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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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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 1 제15강 :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1. 중일전쟁 이전 시기 한반도에서의 뉴스영화

구한말 한국(인)은 타자화된 대상으로서 카메라 렌즈의 피사체가 되었다. 그리고 러일전쟁- 을사조약-고종 퇴위-군대 해산-사법권과 경찰권의 박탈-한일병합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카메라를 통한 시선의 주체가 서양(인)에서 일본(인)으로 교체되어 갔다. 1910년,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기존의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환원될 무렵, 경성을 중심으로 영 화 상영이 제도화되었다. 조선인/일본인, 조선어/일본어라는 민족-언어로 경계 지어진 활동 사진 상설 극장에서는 구미와 일본의 뉴스영화가 관객에게 특정 사실과 세계(관)를 전시하 였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대 조선 식민지 정책 기조가 소위 ‘문화 통치’로 전환 되는 한편, 조선에서 (무성)영화 제작 활동 또한 활발해져 갔다. 그러면서 조선총독부를 위 시한 권력 기구와 언론 기관, 그리고 단성사 등 극장을 중심으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 졌다. 그러다가 1920년대를 통과하며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등 조선어 민간지 발행사와 조선인 민간 조직체인 동아상공영화뉴쓰사를 통해 조선인을 주축으로 뉴스영화 제작이 시도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통과하며 수그러들고 말았다.

2.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 연구

영화 기술과 국제 정세의 변화로 전 세계적으로 뉴스영화가 성행하던 1930년대 식민지 조 선에서도 뉴스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제작의 기운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시 상황에 돌입한 뒤 영화의 선전-계몽 역할이 더 욱 강화됨에 따라 정책, 산업 양면에서 뉴스영화의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의 관변 단체, 군대 기구, 관공 기관 등에서는 시국 인식과 전시 동원을 목적으로 강연회와 영화회를 결합한 형태의 각종 군중 집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신문사들, 그 중에서도 총독부의 기관지를 발행하던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여기에서는 주로 ‘국가’의 시책 선전과 계몽을 위한 ‘시국영화’가 상영되었는데, 대부분은 전 시의 상황과 후방의 역할을 필름 속 영상과 소리를 통해 투사하였다. 그 중에서도 뉴스영화 가, 특히 ‘사변뉴스’로 불리던 중일전쟁 관련 뉴스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 조선(경성)에도 뉴스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이른바 ‘뉴스영화 전문 관’이 등장하였다. 아울러, 1940년 6월부터 일본의 뉴스영화를 일원화하여 제작-배급되기 시작한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의 <일본뉴스>가 조선에서도 그 입지를 강화하였다. 뉴스 영화의 의무 상영에 대한 법제적 장치 역시 일본과의 교신 및 연동을 통해 마련되었다. 그 리고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는 1941년 12월 8일 이 후 더욱 강화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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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개봉일 단편 필름 제목 (내용)

제1보 1942.12.9 아아 남방의 주춧돌 합동 고별식 / 저축 공로자 표창식 / 제18회 전조선 기마대회 / 치안 영혼을 기리다 / 불타는 진정

제2보 1942.12.23 대동아 전쟁 1주년을 맞이하여 / 1억 백성의 언어는 하나 / 국민 개병에 올리는 횃불

제3보 1943.1.4 농촌 신년 / 영국군 포로를 수용하다 / 대륙의 엄격한 감시 / 연두인사 제4보 1943.2.8 애국 백인일수(百人一首) / 동계 연성 빙상경기대회 / 싸우는 백의의 천사

/ 바다를 지킨다

제5보 1943.3.8 너도 나도 결전이다 / 원시의 숲과 싸우다 / 대동아 건설보 철벽수비의 방공진

제6보 1943.4.14 연성 연보 / 교육자 간담회 / 싸우는 여성 / 어뢰와 포탄을 우리의 진정으 로 / 수송 결전진

제7보 1943.5.13 만주국 황제폐하 수풍댐 순수(巡狩) / 장대한 위용 / 증산 전사에 영광 있 으리라 / 이 은혜에 우리들 총력으로 보답하자

3. 식민지 조선의 뉴스영화 <조선시보>

1940년대 들어 식민지 조선에서도 지속적이고도 정기적인 뉴스영화 제작의 시도가 있었다.

1941년 조선문화영화협회에서 <조선뉴스>가 제작되었으며, 1942년 조선의 모든 영화회사 가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로 통합된 이후에는 12월부터 <조선시보>가 발행되기 시 작하였다. <조선시보>는 구성, 형식, 내용 등의 측면에서 동시기 일본 유일의 뉴스영화이자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 전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본뉴스>와 일정 부분 공통점과 차이 점을 보였다. 또한 주로 조선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1개월에 1회 제작되던 <조선시보>는 조선 유일의 뉴스영화로서의 위상을 지녔으나, ‘제국’ 권역을 범위로 삼아 1주일에 1회 정 기 발행하던 <일본뉴스>가 꾸준하게 조선에서 상영되는 상황에서 뉴스영화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이후에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뉴스영화의 공급처가 사 단법인 일본영화사의 <일본뉴스>로 집약되었다. 이를 통해 중일전쟁의 장기화와 태평양전 쟁의 발발에 따른 전시체제의 공고화와 식민지 본국 일본과 그 대상국 조선의 종속적 위계 화의 심화가 영화 분야로도 확대되고 뉴스영화 부문에도 이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제국의 뉴스영화와 식민지 뉴스영화의 ‘장(場)’으로서의 조선, 그러나 보통의 극영화보다도 훨씬 그 기반이 취약하여 애초부터 일본(인)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던 뉴스영화의 경우 극 한 정책적 환경에 스스로를 조율하며 제국과 식민지 간의 역학적 모순을 은폐한 채 시대 논 리와 분위기 속에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다.

(1) <조선시보>의 제작 경향과 식민지 뉴스영화로서의 한계

[표] <조선시보> 제1보~제7보 관련 사항1)

<조선시보> 제작 관련 소식이 가장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는 자료라 할 만한 위의 기사를 보건대, <조선일보>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설립된 년도인 1942년 말부터 발 간되어 제3보까지 약 2주, 10일 간격으로 나오다가 1943년 들어 제3보부터는 1개월에 1회 정도의 일정한 주기로 발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작품 활동에 있어 “결산 제1기(1942년-인용자)에는 조선시보 3종(제1보부터 제3보), 위탁 영화 3종(별도 기재)이 완성되었을 뿐, 다른 것은 모두 제작 중도 또는 기획에서 끝났다”2)

1) 1943년 7월 11일 ‘조선영화 특집(朝鮮映画特輯)’호,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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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종류의 영화에 비해 뉴스영화의 제작이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활 발히 이루어진 편이다.3)

<조선시보>의 각 호 속에 포함된 단편 필름의 제목을 통해 유추 가능한 뉴스의 내용은 대체로 ‘대동아’전쟁과 전시‘총력’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남방’, ‘대륙’, ‘바다’, ‘원시 의 숲’, ‘만주’ 등 지역적 영역과 ‘백성’, ‘여성’, ‘공로자’, ‘교육자’, ‘포로’, ‘황제’, 간호사 등 대상의 범위가 넓어지고 예식, 대회, 인사, 간담회, 순시 등 행사의 종류와 저축, 언어, ‘결 전’, ‘보답’ 등에 대한 계몽, 선전, 선동의 성격이 다양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2009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매한 <발굴된 과거 네 번째 고스필모폰드 발국영상 모음>

DVD에 포함되어 있는 제11보를 참고하건대, <조선시보>는 최소한 1943년 9월까지는 규칙 적으로 제작, 공개되었던 듯하다. 설명 책자에는 제작년도가 ‘1943년경’ 정도로 불분명하게 표기되어 있으며,4) 작품에 관한 영상자료 해제를 담은 글에서도 영화 속에 배치된 단편 필 름 내용만을 소개할 뿐 제작 또는 상영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5) 그런데 필자가 발굴한 다음의 《매일신보》 1943년 9월 21일 기사에는 <조선시보> 제 11보가 공개된 시점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진1] <조선시보> 제11보 관련 기사, 《매일신보》1943.9.21, 2면

그 내용과 형식에 대해서는 후술토록 하고, 일단 배급 및 흥행 정보를 살펴보자. <조선시 보> 11보는 1943년 9월 22일부터 조선 내 홍백계(紅白系) 배급망을 통해 일제로 보급-상 영되었을 터, 첫째 동년 5월 13일 제7보가, 9월 22일 제11보가 공개된 것으로 보아 6월에 8보가, 7월에 9보가, 8월에 10보가 발행되었을 확률이 높으며, 둘째 당시 영화관 상영 프로 그램 가운데 메인을 차지하던 극영화가 통상 홍계 또는 백계 중 하나의 계통을 통해 배급된 데 반해 <조선시보>는 양 쪽에서 배급되었던 것 같다. 조선 유일의 뉴스영화로서 <조선시 보>의 중요성이 그만큼 컸음을 반증한다.

하지만 그것이 해방 시점까지 일제말기 내내 지속되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그 이유에 대

2) 위의 기사, p.33.

3) 참고로 1942년 제작된 위탁영화 3편은 조선총독부 정보과 위촉의 <다나카 총감의 연설>, 일본광업주식회사 위촉의 <고이소 총독 운산광산 시찰>, <우리는 지금 간다>였다. 또한 1943년 들어 7월까지 제작된 문화영화 는 <조선에 온 포로>, <쇼와(昭和) 19년>, <반도의 처녀들>, <영광의 날>, <빛나는 승리> 등 모두 5편이었 다. 아울러 극영화는 1943년 4월부터 <젊은 자태>(도요타 시로 감독)와 <조선해협>(박기채 감독) 제작이 동 시에 개시되었다. <조선해협>의 개봉은 1943년 6월 16일에, <젊은 자태>의 개봉은 동년 12월 1일에 이루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한국영상자료원, 「5. 조선시보 제11보」, 『발굴된 과거 네 번째 고스필모폰드 발국영상 모음』 자료해설 책 자, 2009, 6쪽.

5) 김백영, 「영상자료 해제」, 『발굴된 과거 네 번째 고스필모폰드 발국영상 모음』 자료해설 책자, 한국영상자 료원, 200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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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힌트는 앞서 소개한 《에가준포》 ‘조선영화 특집’호에 게재된, <조선시보>에 관한 당시 조선군 보도부장이자 육군 소장이던 구라시게 슈죠(倉茂周藏)의 견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뉴스는 「조선시보」라고 개제(改題)하여 1개월간의 조선 주요 시사를 1편에 정리하고 있으나, 평 판은 좋지 않다. 그것은 뉴스로서는 시기가 늦으며, 기록영화로서는 너무나 조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월 1편의 제작으로 생생한 뉴스를 제공할 수 없다면 오히려 기록영화로서,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얻기 어려운 사실을 중점적으로 기록해 두어야 한다.6)

그의 말에 의하면, 뉴스영화로서 <조선시보>의 한계는 월 1회 발행에 따른 ‘생생한 뉴스’

(속보성) 제공의 곤란과 질적 차원에서의 영상(기술)의 ‘조잡’함에 기인한다. 이에, 그는 <조 선시보>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얻기 어려운 사실”에 대한 기록영화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데 집중할 것을 권고한다.

‘조선영화 특집’호를 기념하여 《에가준포》가 마련한 ‘조선영화의 특수성’이라는 제명(題 名)의 좌담회에서 “조선을 거듭 인식하라”며 “뉴스영화의 예를 들어도 일본에서는 백 수십 편이 나오”지만 조선의 경우는 “이것에 비해 불과 9편이다.”7)라고 강조하는 사단법인 조선 영화배급사의 상무이사 오카다 준이치(岡田順一)의 발언까지를 참고한다면, 이러한 구라시 게의 권고는 다분히 동시기 일본 유일의 뉴스영화로서 조선을 포함한 식민지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아울러 보도의 속보성 및 범위, 내용의 양과 다양성 등 모든 면에서

<조선시보>를 압도하며 ‘제국 뉴스영화’의 표본을 자랑하던 <일본뉴스>를 염두에 둔 것이 라고 여겨진다.

<일본뉴스>는 1940년 4월 15일 설립된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社團法人日本ニュース 映畵社)에서 제작되어 동년 6월 11일부터 공개된 뉴스영화로서, 패전 직전인 1945년 7월까 지 모두 254호가 제작된 당시 일본 유일의 뉴스영화였다.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는 1941 년 5월 1일 사단법인 일본영화사(社團法人日本映畵社)로 개명함과 동시에 문화영화의 배급 을 겸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뉴스영화 제작 및 뉴스-문화영화 배급 부문에서 차지하는 사 단법인 일본영화사의 영향력은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식민지 조선의 뉴스영화로서의 <조선시보>의 역할과 기능, 나아가 그 필요성에 대한 의문 및 문제 제기가 발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런지 모른다.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만들어지는 극영화에는 상대적으로 조선 나름의 풍경이 나 풍습, 정서, 사정 등 이른바 ‘조선색’이 반영되기 쉽고 문화영화나 기록영화의 경우 또한 그러할 여지가 존재하는 데 반해, 어쨌거나 ‘사실 기록’에 대한 ‘빠른 보도’를 표방하는 뉴스 영화에서는 그것이 어느 곳에서 발행되느냐는 부차적인 사항일 수 있다. 이에 따라, 앞서 구라시게의 발언에서처럼 <조선시보>를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얻기 어려운 사실을 중 점적으로” 담아내는 ‘기록영화’로 특성화할 방안을 세워볼 만도 하겠으나, 이 역시 당대 식 민지 조선의 영화 제작 여건 상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귀결점은 하 나, <조선시보>의 제작 중지 혹은 폐지가 그것이다.

<조선시보>가 정확히 언제, 몇 보까지 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알 기 어렵다. 다만 “결전 비상조치에 의한 흥행 부문의 쇄신 및 이동영사의 본격적 활용을 지 향하고, 현재 영화가 가지는 사명을 최고도로 발휘하기 위해” 1944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6) 倉茂周藏, <朝鮮映画への希望>, 《映画旬報》1943.7.11(朝鮮映画特輯), p.9.

7) 이를 통해 1943년 7월 시점에서 <조선시보>가 제9호까지 발행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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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제작회사를 해산, 그 사업을 영화배급사가 접수함과 동시에 이 기구의 일부를 개 편하여 제작배급 사업을 행하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사(社團法人 朝鮮映畵社)가 신설, 4월 7 일에 발족”하는8) 과정에서, 아니면 그 시기를 전후하여 식민지 조선의 뉴스영화 공급처가 사단법인 일본영화사의 <일본뉴스>로 대체되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을 세우는 일 정도는 가 능해 보인다.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사단법인 조선영화사로의 구조 개편을 통 해 뉴스영화 제작을 담당하던 제3제작과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9)

그런데, 이를 포함한 동시기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 분야의 변화는 동시기 일본의 전시체 제 구축 및 그에 따른 식민지 정책 변화에 연동되어 이루어졌으며 그럼으로써 식민지 조선 영화(계)가 점차 일본영화(계)에 종속되어 가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제로 조선 내의 영화 일원화란 극영화 제작 부문의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일본의 다이에, 도호, 쇼치쿠를 잇는 “일본 제4의 제작회사”10)로서, 배급 부문의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가 일 본의 사단법인 영화배급사로11)의 ‘조선 지사’로서 위치 지어지는 내부적 변화의 성격을 강 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12) 따라서 제국-식민지를 잇는 ‘국가’적 차원의 간섭과 통제의 영향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뉴스영화의 특성 상, <조선시보>의 제작 중지 혹은 폐지를 둘러싼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다.

(2) <조선시보>의 구성, 형식, 내용적 특징 : <일본뉴스>와의 비교 분석을 통해

뉴스영화가 여타 종류의 영화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영화의 구성적, 형식적 측면에서 시청각적인 특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현존하는 유일 한 조선의 뉴스영화인 <조선시보> 제11보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8)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조직은 크게 총무부, 배급부, 제작부 3부 체제로 구성되었다. 총무부는 서무과, 기획과, 경리과를, 배급부는 배급과, 보급과를, 제작부는 계획과, 제작과, 기능과, 기술과 등을 산하에 두었다. 이 가운 데 제작과 내에는 제작과장과 문화영화계장, 미술계 직원이 배치되었는데, 이를 통해 기존의 제작 3과로 분화 되어 극영화, 문화영화, 뉴스영화 모두를 취급하던 체계에서 극영화를 중심으로 하면서 문화영화까지를 섭렵 하는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화계 시사 조선영화>, 《日本映画》1944.5.1, p.31.(한국영상자료원 편,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 2』, 현실문화연구, 2011, 241~242쪽에서 재인용) 9) 高橋猛 編, 『朝鮮年鑑』, 京城日報社, 1944, p.528.

10) 高島金次, 앞의 책, p.135.

11)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의 “「정관」을 비롯하여 「배급업무 규정」, 「영화배급에 관한 규약」, 「영화배 급위탁에 관한 규약」, 그 외 내부적 「복무 규정」” 등은 대부분 사단법인 영화배급사의 그것들이 그대로 적 용된 것이었다. <朝鮮の映画配給興行展望>, 《映画旬報》1943.7.11(朝鮮映画特輯), p.48.

12) 이는 조선영화의 제작 편수가 감소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는데, 극영화의 경우 1940년대 조선에서 개봉된 작품 수는 1941년 7편이던 것이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설립 전후로는 1942년 2편, 1943년 3편, 1944년 3편, 1945년 1편을 기록하였다. 이 가운데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작품은 <조선해협(朝鮮海 峽)>(박기채 감독, 1943), <젊은 자태(若き姿)>(도요타 시로(豊田四郎) 감독, 1943), <거경전(巨鯨傳)>(방한준 감독, 1944) 등 3편이었고,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작품은 <병정님(兵隊さん)>(방한준 감독, 1944), <태양의 아 이들(太陽の子供たち)>(최인규 감독, 1944), <사랑과 맹세(愛と誓ひ)>(최인규 감독, 1945) 등 3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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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조선시보> 11보의 회사, 제명, 호수, 단편 뉴스, 시종 표시 자막 이미지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조영(朝映)’ 로고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朝鮮映画製作 株式會社)’라는 회사 표기 위에 ‘조선시보(朝鮮時報)’ 제명이 겹쳐지며 삽입되는 동시에 로고 는 사라지고 영화 제명과 회사 이름만 남는다. 다음으로 ‘제11보(第11報)’라는 호수 표기가 이어진 후 본격적인 단편 뉴스 필름이 시작된다. <조선시보> 11보의 경우 다케야마(武山) 대위(大尉)의 전사 소식을 전하면서 특별히 ‘쳐부수자 적 미영(叩き潰せ敵米英)’이라는 자막 으로 시작되고 있지만, 흔히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단편 뉴스 필름 자막이 나오는 게 보통의 순서일 듯하다. 그리고 단편 뉴스가 모두 끝나면, ‘조선시보 끝(朝鮮時報 終)’이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가 막을 내린다. 이들 단편 필름 및 뉴스 마감 자막을 ‘조영’ 마크로 디자인된 원 과 이중사각 도형이 감싸고 있는 것이 시각적 특징이라면 특징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전개 방식은 <일본뉴스>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조선시보> 11 보 상영일과 같은 날인 1943년 9월 22일 공개된 <일본뉴스> 172호를 예로 들면 그 이미 지는 다음과 같다.

[사진3] <일본뉴스> 제172호의 회사, 제명, 호수, 단편 뉴스, 시종 표시 자막 이미지

이렇게 <조선시보>와 <일본뉴스>는 비록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뉴스영화 형식의 기본 틀이라 할 수 있는 자막 표기 또는 순서 배열 방식에서는 대체적으로 공통점을 지닌다. 동시기 ‘국어’로서 일본어가 두 뉴스영화에서 공식 언어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은 물 론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클 터,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뉴 스영화의 일반적인 형식이 공통분모로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일본뉴스>와 <조선시 보> 사이의 위계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도 배제하기 힘들다.

<조선시보>가 발간되기 약 2년 반 정도 이전부터 일본 유일의 뉴스영화로서 <일본뉴스>

가 식민지 조선에서도 꾸준하고 특별하게 배급-상영되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 며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주요 결정권자 및 실무 책임자들이 대개 일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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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실만을 고려하더라도, 두 뉴스영화 간의 연관성은 어렵잖게 상정된다. 특히, 1942년 시점에서 ‘영화 제작 종사자 등록 명부(映畵製作從事者登錄名簿)’에 연출자 16명, 남자 연기 자 44명, 여자 연기자 18명과 함께 촬영 담당 영화인 12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는데, 그 가 운데 본적지를 각각 야마가타현(山形縣)와 도쿄부(東京府)로 두고 있던 가게자와 키요시(影 澤淸)와 이리자와 히로하루(入澤宏治) 등 2명의 일본인이 각각 일본의 뉴스영화 <아사히영 화주보(朝日映畵週報)>와 <도니치오마이뉴스(東日大每ニュース)>의 제작 경험자였다는 사실 은 그 가능성을 높여 준다.14)

이에 대해, 각 뉴스영화 속 단편 뉴스의 내용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시보> 11보에는 특별 뉴스로 보이는 ‘쳐부수자 적 미영’을 포함하여, ‘우리들은 바다 의 아들(ぼく等は海の子)’, ‘반도 과학의 개가 송탄유의 등장(半島科學の凱歌 松炭油の登場)’,

‘본방 최초의 할증금 부가 정기예금 제1회 추천 발표(本邦最初の 割增金定期預金 第一回抽 選発表)’, ‘적 격멸에 하나의 혼을 파자(敵擊滅へ掘り出せ一魂)’ 등 모두 5편의 단편 뉴스가 배치되어 있다.

한편 <일본뉴스> 172호 또한 모두 5편의 단편 뉴스 필름을 담고 있는데, 그 제목을 열거 하면 ‘다카마쓰노미야 전하대감 해군기관학교 졸업식(高松宮殿下台監 海軍機関学校卒業式)’,

‘야마모토 원수의 묘 앞에 바치다(山本元帥の墓前に捧ぐ)’, ‘1억의 적성 군용기 헌납식(一億 の赤誠軍用機 献納式)’, ‘제2차 일미 교환선 출발(第二次 日米交換船出発)’, ‘재지나 이탈리아 군 무장 해산(在支伊軍 武裝解除)’ 등이다.

일단은 대부분의 단편 뉴스 필름이 전시, 군사 관련 소식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유사 성을 띤다. <조선시보>를 예로 들면, 순서대로 ‘쳐부수자 적 미영’과 ‘우리들은 바다의 아들’

은 전시 병력 동원, ‘반도 과학의 개가 송탄유의 등장’은 군사 연료, ‘본방 최초의 할증금 부 가 정기예금 제1회 추천 발표’는 군사 자금, ‘적 격멸에 하나의 혼을 파자’는 전시 물자 확 보 등의 주제를 다룬다. 하지만 그 내용이나 성격 등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뉴스영 화 간 일련의 차이점도 발견된다. 즉 <조선시보>는 ‘본방 최초’, ‘반도 과학’ 등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주로 조선에 관련된 소식을 주요 대상으로 삼으며 ‘쳐부수자 적 미영’, ‘적 격멸에 하나의 혼을 파자’ 등의 선동적 구호를 붙이는 반면, <일본뉴스>의 경우 ‘사실’ 전달 위주로 단편 뉴스를 구성하되 그 범위에 있어 ‘1억 인구’로 표시되는 ‘제국’의 전 영역 뿐 아니라 미국(日米)이나 이탈리아(伊軍) 등 해외를 아우른다.

물론 이러한 괴리는 당시 전투가 벌어지던 주요 지역이 중국 대륙과 동남아 일대, 그리고 태평양의 여러 섬들이었다는 사실,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일본영화사 간의 인력- 설비의 격차,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동시기 제국/식민지라는 입장의 차이 등과 무관하지 않

13) 애초부터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의 사장을 겸하고 있던 대표이사 “다나카 사부로는 조선에서 활동 중인 기존의 영화업자들과 영화인들을 배체하고 내지의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영업과장 출신으로, 1934년 니카츠(日活) 계통의 협동영화사(協同映畵社)를 세워 <다정불심(多情仏 心)>을 제작했고, 이후 만영과 중국에서 영화 활동을 하고 있던 나카다 하루야스를 새로 설립될 영화회사의 실무책임자로 데려왔다. 또한 통제회사가 접수하게 될 각 회사의 기계, 설비의 사정(査定)은 다이에(大映)의 기술과장 요코타 타츠유키(橫田達之)에게 맡겼고 친구의 아들이기도 했던 다이에의 영화감독 다구치 테츠(田 口哲)에게 회사 설립과 영화제작의 자문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렇게 설립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 사 제작 부문의 주요 실무자로 “나카다 하루야스의 추천을 받아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카츠우라 센타로 (勝浦仙太郞, 제1제작과장), 이와이 카네오(岩井金男, 제2제작과장),” 그리고 “카와스미 이츠오(河済逸男, 제3 제작과장)” 등이 포진되었다. 한상언, 「일제말기 통제영화회사 연구」, 『영화연구』36호, 한국영화학회, 2008, 405, 409~410쪽.

14) 田中三郞, 『昭和17年映画年鑑』, 日本映画雑誌協会, 1942, p.7-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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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보인다. 일본 유일의 뉴스영화로서 <일본뉴스>가 ‘제국’ 권역 내의 전황을 시시각각 전 달하며 그것이 어떠한 국가적 당위와 시대적 정당성을 지니는가에 대해 ‘객관성’을 강조함 으로써 ‘제국 뉴스영화’로서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다면,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뉴스>의 배 급과 제작이 지속되고 있던 상황 하 <조선시보>의 역할은 전쟁 상황 자체를 알리기보다는 병력 증강과 후방 지원을 위한 대 조선(인) 동원 정책을 선전하고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뉴스> 안에 포함된 단편 뉴스가 <조선시보> 내에 그대로 담겨지기도 하였 다. 1943년 5월 11일 공개된 <일본뉴스> 제153호에는 ‘탈모 만주국 황제폐하 수풍댐 시찰 조선군사령부검열제(脫帽 滿洲國皇帝陛下 水豊ダム御視察 朝鮮軍司令部檢閱済)’라는 제목의 단편 뉴스 필름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만주국 황제폐하 수풍댐 순수(巡狩)’로 약 간의 개명이 가해진 상태로 1943년 5월 13일 공개된 <조선시보> 제7보에도 자리하고 있 다. 수풍댐 현지 촬영을 거쳐 조선군사령부의 검열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사단법인 조선영화 제작주식회사의 필름을 사단법인 일본영화사가 건네받아 <일본뉴스> 속에 삽입하였을 수도 있고, 일본에서의 공개 시점이 조선에서의 그것보다 이틀 빠르다는 점에서는 반대로 사단법 인 일본영화사 촬영반이 직접 찍은 필름이 조선 내 검열 등의 과정을 거쳐 사단법인 조선영 화제작주식회사로 입수되어 <조선시보> 속에 반영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보>는 현존하는 조선총독부 제작의 기록영화 <총후의 조선(総後の朝 鮮)>(1937)이나 <조선의 애국일(朝鮮の愛國日)>(1940) 등과는 분명히 다른 뉴스영화만의 형식적 특징을 <일본뉴스>와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뉴스의 내용 및 범위, 전달 목적과 성격 등에 있어서는 <일본뉴스>와도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혹은 괴 리)’가 <조선뉴스>의 독자성과 존재성을 담보해 주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조선뉴스>가 노 정하고 있던 식민지 조선과 그 주변에 국한된 뉴스 대상의 공간적 범위, 월 1회라는 발행 주기, 그리고 속보성의 한계는 ‘제국’의 전 지역을 대상으로 시시각각 일어나는 사건들을 카 메라에 담아 주 1회씩 정기적으로 선보이던 <일본뉴스>의 정보 전달력과는 분명히 대비되 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5)

1943년 7월 시점에서 식민지 조선의 영화 정책 및 배급 분야 당국자들조차 조선 유일의 뉴스영화였던 <조선시보>의 위상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 존재 한다.

15) 가령, ‘속보성’의 차원에서 1943년 9월 22일 공개된 <조선시보> 11보와 <일본뉴스> 172호를 비교해 보자.

일례로, <조선시보>의 단편 필름 속에 포함된 ‘다케야마 대위’(본명: 최명하)가 전사한 것은 1942년 1월 20일 이었고 ‘제15회 대동아전쟁 전사자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선정된 것은 1943년 8월의 일이었다.(<恩命에 感泣 하는 勇士遺族 部隊長 掩護機로活躍 殊勳甲의 恩命을 浴한 武山隆大尉> / <내 아들 뒤따르라! 功四旭六에 빛 나는 武山大尉 嚴親談>, 《매일신보(每日新報)》1943.8.31, 3면 참조) 한편, <일본뉴스>의 경우 다섯 편의 단 편 필름의 촬영 일자는 각각 9월 15일, 1일, 20일, 14일, 8일이었다.

참조

관련 문서

셋째, 명실상부 향약전문가 도미나가 히로카즈의 함경북도 부 임을 들 수 있다. 지방적으로 강 습회와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중견청년의 양성에 노력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