 생각한다.

2. 동부여(가섭원 부여) 도읍지 위치

동부여는 해부루 일행이 동쪽 바닷가 가섭원에 세운 나라로 가섭원 이 도읍지이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북부여는 고구려의 등장으로 사라졌고 나중에 고구려에 복속되는 부여는 동부여다. 따라서 마지막 까지 부여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 동부여의 도읍지인 가섭원이다.

󰡔후한서󰡕

47)

동이전부여조에는 부여의 영토 범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며, 북에는 약수가 있다. 땅은 사방 2천리인데 본디 예(濊)의 땅이다.

48)

위 기록은 부여의 역사나 지리를 기록하는 거의 모든 한⋅중 문헌 에서 인용되고 있으며, 부여의 넓은 영토와 세력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여는 현도군의 위치에 따라 그 영토 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문구이기도 하다.

앞서 현도군 고구려현이 북부여의 도읍지였던 졸본이었고, 가섭원 은 북부여 동쪽이라 했으므로 졸본의 동북쪽 1천리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 요하의 동쪽이면서 북쪽에 위치했을 가능성 이 있다.

47) 중국 24史 중의 하나로

後漢의 역사(25년(건무(建武) 원년)부터 194년(흥평

(興平) 원년))를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범엽(398년∼445년)이 정리한 책이다..

다루는 시대는 까지의 역사이다.

48)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夫餘國, 在玄菟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

挹婁

,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23)

한진서는 󰡔해동역사지리고󰡕에서 부여 왕성 위치와 영토 범위를 다 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여는 본디 예 지역에 있는 북이(北夷)로, 북이의 왕자 동명(東明)이 남 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혹 북부여라고도 칭하며, 지금의 봉 천부(奉天府) 개원현(開原縣) 등지이다.……부여국은 지금의 개원현의 치소 (治所) 경계 안이 모두 그 지역이다. 부여국의 왕성은 개원현성의 서남쪽에 있었다. 요나라에서 통주(通州)로 고쳤다.’

49)

부여의 중심부가 봉천부 개원현이고 개원현성 서남쪽에 부여의 왕 성이 있었고 이 곳은 요나라 때 통주였다고 한다. ‘혹 북부여라고도 칭하며’ 라는 것은 한진서가 북부여와 동부여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 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상당수의 실학자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이 기도 하다. 아울러 󰡔해동역사지리고󰡕에는 흑룡강을 부여 북쪽 경계 인 약수로 비정하고 있다. 즉 부여는 요하 동쪽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는 소요수인 혼하에서 북쪽으로는 약수인 흑룡강까지 이어지는 것으 로 보고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

50)

에서 후금 때의 황룡부를 부여 의 왕성으로 보고 있다.

부여성은 나중에 발해의 치소가 되었다. 지금의 황룡부다.

51)

󰡔만주원류고󰡕에는 󰡔요사지리지󰡕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 고 있다.

용주 황룡부는 본래 발해의 부여부이다.

…… 동경의 통주 안원군은 본

49) 한진서, 󰡔海東歷史地理考󰡕 제5권,

「부여조 」

“夫餘者亦濊地北夷.王子東明.南

來立國.稱北夫餘.今奉天府地開原縣等地也.”

50)

李睟光(1563∼1628)이 편찬한 백과전서.

51) 이수광, 󰡔芝峯類設󰡕제2권,

諸國部 “扶餘城後爲渤海所都

今黃龍府是也

(24)

래 부여국의 왕성이다. 발해에서 부여성으로 불렀고 태조가 용주로 바꿨다.

성종이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52)

요나라 통주는 오늘날 요녕성 개원시 일대이다. 많은 문헌들이 그 곳을 지목하고 있는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바로 ‘동쪽 바닷가’라 는 기록과 ‘읍루 서쪽’이라는 기록이 서로 부딪친다는 것이다. 읍루 서쪽에 가섭원이 있다면 그 곳은 동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 기록에는 종종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나 평야를 바다로 표현하는 경 우가 많다. 그렇다면 ‘동쪽 바닷가’라는 것도 끝없는 평야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요녕성 개원시에 있는 개원평야는 동요하를 끼고 끝 없이 펼쳐져 있어 마치 끝없는 바다를 보는 듯하다.

한나라 시원 이후의 이군도

53)

추리도

54)

동요하 상류와 개원평야

55)

개원평야

52) 󰡔滿州源流考󰡕

卷八 疆域

“遼史地理志 龍州黃龍府 本渤海夫餘府…東京通州安

軍 本夫餘國王城 渤海號夫餘城 太祖改龍州 聖宗更今名”

53) 󰡔해동역사지리고󰡕

「고금강역도」에 나오는 지도로 부여의 위치가 표시되어

(25)

통주에 부여왕성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곳이 지금 의 개원인 것이다. 기원전 87년에 해부루 일행은 졸본에서 1천리 떨 어진 개원평야에서 정착하여 400여년간 나라를 지속하였다. 농경사 회에서 드넓은 농지와 수로가 확보된다면 백성이 부유해 질 것이고, 나라 또한 부강해 졌을 것이다. 이러한 천혜의 환경 조건을 바탕으로 동부여는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 맺음말

지금까지 각 부여의 건국과정을 통한 건국 시기와 도읍지의 위치 에 대해 살펴보았다. 기원전 425년에 단군조선은 커다란 정치적 변화 를 맞았다. 단군세기에는 43대 단군 물리 때의 급박한 상황을 전 하고 있다.

을묘 36년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좌 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 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 해에 백민성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의 군사들이 이 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56)

있다. 이는 동부여이다.

54)

墜理圖 : 1190년에 남송(南宋)에서 그려진 것을 1270년에 돌판에 새긴 것으

로 알려져 있다.현재 중국蘇州 石刻 박물관에 남아있으며 일명 ‘거란지리도’

로 불린다.

55) 출처 : 2012.7.3. 직접 촬영

56) 󰡔檀君世紀󰡕“乙卯三十六年隆安獵戶于和沖自稱將軍聚衆數萬陷西北三十六郡

帝遣兵不克……與左右宮人奉廟社主浮舟而下之海 頭尋崩是歲白民城褥薩丘

勿以命起兵先據藏唐京九地師從之東西 鴨綠十八城皆遣兵來援”

(26)

일개 사냥꾼이 일으킨 난에 단군이 피신을 했을 정도면 단군의 위 상이 상당히 약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욕살이었던 구물 이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으로 즉위했다면 각 거수국들의 우두 머리들과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가 ‘삼한이 삼조선으로’ 격상 되었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경기도가 경기민국이 되었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단군의 권한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 군구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 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57)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작전지휘권을 지방정부가 갖게 되었다는 것이 다. 따라서 단군의 위상은 ‘대부여’라는 나라 이름과 더불어 상징적 존재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단군’이라는 호칭은 계속 이어져 사용되었지만,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단군세기󰡕의 기 록을 바탕으로 역년(歷年)을 계산해 보면 단군왕검이 세운 단군 조선 의 역사는 1908년 만에 사실상 막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 실을 󰡔삼국유사󰡕 고조선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단군왕검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후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 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산에 숨어 山神이 되었으니 수 명은 1,908세였다.”

58)

이는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산 것이 아니라, 단군왕검이 세웠던 조 선이 개국한 지 1908년 만에 문을 닫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57) 󰡔檀君世紀󰡕“自是三朝鮮雖奉檀君爲 一尊臨理之制而惟和戰之權不在一尊也”

58) 󰡔三國遺事󰡕

「古朝鮮(王儉朝鮮)」“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

鮮 壇君乃移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27)

있다.

중앙정부의 권한이 축소되고 20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지방정부 는 중앙의 통제를 벗어난 행동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나라 나 연나라와의 관계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결국 이틈을 타고 해 모수는 졸본에서 북부여를 세웠고, 이듬해 대부여를 장악하였다. 그 러나 위만의 망명과 배신으로 서쪽 지역을 잃게 되었고 위만조선을 멸한 한의 침략으로 북부여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고리국 출 신 고두막의 등장으로 중흥하였다. 영웅이 된 고두막은 동명왕으로 즉위하고 구 왕실세력이었던 해부루 일행은 졸본에서 동북 1천리에 있던 개원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웠다. 북부여와 동부여가 공존 하던 시기에는 각 부여의 도읍지를 지칭하여 졸본부여와 가섭원부여 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유사󰡕 북부여와 󰡔북부여기󰡕 가섭 원부여등의 기록

59)

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 오늘날 외국에서 남 한과 북한에 대한 호칭을 South Korea와 North Korea로 하는 것과 유사할 것으로 생각한다. 천혜의 환경을 가진 동부여는 그로부터 고 구려에 복속되기까지 400여 년간 지속되었다.

한편, 북부여 왕실 혈통을 가진 주몽은 우여곡절 끝에 북부여왕의 사위가 되어 정권을 이어 받았다. 주몽은 즉위 후에 얼마 동안은 부 여의 왕으로 있었으나,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바꾸고 정치개혁을 단 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역사를 대부여(기원전425년)로부터 동부여가 고구려에 복 속된 시점(494녀)으로 본다면 무려 900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대역사 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문헌에서 부여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 이다. 부여는 명백히 고조선과 삼국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선상에 존재한 한민족의 역사라 하겠다.

59) 󰡔三國遺事󰡕

「北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동명

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가 되었 다.); 󰡔북부여기󰡕에는 동부여가 아닌 가섭원부여로 기록하고 있다.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