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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미술의 전개와 확장: 미술 단체 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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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_2019.12.10 심사기간_2020.01.01-14 게재확정일_2020.02.11

박수근 미술의 전개와 확장: 미술 단체 활동을 중심으로

The Development and Expansion of Park Soo-keun's Art: Focusing on the activities of art group

공주형_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Kong, Ju Hyung_Peace and Liberal Arts College, Hanshin, University

차례 1. 서론

1.1. 연구의 배경과 목적 1.2. 연구의 범위와 방법 1.3. 기존 연구

2. 주호회 활동과 예술적 근간 마련 2.1. 주호회

2.2. 주호회 활동과 예술적 근간

3. 대한미술협회 활동과 예술적 변화 실천 3.1. 대한미술협회

3.2. 대한미술협회 활동과 예술적 변화

4. 한국판화협회 활동과 조형적 실험 확대 4.1. 한국판화협회의

4.2. 한국판화협회 활동과 예술적 실험

5. 현대판화동인 활동과 예술적 위상 확인 5.1. 현대판화동인의

5.2. 현대판화동인 활동과 예술적 위상

6.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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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미술의 전개와 확장: 미술 단체 활동을 중심으로

The Development and Expansion of Park Soo-keun's Art: Focusing on the activities of art group

공주형_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Kong, Ju Hyung_Peace and Liberal Arts College, Hanshin, University

요약 박수근(朴壽根, 1914~1965) 미술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 미술공모전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미술전람

회의 출품과 수상을 중심으로 알려져 왔고, 이외의 예술 활동은 관련 기록이나 자료가 많지 않아 작가 예술의 조 형적 근원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데 한계를 지녀왔다. 더욱이 박수근은 타계 후 언론 보도에서도 ‘순수한 무소속 화가’로 소개될 정도로 작가와 당대 미술계와 예술적 교류는 기본적인 현황조차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아 왔다.

전문 기관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었던 박수근이 평생 동안 네 차례에 걸쳐 미술 단체에 가입해 활동 했던 사실은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본 연구는 박수근이 가입했던 미술 단체 활동이 작가 예술 의 전개와 확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우선 박수근 예술의 모색기 이었던 평양 시절, 작가의 주호회 활동을 살펴보았다. 그 다음 본 연구는 6.25 전쟁 이후 박수근 예술의 확립과 확장의 시기이었던 서울 시절, 작가의 대한미술협회와 한국판화협회 활동을 고찰하하였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 는 박수근이 타계를 몇 해 앞둔 예술의 정리기 참여했던 현대판화동인 활동을 검토하였다.

이상을 통해 본 연구는 박수근 미술의 고유성 확립과 확장 과정에서 당대 미술계와의 교류 또한 간과할 수 없 음을 확인했다. 특히 박수근의 주호회 활동은 한국적 미감의 실천이라는 작가 예술의 조형적 근간 마련에 토대 가 되었고, 대한미술협회 활동은 남한 화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작가 예술의 독자적 실천 동력을 제공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판화협회 활동은 판화의 표현 매체적 가능성에 주목해 형 식 실험 본격화의 계기로 작용했고, 현대판화동인 활동은 자신의 예술적 위상의 현재와 현실적으로 고민할 기회 를 제공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e art of Park Soo-keun(1914~1965) was known only for his art entries submitted to and awards received from the Joseon Art Exhibition and National Art Exhibi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before and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from Japanese colonial rule. Since there aren't many records or materials on other artistic activities, an in-depth understanding of the formative source of the artist's work has been limited. Furthermore, the artistic exchanges between the artist and the art circles of the time have not been revealed sufficiently including the very basic information to an extent that he was introduced as a ‘pure independence artist’ in the press release related to the exhibition of Park Soo-keun’s posthumous work.

The fact that Park Soo-keun, who had never received art education in a professional institution, joined and participated in the art associations four times during his lifetime is relatively unknown. To this end, this study aims to review how the art association activities that Park Soo-keun joined influenced the development and expansion of his artwork. The study first reviewed the artist’s activities in Joo Ho-hoe during Park Soo-keun’s Pyongyang days, a period of exploring his art. Next, this study reviewed the artist’s activities in the Korean Art Association and Korea Prints Association during Park Soo-keun’s Seoul days, a period of establishing and expanding his art after the Korean War. Finally, this study reviewed the artist’s activities in the Contemporary Prints Association, where Park Soo-keun participated during a final period of his art, a few years before his death.

Through the above, this study confirmed that the exchange with the art circles of the time cannot be overlooked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nd expanding Park Soo-keun’s art. In particular, Park Soo-keun’s Joo Ho-hoe activities laid the ground for the formative foundation of the artist’s work, which practices the aesthetics of Korea. The activities in the Korean Art Association provided Park Soo-keun an independent driving force for his work based on the psychological stability of becoming a member of the South Korean art circles. The activities in the Korea Prints Association served as an opportunity for the full-scale experiment paying attention to the potential of printmaking as an expressive medium, while the activities in the Contemporary Prints Association provided an opportunity to realistically consider the present state of his artistry.

중심어

박수근 주호회 대한미술협회 한국판화협회 현대판화동인

ABSTRACT Keyword

Park Soo-keun Joo Ho-hoe

Korean Art Association Korea Prints Association Contemporary

Prints Association

본 연구는 한신대학교 교내학술 연구비 지원 과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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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1.1. 연구의 배경과 목적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예술 이력은 주로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과 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작을 중심으로 알려져 왔다. 안타까운 점은 조선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출품과 수상 이외에 박수근 예술 활동 관련 기록이나 자료가 많지 않아 작가 예술의 조형적 근원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타계 이후 유작전을 소개하는 언론 보도조차도 박수근을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화가로 동인전 에 참여한 경험이 없는 ‘순수한 무소속 화가(無所屬 畵家)’1)로 소개하는 등 작가와 당대 미술 계의 예술적 교류는 기본적인 현황도 밝혀지지 않아 왔다.

박수근은 1940년 이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미술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 보통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으로 전문 기관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이런 박수 근과 당대 미술계의 첫 예술적 교류는 작가가 도청 서기로 근무하면서 작업을 해 나갔던 평양 시절 주호회 활동이었다. 이후 박수근은 6.25 전쟁 발발 후 월남하여 서울 화단에서 대한미술 협회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고, 한국판화협회와 현대판화동인 소속으로 당대 미술계와 유기 적 관계를 가져왔다. 이에 본 연구는 박수근이 평양과 서울에서 작업했던 시절에 가입했던 미술 단체 활동이 작가 예술 전개와 확립 과정에서 어떤 영향과 의의를 제공했는지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1.2. 연구의 범위와 절차

박수근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1875)의 원색도판을 보고 미술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양구보통학교 은사였던 오득영(吳得泳)의 격려 속에서 조선미술 전람회에 출품을 하며 작업을 해 나갔다. 하지만 박수근이 직면해 있던 특수한 상황에서 예술 적 고민을 함께 나눌 스승과 선후배 그리고 동료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이런 박수근은 미술 단체 가입과 단체전 참여 등을 하며 동료들과 예술적 교류의 기회를 얻었다. 따라서 국내 미술 계에서 다른 미술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립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평가 되어 온 박수근의 미술 단체 활동은 작가의 당대 미술계와 교류 현황을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박수근이 가입해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주호회, 대한미술협회, 한국판화협 회, 현대판화동인으로 범위를 한정해 살펴보고자 한다. 박수근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평 양의 ‘주호회’(珠壺會)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향후 전개해 나가야 할 예술 전반의 과제를 숙고 하는 모색의 시기를 보냈다. 이후 박수근은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미술협회’ 구성원으 로 협회전에 참가하고, 임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독자적 예술 세계를 확립해 나갔다. 한편 박수근은 1958년 ‘한국판화협회’ 창립 회원으로 판화를 통해 예술 형식 실험을 본격화했고, 1960년 ‘현대판화동인’의 동인으로 국내외 미술가가 한데 모인 동인전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위상을 현실적으로 확인할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박수근의 미술 단체 활동이 작가 예술의 전개와 확장 그리고 미학적 성취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의의를 검토하고자 한 본 연구는 우선 작가가 평양에 머물 당시 가입했던 주호회 활동과 의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 본 연구는 박수근이 서울에 거주하며 전업 작가로 작업 에 몰두할 당시 참여했던 대한미술협회, 한국판화협회, 현대판화동인의 면면과 의미 또한 짚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타계 당시 국내 미술 단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화가로 알려 졌던 박수근 예술에서 미술 단체 활동은 작가 예술의 조형적 근간 마련과 예술적 변화의 계기, 조형적 실험 확대와 예술적 가능성과 한계를 현실적으로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했음을 확인할 것이다. 박수근 예술의 전개와 확장 과정에서 미술 단체 활동이 지니는 조명해 보고자 한 본 논문은 당대 미술계와의 관계 속에서 작가 예술의 변화와 성장 과정을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1) 庶民層에 속하는 韓國人을 즐겨 그린 點畵같은 인상의 독특한 手法과 黑白의 사용으로 新羅土器를 연상케하는 가장 土俗的인 韓國 의 西洋畵家라는 評壽을 받아왔고, 그의 그림은 國內보다 外國에서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가난에 시달렸던 朴根씨는 순수한 無所屬畵家로 個人展이나 同人展을 갖지 못해 畵壇 여러 人事의 주선으로 열린 이번 遺作展遺이 첫 個人展이기도 하다.(「朴壽根 遺 作展」, 동아일보, 196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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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1.3. 기존 연구

박수근의 미술 단체 활동은 2008년 박수근미술관이 기획한 전시 《동행, 주호회와 박수근》

展이 개최되면서 주호회를 중심으로 관심이 시작되었다. 전시 기획자인 최형순은 「동행, 주호 회와 박수근」(2008)에서 박수근 예술에서 주호회를 포함한 미술 단체 활동이 지니는 중요성 과 의미를 부각시켰다. 이후 최근까지의 사례를 보면 기존 연구는 첫째, 박수근 미술 전반을 다루면서 가입 미술 단체 활동상의 면면을 검토할 수 있는 연구와 둘째, 박수근의 미술 단체 활동상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연구로 나뉘어 전개되어 왔다. 최열의『박수근 평전, 시대공감』(2011) 같은 단행본에 전자에 해당한다면, 이를 제외한 대다수 연구들은 후자에 속한다. 정현아의 「모티브가 갖는 친밀감의 형성원류로서 평양시대」(2014)는 박수근의 주 호회 활동이 작가 예술 전반에 미친 영향을 검토한 논문이고, 권행가의「최영림과 주호회」는 주호회의 출범 배경과 활동상을 살필 수 있는 연구이다. 한편 박지은의「박수근 판화와 복제판 화」(2014)는 박수근의 미술 단체 활동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으나 작가의 한국판화협 회 활동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석사학위 논문이고, 김윤애의

「1950-60년대 한국판화의 성과와 의미」(2011)는 한국현대판화를 다룬 연구로 해당 시기 한국판화협회 출범 당시 박수근의 활동상을 살필 수 있는 연구이다. 마지막으로 오광수의 「박 수근 판화와 그 주제 의식」(2015)은 박수근의 현대판화동인 활동을 소략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는 연구이다.

그럼에도 기존 연구는 박수근이 가입해 활동했던 미술 단체 활동 전반을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 으로 다루지는 못했고, 해당 활동이 작가 예술변화와 성장에 어떤 자극과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집중적으로 검토하지 못했다. 이에 본 연구는 기존 연구의 성과를 토대로 박수근 예술의 미학적 성과의 틀 안에서 작가 예술의 변화와 성장에 미술 단체 활동이 어떤 자극과 영향을 제공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본 논문은 박수근의 미술 단체 활동이 작가 예술의 전개와 확산의 여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계기였음을 밝히고자 한다.

2. 주호회 활동과 예술적 근간 마련 2.1. 주호회

주호회(珠壺會)는 1940년 설립되어 1945년 해체된 평양 지역 작가들이 만든 미술 단체이다.

일찍이 평양은 활발한 창작 활동을 기반으로 전시와 교육, 판매와 유통의 수준이 서울 화단에 이르렀다. 특히 주호회가 출범할 무렵은 일본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평양 출신 유학생들이 급증해 그 어느 때 보다 화단의 다양화가 모색되던 시기였다.2)

당시 유학생을 통해 서양화 보급이 빠르게 진행되었던 평양 화단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창작 판화의 국내 보급이었다. 1935년 평양박물관 학예관으로 부임한 일본인 오노 타다아키라(小 野忠明, 1903~1994)는 평양 화단의 미술인들에게 창작 판화를 가르치기고 했고, 히라츠카 운이치(平塚運一, 1895~1997)가 한국의 풍경을 목판화로 제작해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하 라츠카 운이치는 1931년, 1934년. 1936년 세 차례 국내에서 판화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국내 에 창작판화 보급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창작판화는 밑그림부터 판각, 인쇄가 협업으로 진행되 는 일본 전통 판화인 우키요에와 달리 철저히 개인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국내에서 창작 판화 는 일본인 판화가와 그들이 제작한 판화집 그리고 국내에서 제작된 판화전시를 통해 소개되었 다.3) 예술작품으로 판화 개념의 인식이 낮았던 국내에서 일본 창작 판화의 파급력은 크지 않았지만 최지원(崔志元,?~1939) 같은 예외적 인물도 있었다.

최지원은 1939년 제 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판화〈걸인과 꽃〉(도판 1)을 출품해 입선했으 나 아쉽게도 요절했다. 이에 창작판화를 중심으로 예술적 교류를 지속해 온 평양 화단의 미술

2) 김취정, 「근대기 평양지역 동양화단(東洋畵壇)의 형성과 전개」,『한국근현대미술사학』 28집, 2014, p. 294 3) 권행가, 「최영림과 주호회」,『최영림 · 무나카타 시코』, 컬처북스, 2008, pp. 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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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은 최지원을 추모하고자 미술 단체를 만드는데 뜻을 모았다. 주호회는 오노 타다아키라의 제안으로 최지원의 호였던 ‘주호’(珠壺)를 단체 명칭으로 최지원 타계 1주년의 해 출범하였다.

주호회의 핵심 인물은 최영림(崔榮林, 1916~1985), 장리석(張利錫, 1916~2019), 황유엽, 오노 타다아키라와 등이었고, 변철환, 장기표, 홍건표를 비롯해 박수근까지 함께 했다. 주호회 는 최지원이 남긴 작품들과 주호회 회원들의 출품작으로 첫 단체전을 개최하며 본격적인 활동 을 시작했다. 최지원의 예술혼을 추모하는 취지에서 출범한 단체였던 만큼 주호회의 첫 단체전 은 판화가 다수를 차지했다.

주호회는 창작판화 중심 협회전을 시작으로 평양 미나카이 백화점에서 5년 동안 1년에 한 차례씩 단체전을 가졌다. 하지만 주호회를 순수한 창작판화협회로 규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주호회가 창작판화와 관련된 뚜렷한 문제의식과 예술 의지에 집중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 이다. 조선미술전람회 입상을 통해 국내 화단에서 예술적 입지를 확보해 나가야 하는 공동의 당면 과제를 가지고 있었던 주호회 회원들은 유화 작업에 몰두했다. 특히 주호회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비롯한 한국성의 예술적 실천”4)에 지대한 관심을 공유하였다. 단체전 개최를 중 심으로 활동을 이어가던 주호회는 1945년 단체의 핵심 인물이었던 오노 타다아키라가 평양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5년간 지속되었던 주호회는 국내의 첫 창작판 화전을 개최한 한국 근·현대 판화의 태동을 알린 미술 단체로 의의를 평가받고 있다.5)

2.2. 주호회 활동과 예술적 근간 마련

박수근은 18세 되던 1932년 강원도 양구에서 조 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봄이 오다〉(도판 2)가 입선하면서 미술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미 술의 길을 걷고자 했지만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미술 교육기관 진학을 할 수도, 창작에만 몰두 할 수도 없었던 박수근은 조선미술전람회에 1934년

<겨울 풍경>, 1936년 <일하는 여인>, 1937년

<춘(春)>, 1938년 <농가의 여인>과 <여일(麗 日)>을 출품하며 홀로 예술의 길을 걸었다.

이후 박수근은 평안남도 도청 서기로 일하기 위해 1940년부터 1944년까지 평양에 머물며 틈틈이 작품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박수근이 훗날 주호회의 핵심 회원들인 화우들과 첫 대면을 한 것도 평양 모란봉에서 야외 스케치를 하던 중이었다. 이곳에서 우연히 평양 출신의 장리석과 만난 후 박수근은 최영림, 황유엽 등 평양 화단에서 활동하던 미술가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주호회에 합류하기에 이르렀 다.6) 주호회 회원들과 예술적 교류가 시작될 무렵 박수근의 중요한 관심사는 여전히 조선미술 전람회이었다. 박수근은 1940년 <맷돌질하는 여인>을 시작으로 1941년 <망질하는 여인>, 1942년 <모자(母子)>를 거쳐 1943년 <실 뽑는 여인>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며 예술 적 모색을 이어나갔다.

평양 시절, 박수근이 해결해야 할 예술의 과제는 주로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에 요청된 조형적 보완점이었다. 독자적 조형성 형성을 위한 회화의 전반적 분위기7)와 안정적 화면 구성, 질감 효과8)와 색채 표현9) 등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평론가들은 박수근 예술이 채워나가야 할 미학

4) 안진국, 「최영림의 ‘평양 시기’와 정형화풍」,『미술평단』 121호, 2016, pp. 76~78.

5) http://encykorea.aks.ac.kr/ 참조.

6) 최열,『박수근 평전, 시대공감』, 마로니에북스, 2011, p. 95.

7) 1936년 박수근의〈일하는 女〉는 “拜面이 컴컴하고 白粉이 떠서 陰散하다.”는 평을 받았다.(윤희순, 「美展의 印象」, 매일신보, 1936.

5. 29.)

8) 1937년 박수근의〈春〉은 ”인물이 너무 화면의 중심에 존재한 관계로 安全感이 부족하다.”는 지적(심형구, 「조선미전단평」, 매일신 보, 1937. 5. 22.)과 동시에 “白黑色調의 通達은 보이나 질감의 필요를 잊어버린 것인 念한 바이다.”(김인승, 「제 17회 朝鮮美展」, 매일신보, 1937. 6. 3)

9) 1940년 박수근의〈맷돌질하는 여인〉은 “濕味있는 構圖며 畵面 全體를 黑色으로 統一한 것도 좋게 生覺된다마는 暗色 中에서 明色

<도판 2> 박수근, <봄이 오다>, 수채, 1932,

<도판 1> 최지원, <걸인과꽃), 목판화,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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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과제를 신문 단평을 통해 폭넓게 요청했다. 평양 시절 박수근은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의 경향 등 당대 미술계의 동향과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동료들의 예술 의지와 태도를 예의 주시 하고 또 참고하며 예술적 탐문을 지속해 나갔다. 예술 전반에 관해 모색의 시기였던 평양 시절, 박수근은 4년 남짓의 기간 동안 주호회 활동을 하며 협회의 집합적 예술 의지를 공유하고, 한국적 소재를 통한 한국적 미감의 실천이라는 작가 예술의 조형적 근간을 공고히 할 계기를 마련했다.

3. 대한미술협회 활동과 예술적 변화 실천 3.1. 대한미술협회

대한미술협회는 1945년 11월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가 확대 재편된 미술 단체이다. 대한미술 협회의 출범 시기는 1948년, 1950년 2월, 1950년 5월로 추정 시기가 다르다. 1953년 8월 15일 서울 환도 선포 이후 각지에 흩어져 있던 미술인들이 재집결하면서 서울 화단은 활기를 되찾았고, 대한미술협회는 6.25 전쟁 이후 국가 정책에 호응하며 미술인 결집의 구심점 역할 을 수행했다.10)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을 초대 회장으로 출범한 대한미술협회는 협회전인《대한미협》

展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 4월 24일부터 5월 10일까지 경복궁미술관에서 개최 된 제 1회《대한미협》展은 하루 1천 명을 넘는 관객이 방문할 정도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이후《대한미협》展은 매 년 1~2차례 개최될 때마다 전시장을 찾은 정치 뿐 아니라 각계 인사 들의 관람 기사가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냈다.11) 국내 화단에서의 영향력도 매우 컸던 대한미술협회는 임원을 비롯해 협회의 주요 인사들이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를 맡았고, 6.25 전쟁 기념 전시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전시 기획을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대한 미협》展은 회원과 비회원으로 참여 작가가 이분화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상을 비롯해 문공부장관상 등 수상 자격은 회원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대한미협》展의 위상은 국가전람 회화 다르지 않았다.

당대 화단의 대표적 미술 단체였던 대한미술협회는 미술계 분열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1953 년에는《대한미협》展 서예 분야 폐지를 둘러싸고 한 차례 소란이 있었고, 1955년에는 협회 임원 선출 과정에 불만을 품은 미술인들이 대한미술협회를 탈퇴해 한국미술가협회를 출범시 키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1956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구성에서 소속 회원의 숫자에 불만을 품고 국가적 차원의 미술 전람회를 노골적으로 방해하다가 미술계의 비난을 받았고, 한국미술가협회와 합동전시 개최를 요구하는 정부의 요청에 맞서며 갈등도 빚었다.

대한미술협회는 4.19 발발 이후 5월 개최된 긴급임시총회에서 임원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 였고, 1961년에는 ‘화단통합을 위한 임시총회’12) 등을 개최하며 쇄신 기회를 모색하였으나 해체되었다. 대한미술협회는 예술의 명확한 지향 없이 보수적 정치 성향을 지닌 미술 단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적받아 왔으나, 미술인들에게 작품 발표와 판매 기회를 제공하며 활동 기반 마련에 기여한 바가 큰 미술 단체로 의의 또한 평가받고 있다.13)

3.2. 대한미술협회 활동과 예술적 변화 실천

6.25 전쟁은 박수근 삶에도 큰 변화를 야기했다. 박수근은 평양을 떠나 금성에 머물 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홀로 월남하였다. 이후 뒤 따라 남하한 가족들과 1953년 상봉한 후 타계에 이르기까지 박수근의 활동 거점은 서울 화단이었다. 박수근은 대한미술협회에 1955년 가입했고, 1958년 7월에는 정기총회에서 21명의 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박수근이 대한미술협회 탈퇴 시기는 1960년 4.19 이후 임시총회에서 위원 일괄 사표 제출을

을 發見하도록 硏究함이 좋겠다.”(심형구, 「第十九回 朝鮮美展 印象記」, 동아일보, 1940. 6. 9.

10) http://encykorea.aks.ac.kr

11) 조은정,「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권력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5, p. 8.

12) 大韓美術協會 總會,『경향신문』, 1961. 7. 13 13) 앞의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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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점 즈음이다.14)

박수근이 대한미술협회에 가입했던 해는 국내 화단의 분열이 가속화되던 때였다. 대한미술협 회의 정기총회에서 위원장 선출을 두고 전 위원장이었던 고희동과 경합을 벌이던 장발(張勃, 1901~2001)이 선거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협회를 탈퇴하여 한국미술가협회를 결성한 것 도 바로 이 해였다.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 두 군데 모두 소속되지 않았던 박수근은 신흥조직인 한국미술가협회가 아닌 기존 조직인 대한미술협회를 선택하였다.

박수근의 대한미술협회 가입 결정은 예술적 신념 보다는 미술계 내 친분에 의한 것이었다.

15) 박수근이 대한미술협회에 가입할 당시 대한미술협회가 확정 발표한 임원과 회원의 명단에 는 황유엽과 김환기(金煥基, 1913~1974)가 포함되어 있다.16) 황유엽은 평양 화단에서 월남 후 서울 화단에 이르기까지 교류를 지속했던 몇 명 안 되는 동료이었고, 김환기는 대한민국미 술전람회 특선 수상작이었던 박수근의〈우물가(집)〉(도판 4)의 심사를 맡았던 인연으로 작 가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미술계 인사였다.

박수근이 대한미술협회에 가입한 1955년은 조선미술가협회 창립 10주년이자, 이승만 대통령 이 팔순이 되던 해이기도했다. 대한미술협회는 어수선한협회 분위기를 쇄신하는 동시에 조선 미술가협회의 정신을 계승한 단체로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그 어느 때 보다《대한미협》展 개 최에 힘을 쏟았다. 박수근이 협회 가입 후 처음 참가한《대한미협》展 ‘우계로 인해 관람하지 못한 일반 및 학도의 편의를 도모’17)를 목적으로 이례적으로 전시가 열흘 연장되기도 했다.

박수근은 수묵채색화 36점, 유채화 166점, 조소 15점, 공예 4점을 포함해 총 221 점이 출품된 제7회《대한미협》展 회원 자격으로 <두 여인>, <노상>, <산>, 중 <노상>을 출품했고, 이 중 현재 흑백 도판으로 남아있는 <노상> (도판 4)이 국회위원장상을 수상하면서 예술성을 인정받았다.18)

대한미술협회에 가입을 기점으로 박수근이 국내 화단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강화하면서 작업 에 매진할 무렵 작가 미술은 ‘근본적인 자기 부정을 통한 예술적 쇄신’19)의 필요성을 요청받기 도 했다. 하지만 ‘대한미술협회를 대표하는 역량을 지닌 실력 있는 핵심’20)과 같은 호평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편이었다. 월남 이후 학연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던 서울 화단의 특수성 속에서 박수근이 자신의 예술적 입지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과 당선이었다.

늘 신인처럼 심사와 평가의 대상이었던 박수근은 미술비평가와 미술계의 관심과 인정을 받았 고, 이러한 상황은 작업에 관한 확신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이해된다.21) 주목할 만 한 점은

14) 최열, 앞의 책, p. 264 15) 최열, 앞의 책, p. 200.

16) 최열,『한국현대미술의역사, 한국미술사사전 1945-1961』, 열화당, 2006, p. 383.

17) 「문화소식」,『동아일보』, 1955. 6. 29.

18) 최열,『박수근 평전, 시대공감』, 마로니에북스, 2011, p. 264 19) 이봉상, 「國展評 上 洋畵部 現實性의 貧困」, 동아일보, 1955. 11. 26.

20) 김영주, 「모색의 전환을 꾀하자」,『새벽』, 1956(최열, 앞의 책, p. 152 재인용) 21) 최열, 앞의 책, p. 167

<도판 3> 박수근,〈우물가(집),〉캔버스에 유채, 80.3x100cm, 1953

<도판 4> 박수근, <노상>, 1955, 제 7회 대한미술협회전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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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이 대한미술협회에 가입해 활동했던 1950년대 중반 작가 예술이 내용과 형식에서 큰 변화가 시도되면서 독자적 조형성이 확립되는 시기로 평가되는 점이다. 22)

박수근 예술의 내용은 농촌 풍경에서 도시의 삶으로 전환이 시도되었고, 형식 또한 공간 분할 과 형태 표현에서 ‘추상성이 강화’23)되는 변화가 실천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1953년 창신동에 집을 마련한 후 전업 화가로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환경 조성뿐 아니라 작업에 대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술의 고유성이 확립되던 서울 시절, 박수근은 대한미술협회 활동 을 하며 남한 화단의 일원이라는 심리적 안정감과 함께 예술적 자신감을 얻었고, 이를 토대로 독자적 조형성 확립을 위한 예술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4. 한국판화협회와 예술적 실험 확대 4.1. 한국판화협회

한국판화협회는 1958년 ‘표현매체로서의 판화 대중화’24)에 취지를 두고 설립된 미술 단체이 다. 1910년대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석판화, 1920년대 나혜석(羅蕙錫, 1896~1948) 의『신여자』와『개벽』에 수록된 목판화, 1930년대 국내 체류 일본 미술인들의 창작판화 등 한국판화협회 이전에도 순수예술로서 판화 작업은 존재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판화 작업은 개인적 관심사에 그치는 수준이었고, 창작판화에 관한 예술적 관심은 부족해 순수예술로서의 판화 작업은 본격화되지 못해 왔다.25)

한국판화협회가 창립될 무렵 서울 화단에는 서구 미술의 유입이 확산되던 때였다. 전후 미국의 경제 원조와 미군 주둔과 함께 미국에서 발행된 잡지의 보급으로 과거 보다 쉽게 서구 모더니 즘을 접할 수 있었던 상황의 힘이 컸다. 1950년대 미정보교육교환(USIE) 기금으로 국내의 주요 기관에 타임·라이프·뉴스위크 등 미국 잡지가 무료 배포되었고, 해당 잡지에는 실린 판화 관련 기사는 당시 미국 미술계의 판화 붐을 서울 화단에 전달하는 경로가 되었다.26) 특히 1950년대부터 문화 교류 차원에서 오리지널 회화 보다 운반이 용이하고, 훼손에 대한 부담이 적은 판화 전시가 국내에서 개최되면서 판화에 대한 관심도 확대되었다.27)

한국판화협회의 창립을 주도한 이항성(李恒星, 1919~1997)은 1958년 미국 신시네티 미술관 에서 개최된 제 5회 국제현대석판화 비엔날레에서 수상 후 국내에서 첫 석판화 개인전을 연 장본인이기도 했다.28) 이항성을 비롯하여 국내 미술가들이 국제전에 판화를 출품해 좋은 성과 를 거두면서 서울 화단은 우리 미술의 국제화를 위한 새로운 표현 매체로 한국 판화의 가능성 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29) 한국판화협회의 창립회원은 유강렬(劉康烈, 1920~1976), 최영 림, 이상욱(李相昱, 1923~1988), 박수근, 최덕휴(德休, 1922~1998), 임직순(任直淳, 1921~1996), 장리석, 변종하(卞鍾夏.1926∼2000) 등 15명이었다.30) 한국판화협회는 출범 의 해 3월 중앙공보관화랑에서 창립전을 열고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협회전과 공모전을 지속하며 1962년 개최된 현대작가초대전에 판화부를 신설하는데 일조하였다. 또한 1964년에는 신인공모전을 열어 판화의 저변 확대를 도모함과 동시에 필리핀에서 한국판화전 도 기획·전시해 한국 판화의 국제화를 모색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판화협회 를 탈퇴한 회원들을 주축으로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결성되면서 단체는 활동 동력 상실로 인 한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한국판화협회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판화부 신설을 건의하 는 등 한국현대판화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한 미술 단체로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31)

22) 하수봉, 「박수근 회화의 표현기법 연구: 진위문제, 편년 재조정, 그리고 재현작업을 중심으로」, 명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2, p. 118

23) 윤중식, 「제 7회 협전을 보고」, 서울신문, 1955. 6. 15 24) 「문화계소식」,『경향신문』, 1958. 2. 4.

25) 김윤애, 「1950-60년대 한국판화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pp. 7~10.

26) 정무정, 「추상표현주의와 한국 엥포르멜」,『미술사연구』, 15집, 2001, p. 248 참조.

27) 김윤애, 「한국현대판화의 성과와 의미」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2집, 2011, p.

28) 「李氏作品等」을 選定 씬씨나티美術舘所藏으로」,『동아일보』, 1958. 8. 29 29) 김윤애, 앞의 논문, pp. 238~239 참고.

30) 최선주, 「한국현대판화 50년의 흐름: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홍익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1,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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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한국판화협회 활동과 예술적 실험 확대

박수근은 1958년 창립회원으로 한국판화협회 출범과 활동을 함께 시작했다. 당시 한국판화협 회의 회원은 ‘전문 판화가가 아닌 회화 장르에서 이름이 났거나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여기(餘技)로 판화를 시작했던’32) 미술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판화협회 출범 당시 박수근은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에서 개최된 《한국현대미술》展에 유화 작업 <모 자>, <노상>, <풍경> 등을 출품했고, 대한미술협회의 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전문 판화가는 아니었지만 국내외 서양화 분야에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한편 한국판화협회 창립 회원 중에는 장리석, 최영림도 포함되어 있어 박수근의 협회 가입에 오랫동안 예술적 교류를 이어온 화우들의 영향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박수근은 창작미술협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최영 림, 황유엽 등 평양 시절 주호회 동료들이 가입해 활동했던 창작미술협회 회원들과 가깝게 지낸 것도 확인된다.33)

박수근은 주호회 활동 당시 유화 작업에 치중했던 것과 달리 한국판화협회 창립전에는 목판화

<노인과 여인> (도판 5)을 출품했다. 박수근의 출품작〈노인과 여인〉은 거리에 앉아 있는 남녀노소 7명의 모습을 음각으로 표현한 목판화로, 작가 특유의 공간 구성력을 확인할 수 있 다. 박수근이 한국판화협회 창립전에 출품한 목판화는 1956년부터 광화문 근처에 미술교육출 판사를 운영한 이항성이 1959년 발간한『신미술』에 수록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박수근의 목판화〈노인과 여인〉은 1959년 제작한 목판화〈밤길〉(도판 6)을 비롯해 1960 년대 제작한 일련의 판화에 비해 회화성이 확연히 돋보인다. 또한 박수근의 목판화〈노인과 여인〉의 인물의 배치, 화면의 구성 등은 훗날 유화로 제작된〈노상〉(도판 7)을 비롯한 일련 의 회화 작업과 조형적 연계성도 확인된다. 박수근 판화는 다른 매체 특히 유화 작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해 왔지만 작가 예술의 변형과 확장의 계기를 이해하는데 유효한 시사 를 준다. 박수근은 목판화〈노인과 여인〉의 경우처럼 판화를 먼저 제작 후 유사한 내용과 형식의 유화를 다시 제작하기도 했고, 유화 완성작을 시차를 두고 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예술적 확장을 모색하던 시기, 박수근은 판화를 예술 매체로 인식했던 한국판화협회의 미학적 판단에 동의하며 판화의 표현 매체적 가능성을 토대로 단순한 형태와 절제된 색채, 강화된 표면 질감과 짜임 있는 화면 구성 등 작가 특유의 조형 언어 강화를 위한 형식 실험을 본격화했다.

5. 현대판화동인과 예술적 위상 확인 5.1. 현대판화동인 개관

현대판화동인은 김환기, 최영림, 유강렬(劉康烈, 1920~1976), 정규(鄭圭, 1922~1971), 박 수근을 포함하여 5 명을 창립 회원으로 출범했다. 현대판화동인의 소속 회원은 한국판화협회 에 적을 두고 있었던 미술인들이 대다수이었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국판화협회에서 제외당한 박수근, 유강열, 정규, 최영림이 김환기를 영입해 발족한 것이 현대판화동인 출범 배경으로 간략히 알려져 있다. 현대판화동인 설립과 함께 국내 화단에는 판화관련 단체가 두

31) 김운애, 앞의 논문, p. 35 참조.

32) 차역 인터뷰, 2013. 9. 16.( 박지은, 「박수근의 판화와 복제판화에 대한 고찰」, 명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4, p. 4 재인용) 33) 박수근미술관,『새로 보는 박수근:박수근 100장면』, 수류산방, 2015, p. 348.

〈도판 5〉. 박수근,〈노인과 여인〉, 목판화, 1958 <도판 6> 박수근, 밤길, 11.7x14.7cm,1959

<도판 7> 박수근, <노상>, 캔버스에 유채, 38x45.8cm, 1960년대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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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 늘어났고, 현대판화동인의 회원 구성은 “이념이나 양식의 울타리를 내세운 분리라기보다 는 회원 상호간의 인연”34)에서 특이성을 찾을 수 있다.

현대판화동인는 예술 매체로서의 판화 인식 확산에 취지를 두었던 한국판화협회와 달리 ‘진정 한 판화 예술의 개척’35)을 출범 목표로 기존 판화 단체와 차별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현대판 화동인 역시 여타의 미술 단체처럼 창립전 개최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대판화동인은 한국판화협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체 규모, 운영 기간, 회원 숫자 등 모든 측면에서 열세이었 다. 따라서 현대판화동인은 회원 뿐 아니라 해외 판화 원작을 함께 소개하는 국제전 성격의 창립전을 통해 한국판화협회를 견제하고 단체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했다.

현대판화동인은 의욕적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했으나 창립전 이후 활동과 해체 시기 및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주목할 만 한 점은 현대판화동인 창립의 해 창립 회원들의 상황이다. 1960년 김환기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최영림은 ‘서 라벌예술대학(1981년에 중앙대 예대 부교소루 정년퇴직 때까지) 강사’36) 생활을 시작했다.

한편 1963년 경희대학교 요업과 교수가 된 정규는 한국민속도자공예연구소도 창설했고, 뉴 욕대학교에서 판화를 공부하였던 유강렬은 홍익대학교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현대판화동인 창립 회원들은 중 박수근을 제외한 나머지 회원 모두가 미술대학 교수 재직하면서 새로운 미술 단체 창립 준비와 국가미술전람회 심사 그리고 국제 미술 행사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후 현대 판화동인 관련 공식적인 활동은 찾아 볼 수 없다.

5.2. 현대판화동인 활동과 예술적 위상 확인

현대판화동인 창립의 해 박수근은 좌절과 영광을 동시에 경험했다. 4.19 발발 이후 박수근은 대한미술협회 5월 임시 총회에서 일괄 사퇴가 결정되면서 위원직에서 물러나야하는 수모를 겪었고, 해당 년도 10월에 는 추천작가 자격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노상의 소녀〉(도판 9)를 출품하기도 했다. 사회적 혼란과 화단의 동요 속에서 절망과 성취를 동시에 맛보던 와중 에 박수근은 현대판화동인 창립전에 참여했다.

당시 《현대판화동인》展에는 해외 작가와 회원들의 판화과 동시에 소개 되었다. 창립전에 소개된 해외 원작 판화는 피카소(Pablo Picasso), 마티스(Henri Matisse), 미로(Joan Miro),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자크 비용(Jacques Villon), 알프레드 마네시에(Alfred Manessier), 디메르와 브라질의 안토니 헨리크 아마랄(Antonio Henrique Amaral), 미국의 벤 샨(Ben Shahn), 일본의 무나카타 시코, 세키노 준이치로(關野準一郎) 등의 것이었다.37) 한편 회원들 중 최영림이 9점, 유강렬이 7점, 김환기가 3점, 정규가 2점, 박수근은 1점을 《현 대판화동인》展에 출품했다.

박수근은 한국판화협회 가입 이후 판화 제작을 지속했다. 그런데 박수근이 현대판화동인에 가입해 활동했던 1960년을 전후 한 시기 제작 판화는 1958년 《한국판화협회》展 출품 목판 화〈노인과 여인〉처럼 회화성이 돋보이기 보다는 1959년 제작된〈탑돌이〉(도판 9)처럼 삽 화적 경향이 강한 것들이었다. 또한 판화는 제작 목적도 전시 출품이 아닌 미술계의 지인들이 나 해외의 소장자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 표지를 장식용이었다. 안타깝게도 박수근 이 《현대판화동인》展에 출품한 판화의 구체적 면모는 확인할 수 없으나, 작가가 작은 크기 판화 한 점을 출품했던 정황은 ‘단 한 점의 소품은 몹시 소박하고 소심이었으나 그것으로 문제 를 끌어내기에 너무 부족한 것 같다.’38)는 이경성의 언급으로 알 수 있다.

박수근은 1957년 홍콩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화가》展, 미국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에서 진행 된 《동서미술》展, 1958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展과 대 만의 대북국립역사박물관에서 선보인 《한국현대미술》展 등을 통해 이미 자신의 유화 작업

34) 최열, 앞의 책, p. 196

35) 이경성, 「판화예술의 지침-현대판화동인전의 의미」,『서울신문』, 1960. 12. 23.

36) 이경성 외,『韓國近代繪畫選集 洋畵 12 崔榮林, 張旭鎭』, 금성출판사, 1990, p. 146 37) 최열, 앞의 책, p. 196 참조.

38) 이경성, 앞의 기사

<도판 8>> 박수근, <노인과 소녀>, 캔버스에 유채, 145.5x90cm, 1959

<도판 9> 박수근, <탑돌이>, 판화, 1959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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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해외에 선보인 바가 있었다. 하지만 국제전에 유화가 아닌 판화는 첫 출품이었다. 더군다나 국내에서 개최된 《현대판화동인》展은 박수근이 지금까지 유화를 출품했던 국제전처럼 전시 종료 후 도록을 통해 실체를 확인해야 했던 국제전과는 달리 직접 관람이 가능한 전시이었다.

현대판화동인으로 활동하던 시기를 전후 해 박수근 예술 활동은 전시 출품을 목적으로 한 유화 작업과 상업적 취지에서 제작된 삽화 작업으로 예술 활동이 이분화 되기 시작했다. 생의 말년 이자 예술의 정리기이었던 시기, 박수근은 국내외 거장들과 함께 했던 국제전 성격의 동인전 참가와 혹평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위상의 현재와 한계를 현실적인 틀에서 성찰할 계기 를 제공받았다.

6. 결론

일제강점과 해방 그리고 6.25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 확립에 힘써 온 박수근 미술의 전개와 확장 과정에서 미술 단체 활동이 지니는 영향과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호회 활동을 할 당시 박수근은 향후 전개해 나갈 예술의 내용과 형식 전반에 관한 심도 있는 예술적 모색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화면 구성과 질감 처리, 색채 표현과 작업의 분위기 등 예술적 당면 과제를 집중적으로 고민하던 박수근은 한국적 소재와 한국적 미감의 실천이라는 주호회의 집단적 관심사를 공유하며 정서적 친밀함의 소재와 한국성의 시각적 구 현을 위한 조형적 근간을 마련했다.

둘째, 대한미술협회 활동을 할 당시 박수근은 예술적 내용과 형식에서 큰 변화가 시도되면서 독자적 조형성을 인정받던 예술의 확립기였다. 농촌 풍경에서 도시의 삶으로 예술적 관심사가 전환되고 형식에서 추상성이 강화되던 박수근은 협회전 수상과 협회 임원 선출 등의 경험을 통해 얻은 월남 후 남한 화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독자적 예술 실천 의 동력을 확보했다.

셋째, 한국판화협회 활동을 할 당시 박수근은 단순한 형태와 절제된 색채, 강화된 표면 질감과 효과적 화면 등을 중심으로 독자적 조형성이 심화되던 예술의 확장기였다. 판화를 예술 매체로 인식했던 한국판화협회의 미학적 판단에 동의하며 박수근은 판화의 표현 매체적 가능성을 토 대로 고유한 조형 언어 구축을 위한 형식 실험을 본격화했다.

넷째, 현대판화동인 활동 당시 박수근은 기존의 작업 방향을 점검하던 예술의 정리기였다.

전시 출품을 위한 유화 작업과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한 삽화 작업으로 예술 활동의 이원화를 실천하던 박수근은 국내외 거장들과 함께 했던 국제전 성격의 동인전 참여를 통해 자신의 예술 적 위상의 현재와 한계를 현실적인 틀에서 고민할 계기를 마련했다.

이상을 통해 본 연구는 박수근이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가입해 활동했던 미술 단체의 성격과 활동이 작가 예술의 전개와 확장 과정에서 확인되는 의의를 검토해 보였다. 박수근 가입 미술 단체 중 세 군데가 판화와 관련 단체였으나 본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박수근 판화의 조형적 특성과 미술사적 의의는 추후 연구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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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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