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도시 27
서민호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 미국 국무부 풀브라이트(Fulbright) 방문학자 ([email protected])
율리시스의 서사가 일상에서 재현되는 도시, 더블린
영화 ‘Once’
더블린
더블린에서 만난 또 하나의 현대적 서사
더블린(Dublin) 그래프턴 스트리트(Grafton Street)에서 버스킹하는 ‘그’, 글 렌 핸사드(Glen Hansard)와 체코에서 이주해 와 거리에서 잡지와 꽃을 팔며 생계를 꾸려가는 ‘그녀’, 마케타 잉글로바(Marketa Irglova). 두 번째 만난 날 그들은 사우스 그레이트 조지 스트리트(South Great George Street)의 월턴 (Waltons)이라는 악기점 구석에서 낡고 구멍난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를 연 주하며 그가 만든 노래를 함께 부르기 시작한다.
“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 All the more for that words fall through me. And always fool me and I can’t react. … (난 당신을 모르지만, 난 당신을 원해요. 그래서 난 더욱 더 할 말을 잃고, 늘 바보였 던 것처럼 어쩔줄 모르겠네요. …)”
아카데미수상위원회가 매우 엄격했던 그동안의 규정을 이례적으로 적용하 면서까지 오스카상을 수여하고자 했던 영화 ‘원스(Once)’의 주제가인 ‘Falling Slowly’는 마케타 잉글로바가 제8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우리가 서로 얼 마나 다르든 간에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한 것 처럼 거리에서 살아가는 젊은 예술가들의 꿈과 용기, 사랑과 희망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영화 ‘원스’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3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핸디캠 두 대만을 가지고 촬영된 아일랜드 출신 존 카니(John Carney) 감독의 2006 년작 저예산 독립영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디 음악인들과 젊은 예술 가들을 위한 영화다. 영화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가 그의 노래에 담긴 슬픔과 희망을 응원하는 거리의 소녀 ‘그녀’를 만나고, 이후 그녀의 응원에 힘 입어 오디션을 보기 위한 앨범까지 녹음한 뒤에 런던으로 떠난다는 단순한 플 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86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에게 보여지는 장면은 ‘그’
와 ‘그녀’의 어설픈 대화와 하다만 사랑 이야기, 약간 촌스럽기도 한 어쿠스틱 한 음악과 배경이 되는 더블린의 일상적 도시 풍경뿐이다. 영화는 단지 더블린 의 어느 거리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일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담담히 비출 뿐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원스’가 불러일으킨 반향은 실로 놀라웠다. 선댄스 영화제와 더블린 영화제 관객상, 아카데미 영화주제가상은 차치하고라도, 미 국에서 두 개 관으로 개봉한 독립영화가 불과 80일 만에 140여 개 관으로 상영
ONCE(원스, 2006) 감독: 존 카니(John Carney) 출연: 글렌 핸사드(Glen Hansard), 마케타 잉글로바(Marketa Irglova), 앨리이스테어 폴리(Alaistair Foley), 캐서린 핸사드(Catherine Hansard)
더블린 위치
더블린(Dublin)●
IRELAND
UNITED KINGDOM
관을 늘린 경이적인 기록을 보이며, 종국에는 관객들이 선 정한 ‘2007년 최고의 영화’가 되었다. 수많은 영화에서 보 았던 그 흔한 멜로나 액션, 남녀 간의 갈등이나 해피엔딩 도 등장하지 않는 ‘원스’가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찬사를 받으며 오래토록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 분의 관객들은 “이 영화는 뮤지컬의 진정한 미래다. ‘화려 함’과 ‘웅장함’이 아닌 ‘수수함’과 ‘절제’의 설득력을 보여준 다”라는 뉴욕타임즈 비평에 공감할지 모른다. 하지만 필 자에게 영화 ‘원스’는 젊은 예술가들의 삶과 꿈이 더블린 이라는 도시를 통해 융해되어 드러나는, 마치 「율리시스 (Ulysses)」의 21세기적 오마주 같은 더블린에 대한 또 하 나의 정통적(authentic)이고 현대적인 서사(narrative)로 다가온다.
율리시스의 현대적 오마주, 영화 ‘원스’
아일랜드가 낳은 세계적 문호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20세기 영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율리시스」를 끝낸 직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항상 더블린에 대해 쓴다. 내가 더블린의 심장에 다가간다는 것은 세계 모든 도시의 심장에 다가간다는 말이다. 그 세부 속에 전 체가 담겨 있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아침 8시 부터 그 다음날 오후 2시까지 더블린에서 일어난 18개 장 면을 하나의 단편적 서사로 엮어 풀어낸, 영문학 사상 가 장 독특하고 현대적인 대작이다. 표면적으로는 스티븐과 블룸 부부가 하루 동안 더블린에서 겪는 사건들에 대한 기 록이지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생각이나 규범들이 우연 이나 관념적 이미지에 기인할 수 있음을 일상의 세밀한 묘 사를 통해 이야기된다. 제임스 조이스가 22살의 나이에 그의 조국 아일랜드를 떠나 영원한 방랑의 길로 들어서기 전까지 더블린 곳곳의 거리들과 주점들을 하염없이 방랑 했기 때문에서인지, 「율리시스」에는 20세기 초 더블린의 사회상과 그곳을 살아가던 이들의 우울하고 냉소적인 모
습들이 매우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화 ‘원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율리시스」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영화 ‘원스’ 역시 「율리시스」
처럼 더블린 거리에서 만난 남녀 간의 일상적 모습을 관찰 자적 장면 구성을 통해 현실적 서사의 이미지들을 전달하 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원스’에서는 결코 많지 않은 인물 들 간의 만남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화면적 구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대화 만으로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내적 심리를 영 화 곳곳에 삽입된 그들의 음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 는 뮤지컬적인 구성이 영화 속 감정의 흐름을 이해하는 중 요한 실마리로 작용한다. 이러한 구성은 제임스 조이스가 단 하루의 이야기를 현대적 서사로 묘사하기 위해 의도한
「율리시스」의 심리적 구성, 즉 더블린 거리의 모든 사소한 사물과 풍경, 인물들의 생각이나 감정, 이로 인해 떠올려 진 연상이나 무의식을 극도로 세밀하고 현실적이면서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제부터 ‘원 스’가 어떻게 더블린만의 서사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는 지 몇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역사와 예술, 젊은 영혼이 하나로 융해되는 도시
어느 날 밤 더블린 그래프턴 스트리트. 거리에서 버스킹 하는 ‘그’를 먼발치에 있는 관객이 조명하는 것과 같은 시 선과 함께 영화 ‘원스’의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조 용한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 담담히 노래를 시작하던 ‘그’는 가사에 담긴 심경을 격정적인 노래와 기타 반주로 분출하 기 시작한다. 아무 관객도 없이 홀로 거리에서 노래를 부 르던 ‘그’가 자신의 노래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먼발치에 머물던 카메라의 시선이 점점 그에게 다가가며 ‘그’의 얼굴 과 몸짓을 통해 드러나는 내적 심상을 보여준다. 3분이 넘 는 시간 동안 아무런 대사도 없는 다큐멘터리식 롱테이크 영화와 도시 27
로 거리 공연만을 담담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관객 은 더블린 거리의 스산한 밤 풍경과 그 속에서 버스킹하는 한 남자의 사랑과 슬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거리를 지나가는 한 행인의 시선에서 점점 ‘그’ 남자 자신이 되어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낀다. 노래가 끝나고 단 한 명의 관 객인 ‘그녀’가 박수치는 장면이 롱테이크로 이어지면서, 관 객은 이전의 그 시선이 마치 ‘그녀’의 시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어지는 ‘그’와 ‘그녀’의 짤막한 대화를 통 해 우리는 ‘그녀’ 역시 거리에서 잡지를 팔며 살아가는 또 한 명의 젊은이고, ‘그녀’가 ‘그’의 노래에 담긴 사랑과 그 리움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한 진심을 노래로 부르는 ‘그’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열망을 타자의 시 선으로 관찰하게 된다.
이 상황은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생길 수 있는 하나의 평범한 장면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 도시 풍 경이나 등장인물 간의 대화, 그리고 연주되는 노래의 분위 기를 조금만 깊게 관찰해보면, 이 상황이 더블린에서만 일 어날 것 같은 독특한 서사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 도 유추할 수 있다. 먼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의 버스킹 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일랜드 출신 싱어송 라이터 데 미안 라이스(Damien Rice)나 밴 모리슨(Van Morrison) 의 분위기를 떠오르게 한다. 헤어짐의 기로에 선 연인들의
슬픔과 애절함이 절실히 담겨 있는 가사에서부터, 조용한 기타 반주로 독백처럼 시작된 노래가 격정적 내 면의 외침으로 고조되고, 다시 체 념적 독백처럼 마무리되는 음악적 구성. ‘그’의 단순한 버스킹에서 데 미안 라이스나 밴 모리슨 같은 분 위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그’의 노래가 아일랜드 특 유의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 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일랜드는 우리를 뛰어넘는 ‘한(恨)’
많은 질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아일랜드인 스스로가 자신 들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나라’로 부를 만큼 아 일랜드는 800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배로 고통 받았다.
또한 1845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대기근으로 인구의 절반 이 아사(餓死)하거나 다른 나라로 유랑생활을 떠날 수밖 에 없었던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일랜드의 문학이나 음악 속에는 우리 한국인이 공감할 수 있는 한 과 슬픔, 고독과 그리움에 대한 정서가 깊이 배어 있고, 아 일랜드의 예술인들은 그들의 역사 속에 축적된 문화와 정 서를 간직하고 표출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 일랜드는 그들만의 예술혼을 담은 세계적 대문호나 걸출 한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해 왔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와 같은 노벨문학 상 수상자는 물론, 세계 최정상 밴드 U2와 웨스트라이프 (Westlife),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한 엔야(Enya) 등 수 많은 뮤지션들이 아일랜드만의 혼(魂)과 정서를 그들의 작 품에 담아내고 있다.
더블린 도심에는 새로운 건물이 많지 않다. 백년 이상된 역사적 건물들이 즐비하게 존치되어 있으며, 제임스 조이 스나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이 대부
더블린 그래프턴 스트리트에서 우연히 만난 버스킹하는 ‘그’와 잡지와 꽃을 파는 ‘그녀’
분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현재의 더블린을 걷는 것은 백 년 전 문학작품 속의 더블린을 걷는 행위가 된다. 실제로 더블린에서는 매해 6월 16일 「율리시스」의 주인공 블룸의 하루 일과를 그대로 재현하는 ‘블룸스데이’ 행사가 개최되 고 있으며,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에 등장한 인상적 장면 들을 직접 도시 속 그 장소에서 재현하는 행사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더블린만의 정통적 분위기는 오래된 흔적을 간 직한 도시 풍경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더블린 거리를 걷다 보면 일상적인 모습들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다 양한 음악가, 화가, 행위예술가들의 버스킹을 목격할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더블리너뿐만이 아닌 세계 각국에서 여행을 온 또는 체류하기 위해 온 젊은 예술가들 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예술가들이 아일랜드 특유의 정서적 감성을 결합하여 버 스킹하는 행위에 주변 행인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하여 춤 을 추고 함께 노래하는 모습, 더블린에서는 이것이 너무나 도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더블린은 늘 젊은이들 로 가득 차 있다. 실제로 더블린은 30대 이하 인구 비율이
40%를 넘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 고 그 젊은이들이 표현하는 예술적 에너지와 질적 수준 역 시 다른 도시들을 뛰어넘는다. 이렇듯 더블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역사와 문학, 예술이 하나가 된 듯한 정통적 모습 은 더블린이 1991년 유럽문화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 2010년 유네스코(UNESCO) ‘문학 도시(City of Literature)’로 지정되면서 인정 받고 있다.
사람이 공간의 주인이 되어 삶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곳
그래프턴 스트리트 어딘가에서 바라본 행인의 시선처 럼 멀리서 줌인되는 ‘그’와 ‘그녀’의 두 번째 만남. 사우 스 그레이트 조지 스트리트의 커피점 사이몬스 플레이스 (Simon’s Place)의 창문 너머로 흐릿하게 반사되어 비추 는 ‘그’와 ‘그녀’의 짧은 대화. 거리 건너편 악기점 월턴에 서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그’의 자작곡과 ‘그녀’의 합주. 그 리고 다시 조지 스트리트 아케이드 어딘가로 행인들의 일
아일랜드의 수도이자 켈틱 호랑이(Celtic Tiger)의 심장, 더블린 전경 영화와 도시 27
부가 되어 사라지는 ‘그’와 ‘그녀’의 모습. 10분 남짓한 시 간 동안의 이 장면들은 우리가 거리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간의 대화나 움직임과 크게 다르지 않 다. 굳이 특별하다고 할 만한 것은 악기점에서 연출되는
‘그’와 ‘그녀’의 즉흥적 노래와 합주뿐인데, 이 역시 더블린 의 여타 악기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일 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이렇게 평범하고 일상적 장면들에 서 ‘그’와 ‘그녀’가 음악적 열정을 공유하고 그들의 우연한 만남이 서로에게 운명처럼 작용할 수 있음을 예감한다. 그 와 그녀의 짧은 대화와 눈빛 교환, 즉흥 연주 속 노래 가사 나 제스처만으로도 우리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 사이에 어떤 교감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영화 속에서 ‘그’와 ‘그녀’의 이야 기를 본격적으로 형성해가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만남에 등장한 장면들 속에 녹여진 도시 풍경들은 관객들 이 더블린이라는 도시를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가 버스 킹하고 ‘그’와 ‘그녀’가 만나던 더블린의 그래프턴 스트리트 는 실제로도 거리를 걷거나 배회하기에 편하고, 거리에 멈 춰서 쉬거나 구경하기 좋으며, 많은 볼거리와 이벤트로 학 습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세계적 도시설계 가인 얀겔(Jan Gehl)이 좋은 공공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 다고 분류한 필수적·선택적·사회적 활동 모두가 이곳에
서는 일상처럼 하나가 되어 펼쳐진다. 영화 ‘원스’에서 묘 사된 더블린 어느 거리의 극히 사실적인 모습은, ‘도시에 이런 공간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렇다면 영화의 두 주인공처럼 나에게도 우연한 만남이 하나의 인생 이야 기로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관 객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더블린의 그래프턴 스트리트는 약 110년 전 제임스 조 이스가 거닐던 더블린 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블 린에는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건물과 상점들이 아직도 많 이 있고, 「율리시스」에서 블룸이 샌드위치와 버건디 와인 을 즐기던 데비번스(Davy Byrne’s)나 아일랜드 독립영웅 인 마이클 콜린스가 즐겨찾던 더 듀크(The Duke) 같은 펍 (pub)들도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공간 들이 거리에 즐비해서인지,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나 이방 인들은 더블린 거리를 걷는 행위만으로도 수백 년간 축적 된 더블린의 문학적·예술적 자산들과 온전히 결합하여 자신이 무언가의 스토리를 갖는 현대적 서사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더블린 거리가 과거와 현재, 문학과 예술이 온전히 융 해된 매력적인 모습을 간직한 데는 그 누구보다 더블리너 들의 애정이 컸다. 조지 스트리트 아케이드가 19세기 후 반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는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운동 을 통해 그 공간의 복원이 가능했다. 12년 전 그래프턴 거
더블린 그래프턴 거리에서 ‘그’와 행인들의 교감(좌), 타자적 시선으로 비춰진 ‘그’와 ‘그녀’의 대화(우)
리의 상징적 공간인 보우리스 오리엔탈 카페(Bewley’s Oriental Cafe)가 폐업할 위기에는 시민들의 캠페인과 정 치가들의 노력으로 그 공간의 유지가 가능했다. 18세기부 터 현재에 이르는 오랜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더 블린 거리는 특정한 몇몇에 의해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 닌, 더블리너 모두가 수백 년간 조금씩 만들고 보존해 온 온전한 시민의 거리인 것이다. 그래서 더블린 거리에서는 거리를 구성하는 모두가 이방인이 아닌 주인처럼 행동하 고, 격식을 갖추지 않은 다양한 이벤트와 만남이 매우 자 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더블린에 있는 모두가 온전히 도 시 공간의 주인으로 활동하고,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경 험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곳, 그곳이 바 로 더블린이다.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을 더블린만의 서사
영화 ‘원스’의 더블린, 그리고 110년 전 「율리시스」에 기록 된 또 하나의 더블린. 더블린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 가는 이야기가 있고, 사람들이 생활하는 풍경이 있다. 여 느 유럽 도시 못지않게 많은 역사적 건축물이 있고, 수많 은 예술가들의 터전이 된 곳. 인류 최악으로 기록된 대기 근의 고통을 겪은 가난한 농업국을 탈피하여 국민소득 5 만 달러와 완전고용의 신화를 달성한 켈틱 호랑이(Celtic
Tiger)의 심장. 세계 10대 IT기업의 유럽 헤드쿼터 중 아 홉 개가 위치해 있으며, OECD에서 선정한 가장 비즈니스 하기 좋은 10대 도시 중 한 곳. 인구 50만 명이 채 안 되는 유럽 변방의 작고 오래된 도시 더블린이 세계적 도시들 사 이에서 찬란히 빛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더블린에서는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빛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더블린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머물고 소통하기 좋은 거리와 도시적 풍경, 그 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이지만 다채로운 소통과 이벤트는 많은 젊은이들과 예술가들이 더블린을 그리워하 게 하는 원천이다. 그리고 그들이 더블린을 노래하고 더블 린의 모습을 그리워할 때마다 더블린은 더욱 더 많은 기억 과 작품들 속에서 살아 숨쉬며 정통적인 모습으로 역사에 새겨진다. 이것이 바로 더블린을 더블린이게 하는 진정한 가치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진솔한 모습에 주목하게 되는 곳. 누군가의 평범한 이야기가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다가 올 수 있는 곳. 그곳 더블린에서 오늘은 또 어떤 누군가의 서사가 펼쳐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영화와 도시 27
템플바 디스트릭(좌), 더블린 스파이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