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통치 시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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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통치 시기 사회

1.명종 사후: 승계자가 없는 최초의 상황

중종의 서손인 하성군이 계승(선조) 2.덕흥군: 조선 초 최초의 대원군(사후 추존)

3.선조: 방계(傍系) 승통 한계점 극복 위해 성리학적 왕도(王道) 정치 추구

(사림 등용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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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자책봉 문제 대두 -서인의 거두 정철 실각

-치죄(治罪 )과정에서 동인의 분열

<온건파(남인)/ 급진파(북인)>

5.국력약화/ 여진족과 왜구의 할거

6.통신사 황윤길(서인)과 김성일(동인)의

상반된 보고 내용(선조와 집권층 판단 착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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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의 정세

1.조선의 정세: 국내 정치 혼란+왜구의 도발 (3포 왜란/ 사량진 왜변/을묘왜변)

2. 조선의 대응책: 비변사

일본으로 황윤길과 김성일 파견 율곡 이이의 십만대군양병설(현실화X)

3.군체제의 문란: 군역제의 변질

방위체제 변화(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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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읽기

나라의 형세가 부실함이 오래되어 앞으로 닥쳐올 화(禍)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성에 2만 명, 각 도에 1만명씩 10만 명을 양병(養兵)해 위급한 일에 대비해야 한다.

직무를 게을리하며 세월만 보내고 무사안일한 습관이 들면 하루 아침에 갑자기 변이 일어나 저잣거리 백성들을 이끌고 싸우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러면 일을 크게 그르치게 될 것이다.

-안방준 <임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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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개과정

1. 이순신의 활약: 전쟁 전 거북선, 군량미 비축

2.옥포 해전: 임진왜란 발발 후 첫 승리 3.사천해전: 처음으로 거북선 사용

4.한산도 대첩: 학익진 전법

5.결과: 남해 제해권 장악, 곡창지대 전라도 수성/ 일본의 수륙병진작전 좌절,

전주 사고(史庫)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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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읽기

“적은 본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북쪽 을 치려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으로 왜적의 한 팔을 꺾었기에, 비록 왜장(倭將)이 평양을

얻었으나 군세(軍勢)가

고립되어 더 나아가지 못했다“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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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읽기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꼭 죽으리라 결심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꼭 살리라고 마음먹고 싸우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 사람이 길목을 지켜 내면 넉넉히 천 사람 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들 모든 장병들은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軍法)으로 다스려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용서

하지 않을 것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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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읽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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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읽기

“이순신이 드디어 원병(援兵)을 내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元均)을 만났다. 옥포에 이르러 적선(敵船) 30척이 있는지라 진격 하여 크게 무찌르니 남은 적이 뭍으로 올 라 달아났다“

-선조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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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읽기-쟁공(爭功)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하여, ‘원균이 조정을 속인다. 12세 밖에 안 된 아들이 군공(軍功 )이 있다고 보고한다’라 하니

원균이 ‘내 아들의 나이 이미 18세에 궁마(

弓馬 )에 재주가 있다’ 하면서 추궁해 이순신이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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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로 재직 중에도 여러 차례 수군 작전에 관한 계획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번 수사로 재기용할 것을 검토하던 중,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잡혀가 국문을 받게 되자 1597년 1월에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 수군을 통제하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군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중인 것도 모르고,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삼도 수군을 이끌고 부산의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1604년 이순신·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책록되어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1605년 왕이 내린 치제문과 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金幹)이 찬한 <통제사원균 증좌찬성공행장 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 있다.-한국사교과서 참조-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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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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