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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청간 間島 영유권 분쟁의 역사적 전개와 전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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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청간 間島 영유권 분쟁의 역사적 전개와 전망* **

41)

박 성 순***

❙국문초록❙

본고는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간도 영유권 관련 연구의 개황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

미래를 전망해 보고자 작성되었다

.

특히 글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가급적

1

차 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

앞으로의 간도 논의들이 더 이 상 소모적인 논란거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유의하였다

.

숙종

36

(1710)

평안도 渭原에서 李萬枝 사건이 발생하였다

.

청 성조는 두 나라의 경계가 불명확하기 때 문이라고 판단하고 烏喇摠管 穆克登을 조선에 보내 공동 査界를 요구하였다

.

숙종

38

(1712) 5

월 穆克登의 주도하에

西爲鴨綠 東爲土門

을 골자로 하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졌다

.

이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과 청측에서 는 두만강과 토문강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

그러다가 조선에서는 穆克登의 요구대로 백두산 정계비 와 토문강을 잇는 設柵 공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강이 두만강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

청은 태종

(1626~1643)

때 開原 威遠堡에서 압록강 어귀까지

,

康熙

20

(1681)

에는 개원 위원보에서 舒蘭 二道河子까지 柳條邊을 수축하였다

.

때문에 압록강

·

두만강과 유조변 중간에는 무인지역이 만들어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

정축년

(1877)

경부터 종성과 온성 부근의 土民이 두만강과 해란강 접점의 삼각주를 개간 하기 시작하였다

.

그리고 그 개간이 두만강 대안 백두산 동록 전체로 확대되면서 이를 총칭하여 間島라고 부 르게 되었다

.

청국에서는 이를 古林邊界라고 칭했는데

,

조선에서는 그후 이를 墾島라고도 칭하였다

.

구한국 정부는

20

세 기 초에 청국과의 간도 유민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일관되게

墾島

라는 명칭만을 사용하였다

.

조선 변민들 이 간도에 들어가 그곳을 개척하여 우리 영토화 했다는 능동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짐작 된다

.

그러다가

1904

년에

北間島

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

본고에서는 간도 영유권 분쟁에 관한 문제들을 시간순에 따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문제시될 수 있는 역 사적 맥락들을 짚어보고자 하였다

.

다각적 시각에서 간도분쟁의 심층적 이해와 전망에 도움이 되는 부분들만 을 주로 다루었다

.

[

주제어

]

간도 영유권

,

백두산 정계비

,

정계회담

,

간도관리사

,

다양한 법적 논의들

* 이 논문은 2013년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교책중점연구기관)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과제번호 118255).

** 이 논문은 2014년 1월 17일 제19회 동양학연구원 연구과제 학술회의 ‘동아시아의 영역과 대외관계’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임.

*** 단국대학교 강의전담조교수 / [email protected]

(2)

❙목 차❙

.

머리말

.

간도 영유권 분쟁의 발단

.

간도 영유권 분쟁의 전개

.

간도 영유권 분쟁의 전망

.

맺음말

Ⅰ. 머리말

간도에 대한 그동안의 개략적인 연구 현황은 장계황

·

이범관의 공동 조사를 통해서 발표된 바 있다

.

1) 그 들은 간도 관련 연구 주제를 ① 간도에 대한 인식

,

② 교육

,

③ 문학

,

④ 사회

,

⑤ 영유권문제

,

⑥ 간도에 대 한 한

·

·

일의 정책

,

⑦ 경제

,

⑧ 지리

·

지적학적 측면에서 본 간도의 문제로 구분하였다

.

그 결과에 의하 면

,

간도에 관한 논문은

331

편의 학술지논문과

19

편의 박사학위논문이 발표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

이 중에서 본고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간도의 영유권 관련 논문은 박사학위논문

3

,

연구논문

52

편 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

초기의 연구는 白山學會에서 진행한 것으로 간도를 우리나라에 귀속시킬 수 있는 근거를 찾는 데 모아졌다

.

그중에서도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이 정확히 어느 강인가 하는 문제가 이 슈가 되었다

.

한편 간도협약에 관한 연구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

·

일 간도협약의 체결과정과 내용의 부당 성을 분석하여 간도협약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

통일 한국 차원에서 이 조약은 주변국과 협상을 통해 재논 의 되어야 한다는 주장들로 압축된다

.

이밖에도 간도와 독도문제를 비교한 연구도 있다

.

독도는 한국이 역사 적 권원을 바탕으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해야 하고

,

간도는 역사적 권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있으므로

,

정부는 「조중변계조약」이 북한 단독의 비밀 추진 결과임을 문제 삼아 간도 영유권 을 제기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2)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

간도의 영유권에 관한 연구는 그 양적인 면에서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

그러나 많은 논문들이

1

차 사료를 확인하지 않고

,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인용을 거듭하다 보니 기본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조차 결여하고 있는 글들이 부지기수이다

.

아울러 일방적인 민족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 고 있는 논문들도 많은 편이다

.

초창기의 선도적 연구라 할 수 있는 이선근의 글은 목차에서부터 다소 감정적인 표현이 여과없이 드러나 고 있다

.

3)

1987

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된 책에서 만주 부분을 담당한 임계순의 글은 아직까지도 많은

1) 장계황·이범관, 「간도에 관한 선행 연구의 특성 연구」, 󰡔大韓不動産學會誌󰡕 30: 1, 대한부동산학회, 2012.

2) 장계황·이범관, 위의 글, 241~243쪽.

3)李瑄根, 「白頭山과 間島問題 ‒ 回想되는 우리 疆域의 歷史的 受難」, 󰡔歷史學報󰡕 17, 역사학회, 1962. 이 글은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Ⅲ. 結語’를 제외하면, 나머지 두 장의 제목이 ‘Ⅰ. 白頭山은 우리의 主山靈峰’, ‘Ⅱ. 淸帝의 貪慾과 白頭山 및 間島問題’로 되어 있다.

(3)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간도문제에 대한 편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4) 특히

1960

년대 들어 북한이 중국 에 백두산을 넘겨주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간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논의는

1966

년 백산학회의 창설로 이어 졌다

.

아울러 반공의식과 고토회복의식이 결합된 이념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

5) 대부분의 간도 영유권 연구는 간도가 민족의 발상지이자 민족 본래의 강역이라는 전제 아래 중공의 야욕을 분쇄하고

,

북한의 수복

,

간도의 수복을 위하여 간도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

그리고 법적으로 중국과 북한의 어떠한 합의 도 무효라고 주장한다

.

6)

본고는 그동안 진행된 간도 영유권 연구의 문제점들을 바로잡아 보기 위한 시도이다

.

초창기부터 시작된 간도연구의 목적과 그 지향이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올바른 것이었다 해도

,

객관적인 사실의 검증을 결여 하고 감정에 치우친다면

,

학술적 의미를 상실한 무의미한 논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따라서 본고에서는 간 도 영유권 분쟁에 관한 문제들을 시간순에 따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문제시될 수 있는 역사적 맥락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

다각적 시각에서 간도분쟁의 심층적 이해와 전망에 도움이 되는 부분들만을 주로 다룰 것 이다

.

그리고 가급적

1

차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여 간도문제가 더 이상 소모적인 논란거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

Ⅱ. 간도 영유권 분쟁의 발단

1. 백두산 정계비의 설치

17

세기 초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 연변 및 백두산 일대에 거 주하던 번호들을 흡수하여 중원으로 이동하였다

.

그러자 이 지역은 일종의 공백지대가 되었다

.

이에 평안도 와 함경도 북변의 조선인들은 삼을 캐고 사냥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는 등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전개하였다

.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강변 일대에서 역시 삼을 캐고 사냥하던 청인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으며 서로 약탈하거나 심지어는 살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

현종

9

(1668,

청 강희

7)

에 청은 漢族의 만주 이주를 금 한 이래 瀋陽 동쪽 일원에 광범위한 封禁地帶를 설정하고 자국민의 거주를 금하였다

.

瀋陽將 및 吉林城將의 관리하에 매년 일정기간에 제한된 인원만을 이 봉금지대에 들여보내 貂皮

,

人蔘 등을 채취하도록 하였다

.

4)임계순, 「만주·노령 동포사회(1860~1910)」, 󰡔한민족독립운동사󰡕 2, 국사편찬위원회, 1987, 582쪽. “일본의 마수에 의하여 식민지화 되어가던 조선은 土門, 圖們, 豆滿이 동일한 강을 지칭한다는 청측의 주장이 문헌과 과학적인 방법에 의하여 확실 히 증명되지도 못한 상황에서 한민족이 피와 땀으로 개간한 옥토를 일본제국주의의 제물로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간도 는 한민족의 ‘피와 땀’의 영토인데, 일본제국주의와 중국의 무지한 억지에 의해서 빼앗긴 곳이라는 일반적 인식을 잘 보여준 다. 그러나 백두산 정계비가 설립될 때까지 청은 물론이고, 조선 또한 전기부터 토문·도문·두만강이 같은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5) 배성준, 「한·중의 간도문제 인식과 갈등구조」, 󰡔東洋學󰡕 43,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2008, 340~341쪽. 6) 李漢基, 󰡔한국의 영토󰡕, 서울대출판부, 1969, 350쪽; 배성준, 위의 글, 341쪽 재인용.

(4)

선 역시 두만

,

압록강을 넘어 청의 봉금지대에 왕래하는 것을 금하였다

.

그러나 국내외의 초피

,

인삼 수요가 증가하고 이를 구하기 위한 조선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월강 충돌사건이 증가하였다

.

숙종

36

(1710)

에는 평안도 渭原의 李萬枝 등이 압록강을 건너 평소 안면이 있던 청인

5

명을 타살하고 삼과 물품을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

청 황제는 두 나라의 경계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계속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 보고

,

烏喇摠管 穆克登을 보내 공동 査界를 요구하였다

.

7)

1712

2

월에 청의 禮部에서 정식으로 咨 文을 보내 목극등을 책임자로 하는 국경조사단을 파송하겠다고 통보하였다

.

8)

조선에서는 정계시에 가능한 우리측 지역의 捷路를 청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며

,

백두산을 기준으로 하여 압록강과 토문강 이남을 조선의 강역으로 확보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

당시 조선에서는 백두산과 압록강

,

두 만강 일대의 지세가 험할 뿐만 아니라

,

범월을 막기 위한 조처로 주민들의 거주를 제한하고 있었다

.

鎭堡 역 시 백두산 남쪽

5, 6

日程에 있었다

.

그러므로 현지 답사 중에 청측에서 파수처를 기준으로 경계를 정하자고 주장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

9) 설상가상 󰡔大明一統志󰡕에는 백두산을 女眞에 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穆克登이 조선의 파수처를 경계로 한다면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될 것이었다

.

그래서 도제조 李頤命은 토문강 과 압록강 두 강을 경계로 하여 그 남쪽을 모두 조선영토로 확보할 수 있도록 접반사에게 신칙할 것을 아뢰 었다

.

임금이 이에 허락하였다

.

10)

1712

4

월 청 성조가 穆克登을 파견하여 조선과 국경을 정하도록 하였다

.

그러나 조선의 우려와는 달리

1712

5

월에 압록강을 건너온 청 差使 穆克登은 鎭堡가 내륙에 설치된 것이나

,

백두산 남쪽에 주민이 거의 없다는 점들은 크게 문제 삼으려 하지 않았다

.

그는 조

·

청 양국의 경계는 백두산과 압록강

,

두만강이라는 접반사 朴權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

그리고 파수처가 백두산 남쪽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험준한 이 지 역에 파수처가 없는 것은 청에서도 책문 밖에 파수처를 두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박권의 말에 이의 를 제기하지 않았다

.

11) 당시 穆克登 역시 조

·

청 양국의 경계가 압록

·

토문 양강인 것은 논의할 필요도 없 다고 보고 있었다

.

12)

穆克登은 조선측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李善簿의 동행을 거부하고

,

청측 일행과 조선인 역관

,

군관들만 을 데리고 백두산에 올라 압록강과 토문강의 수원을 직접 정하였다

.

그리고 조선과 청은

서쪽은 압록강

,

동 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

(

西爲鴨綠 東爲土門

)’

는 내용의 정계비를 세웠다

.

13) 이로써 압록강

,

백두산 남쪽 을 조선의 강역으로 확보하는 문제는 어렵지 않게 일단락되었다

.

이전부터 양국 간에 묵시적인 국경개념은 있었으나

,

국경에 대해 명문화된 규정이 표기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

14)

7) 강석화, 「조선후기의 북방영토의식」, 󰡔韓國史硏究󰡕 129, 한국사연구회, 2005, 97쪽. 8) 󰡔肅宗實錄󰡕 肅宗 38년 2월 24일.

9) 󰡔備邊司謄錄󰡕 肅宗 38년 3월 24일.

10) 󰡔肅宗實錄󰡕 숙종 38년 3월 8일. 이 기사 외에도 이 당시 사람들은 두만강 대신 ‘土門江’이라는 표현을 곧잘 사용하였다. 󰡔肅 宗實錄󰡕 숙종 37년 3월 5일; 󰡔肅宗實錄󰡕 숙종 38년 2월 24일; 󰡔肅宗實錄󰡕 숙종 38년 3월 6일; 󰡔肅宗實錄󰡕 숙종 38년 6월 4일.

11) 󰡔肅宗實錄󰡕 肅宗 38년 5월 5일. 12) 金指南, 󰡔北征錄󰡕 5월 28일.

13) 󰡔肅宗實錄󰡕 숙종 38년 5월 23일; 󰡔肅宗實錄󰡕 숙종 38년 6월 3일; 󰡔肅宗實錄󰡕 숙종 38년 6월 10일.

(5)

2. 정계 당시 조·청의 토문강 인식

대체로 청에서는

土門

豆滿

을 같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

조선에서도 적어도 정계를 전 후한 시기에는 豆滿江과 土門江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

15)豆門과 土門은 조선 전기부터 豆滿江 유 역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혼용되었다

.

16) 이런 사실은 조선 후기 숙종대까지 두만강이 곧 토문강이라는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

조선 조정에서 정계대책을 논할 때에도 土門과 豆滿이 혼용되고 있었으며 淸使와 定 界할 때에도 우리측 경계는

두만강

이라 하였다

.

당시 청에서 보낸 咨文에 鴨綠江과 土門江의 근원을 밝혀야 한다는 내용이 있자

,

이에 대해 조선측에서는 두만강의 근원을 미리 확인하도록 지시한 적도 있었다

.

土 門

豆滿

을 구별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

조선접반사 박권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 였을 때 청 穆克登은 이에 대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정계 이후에도 이같은 사례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

영조

33

(1757)

에 발생한 조선인들의 犯越 사건을 조 사하면서

,

청 예부에서는 범인들이 말하는 두만강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묻는 자문을 조선에 보냈다

.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豆滿

土門

은 같은 것이며

,

한 강에 두 이름이 있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

17)

이같이

豆滿

土門

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것은 당시 백두산 지역에 대한 지리적 지식의 부족에서 비 롯된 것이다

.

정계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토문과 두만이 같은 것이든 별개의 것이든 큰 문제가 아니었다

.

당 시 북변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져 가고는 있었지만

,

아직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 는 것은 아니었다

.

실제 방어선도 내륙에 위치하고 있었다

.

그러므로 두 강의 남쪽을 조선의 강역으로 보장 받을 수 있었던 것만도 정계의 중요한 성과로 자부하였다

.

더욱이 조선과 청이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한 다는 비석은 청측 책임자가 세운 것이므로

,

만일 두만강과 토문강이 별개라면 조선은 영역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잇점이 있었다

.

정계 이후에 조선에서 강의 수원지나 목책의 위치에 대해 잠시 논란이 있다가 곧 중지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

청 差使員 穆克登은 분수령 상에 정계비를 세우고 귀환하면서

,

토문강의 물줄기가 흐르다가 끊어져 복류 하는 곳에 목책을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

조선에서는 그의 요구대로 設柵 공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정 계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

穆克登이 토문강의 수원이라 지적한 물의 흐름을 다시 조사한 결과 두만강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명확히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

1712

12

월 兼文學 洪致中은 상소하여 두만강 수원의 문제와 목책 설치 공사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

18) 홍치중의 상소에 따르면

,

백두산 동편에서 흘러나와 두만강을 이루는 물줄기는 넷이었다

.

목극등은 그 가운 데 어느 것도 수원으로 지목하지 않았으며

,

두만강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별개의 물줄기를 토문강의 근원이 라 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

19)

14) 姜錫和, 「1712년의 朝·淸 定界와 18세기 朝鮮의 北方經營」, 󰡔震檀學報󰡕 79, 진단학회, 1995, 146쪽. 15) 姜錫和, 위의 글, 147쪽.

16) 󰡔太宗實錄󰡕 태종 6년 3월 6일; 󰡔世宗實錄󰡕 세종 14년 12월 21일. 17) 󰡔同文彙考󰡕 권57, 犯越編, 乾隆 22년 12월 초 6일 回咨. 18) 󰡔肅宗實錄󰡕 肅宗 38년 12월 7일.

(6)

이에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여졌다

.

영의정 李濡는

穆差

’(

穆克登

)

가 정한 水源이 잘못된 것인데도 차원들이 監司에게 말하지도 않고 評事의 지휘도 듣지 않은 채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

잡아다 推問하고

,

감사도 推 考하라고 주장하였다

.

형조판서 朴權은 穆差가 정한 수원이 두만강이라 확신하면서

,

그 수원이 비록 북쪽으 로 조금 뻗어나갔다고 해서

,

穆差가 지정해준 것을 무시하고 원래보다 푯말을 안쪽으로 거의

20

리 가량 옮겨 세운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

설령 애초의 수원이 끝내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穆差에게

당초 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

고 사실대로 말하면

,

무슨 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

그러나 이유는 청에 奏聞하면 穆差가 견책을 받을 위험이 있으므로 우선 穆差에게 묻고

,

시급하게 다시 看審하자고 주장하였다

.

우참찬 金鎭圭의 상소도 이와 비슷하여

,

우선 현지 사정에 밝은 사람을 골라 간심하도록 하였다

.

북평사 밑에서 푯말작업의 실무를 맡았다가 잡혀온 居山察訪 許樑 등의 공술에 의하면

,

이들은 여러 差員 들과의 의논 끝에

, ‘

북쪽으로 흐르는 물에다 목책을 세우면 앞으로 염려가 있을 것

이라는 사실 때문에 穆差 의 말을 무시하고

, ‘

두만강

상류쪽으로 목책과 토석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였다고 한다

.

20)

18

세기 초까지는 穆克登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도 두만강의 수원에 관해서 부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

함경감사 李善簿 역시 혜산첨사의 보고에 따라 강의 근원은 백두산 산마루 중간에서 시작되어 거의

8, 90

리 흐름이 끊어졌다가 甘土峰 밑에서 솟아나와 두만강을 이룬다고 보고 있었다

.

21)

논란 끝에 조선 조정에서는 정확한 수원 확인을 위해 현지 조사를 다시 행하는 한편

,

穆克登에게 그 사실 을 알려 재답사를 통해 잘못을 시정할 것을 청하기로 하였다

.

그런데 이듬해 칙사로 조선에 온 穆克登은 정 계와 설책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오히려 그와 함께 온 부칙사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조선에서 제작한 백두산 지도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

조선은 비변사의 지도는 상세하므로 보여주지 않기 로 하고

,

전국지도와 穆克登이 정계 당시에 주고간 백두산 지도를 보여주어 논란을 피하려 하였다

.

22) 정계비 의 내용이나 설책한 바가 조선측에 크게 불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정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국경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한 것이다

.

23)

3. 정계비 설치 이후의 영향

(1) 북방영토에 대한 관심의 증폭

백두산 정상 부근은 척박한 불모지대로 농경이나 거주에 적합하지 않아 소수의 수렵이나 채삼인 이외에는

19) 姜錫和, 「1712년의 朝·淸·定界와 18세기 朝鮮의 北方經營」, 󰡔震檀學報󰡕 79, 진단학회, 1995, 148~149쪽.

20) 󰡔肅宗實錄󰡕 숙종 38년 12월 7일. 정계비 세운 곳에서 아래로 25리까지는 목책을 세우거나 돌을 쌓았고, 그 아래의 물이 나오는 곳 5리와 乾川 20여 리는 산이 높고 골짝이 깊으며 川의 흔적이 분명하여 푯말을 세우지 않았다. 또 그 밑으로 물이 솟아나는 곳까지의 40여 리는 모두 목책을 세웠고, 그 중간의 5, 6리는 나무나 돌도 없고, 토질이 강하기에 단지 흙으로 돈대만 쌓았다.

21) 󰡔肅宗實錄󰡕 肅宗 38년 5월 15일. 22) 󰡔肅宗實錄󰡕 肅宗 39년 6월 2일.

23) 姜錫和, 「1712년의 朝·淸 定界와 18세기 朝鮮의 北方經營」, 󰡔震檀學報󰡕 79, 진단학회, 1995, 151~152쪽.

(7)

왕래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

그러나

1712

년 정계 이후 조선의 강역에 속하는 곳이라는 관념이 확산되고

,

조종산이자 왕조의 발상지로 인식되는 등 신성성이 강화되고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

그리하여 백두산을 직 접 답사하고 기행문을 남기는 사례가 크게 늘어난다

.

李鍾徽

(1731~1797)

는 백두산 부근과 요동의 靑石嶺 안 쪽이 모두 고려의 경계이므로 고려를 이어받은 조선의 영토는 압록강

,

두만강 대안 지역 전부라고 언명하면 서 백두산 북쪽의 통로를 확보하면 발해 고토를 모두 수복하여 영토가 만리에 이르고 천하를 雄視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

24)安鼎福

(1712~1791)

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하나의 독립된 구역에서 독자적인 역사 와 문화를 이루고 유지해 왔음에 주목하였다

.

25)

洪世泰

(1653~1725)

백두산은 동북의 곤륜

이라고 규정하여 곤륜산과 맞먹는 위상을 강조하였다

.

26) 李 縡

(1680~1746)

백두산세가 북쪽으로 곤륜과 상대하기 위해 대륙을 휘감고 있으니 천지에 없는 것이고

,

동쪽으로 달리는 천 갈래 산들은 자손과 같다

.”

27) 하여 백두산의 형세는 곤륜과 맞서는 것이라 평하였다

.

정조

17

(1793)

에 연행한 金正中도 백두산이 북쪽 한곳을 차지하고 당당히 서 있는 것은 중국에 굽히지 않

는 기상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

28)

洪良浩

(1724~1802)

서방의 산들은 곤륜산을 조종산으로 삼고 동방의 산들은 백두산이 조상이 된다

.”

고 하여

,

29)중국의 곤륜산과 조선의 백두산을 동서 지역의 각기 다른 조종산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李獻慶

(1719~1791)

은 백두산이 조선뿐 아니라 고대 여러 나라들의 발상지이고 조선 산천은 물론 일본 전지 역

,

나아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있는 조산의 조종이라는 관념을 보였다

.

30) 丁若鏞

(1762~1836)

19

세기 초 백두산과 그것이 상징하는 조선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을 가장 확실히 보여준다

.

그의 주장은 곤륜산 과 백두산을

동서의 조종

으로 보는 관점을 계승하여 중국에 대해서 독자성을 내세우는 한편 동북지역에서 백두산이 동방지역 여러 산의 중심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

31)

이 시기 백두산 및 압록

,

두만강 지역의 개발추세와 영토의식의 변화상은 조선후기에 편찬된 고지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1712

년 조

·

청 정계 이전 지도에서는 대체로 백두산과 압록강

,

두만강의 큰 줄기만 으로 중국과 조선을 구분하고 있고

,

두만강과 토문강의 명칭도 구별하지 않은 채 쓰고 있으며

,

선춘령에 대 해서도 표시가 없었다

.

이에 비해 정계 이후에 그려진 북관지역에 관한 지도들은 대부분 두만강 이북 지역에 선춘령의 위치를 표기하고

高麗境

이라고 기록하였다

.

18

세기 이후의 지도에 나타나는 또다른 특징으로 土門江과 豆滿江을 명확히 구분하여 표기하는 경향이 있 음을 들 수 있다

.

물론 정계 이후에 그려진 지도에도 두만강과 토문강을 구별하지 않거나 토문강이 두만강의

24) 李鍾徽, 󰡔修山集󰡕 권4, 「先春嶺記」.

25) 安鼎福, 󰡔順菴集󰡕 권1, 「敬次星湖先生寄涑河安秀才樂重韻二首贈樂重 兼示正進」. 26) 洪世泰, 「白頭山記」, “白山者 東方之昆侖.”

27) 李縡, 󰡔陶菴先生集󰡕 권1, 「聽人談白頭山」, “白頭勢欲敵崐崙 北蟠大陸無天地 東走天山若子孫.”

28) 金正中, 󰡔奇遊錄󰡕.

29) 洪良浩, 󰡔耳溪集󰡕 권16, 「題申文初白頭山詩」.

30) 李獻慶, 󰡔艮翁先生文集󰡕 권9, 「白頭山歌 送震澤申文初北游」.

31) 丁若鏞, 󰡔與猶堂全書󰡕 6, 󰡔地理集󰡕 권3, 「疆域考」 3, 白山譜; 강석화, 「조선후기 백두산에 대한 인식의 변화」, 󰡔조선시대사 학보󰡕 56, 조선시대사학회, 2011, 210~218쪽.

(8)

상류인 것처럼 그린 것들이 있다

.

그러나 영조대 이후의 지도들은 두만강과 구별된 토문강의 수원을 표시해 준 지도와 토문강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두만강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수원을 가진 강을 별도로 그 린 것이 대종을 이룬다

.

물론

18

세기 중엽까지는 이 지역에 대한 지리 정보의 축적이 미비하여 토문강이 수 원은 두만강과 다르지만 결국은 두만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비정하여 그린 지도도 있고 별도로 分界江 을 상정하여 그린 지도도 발견된다

.

32) 관심은 고조되고 있었으나 아직도 부정확한 북변 지리인식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

함경도 지역개발에도 불구하고 두만강 대안 지역을 답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확한 지리정보의 축적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

토문강을 두만강의 수원과 구별하는데 그치는 것

,

分界江論 등

강으로서의 토문

의 실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던 것은 모두 높아진 관심에 비해 활용된 지리정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

활성화된 북방영토의식에는 先春嶺이 두만강 이북

700

리에 있다는 견해도 포함된 다

.

그러나 당시 객관성과 정확성을 인정받고 있던 새로운 지리정보들은 이런 선춘령설과 충돌을 빚었다

.

관 찬지도 가운데에는 두만강 이북

700

리설이 새로운 지리정보에 의해 수정된 사례가 확인된다

.

33)

한편 청나라의 백두산 답사 활동은 청초 강희 연간과 청말 광서 연간에 집중되었다

.

강희 연간의 백두산 답사는 청조의 발상지에 대한 중시 및 󰡔盛京通志󰡕

·

󰡔一統志󰡕

·

󰡔皇輿全覽圖󰡕 제작과 관련이 있다

.

강희

16

(1677)

강희제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 “

長白山이 조종 발상지이지만

,

지금까지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다

.

너희들이 가서 참작하여 예를 행하도록 하라

고 명하였다

.

34)이것이 청조의 첫 번째 백두산 답사이다

.

이듬 해

1

월 강희제는 백두산을

長白山之神

으로 봉하고

,

祀典을

5

嶽과 동일하게 하였다

.

35) 강희 초년에 󰡔一統志󰡕

편찬이 진척됨에 따라 강희제는 더욱더 압록강

·

두만강

·

백두산과 조선의 접경지대에 대해 알고자 하였다

.

강희

50

(1711)·51

(1712)

청은 두 차례에 걸쳐 烏喇總管 穆克登을 파견하여 조청 국경을 조사하였다

.

이는 전국지도인 󰡔皇輿全覽圖󰡕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

36) 그리고 이 때 세운 것이 백두산정계비였다

.

강희

48

(1707)

부터 청조는 서양 선교사 레지

(

雷孝思

, Jean Baptiste Regis)·

자루트

(

杜德美

, Petrus

Jartoux)

등을 파견하여 중극측 관원들과 함께 만주 일대의 지형을 조사하고 경위도를 실측하여 전국 지도를

만들고자 하였다

.

37)그런데 당시 레지가 제작한 지도에는 두만강으로써 경계를 삼지 않고

,

도리어 두만강 左 岸을 달리는 산맥으로써 조청간의 境域을 나누고 있어 주목된다

.

38) 일본외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

강희제는 정계비 건설 후에도 오히려 두만강 左岸에서 그 통치권을 행하지 않고 다만 그 하류지방에 琿春廳을 두었어 도

,

상류지방에 이르러서는 전혀 이를 포기해 버렸다

.

뿐만 아니라

,

강희

54

(1715)

청국인이 무산

·

종성

·

경원 등 대안인 두만강 부근에 房屋을 구축한 데 대해 조선정부가 항의를 제출하자

,

강희제가 이를 수용하여

32) 姜錫和, 「1712년의 朝·淸 定界와 18세기 朝鮮의 北方經營」, 󰡔震檀學報󰡕 79, 진단학회, 1995, 159쪽. 33) 裵祐晟, 「書評 ‒ 姜錫和 著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韓國史硏究󰡕 112, 2001, 230~231쪽. 34) 王士禎, 󰡔池北偶談󰡕, 中華書局, 2006, 88~89쪽.

35) 󰡔淸聖祖實錄󰡕 권69, 강희 16년 9월 병자; 권71, 강희 17년 정월 경인. 36) 李花子, 󰡔한중국경사 연구󰡕, 혜안, 2011, 174~185쪽.

37) 李花子, 위의 책, 185쪽.

38)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113~114·367쪽.

(9)

해당 房屋을 철거케 하고 해당 지역에 촌락을 세우는 것을 금하기까지 하였다

.

39)

18

세기는 물론

19

세기 전반까지 조

·

청 양국 모두 백두산과 두만강 북변 지리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보여주지 못했다

. 18

세기 조선의 만주 지리 인식에 영향을 준 청대 지리서 가운데 하나인 󰡔盛京通志󰡕의 「盛 京輿地全圖」에는 사실상 海蘭河를 묘사한 물줄기가 있지만

,

해란하라는 지명 표시는 없었다

.

더구나 󰡔盛京通 志󰡕의 본문에 기록된 해란하에 관한 설명은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물줄기가 아니었다

.

이는 간도지역에 대한 당시 청조의 부정확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

(2) 북변 수호의지의 강화

조선 조정은 숙종

38

(1712)

백두산 정계로 두만강과 백두산

,

압록강 남쪽 전역을 조선의 강역으로 완전 히 확보하였다고 판단하자 북변 일대의 개간과 주민 거주를 허용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였다

.

그 결과 개마 고원 지역에 장진부

,

압록강변에 후주부를 세웠고

19

세기 후반에는 폐

4

군을 복구할 수 있었다

.

40)

정계 이후 가장 큰 변화로 들 수 있는 것은 압록

,

두만강 강변과 폐

4

군 지역 및 백두산 남쪽 지역 방비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

이 지역에 대한 주민들의 입주와 경작활동을 정부에서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숙 종대 茂山府의 설치와 厚州鎭의 置廢에서 보이듯이

17

세기말부터 압록강

,

두만강 중상류지역까지 주민의 이 주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

당시 邑治나 鎭堡의 설치는 국가에서 기반시설을 세우고 주민들을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먼저 주민들이 몰려들여 경지를 개간하고 거주하고 있는 상황을 국가에서 추인한 것이었다

.

41)

정계 이후에는 조선 조정에서 瀋陽將軍을 대하는 태도도 변화하였다

.

정계 이전에는 조선 경내에 침범한 청인을 체포해도 심양장군과의 마찰을 우려하여 심양에 먼저 처리방침을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採蔘을 위 한 淸人 犯越者는 대개 심양에서 보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

조선에서는 월경사건이 청 중앙정부에 알려져 使行路를 관장하는 瀋陽將의 입장이 곤란해지고 그 보복으로 청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이 불편을 겪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야 했던 것이다

.

그러나 일단 정계가 이루어진 뒤에는 청인의 범월을 철저히 단속하고 청 중앙정부에 직접 통보하여 邊禁 단속을 강력히 요구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

청이 조선 경내에 침입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두만

,

압록강의 對岸에 거주하거나 수렵하는 행위 역시 금하도록 청에 요구하는 사례도 증가하였다

.

정계의 문제가 일단락된

1714

(

숙종

40)

에 함경도 慶源 訓戎鎭 건너편에 거주하는 청인을 撤還시키도록 咨文을 보낸 것을 필두로42) 강변에 設幕하거나 통행하는 청인이 발견될 때마다 꾸준이 단속을 요구하여 범월 가능성을 미리 막고 강역 확보에 철저를 기하려 하였다

.

영조

3

(1727)

에 범월한 청인들이 압록강 위에서 수색하는 청 관병과 조선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

조선에서는 이 사건을 직접 청 예부에 항의하고 청인의 범월단속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

43) 이에 난처해진 청 39) 󰡔英祖實錄󰡕 영조 22년 4월 19일;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115쪽.

40) 강석화, 「조선후기 백두산에 대한 인식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56, 조선시대사학회, 2011, 197쪽. 41) 姜錫和, 「1712년의 朝·淸 定界와 18세기 朝鮮의 北方經營」, 󰡔震檀學報󰡕 79, 진단학회, 1995, 155쪽. 42) 󰡔肅宗實錄󰡕 肅宗 40년 12월 23일(辛卯).

43) 󰡔英祖實錄󰡕 英祖 3년 5월 5일.

(10)

瀋陽將은 연행사를 따라 청에 왕래하는 조선 상인들이 청 상인들에게 빚진 은을 문제삼아 景宗과 英祖를 모 욕하는 자문을 보내 외교문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청인의 범월단속을 더 욱 강력히 요구하였다

.

영조

5

(1729)

에는 청인의 범월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심양장보다 먼저 청 예부에 직접 馳報하여 심양장의 방해를 막으려 하였다

.

45)

북방 국경지대에 대한 철저한 확보와 아울러

,

조선은 청이 동북지역에 폭넓게 설정한 封禁地帶에 대해서 도 관심을 가졌으며

,

이를 축소하거나 개간하려는 청의 기도를 가능한 저지하려 하였다

.

영조

7

(1731)

에 심양에서 부근의 수로를 확장 설치하려 하자 이에 항의하여 철회시킨 일이 있었다

.

46) 영조

22

(1746)

에도 책문을 남쪽으로 옮겨 설치하여 봉금지대를 축소하고 경작지를 확보하려 한 심양장의 기도를 막은 일이 있었 다

.

이때 조선은 청 예부에 직접 주문을 보내 심양장의 행위를 저지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

47)

정계 이후 보장된 강역을 보다 철저히 확보하려는 노력과 아울러 북관지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늘리고 採蔘

,

狩獵

,

개간 및 이주 등 경내에서의 주민활동을 폭넓게 허용하여 북도 주민의 생활을 보장하려는 정책 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

숙종

11

(1685)

의 후주진 범월 사건 때문에 전면 금지되었던 북도의 인삼 채취는 일찍부터 허용 논의가 제기되어 이미 숙종

32

(1706)

부터 전면 허용되었다

.

그리고 당시 함께 금지되었던 鳥銃의 소지와 사용 역시 다시 허가되었다

.

조총을 민간에 다시 보급하여 조선의 강역 내에서는 자유로운 수렵활동을 보장하고 범월만 단속해야 한다 는 견해가 정계 이후에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

숙종

39

(1713)

부터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었으 며

,

48)영조

3

(1727)

에는 북관지역에서도 조총훈련이 허용되었다

.

49) 영조

8

(1732)

에는 北兵營 관할의

6

진에서도 官庫에 보관한 조총을 매월

2, 3

차례씩 入番 군사들에게 내주어 放砲 훈련을 실시하도록 정례화하 였다

.

50) 조선 조정의 북변 수호 의지가 북관지역민들의 조총 훈련으로 가시화 된 것이다

.

Ⅲ. 간도 영유권 분쟁의 전개

1. 간도 영유권 문제 발생 배경

종전에 採蔘이나 수렵 같은 일시적인 월경과는 달리

, 19

세기 중엽 이후 조선 백성들의 간도지역으로의 이

44) 󰡔英祖實錄󰡕 英祖 3년 6월 13일. 45) 󰡔英祖實錄󰡕 英祖 5년 10월 8일. 46) 󰡔英祖實錄󰡕 英祖 7년 6월 29일.

47) 󰡔英祖實錄󰡕 英祖 22년 4월 19일; 󰡔英祖實錄󰡕 英祖 22년 8월 17일; 姜錫和, 「1712년의 朝·淸 定界와 18세기 朝鮮의 北方 經營」, 󰡔震檀學報󰡕 79, 1995, 152~153쪽.

48) 󰡔肅宗實錄󰡕 肅宗 39년 11월 20일. 49) 󰡔英祖實錄󰡕 英祖 3년 6월 29일.

50) 󰡔英祖實錄󰡕 英祖 8년 3월 25일; 姜錫和, 「1712년의 朝·淸 定界와 18세기 朝鮮의 北方經營」, 󰡔震檀學報󰡕 79, 진단학회, 1995, 154쪽.

(11)

주 규모가 커졌다

.

그 이유는 다양하다

.

첫째 당시까지 간도지역은 여전히 봉금지역으로서 황무지 상태의 경 작토지가 많이 남아 있었다

.

조선에서는 함경도 지역에 여러 차례 수재가 발생하고 흉년이 겹쳐 북방민들의 생계유지가 어려웠기 때문에 많은 북방주민들이 간도로 건너갔다

.

오늘날 일반적으로 조선인들이 간도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869

년과

1870

년의 함경도 흉년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조선인이

1869

년과

1870

년 함경도 六鎭지역의 기근으로 두만강을 건너 주로 烟秋

(

노에 프스키

)

등과 같은 露領으로 들어가 개간에 종사했다는 이야기의 근거는 박은식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였 다

.

51) 이후에 이 기술이 계속 재인용되면서 이 시기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가 마치 일반적인 사실인 것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

52)

그러나 󰡔고종실록󰡕을 보면 함경도민들의 두만강 도강은

1876

년부터 본격화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

53) 고 종은 그해

8

9

일 「윤음」을 내려 기근으로 고생하는 함경도민들을 위로하고

,

俄羅斯로 넘어간 조선백성이 몇 천인지

,

몇 백인지 알 수 없다고 근심을 토로하였다

.

고종

16

(1879), 17

(1880)

두 해에 큰 흉작이 있은 후 조선인으로 간도에 越墾한 자는 대략

2

만여 호가 되었다

.

그러므로 간도지방의 개척은 오로지 조선 인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

약간의 청나라 백성이 그 사이에 섞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

54)

조선인의 간도 이주가 본격화 할 수 있었던 것은 약

2

백 년 동안 이 곳이 空閑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청이 입관 이후 실시한 封禁정책에서 연유한다

. 1706

년 이이명이 제작한

10

폭의 병풍에 실린 지도인

「遼薊關防地圖」에는 청대의 柳條邊이 잘 드러나 있다

.

유조변은 청 왕조가 漢族들로부터 그들의 발상지인 만주에 대한 특권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책이었다

.

버드나무를 심어 구획했다고 해서

柳條邊

이라 불린다

.

山海關에서 開原 威遠堡를 경유하여 압록강 어귀까지 이어지는 老邊과

,

개원 위원보에서 舒蘭 二道 河子까지 이어지는 新邊으로 이루어져 있다

.

55) 청 태종

(1626~1643)

때 개원 위원보에서 압록강 입구까지 柳條邊을 수축하였고

,

順治

(1644~1661)

연간에 또 산해관에서 개원 위원보까지 邊墻을 쌓았는데

,

이를 老邊 이라 한다

.

康熙

20

(1681)

新邊을 수축하였다

.

청은 유조변의 巡狩를 엄히 하고

,

매 문마다 章京

1

,

筆 帖式

1

,

披甲

10

명을 두었지만

,

압록강

·

두만강과 유조변 중간에는 무인지역이 만들어져 관리가 제대로 되 지 않았다

.

유조변은 조선인들이 도강하여 거주하기에 유리한 공간이었다

.

56)

일본 외무성에서 조사한 바로도 간도는 여진족 愛新覺羅가 敦化 지방에서 일어나 두만강 左岸의 주민을 부하로 예속시키고 그들을 이끌고 南征한 후 간도지방은 전혀 공허하게 되어 한 사람의 주민도 없었다

.

조청 양국이 모두 이 지방으로 사람이 이주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완전히 중립지대로 남았다고 보았다

.

57)

그래서 이 지대를 간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

간도라는 명칭이 생겨난 기원은 다음과 같다

.

勘界使 李重

51)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下, 서문문고, 1975, 158쪽.

52) 임계순, 「만주·노령 동포사회(1860~1910)」, 󰡔한민족독립운동사󰡕 2, 국사편찬위원회, 1987, 596쪽, 각주 70).

53) 󰡔高宗實錄󰡕 고종 13년 7월 13일; 8월 9일.

54) 國會圖書館 編, 「慶興監理 黃祐永 意見書」,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1쪽. 55) 개리 레드야드 저, 장상훈 역, 󰡔한국 고지도의 역사󰡕, 소나무, 2011, 332~333쪽.

56) 長白朝鮮族歷史資料編寫委員會, 󰡔長白朝鮮族歷史資料󰡕, 白山市依山印刷有限責任公司, 2002, 19쪽. 57)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113쪽

(12)

夏의 복명서 「勘界謄錄」의 부록에 의하면

,

원래 종성과 온성 사이에서 두만강이 해란강과 분파하였기 때문에 삼각주가 형성되어 토지가 매우 비옥했다고 한다

.

정축년

(1877)

경부터 부근의 土民이 이곳을 개간하기 시 작하면서 間島라고 불렀다

.

그 후 무산에서 온성 사이의 토민이 다투어 이를 본받아 강을 건너가서 개간하는 자가 점증하였다

.

드디어 백두산 동록 일대의 비옥한 땅은 경작되지 않은 곳이 없게 되고 이를 총칭하여 間 島라고 불러왔다

.

청국에서는 이를 古林邊界라 칭했는데

,

조선에서는 그후 이를 墾島라고도 칭하게 되었 다

.

58) 구한국 정부는

20

세기 초에 청국과의 간도 유민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일관되게

墾島

라는 명칭만 을 사용하였다

.

조선 변민들이 간도에 들어가 그곳을 개척하여 우리 영토화 했다는 능동적인 의미를 부각시 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짐작된다

.

그러다가

1904

년에

北間島

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

59)

북간도는 현재 중국의 연길현

·

화룡현

·

왕청현

·

안도현 및 돈화현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약

42,000

㎢에 달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

60)한편 「간도협약」을 체결할 당시 일본은 「間島에 관한 日淸協定要領」이라는 것을 마련하였는데

,

여기에 보면 간도의 범위를 동은 嘎呀河를 경계로 하고

,

북은 老爺嶺에 沿하며

,

서는 老嶺에 따라 정계비에 이르는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

61)이는

1906

년 한국주차일본군 참모부가 조사한 간도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

그 당시 일본은 간도의 범위를 백두산으로부터 토문강

,

해란강을 거쳐 布爾哈圖河 에 걸쳐 最長經 약

40

여 리

,

10

내지

15

리를 넘나드는 것으로 파악했을 뿐이었다

.

62) 일제의 간도침략에 대한 욕구가 점차 증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간도영유권 문제가 발생한 직접적인 발단은

1881

년에 일어난 간도 거주 조선인의 쇄환문제였다

. 1881

년 에 청은 길림성 남부의 봉금 지역을 개방하고

,

吳大澂의 건의로 토문강 동쪽 일대에 개간을 허가하고 여러 행정기관을 신설하였다

.

이 과정에서 청국은 조선인이 간도 지역으로 들어와서 농사짓고 있는 무리가 이미 다수이며

, 2,000

(1

晌은

4-7

단보

)

의 토지를 개간하고 이를 함경관찰사로부터 地券을 받고 있으며

,

함경관 찰사는 이 지역의 지적부를 작성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

이에 청은 간도에 들어온 조선인을 조선으로 철수 시키려 하였으나

,

그 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이를 실행할 수 없었다

.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은 간도 거주민은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 청국 국적을 부여하기로 하고

,

이에 불응하는 조선인은 조선 정부로 하여금 소환해 가 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

간도 거주 조선인들은 쇄환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반발했다

.

그들은 백두산

,

백두산정계비

,

토문강 그리고 석돈과 목책들을 답사한 후 정계비의 위치와 비문을 근거로 敦化知縣 趙敦誠에게 쇄환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

鍾城府使 李正來에게도 그 사실을 통고했다

. “

청은

2

년 전에 돈화현을 설치하였지만

,

국경이 어디에서 어디 까지임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에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

…청컨대 이 뜻을 돈화현에 조 회하여 곧 경계를 조사하여 사태를 바르게 수습해 달라

는 것이었다

.

58)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253쪽.

59) 「咸鏡北道觀察使 李允在 → 議政府贊政內部大臣陸軍副將 閔泳煥 閣下」,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52쪽.

60) 盧啓鉉, 󰡔증보 조선의 영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01, 2쪽. 61)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249쪽.

62)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254쪽.

(13)

청의 돈화현과 조선의 종성부사 사이에 간도 귀속문제와 주민 소환문제가 현안으로 되어 있고 또한 주민 들이 간도 영유권 문제를 정부에 건의하는 등 문제가 일어나자

,

조선 정부는

1883

년에 魚允中을 서북경략사 로 임명하여 사실의 조사와 대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다

.

어윤중은 종성인 김우식과 오원정을 시켜 두 차 례에 걸쳐 백두산 정계비와 그 주변을 탐사케 하였다

.

이들은 답사 후 「探界路程記」와 「探界日誌」를 써서 보고하였다

.

그 보고 요지는

,

토문강은 송화강의 상류로서 흑룡강으로 흘러들어가고

,

두만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

이 조사보고를 받은 어윤중은 고종에게 보고하기를

(1)

토문강 이하의 간도 지역이 조선영토임과

(2)

간도 지역의 완충

·

무인지대 즉 봉금지대를 청과 같이 해제하여 이민을 장려하여야 한다는 것

, (3)

조선 은 청에 토문강 이하가 조선영토임을 정식으로 통고해야 한다고 하였다

.

63)

조선정부는 어윤중의 보고를 근거로 하여

1885

6

월 청나라 軍機處에 간도지역이 조선영토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

토문강 이남 지역은 조선 백성들이 조선 영토에 거주하는 것이니 불가한 일이 아니라는 견해 를 표명했다

.

64) 이에 청 북양대신 李鴻章도 吉林將軍 希元에게 조선과 공동으로 국경선을 확실히 밝히도록 지시하였다

.

이때부터 양국 정부는 백두산정계비 설치 이후에 본격적으로 국경선을 밝히는 일을 추진하기 시 작하였다

.

2. 을유·정해 정계회담

·

청 양국은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백두산정계비를 재조사하였다

. 1885

(

乙酉

) 9

30

일부터

11

30

일까지

2

개월간 진행되었다

.

첫 회담은 회령에서 개최되었고

,

이어서 무산

·

삼하강구

·

2

차 무산회담 등 네 차례 열렸다

.

청 대표는 혼춘 부도통 德玉

,

초간변황사무위원 賈元桂

,

독리상무위원 秦煐

,

조선 대표는 안변부사 토문감계사 李重夏

,

교섭아문주사 종사관 趙昌植이 참석하였다

.

회담 초부터 양국의 기본 입장이 현저히 달랐기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회담은 결렬되었다

.

조선은 백두 산정계비의 토문강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

65)청은 두만강이 국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양국 대표의 전략도 다르게 나타났다

.

청 대표는 두만강이 국경이 분명하므로 회담장소인 무산에서 두만강 상류로 답사해 올라가면서 상류지방의 여러 강줄기 중 주류를 찾자고 하였다

.

될 수 있는 대로 백두산정계비를 조사 에서 제외시키려는 의도였다

.

조선대표는 정계비를 중심으로 토문강 줄기를 따라 내려가면서 석돈

·

목책

·

토퇴들을 답사하자는 것이었다

.

이에 청 대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 청이 조선을 군사적

·

외교적으로 도와준 점과 종주국이라는 점 을 내세워

,

고압적인 자세로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조사할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 10

13

일에 드

63)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276~277쪽; 盧啓鉉, 「간도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연구」, 󰡔연세경제연구󰡕

9: 1, 연세대 경제연구소, 2002, 11~13쪽. 64) 󰡔淸季中日韓關係史料󰡕 제4권, 1889쪽.

65) 李重夏는 穆克登이 말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며, 정계비에서 송화강 수원까지 土堆가 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國 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72쪽).

(14)

디어 두만강의 상류 세 갈래 지점에 이르렀다

.

청국 대표 秦煐

·

賈元桂와 조선대표 이중하는 맨 북쪽 강줄기 인 紅土水를 따라 올라가고

,

청대표 德玉과 조선 수행원 조창식은 중간 줄기인 紅丹水를 따라 올라가고

,

청 지도 작성자 廉榮과 조선 수행원 吳元貞은 맨 남쪽 강줄기인 西豆水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

이 과정에서 청 대표는 백두산정계비가 청나라는 전혀 모르는 위작된 것이라거나

, 1712

년 정계비 설치 당 시 穆克登이 착오를 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백두산 정계비의 존재를 무시하려 하였다

.

이에 조선대표 이중하는 백두산정계비가 위조되었다는 청의 주장은 억측이라는 점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

66) 결국 을유 정 계회담은 양측의 의견차이로 결렬되었다

.

청은

1887

년에 조선에 정계회담을 다시 제안하였다

.

양국 대표는

1887

(

丁亥

) 4

5

일 청나라의 요구로 회령에서 다시 모였다

.

청국 대표는 德玉과 秦煐

,

方郞이었고

,

조선은 德源府使 李重夏를 勘界使로 파견하였 다

.

양측은

4

7

일부터

5

19

일까지 약

2

개월 반

(

4

월 포함

)

에 걸쳐 두만강을 따라 백두산까지 답사하 면서 회령 회담

·

장파 회담

·

2

차 회령 회담 등을 개최하였으나

,

결국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이 회담도 양측의 입장이 비슷하였는데

,

특이한 점은 청 대표가 조선 대표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한 점과 조선 대표가 토문강을 포기하고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를 국경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

청 대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청이 수차례 막대한 예산을 쓰면서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보호해준 것을 강조하고

,

이중하 대 표에게 청국 황제를 섬기는 태도가 불량하다는 점

,

국경조사에 임하는 조선 대표가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을 부리고 있다고 힐란하였다

.

그리고 홍단수 답사중 조선측

4

명에게 청측

40

명이 이 홍단수로 정하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

조선 수행원 池昌翰에게는 製圖 중에 청측 주장대로 지도를 그리지 않는다고 그의 손에 부상까지 입혔다

.

67)

또 하나의 특징은 이중하가 기존의 토문강설을 접고

,

두만강 홍토수를 경계로 제안한 것이다

.

그 이유는 이중하가 청정부의 밀령을 사전에 입수하여 청국의 정부지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청 정부의 밀령은 이 번 회담에서 두만강 홍단수를 고수하라는 것이었다

.

그래서 이중하는 홍단수보다 북쪽에 있는 홍토수를 조선 이 주장하여도 청 대표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

결국 이중하는 홍토수를 경계로 주장함으로 써 자연스럽게 회담의 결렬을 유도하였다

.

북양대신 이홍장은

1888

1

12

일에 정계회담을 다시 하여 국경을 확정하자고 제안하였다

.

그러나 조 선은

5

16

일에 서울 주재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袁世凱에게

, 1887

년의 정해 정계회담에서 조선 대표 이중하의 주장은 정부와 상관없는 개인적 의견이므로 이를 무효로 한다고 밝혔다

.

그리고 이중하가 정부에 건의한 대로 양국 회담 중의 식량과 기타 비용을 조선측이 부담했으나 이 부담이 너무 크고

,

청 대표의 위협 이 너무 크므로 회담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청측에 전달하였다

.

68)

66)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238쪽. 67)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89쪽.

68)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114·237·562쪽; 盧啓鉉, 「간도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연구」, 󰡔연세경 제연구󰡕 9: 1, 연세대 경제연구소, 2002, 14~16쪽.

(15)

3. 한·청 간의 간도 영유권 분쟁

조선이 공식문서에 의해 丁亥 국경회담을 무효로 선언하면서 토문강을 종전처럼 국경으로 주장하자

,

청은 정해 국경회담에서 그들이 주장한 두만강 홍단수가 국경으로 확정된 것으로 기정사실화 하려 하였다

.

1890

년 청 정부는 일방적으로 두만강 북안 지역에 四堡

·

三十九社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행정체제를 정비 해 나갔다

.

이 제도는 한인들이 집거하고 있는 두만강 북안 지역을 鎭遠堡

·

安遠堡

·

綬遠堡

·

寧遠堡 등 네 개 지역으로 나누고

,

그 아래에

39

, 124

, 415

牌를 설치함으로써 최초의 한인 관리 체제를 형성하였다

.

이는 청조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간도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기정사실화 하려는 조치였다

. 1880

년대 한인 촌락은 두만강에 인접한 茂山

·

會寧

·

鍾城 대안에 국한되었으나

, 1890

년대에 와서는 촌락 분포가 오지인 南 崗

·

北崗

·

西崗

·

嘎呀河 등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

69)

청은

1902

년 局子街에 연길청을 신설하고

,

太拉子에 분방경력청을 두어 지방행정사무를 개시하였다

.

또 芝他所에 무민독려사무를 두면서 군대를 주둔시켰다

.

70) 청은 또한 간도의 조선인 社主에게 청 국적을 취득 케 하고 복장과 두발을 청국식으로 고치도록 했으며

,

이에 불응하는 조선인에게는 토지를 몰수하기도 하고 두만강 이남으로 추방하기도 하였다

.

이에 맞서

1897

년 光武 원년에 함경도 관찰사 趙存禹와

, 1899

년에 吳三甲이 각각 간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서신을 정부에 상신하였다

. 1900

년에 고종의 지시로 내부대신 李乾下는 경원부사 朴逸憲을 査界委員으로 임 명하여 현지답사를 시켰다

.

71) 그가 보고하기를

토문강 상류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하천이 본래 국경선 임이 명백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국경 때문에 청과의 분쟁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국민의 거주를 금하고 그 넓은 지역을 비우니 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토를 인정하여 천여 리의 땅을 러시아에 할양했 다

.

… 이 기회에 현행의 국제조약에 의거하여 공평히 국경을 관장해야 할 것이다

72) 보고하였다

.

조선은

1901

년 회령에 邊界警務署를 설치하고 무산과 종성에 지서를 두어 간도조선인의 보호와 소송사무 를 관장하였다

.

이어서 참정대신과 내무대신 및 경무대신은 각각

변계경무서를 설치하여 간도조선인의 사법 과 행정을 맡게 하니

,

모두 이의 지휘를 받으면서 생업에 종사하라

고 고시하였다

.

조선은 간도를 회령간 도

·

종성간도

·

무산간도

·

온성간도로 행정구역을 정하였다

.

73)

한편

1900

년에 의화단운동이 발생하자 러시아는 간도로 출병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

그러자 간도 조선인들 은 그동안 염증을 느끼던 淸裝과 薙髮을 바꾸어 머리를 기르고 한복을 착용하였다

.

그리고 러시아 관리에게 의뢰하여 청 관리의 주구를 면하려고 하였다

.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2

년 李範允을 간도시찰사로 임명하 고

,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에 기거하는 한인들을 위무하고

,

정확한 호수와 인구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

74) 이범

69) 김춘선, 「北間島地域 韓人社會의 形成과 土地所有權 問題」, 󰡔전주사학󰡕 6, 전주대 역사문화연구소, 1998, 182쪽. 70) 盧啓鉉, 「간도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연구」, 󰡔연세경제연구󰡕 9: 1, 연세대 경제연구소, 2002, 18쪽.

71)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380쪽. 72) 楊昭全·孫玉梅, 󰡔中朝邊界史󰡕, 吉林文史出版社, 1993, 412~413쪽.

73) 盧啓鉉, 「간도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연구」, 󰡔연세경제연구󰡕 9: 1, 연세대 경제연구소, 2002, 18쪽. 74)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12쪽.

(16)

윤은

6

월에 종성에서 간도로 들어가 한인을 위무하였다

.

경내를 순찰한 이범윤은 청인의 포학을 막는 길은 보호병사의 대동과 청국공사의 문빙을 소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여 이를 정부에 요청하였다

.

그러나 청과의 충돌을 우려한 정부는 군대 파견은 허락하지 않았다

.

75)

이범윤은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간도 지방에 사는 조선인을 위무하고 호구와 인구를 조사하여 명부를 작성하였다

.

그는

1903

5

월에 조선인 호적부

52

책을 편제하고

,

부동산

3,647,496

34

錢을 등록하였다

.

그 결과 참정대신 金奎弘은 간도가 분명히 조선 땅임을 강조하고

,

이 곳에 세제적용

·

관리주둔

·

지방행정제 도 확립 등을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

대한제국은

1903

10

월에 간도시찰사인 이범윤을 간도관리사에 임명하 고 많은 권한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

아울러 조선은 이 사실을 청에 통고하였다

.

76)

1903

8, 9

월 경 이범윤은 한인 보호를 위해서 私砲隊란 것을 조직하여 병사를 길렀다

.

본부를 종성에 두고 帽兒山 앞의 二道溝

,

八道河子 西崗 및 沿江 琿春 등처에 각 지부를 설치하여 參理

,

領長 각

1

명을 두어 경비와 행정을 집행하게 하였다

.

이범윤은 이들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조세를 징집하였는데

,

매 호당 엽 전

6

5

백 文

,

小米

6

두를 부과하였다

. 10

월 이후 이범윤은 그 규모를 더욱 확대하여 和龍峪에 병영을 설치 하고 帽兒山과 馬鞍山에

2

개의 營所를

,

西崗 頭道溝에

1

개의 營所를 만들었다

.

77)

1903

3

월부터 조선시찰사 이범윤이 이끄는 경무관들과 청 관헌들 사이에 和龍峪의 안원보 지역에서 충 돌이 일어났다

. 5

, 10

, 11

월에 걸쳐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였고

, 1904

2

15

일부터

23

일에 걸쳐 양국간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

조선 관리 김극렬과 성문석이 각각

100

명씩 인솔 한 군대와 이범윤이 직접 인솔한 무장대가 청 관리와 청인의 학정과 탄압을 견디다 못해 덕화사

·

장화사

·

산계사 등지를 점령하고

,

장대고벽 지방에서는 양국 군병의 대접전까지 있었다

.

78)

이 무렵에 동간도

·

서간도의 구분과 별칭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

79) 동간도는 延吉廳을 서간도는 敦化 縣을 가리켰다

.

80) 이후에 서간도는 압록강 대안

,

백두산 이서를 가리키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

중국 정부는 원래

간도

라고 하는 명칭을 애초부터 허용하지 않았으나

,

이후에는 현실적으로 간도라고 하는 명칭을 수용 함은 물론 서간도

,

동간도의 구분까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중화민국 중앙연구원 근대사 연구소 문서보관소

(

당안관

)

에 보관되어 있는 「延吉」지도

(C-1-0306)

와 「長白」지도

(C-1-0307)

가 그 반증이 다

.

이 지도는

1/500000

비례척의 「中國輿圖」로 길림

,

봉천

,

조선 지역을 포함한 것이다

.

중화민국 참모본부 製圖局에서

1917

12

월에 편찬하고

, 1918

5

월에 인쇄하였다

.

중국에서는 간도

,

북간도라는 명칭은 물론 이고

,

서간도

·

동간도라는 명칭이 일본과 조선이 영토 욕심으로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

따라서 중 국 당국에서 그린 지도 중에 이런 명칭을 명기한 지도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

한편 이 지도의 특징은 천 지와 두만강원

(

중국명 圖們江源

)

이 분명하게 달리 표시되어 있다

.

중국에서 일관되게 토문강과 두만강의 동

75)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380~381쪽.

76) 盧啓鉉, 「간도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연구」, 󰡔연세경제연구󰡕 9: 1, 연세대 경제연구소, 2002, 18~19쪽. 77)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357쪽.

78) 盧啓鉉, 「간도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연구」, 󰡔연세경제연구󰡕 9: 1, 연세대 경제연구소, 2002, 19쪽. 79)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293쪽.

80) 國會圖書館 編, 󰡔間島領有權關係拔萃文書󰡕, 1975, 241쪽.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