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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etoric of th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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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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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etoric of the Image

롤랑 바르뜨

고대의 어원에 의하면 이미지image라는 말은 이미타리imitari(모방하다)의 어원에서 나온 말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기호학에서 제 기되는 중요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유사적인 재현(복제)은 단지 상징들의 단순한 유착이 더 이상 아닌, 진정한 기호체계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진법적 디지털형이 아닌 유사적 아날로그형의 코드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일 까? 언어학자들은 유사에 의한 의사소통을 언어체의 밖으로 되돌린다.[이미 지는 언어학적이 아니라는 이야기] 이미지의 언어학적 성격을 의심하는 것 은 비단 언어학자들만이 아니다. 통설 역시도 이미지를 의미에 저항하는 장 소로 어렴풋이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는 다시 보여주는 것 re-presentation, 즉 재현이다. 우리는 관념적인 것은 체험된 것과는 상반관 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유사는 그 양쪽에서 빈궁한 의미로 느 끼고 있다. 한쪽에서는 이미지가 언어에 비해 매우 초보적인 체계라고 생각 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의미작용이 이미지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요 로움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어떤 방식 으로 의미의 경계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지의 의미작용을 존재론적인 입장 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는 이미지로 어떻게 가는가?

의미는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그리고 만일 의미가 끝났다고 한다면 그 저 편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이것은 이미지가 내포할 수 있는 메시지들에 대한 스펙트럼 분석을 하면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이다.

우선 광고이미지에 관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광고에서는 이미지 의 의미작용이 확실하게 의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광고 메시지의 시니피에 들은 제품의 어떤 속성이며 이 시니피에들은 가능한 한 분명하게 전달돼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고에는 수많은 기호들이 가득 채워져 있고 우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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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읽어내야 한다.

[기호를 읽는 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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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의를 입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노인과 여인” 이라는 그 림이 푸에르토리코 국립박물관에 걸려 있다. 방문객들은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행각을 그린 이 작품에 불쾌한 감정을 표출한다. 국립미술 관의 벽면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인의 부도 덕을 통열히 꾸짖는다. 하지만 의아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검은 수 의를 입은 주책스런 노인과 이성을 잃은 젊은 여성은 가장 부도덕한 인간의 한 유형으로 비쳐지고 있다.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 불륜의 현장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일까. 이 그림은 정말 삼류 포르노인가. 검은 수의를 입 은 노인은 분명 젊은 여인의 아버지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 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 해 싸운 투사였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채포해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 을 내렸다. 음식물 투입 금지.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다. 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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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한지 며칠 지나서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덕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부른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노인과 여인 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푸에르토리코인 들은 이 그림을 만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동일한 그 림을 놓고 사람들은 포르노라고 비하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도 한다. 노인과 여인 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우리들은 가 끔 본질을 파악하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 대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언어기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로 이루어져 있다]

- 기호표현(시니피앙, 기표), 기호내용(시니피에, 기의)

-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기호(언어는 상징기호에 속한다)는 시니피앙과 시 니피에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확대하면 도상기호(그림)에도 적용시킬 수 있겠다).

- 원래 소쉬르에서는 ‘나무’를 가지고 예를 들고 있다.

- 오백 원짜리 동전을 가지고 다시 예를 들어보자.

오백 원짜리 동전이 있다. 오백 원짜리 화폐의 가치를 결정하려면 우리는 먼 저 그 돈이 다른 어떤 물건(빵, 우유 등)으로 교환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같은 화폐 체계 내에서 10원, 100원, 1000원, 10,000원 등 다른 화폐와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달러나 엔화 같 은 다른 화폐 체계와 오백 원의 관계 역시 살펴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단어의 가치를 결정하려면 우리는 그 단어가 한 사상으로 교환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백 원짜리 화폐는 물질적 표현과 그것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가치의 결합체이다. 물질적 표현으로서 오백 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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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기호표현(기표)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가치는 동전 의 기호내용(기의, 기호의미)을 구성한다. 오백 원의 기호 표현으로서의 의미 는 화폐체계 내에서 그것이 갖는 위치에 따라 결정되며 기호내용으로 오백 원의 가치는 그것으로 살 수 있는 물건과 다른 물건들 사이의 차이에서 나 온다. 그 둘이 결합되었을 때 오백 원은 오백 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대 신하는 기호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그러나 오백 원이라는 물질적 표현과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의적인 결합일 뿐이 다).

기호학에서 언어는 정보의 저장과 전달이라는 목표를 수행하는 기호전달의 메카니즘으로 정의된다. 언어는 기호의 하나이다. 기호의 개념은 모든 언어 의 바탕에 깔려 있다. 기호는 그 형식적 측면을 구성하는 물질적 표현과 물 질적 표현이 연상시켜 주는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쉬르는 전자를 씨니 피앙(기호표현), 후자를 씨니피에(기호내용)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골동품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골동품이라는 단어에서 특수한 한국어 음소들과 형태-문법적 구조는 표현을 구성하며 그 어휘적, 역사적, 문화적 의미들은 기호의 내용을 구성한다. 우리가 골동품이라는 낱말을 보거 나 들었을 때 철자나 소리는 물질적 표현, 즉 기호표현에 해당되며 그것이 연상시켜 주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 값진 물건 등 사회, 역사, 문화적 개념 은 기호내용을 구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골동품이라는 기호표현이 기호내용 을 대신한다는 것, 즉 씨니피앙과 씨니피에 사이에는 대신하는 것과 대체되 는 것의 관계가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가 기호의 의미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미가 관계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기호내용과 기호표현이 동일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전달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호내용과 표현 은 같아서는 안 된다. 어떤 것을 같은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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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라는 개념 속에는 항상 어떤 것을 대신하는 것, 즉 대용물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둘 사이가 같다면 그것은 기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기호내용과 기호표현의 두 요소로 구성된 기호는 두 가지 의미에서 자의적 성격을 지닌다. 소쉬르는 기호표현과 기호내용의 결합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 하고는 자연적 결합이 아닌 언어적 관례의 소산이며 기호 전체와 기호가 지 시하는 지시대상 사이에도 어떤 자연적 관계도 없다고 말한다. 말은 경험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반영하지 못한다. 말은 언어나 다른 기호체계가 없다 면 아무런 변별도 없는 생각의 혼돈에 그치고 말 것에 형식을 부여해준다.

사물이 말의 의미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물의 의미를 한정하는 것 이다. 우리는 청각적 이미지와 그것이 연상시키는 개념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청각적 이미지는 그 언어체계 내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값이 주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지"라는 소리는 국어 음성체계 내에서 "바지", "주지", "둥지" 등과의 차이 때문에 값을 가지 는 것이다. 기호내용 역시 마찬가지다. "나무"라는 기호내용은 그것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여러 식물체의 반영이나 표현이 아니라 문제의 기호에 의 해 우리가 덤불 따위의 다른 대상과 구별하는 "나무들"이라는 대상의 부류일 뿐이다. 기호표현은 청각적, 시각적 이미지 체계 내에서 그것들이 갖는 위치 에 따라, 기호내용은 사고체계 내에서 그 개념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값이 주어진다. 각각 다른 체계 내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둘의 결 합은 자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의적인 관계, 즉 사회적 약속에 의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기호내용과 표현 사이의 관계는 종이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개념이 음성과 결부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음성을 언어 단 위로 인지할 수 없고 개념과 결부된 언표 형식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없다 면 그 개념 역시 마음속에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모호한 사고의 미결 수준과 모호한 음성의 차원을 언어는 임의로 분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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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이미지와 개념이 창조되고 그것이 결합되어 우리는 그것을 말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색채 스펙트럼의 경우 언어화하기 전까지 그것은 생각의 혼 돈된 미결수준, 즉 광파의 흐름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빨강, 보랑, 주황 같은 색채 용어에 의해 임의로 분할하여 명명함으로써 개념과 음성이미지를 결합시켜 하나의 기호를 창조한다. 그 기호가 없다면 세계는 모호한 생각의 흐름일 뿐인 것이다.

물론 기호표현과 내용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지도와 현장, 초상과 사람, 사람과 사진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 한다. 앞의 경우를 관례적 기호라고 한다면 이런 경우는 재현적 기호, 또는 도상(성상과 같은 것)적 기호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것들 사이에 는 차이점이 존재하며 유사성은 관례에 따라 어떤 점에서 같다고 인정하는 정도일 뿐이다. 초상화와 인물 사이에는 3차원적 대상을 2차원적인 그림으 로 나타냈다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소쉬르는 기호표현과 기호 내용 사이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한 이외에 기 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관계 역시 자의적인 관계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호표 현과 내용으로 이루어진 기호는 그 자체로 독립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 라 체계내의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에 의해 값이 주어지며 결국 어떤 외부 세계의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 대상과 임의적으로 결합된다. 이 역시 사회적 약속에 의해 같다고 인정될 뿐이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 가지 메시지

판자니 스파게티 광고를 예로 들어보자. 붉은 색 바탕에 노란색과 녹색의 배 경 속에서 면 -발 꾸러미, 봉지, 깡통, 토마토, 양파, 고추, 버섯이 반쯤 열린 그물 망태기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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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고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뽑아내 보자. 우선 언어적인 메시지로서 부차 적인 삽화 설명문과 라벨을 들 수 있다. Panjani 라는 라벨은 동일 모음의 반복에 의해 이탈리아풍이라고 할 수 있는 보충적 시니피에를 넘겨준다. 따 라서 이 광고에 있어서 언어학적 메시지는 디노테이션과 코노테이션이라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언어학적인 메시지는 별도로 떼어두고 순수한 이미지 만 놓고 볼 때, 첫 번째로 반쯤 열린 그물 망태기를 통해 스스로 장을 보는 가사 준비의 가치에 대한 의미이다. 두 번째로 포스터의 세 가지 색채(노랑 빨강 초록)와 토마토, 고추의 결합이다. 이것의 시니피에는 이탈리아로서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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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니라는 언어학적 시니피에와 불필요한 중복의 관계에 있다. 세 번째로 상 이한 여러 음식 재료들로 조밀한 집합이 총체적 요리 서비스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고, 네 번째로 제품의 처음 상태와 마지막 상태에 다리를 놓아줌으로 써 통조림 캔과 자연 제품이 대등한 것 같은 의미를 준다. 이것은 미적 시니 피에로서 마치 정물화 같은 느낌을 주며 많은 식료품 그림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켜 준다.

이 이미지에는 네 개의 기호가 있고 그것들은 하나의 일관된 전체를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불연속적인 것이며 대체로 문화적인 지식을 요구하고 또한 그 각각이 종합적이며(예를 들어 이탈리아풍), 행복감을 주는 가치들이 스며들어 있는 시니피에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적 메 시지 다음에 오는 두 번째의 도상적(iconic) 메시지를 보았다. 이것이 끝인 가? 이미지에서 이런 모든 메시지(기호)를 제거한다고 해도 아직도 어떤 정 보를 전달하는 무언가가 남는다. 이 세 번째 메시지의 시니피에는 장면의 실 제 대상물에 의해 형성되며 시니피앙들은 사진 찍혀진 실제 대상물에 의해 형성되어 있다. 기호화된 사물과 그것을 지칭하는 이미지간의 관계가 언어에 서와 같이 임의적인 것이 아닌 한, 대상의 심리적 이미지라는 모습아래 세 번째의 개념을 부여할 필요는 더 이상 없다. 세 번째의 메시지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가 거의 동어반복적이라는 것이다. 사 진은 분명히 하나의 장면을 나름대로 배치한 것이지만 -프레임, 축소, 원근 감의 제거 등을 통해)- 이러한 변화는 코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바와 같은 전환(코노테이션)은 아니다. 여기서는 진정한 기호체계의 특성이 되고 있는 등가성은 사라지고 없으며 사이비 동일성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이 메시지의 기호는 제도적으로 축적된 어떤 것에서 온 것도 아니며, 코드가 덧붙여진 것도 아니므로 우리는 ‘코드 없는 메시지’라는 역설에 부딪 치고 만다. 이 같은 특성은 메시지를 읽는 지식의 층위에서 찾아진다. 이미 지의 이 마지막(혹은 첫 번째) 층위를 읽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은 우리 지각에 결부된 지식일 뿐이다. 그 지식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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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하면 우리는 이미지가 무엇이며 토마토, 그물 망태기, 면봉지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거의 인류학적인 지식의 문제이다.

이 메시지는 말하자면 이미지의 문자에 부합하는 것이며, 우리는 상징적 메 시지인 그 이전의 메시지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을 문자적literal 메시지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이 이미지를 만족스럽게 읽어냈다면, 여기서 분석된 사진은 우리에게 세 가지 메시지를 제공한다. 그 셋은 언어적 메시지, 코드가 덧붙어진 도상 적 메시지, 코드가 없는 도상적 메시지이다. 언어적 메시지는 쉽게 다른 두 가지 메시지와 분리될 수 있으나, 나머지 두 가지는 같은 토대(도상적)를 가 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분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호를 읽을 때 두 도상적 메시지의 구분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 는 것은 확실하다. 이미지를 보는 사람은 지각적 메시지와 문화적 메시지를 동시에 받아들이며, 이미지를 읽는데 있어서의 이러한 혼란이 대중적 이미지 의 기능에 상응한다는 점은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언어 기호에서 기표와 기의의 구분을 허용하는 것과도 비슷한, 분석상의 정 당성을 가지고 있다(실제로 현실에서는 정의라는 메타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는 누구도 ‘단어’를 그 의미로부터 분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분 이 우리로 하여금 이미지의 구조를 간단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서술할 수 있 도록 해준다면, 그리고 그런 서술이 우리로 하여금 사회 속에서의 이미지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깔아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삼 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미지의 전반적인 구조, 즉 세 가 지 메시지의 궁극적인 상호관계를 이해한다는 우리의 목표를 잃지 않으면서 도 각각의 유형의 메시지에 대해 다시금 따져 들어, 그 메시지의 일반적인 성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박한 분석[2]이 아니라 구조적인 서술이므로, 문화적 메시지와 문자적literal 메시지를 뒤바꾸는 식 으로 메시지의 순서에 약간의 변형이 가해질 것이다. 두 가지의 도상적 메시 지중 문화적 메시지는 문자적 메시지 위에 덧 씌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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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적 메시지는 상징적 메시지를 떠받들고 있는 지지체로 보인다. 따라서 다 른 체계의 기호를 떠맡아서 자신의 기표로 삼는 체계가 코노테이션의 세계 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곧바로 즉자적 메시지는 외연적이고 상징적 메시지는 함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래서 우리는 언어 메시지, 외연적 메시지 함의적 메시지에 대해 알아보자.

언어 메시지

언어 메시지는 연속적인가? 이미지 속에, 아래 혹은 주위에 항상 텍스트가 있는가? 언어가 주어져 있지 않은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문맹 인 사회, 즉 그림문자 상태의 이미지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책이라는 것 이 나타난 이래로, 텍스트와 이미지의 연결은 빈번히 일어나고 있지만 그 연 결은 구조적 관점에서는 별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삽 화’는 어떤 구조를 통해서 기호가 되는가? 이미지는 텍스트에 주어져 있는 어떤 정보를 중복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되풀이하고 있는가. 아니면 텍스트가 이미지에 새로운 정보를 더해 주는가? 이 문제는 그림이 많이 담겨있는 고 전기의 책과 그림과 담론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메네스트리에 Menestrier 같은 작가들에 비추어 보아, 역사적인 차원에서 제시될 수 있다.

오늘날 메스 커뮤니케이션의 수준에서는, 언어 메시지는 제목, 그림설명, 기 사, 영화의 대사, 만화의 대사 등을 통해 모든 이미지에 깃들어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현상으로 말미암아 이미지의 문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 주 적절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문명은 아직도, 그리고 어느 때 보다 도 글쓰기의 문명이며, 글쓰기와 말하기는 항상 정보전달구조의 완전한 조건 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언어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뿐인데, 그 메시 지의 위치나 길이는 중요한 것 같지 않다.[3] 도상적 메시지와 관련하여 언 어 메시지의 기능은 무엇인가? 구 가지의 기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고정 anchorage과 연결rela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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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분명하게 보겠지만, 모든 이미지들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이미 지는 그 기표 아래 ‘떠다니는 기의의 사슬’을 가지고 있는데, 독자는 어떤 것 은 선택하고 다른 것은 무시해 버리게 된다. 다의미성은 의미의 문제를 던져 주며, 이 문제는 항상 기능장애dysfunction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사회는 이 기능장애를 비극적이거나 시적인 연기의 형식으로 회복해낸다. 영화에서는 외상적인traumatic 이미지는 사물이나 테도의 의미에 있어서의 불확실함(두 려움)에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에서는 불확실한 기호의 공포에 맞 서기 위한 방편으로 떠다니는 기의를 고정시키기 위한 다양한 테크닉이 개 발되어 있다. 언어 메시지는 이런 테크닉 중의 하나이다. 문자적 메시지의 차원에서는 텍스트는 어느 정도는 직접적이고 부분적인 방식으로-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한다. 텍스트는 장면 속에 나타난 요소와 장면 그 자체를 순수하고 간단하게 식별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이미지를 문자적 으로 서술하는 문제이며 옐름슬레브Hjelmslev[4]의 용어를 쓰자면 (코노테 이션과 반대되는 의미로서) 공정작용operation의 문제이다. 명명의 기능은 명칭에 의거하여, 대상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문자적인 의미를 고정시 키는 것을 말한다. 무언가가 접시에 가득 담겨 있는 모습을 볼 때 나는 형태 를 식별하는데 있어서 주저할지도 모른다. 이때 ‘버섯을 곁들인 쌀과 참치’라 는 문구는 올바른 지각의 수준을 고르는데 도움을 주며, 나의 시선 뿐 아니 라 나의 이해를 초점 맞추도록 해 준다. 상징적 메시지에 있어서는 언어 메 시지가 더 이상 식별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안내하는데 그것은 함 의가 지나치게 개별적인 영역으로(말하자면 언어메시지는 이미지의 투사하는 힘을 제한한다), 아니면 불쾌감을 주는 가치를 향하여 마구 흘러 넘치지 못 하도록 붙잡아 두는 집게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다르시 방부제 광고는 사다 리 근처에 흩어져 있는 몇 개의 과일을 보여준다. ‘마치 여러분의 정원에서 온 듯한’이라는 문구는 하나의 가능한 기의는 불쾌한 것이므로 없애버리고 좀 더 기분좋은 기의(자신의 정원에서 따온 과일이 주는 자연스럽고 사적인 성격)를 읽도록 유도한다. 언어 메시지는 여기서 인공적인 것이라면 의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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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와 연결되는 불쾌한 신화에 맞서 싸우는 역터부로 작용한다. 물론 광고 이외의 곳에서도 고정의 기능은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고 고 정의 기본적인 기능이다. 텍스트는 읽는 이를 이미지의 기의 속으로 이끌고 들어가면서 어떤 것은 피하도록 하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도록 한다. 때로는 미묘한 배치dispatch를 통해서 텍스트는 독자를 원격조정하여 미리 정해 놓 은 의미를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 모든 고정의 경우에 있어서 언어는 분명히 설명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설명은 선택적이며, 그것은 도상적 메시지의 전체가 아니라 그중 어떤 기호에만 적용되는 메타 언어이다. 텍스 트는 사실 이미지에 대해 창조자가 가하는 검사의 권한이다. 고정은 메시지 의 사용에 대한 책임을 띄고 있는 조절의 도구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기의가 가진 자유에 비해 볼 때, 텍스트는 억압적인 성격[5]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는 한 사회의 도덕과 이데올로기가 부과되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고정은 언어 메시지의 기능 중 가장 흔히 나타나는 것이며, 보도 사진이나 광고에서 많이 나타난다. 적어도 고착된 이미지에 관해서는 연결의 기능은 그만큼 흔하지는 않다. 그것은 만화에서 특히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텍스 트와 이미지는 서로 보충하는 관계에 있다. 이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어는 좀 더 일반적이 구문의 한 단편이며 메시지의 통일은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즉, 이야기, 일화의 수준에서 일어난다.(이야기를 자율적인 체계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해 주는 예) 고착된 이미지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이런 연결-텍스트는 영화에서는 아주 중요해 지는데, 영화에서는 대화가 단 지 설명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의미들을 연속되는 메시지 속에서 끄집어냄으로써 행동을 진전시키기 때문이다. 분명 히 언어 메시지의 두 기능은 하나의 도상적 전체 속에서 공존할 수 있으나, 작품의 전반적인 구조에 있어서는 둘 중 어느 것이 우위에 있느냐 하는 것 이 중요하다. 텍스트가 연결의 이야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정보는 더 부 담스러운 것이 되는데, 그 경우에는 그 텍스트를 해독하기 위하여 디지털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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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언어체계)를 배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대체물의 특성(고정, 조절)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지가 정보라는 부담을 가두고 있게 되며, 이미지 는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정보는 게으른 것이 된다.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되 어 잇는 어떤 만화에서는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텍스트에 맡겨지며, 이미지는 계열체적 질서paradiamatic order의 수식적인 정보를 모으게 된다. 부담스 러운 메시지와 담론적 메시지는 성급한 독자가 말로 된 서술의 지루함을 피 할 수 있도록 서로 일치되도록 되어 있으며, 말로 된 서술은 이미지 즉 덜 수고스러운 체계에 맡겨진다.

지시적 메시지Denotative message

우리는 이미지 자체에 있어서는 문자적 메시지와 상징적 메시지간의 구분은 개념적 조작의 문제일 뿐임을 보았다. 우리는 순수하게 문자적인 이미지를 만나는 일은-적어도 광고에서는- 절대로 없다. 완전히 소박한 이미지가 있 다고 해도, 그것은 즉각 소박성이라는 기호와 결합되어 제3의 메시지, 즉 상 징적 메시지가 덧붙게 된다. 따라서 문자적 메시지의 특성은 어떤 실체가 있 는 것이 아니라 상관적일 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축출에 의해 생겨난 메 시지로서 함의의 기호를 심리적으로 지워 없애 버렸을 때 남는 어떤 것에 의해 구성되는 메시지이다. 함의의 기호를 없애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데, 그것은 정물의 구성에서와 같이 함의의 기호가 이미지 전체를 관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축의미적 기호가 축출된 상태는 당연히 풍부한 현 실성에 상응한다. 그것은 모든 의미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의미가 부재한 상태이다. 그것은 또한, 충족적인 메시지이기도 한데-그러나 이 말이 방금 앞의 말과 상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장면의 식별이라는 차원에서는 적어 도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속의 글자는 첫 번째 수준 의 판별능력- 그 이하의 수준에서는 선, 형태, 색깔만을 알아 볼 수 있는- 에 상응하는데 이 판별능력은 바로 그 빈곤함 때문에 가상적인virtual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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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그 이유는 실제 사회 속에서는 누구나 단지 인류학적 수준보다 상위에 있는 지식은 치워버리고 단지 글자 이상의 어떤 것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지 시적 이미지는 축출적이면서도 충족적이므로, 미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일종의 낙원과도 같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아주 이상적으로 함의들이 제거되고 나면, 이미지는 완전히 객관적이 되거나 아니면 결국은 순진한 것이 될 것이다.

디노테이션의 이상향적인 특성은 사진이 그 유사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코 드 없는 메시지를 구성하는 듯이 보인다는 역설에 의해 상당히 강화된다. 여 기서 그러나 구조적 분석은 차별화를 이룩해야 하는데, 모든 종류의 이미지 중에서 사진만이 전환의 불연속적 기호와 규칙에 의하지 않고 문자적인 정 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드 없는 메시지인 사진은 따라서 그냥 외 시될 때에도 코드 있는 메시지인 그림에 대립된다. 그림이 코드화 되어 있다 는 점은 세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우선 사물이나 장면을 그림으로 옮겨 놓으려면 규칙에 따르는 전이가 있어야 한다. 그림으로 옮기는데는 본질적인 성격이 없으며, 전이의 코드는 역사적이다-원근법에 대한 코드를 생각하면 그렇다-. 둘째, 그림(코드화)을 그리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간의 구분이 금방 꼭 생긴다. 그림은 모든 것을 옮겨 놓지는 않으며(때때 로 그것은 아주 적은 것을 옮겨 놓는다), 언제나 강한 메시지이다. 달리 말 하면 스타일이 없는 그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의 디노테이션 메시 지는 사진보다 덜 순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코드들처럼 그림은 훈련을 요구한다(소쉬르는 이 같은 기호학적 사실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 다). 외시적 메시지에 코드를 덧붙이는 것이 함의적 메시지에 영향을 미치는 가? 문자적 메시지에 코드를 붙이는 것이 함의를 준비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확실한데, 그러한 동시에 그림이 그 코드를 드러내는 만큼 두 메시지 사이의 관계는 변형된다. 사진에서와 같이 그것은 더 이상 자연과 문화간의 관계가 아니라, 두 문화 사이의 관계이다. 그림의 윤리는 사진의 윤리와는 같은 것 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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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서는 적어도 문자적 메시지의 층위에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변환이 아니라 기록이며, 코드가 없다는 것은 사진의 자연스러움이라는 신화 를 강화시킨다. 사진의 장면은 인간이 아닌 객관적인 기계에 의해 포착된 채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진에 관한 인간의 개입(배치, 거리, 빛, 연초점, 급속 한 패닝 등)은 사실 완전히 코노테이션의 측면에 속한다. 그것은 마치 원초 적인 사진이 있었는데 사람이 그 위에다가 여러 가지 테크닉의 도움을 빌어 문화적 코드에서 끌어 온 기호들을 늘어놓은 것과 같다. 문화적 코드와 자연 적 非코드 간의 대비만이 사진의 독특한 성격을 설명해 줄 수 있으며, 사진 이 인간의 역사에 가져온 인류학적 혁명을 평가 할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사진에 연루된 의식의 종류는 정말로 그 유례가 없는 것인데, 그것은 사진이 사물이 ‘거기 있다’는 의식이 아니라, 사물이 ‘거기 있었다’ 라는 인식을 불 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간-공간의 범주이다. 그것은 공간적 인 즉각성과 선행성이며, 거기서 사진은 ‘여기-지금’과 ‘거기-그때’의 비논리 적인 연결이 된다. 따라서 사진의 진정한 비현실성은 이러한 외시적 메시지 혹은 코드없는 메시지의 수준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그 비현실성은

‘여기-지금’의 비현실성인데, 사진은 환영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존으로 받아 들여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진의 현실성은 ‘거기 있었다’인데 모든 사진에 는 ‘이게 바로 이랬었다’ 는 어쩔 수 없는 증거, 우리가 피하고 싶어하는 현 실을 희안한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바로 그 증거가 있기 때문 이다. 이런 종류의 시간적 평형은 이미지가 상상력을 투사하는 힘을 줄일 것 이다(심리테스트는 주로 사진보다는 그림으로 행해진다). ‘이게 이랬었다’는 쉽게 ‘이게 나야’를 굴복시킨다. 이런 모든 말들이 옳은 것이 되려면 사진은 순수한 시각적 의식과 연관되야 하며, 영화가 의존하고 있는 상상적이고 마 술적인 허구의 의식과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영화와 사진의 구분 이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대립의 문제라는 견해는 좀더 권위를 얻 을 것이다. 영화는 더 이상 움직이는 사진으로 볼 수 없다. 영화에서는 그곳 에 존재했었음이 거기 있음을 위해 사라진다. 사진이 역사적 사실보다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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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고 불투명한 인류학적 사실을 재현하는 반면 영화는 다른 허구의 예술과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는 처음으로 코드없는 메시지를 체험하게 된다. 사진은 따라서 여러 다양한 이미지의 마지막 결론이 나니라 정보의 소통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외시적 메시지는 어떤 코드도 품고 있지 않은 한(광고사진) 우리가 정의하려는 도상적 메시지의 일반적 구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외시적 이미지는 상징적 메시지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즉 외시적 이 미지는 특히 광고에 있어서, 극도로 밀도가 높은 인공적으로 꾸며진 코노테 이션을 순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판자니 광고 포스터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지만, 문자적인 메시지가 충족적인 한은 사진 속에 대상의 ‘거기있음’이 남아있다. 자연이 눈앞에 잇는 장면을 저절로 만들어낸 것과 같이 보이는 것 이다. 뻔히 의미론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체계의 단순한 정당성을 아무도 모르게 유사 진실로 대체된다. 코드가 없으면 문화의 기호가 자연 속에 토대 를 둔 것 같이 보여지게 되므로 그 메시지는 탈지성화된다. 분명히 이것은 중요한 역사적 역설이다. 기술이 정보의(그리고 이미지의) 확산을 더 발전시 킬수록 그것은 주어진 의미라는 허울 아래 구성된 이미지를 감출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미지의 수사

우리는 세 가지 메시지(상징적, 문화적 혹은 공시적 메시지)의 기호들이 불 연속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기표가 이미지 전체에 걸쳐 있는 듯이 보일 때에도 다른 것과는 별개의 기호가 존재한다. 억양이 언어의 여러 분절화된 단위에 걸쳐서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언어에 있어서는 분리된 기표인 것처 럼 구성은 미적인 기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문화적 코드에서 끌어온 기호를 지닌 정상적인 체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기호의 요소들간의 연결이 유사적이라 해도). 이 체계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같은 어휘,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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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어휘에 대해서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다. 앞서 분석해 본 판자니 광고에서도 네 개의 함의적 기호가 식별되었다.

아마 다른 기호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르게 읽는다는 것이 혼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의 해독에 투여되는 다른 종류의 지식 실용적, 국가적, 문화적, 미적- 에 달려 있으며, 이런 지식은 분류하여 유형 으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한사람 속에 완벽히 공존할 수 있는 여러 다른 사람이 이미지를 읽는 것과도 같다. 하나의 어휘lexicon는 다른 어휘들 을 동원한다. 어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군의 행위와 기술에 상응하는 언어 의 상징적 평면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이미지를 다르게 읽는 문제이다. 각각 의 기호는 일군의 태도 관광, 가사, 예술에 대한 지식에 상응하는데.

[1] 사진에 대한 묘사는 여기에서 신중하게 주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메타 언어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소박한 분석은 요소들을 열거하는 것이며, 구조적인 서술이란 구조의 항 들을 묶고 있는 결속의 원칙(만약 하나의 항이 변하면 다른 항들도 변하게 되는)을 통해서, 이런 요소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3] 긴 텍스트는 코노테이션 덕분에 전체적인 시니피에만을 고려할 뿐이고 또한 이미지와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시니피에이다.

[4] 기능주의적 언어분석 이론을 확립시킨 덴마크의 언어학자(1899-1965) [5] 이것은 이미지가 텍스트에 따라서 구성되어, 아무런 조건이 필요없어 보 이는 역설적인 경우에 분명히 드러난다. 커피의 향기가 가루로 되어 있는 제 품 속에 ‘닫혀’있으며 따라서 커피를 쓸 때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어떤 광고는 커피 깡통에 쇠사슬과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장면 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언어적 비유 ’잠겨있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 다. 우선 읽히는 것은 이미지이고 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텍스트는 결국은 여 러 가지 기의 중에서 하나의 기의를 고르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된다. 이 러한 순환적 운동에서 억압은 메시지의 평범화로 다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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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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