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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도시공간의 현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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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도시공간의 현재와 미래

해방 이후 우리나라 건축도시공간은 경제성장이 급선무다 보니 생산기반시설을 확충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명제 아래 삶의 물리적 토대가 되는 건축도시공간에 대한 요구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건축도시공간은 건축물 중심에서 경관 중심으로, 역사∙문화적 유적 중심에서 생활 및 생태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환경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건축도시공간, 전통마을 구조로 설계된 도시 등이 건축도시공간의 구축에 추구해야 할 흐름으로 대두되고 있다.

지금 정부에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 수많은 새로운 도시를 조성하고 있다. 미래의 건축도시공간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물리적 토대로서,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서 다양하고 다원적이며 개방적이되 차별화된 문화경관을 갖춰야 할 시점이다.

특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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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의 건축 개관

생활문명의 서구화와 산업구조 변화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크게 두 차례의 집중 적이고 급격한 근대화시기를 거쳤다. 근대화의 시기를 두 차례로 나누어 보는 것 은 20세기 중반에 단절기가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시인구의 급증과 서 구적 도시문화의 탄생으로 기록되는 1920년대 중반 이래의 첫 번째 근대화 경험 은 1945년 일제가 물러나고 분단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시 정체기를 맞는다. 근대적 변화의 일부가 일제의 잔재로서 청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1945 년 남한에 미국이 진주하면서 서구화의 대상이 미국 일변도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이후 전개될 두 번째 근대화의 성격이 첫 번째 시기의 그것과 차이나 게 하는 점이다.

첫 번째 근대화 시기의 건축과 도시의 변화는 서양과 일본이라는 두 갈래의 외 래건축, 그리고 조선 전래의 건축이 뒤얽힌 이중적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20세기 초 서울에서 자동차 교통을 위하여 남대문 일대의 성벽이 철거되고,1)궁궐과 사묘 등이 근대적 시설 부지로 전용된 일은 전통 도성의 체계가 훼손되고 새로운 근대 의 시기가 도래함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저개발지였던 남산의 북사면과 용 산일대는 서울 인구의 1/4까지 달하였던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집중 개발되고2)

해방 이후 건축문화의 전개와 미래방향

전봉희|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1) 서울 이외에도 개항 이전에 있었던 약 120여 개 성곽도시의 성곽들이 일제강점기 중에 허물어지고 내부의 길이

근대적 방식으로 정비되었다. 손정목. 1990. 「일제 강점기 도시계획연구」. 서울 : 일지사. p87

2) 정재성 외. 1998.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 서울 : 혜안.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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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사, 조선 신궁3) 등 일본인들의 정신적 구심 점과 주차군사령부와 헌병대 등 물리적 권력의 중추가 자리하였다. 반대로 청계천 북쪽의 북촌 은 한국인들의 생활권으로 남았고, 도시형 한옥 이 상품 주택에 맞게 진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 었다. 서구 건축의 충실한 재현에 상당한 경제 적∙문화적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에서는 양 집 단 사이에 큰 차이가 없어서, 관영건축물은 물 론, 규모가 큰 은행, 백화점, 극장, 종교시설과 상류층 주거에는 서양 건축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해방, 한국전쟁과 새로운 움직임

해방과 함께 일제의 지배를 상징하던 조선 신궁 등이 신속히 철거되고,4) 일본식 지명을 한글로 개명하였으며, 남아 있던 일식 주택의 다다미방 들에는 온돌이 깔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서

구 절충주의 양식의 청사는 별 저항 없이 중앙청 으로 전용되어 사용되고, 한국은행이나 서울시 청, 부민관 등 전화를 피한 나머지 근대시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이 건물들이 상징하는 서 구문명이 한국의 엘리트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목표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5)

해방과 한국전쟁은 건축가 집단의 인적 구성 변화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먼저, 이념 대립 때문에 많은 건축가가 월남∙월북하고, 남북 간 건축교류도 끊어졌다. 이에 더하여, 일제 강점기 에 활동하였던 건축인들 - 국내에서 교육받은 사 람들과 소수의 일본 유학파-이 빠른 속도로 해 방 이후 교육받은 세대로 자리바꿈하게 된다.

실제로 건립된 건물들을 기준으로 볼 때, 해 방 직후의 한국 건축은 그 활동이 미미했다. 건 설활동은 미군의 진주에 따른 군사지원시설의 건립과 남한에서의 응급수리공사, 소규모 부흥 공사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6)해방 이후 해외교

<사진 1> 1930년대에 개발된 가회동의 도시형 한옥단지 <사진 2> 1926년 건립 직후의 조선총독부(엽서사진)

3) 경성신사는 한일합방 이전인 1898년 남산대신궁이라 하여 건립한 것을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하였다. 조선 신궁에는 태양신 아마테라스

와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모셨으며, 신궁의 진좌제 직전인 1925년 7월에 남산 꼭대기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사당인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겼다. 상게서. pp204-215

4) 1959년 국회의사당을 남산자락에 건립하는 계획을 건축가들이 반대한 이유로 조선 신궁이 있던 지역이라는 점이 부지가 높고 협소하며 전

후에 시급한 사업은 아니라는 등의 현실론과 나란히 거론될 정도로 조선 신궁에 대한 거부감은 철폐 후에도 상당기간 남아 있었다

5) 이와 관련하여, 구 조선총독부건물의 철거에 임해서도, 이 건물이 위에서 보았을 때 일본의 일(日)자를 닮았다고 하는 상징적 해석이 철거

논리로 이용되었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6) 안창모. 1996.

「한국 현대 건축 50년」. 서울 : 재원. pp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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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귀국과 분단에 따른 월 남민의 유입으로 서울의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하 였으나, 공업이 발달한 북 한과 단절된 데에 따른 경 제적인 어려움으로 수도 서울의 도시적 성장에 특 별한 성과는 보이지 못하 였다.7)

중요한 건축활동을 일 별하면, 1945년 11월 각각

15평형, 20평형, 25평형의

주택설계안으로 부문을 나 누어 조선주택영단이 주최 했던‘국민주택설계공모’

에서 우승한 천호철, 이종 원, 김희춘의 당선작들은 거실을 중앙에 둔 입식 생활공간을 추구한 것이었다.8)또한 1947년의‘서울만물 전 현상설계’에서는 기능주의적 평면과 국제주의적 입면을 제안한 것을 볼 수 있 으며, 이 현상설계에서 3등을 차지한 오영섭은 동도극장에서도 장식이 적은 벽면 과 기하학적 형태 등 합리주의적 경향을 설계에 반영하였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 이후의 전후 복구활동이 이루어졌다. 전쟁 피해는 여러

도시에서 이후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또한 신진 건축가들이 일찍부터 활동할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서울에서는 고궁을 피하여 청계천 이남에 폭격이 집 중되어 예전의 일본인 지역이었던 남촌에 복구 및 재개발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이고 낙후된 북촌과 근대적으로 발달한 남촌이라는 일제시대의 도시 상징 구조가 그대로 고착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한주택영단, 한국산업은행, 서울시, 한 미재단 등은 부흥주택, 희망주택, 재건주택, 시영주택, 후생주택 등 여러 가지 명

7) 일제의 한반도 경영의 원칙은 대륙에 가까운 북한지역은 공업지대로, 남한지역은 농업지대로 성장시키는 것으

로서 지극히 기형적이고 편파적인 것이었다. 1943년 발행된「朝鮮工業の現段階」에 따르면, 1940년 금속공업 생 산의 경우 북한은 90.9%, 남한은 9.1%, 화학공업의 경우 북한이 86%, 남한이 14%를 차지했던 것이 그러한 상 황을 대변한다. 때문에 해방 직후 남북한의 경제력 차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8) 신영훈 외. 2001.

「우리 건축 100년」. 서울 : 현암사. pp217-218

<사진 3> 일제강점기의 조선신궁(1926)과 해방 후 그 자리에 세워진 김구동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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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공영주택사업을 통하여 주택공급에 힘썼는 데,9) 대한주택영단의 사업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루어진 주거관련 연구의 성과가 반영되었다.

또 교육, 문화, 사회간접자본과 관련된 시설 들을 갖추기 위한 건설사업들이 다수 시행되었 다. 이 중 남대문교회(박동진, 1954), 성균관대 석조전(김태식, 1954), 중앙대 약대(차경순,

1956) 등이 석조로 꾸며진 반면, 1950년대 후반

으로 가면서 김중업의 부산대 본관(1957)과 서 강대 본관(1959), 김정수의 성모병원(1958)과 신국범의 김포국제공항(1960) 등 최신의 근대적 경향을 반영한 작품들이 증가하였다. 이는 건축 가의 빠른 세대교체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산업화와 전통에 대한 관심

5.16에 이은 군사독재하에서 추진된 공업화는

대형 건축 프로젝트의 증가와 이촌향도 현상을 초래하였다. 특히 서울의 인구증가와 영역 팽창

은 두드러진 것이었다.10)조선 후기 20만 명 정도 였던 서울 인구가 해방 당시 90만 명, 고도 성장 기에 들어선 1970년에는 500만 명까지 늘어났 다. 1963년의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지정된 개발 제한구역(greenbelt)은 현재 서울의 윤곽을 대략 결정하였다.11)도시기반시설이 어느 정도 갖추어 졌던 도성 내부는 급속한 경제개발로 인하여 고 밀 개발되었고, 서울의 남북축을 가로지르는 세 운상가(김수근, 1967) 같은 초대형 구조물이 들 어섰으며, 청계천 등의 하천들이 복개되고 고가 도로가 건설되었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한국의 건축가

들은 새로운 구조 방식과 형태들을 여러 가지로 시 험 하 고 있 었 다 . 김 정 수 는 성 모 병 원 (1958~1963)에서 알루미늄 커튼월, 장충체육 관(1963)에서는 전체를 덮는 철골 돔을 사용하 였고,12)이광노는 구덕체육관(1966)에서 하이퍼 쉘 구조를, 구 어린이회관(1970)에서는 RC커튼 월 공법을 시도하였다. 김중업의 제주대 본관

<사진 4> 부산대 본관(김중업, 1957) <사진 5> 성모병원(김정수, 1958-1963)

9) 상게서. pp233-234

10) 1960~1966년의 총 이촌향도 이주자 중 거의 70%를 서울이 흡수하였다. 반면 일본과의 교역창구였던 작은 항구도시들은 오히려 인구가

줄어들었다. 송병락∙E.S.밀즈. 1980.「성장과 도시화문제」. 서울 : 보진재. pp84-85

11) 이후, 서울의 영역 확장은 1977년에 있었던 서대문구의 일부 구역 증가에 그친다

12) 원래는 콘크리트 쉘을 검토하였으나 기술적 어려움이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1999.

「한국현대건축100년」. 서울 : 피아.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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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서 산 부 인 과 (1965) 등에서 노출 콘크 리트와 과감한 곡선이 활 용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김수근은 워커힐 힐탑바 (1963)에서 노출콘크리트 를 외관에 적용하였고 자 유반공연맹센터(1964)에 서는 그 시도가 매우 기념 비적, 권위적인 결과물로 나타나게 되었다.

새로운 고층 건물들은 당시 진행되던 새로운 산 업화와 근대화의 표상이었 다. 이천승, 강명구, 김중 업, 박춘명, 유영근, 정인 국이 설계한 조흥은행본점 (1963~1966)은 미 국

SOM의 레버하우스를 본받은 국제주의적 건물이었고

13)그전까지 보기 드물었던

15층의 고층 빌딩이었다. 정부종합청사(1968~1970)는 21층에 달하는 건물을 슬

립폼 공법으로 지은 것이었는데 정부의 일방적인 설계변경 요구로 설계자가 나상 진에서 미국의 PA&E사로 변경된 사건은 1970년대에 고층건물 설계를 외국인들 에게 의존하는14)사례의 선구로 기록될 만하다.

한편으로 1960년대에 정부는 민족적 자긍심과 역사적 정통성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 남대문 복원(1963), 광화문 복원(1968) 등 건축문화재 보존∙복원사업이 추진되었다. 다만 광화문의 경우, 원래 위치에서 어긋난 자리에 콘크리트로 외형 만 재현하여 최근 광화문 복원 논의가 재개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같은 시기, 전통과 현대건축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일반인들에게까지 주목받 게 되었다. 김중업은 이미 1959년의 프랑스 대사관에서 현대건축에 한국 전통건

1

13) 정인하. 1999.

“한국 현대건축, 1955년부터 현재까지”. 「한국현대건축100년」. 서울 : 피아. p170

14) 안창모. 1996. 전게서. pp128-129

<사진 6> 자유센터(김수근, 1964)

<사진 7> 구어린이회관(이광노,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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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형태 요소를 접목한 설계로 프랑스로부터 슈발리에 칭호를 받는 등15)국제적인 인정을 받 았다. 1960년대의 전통 논쟁에서는 보다 직설적 인 형태의 차용이 문제가 되었다. 강봉진의 국립 종합박물관(1967~1971)은 기능과 무관하게 전 통 건축물을 재현한 외관 때문에 건축가들의 빈 축을 샀다. 반대로 김수근의 부여박물관(1967) 은 외관이 일본 신사의 양식과 유사하다고 비판 받았는데, 논쟁이 반일 감정과 결부되면서 일반 인에게까지 큰 관심을 끌었다. 이와 같은 건축의 전통 논쟁은 해방 후 새롭게 대학교육을 받고 성 장한 청년 엘리트 그룹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따 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개발독재 시대의 건축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1970년 4월)로 막을 연

1970년대는 산업화, 근대화의 성과와 부작용이

모두 뚜렷하게 나타난 시기다. 1960년대보다 서 울 시내의 과밀화가 더욱 진행되었고 신축되는 건물의 규모도 커졌다. 한편으로는 여의도와 강 남의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이전까지 청계천을 경계로 존재하던 서울의 이원적 성장구조가 강 남과 강북으로 확대∙재편되어 갔다. 지방에서 는 새마을운동에 의하여 주거 구조와 지붕 재료 가 개선되고 도로가 확장되는 등 농촌의 건축적 환경이 일변하였다.

1960년대에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는 더 높고 연면적이 큰 빌딩이 다수 시도되었 다. 시그램 빌딩을 참고한 김중업의 삼일로빌딩 (1970)은 당시 도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 다. 장종률의 남산타워(1975)는 당시 동양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남산 꼭대기에 세운 것이었고, 대우센터빌딩(1976)은 당시 국내 최대의 연면 적을 자랑하는 건물로서 이들 세 가지의 건축적 랜드마크는 1970년대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 되 었다.

서울 강남개발에서는 아파트 단지가 도시계 획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였다. 반포단지 (1972), 잠실단지(1975)와 1970년대 초∙중반 의 여의도 시범∙민간아파트 단지16)등이 이 시 기의 중요한 사례다. 국내에는 이전에도 아파트 가 존재했지만, 이처럼 대규모의 단지가 조성된 것은 처음이었다. 아파트 개별주호의 평면은 비 슷한 시기의 소위 집장사집의 평면처럼 중앙의 거실이 홀 역할을 겸하는 집약적 형태가 일반적 이었다.17)

건축계에서는 이광노, 김수근, 김중업 등 해 방 후 1세대의 사무소에서 경험을 쌓은 신진 건 축가들이 독립하면서 건축가 집단이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도 내실이 다져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공간과 재료에 대한 탐구의 저변이 확 대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일례로 김수근의 공간 사옥(1977)은 좁은 대지상에서 전통적, 원형적 공간과 재료, 척도에 대한 창조적이고 충실한 재 해석을 구현한 걸작이다.

15) 신영훈 외. 2001. 전게서. pp241-243

16) 여의도의 아파트단지들은 여의도 내에 구매력을 형성하여 시가지가 활력을 가지게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99.

「서울건축사」. 서울특별시. p835

17) 정인하. 2006∙12. 전게서. p167. 집장사집에 대한 연구는 임창복. 1988.

「한국 도시단독주택의 유형적 지속성과 변용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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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는 특히 정부가 발주한 프로젝트에서 건전하 지 못한 형태로 나타났다. 김정수를 비롯, 여러 건축가의 손을 거친 국회의사당 (1975)에서는 열주나 돔과 같은 기존의 건축언어에 집착한 관계자들이 건축가들 에게 지나친 압력을 가하여 현재와 같은 부정합한 형태가 결정되었다.18)

전통 논쟁으로 높아진 관심은 1970년대에 한국 건축사 연구가 본격화되는 계 기를 마련하여, 1969년 문화재관리국 안에 설치되었던 문화재연구실이 1975년에 는 문화재연구소로 직제가 개정되어, 문화재에 대한 전문적인 국가연구기관이 탄 생하였다. 서울에서는 광화문 복원에 이어 경희궁 숭정전(1976), 경복궁 영추문 (1975)과 보신각(1979) 복원사업 등이 계속 진행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서울 성곽, 북한산성, 낙성대 등 호국정신에 관련된 유적의 발굴 복원이 강조된 점도 특기할 만하다.19)

군사독재가 장기화되면서 정권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건축에 한국적, 민족적인 소재를 사용할 것이 권장되었다. 앞서 언급한 국회의사당에서는 한국 전통의 무늬와 형태들이 장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엄덕문의 세종문화회관 (1973~1978)은 전통적 형태로서 엔타시스와 처마, 전통적 공간의 중정을 재해석 하여 현대적인 단순한 형태로 구현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 지붕의 형태를 본뜬

<사진 8> 삼일로빌딩(김중업, 1970) <그림> 세종문화회관 정면도 및 주단면도(엄덕문, 1978)

18) 손정목은 대통령, 국회의장단, 국회의원, 국회사무처장 등이 건축가들에게 여러 가지로 간섭하였다고 증언한

다. 손정목. 2003. 「서울도시계획이야기 2」. 서울 : 한울. pp87-88

19) 전봉희. 2006∙12.

“서울의 근대화와 도시보존”. 「동아시아 수도의 근대화와 도시보존」. 국제심포지엄 논문집.

츠쿠바대학. p105

20) 낙성대 역시 부석사 무량수전을 본떠 만든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다. 당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인기를 엿볼 수

있다

출처: 「공간」1981년 12월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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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명의 국립광주박물관(1977~1978)20)처럼 여전히 전통건축의 형태를 직설적으로 모사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올림픽 특수와 포스트모던

1980년대 이후는 건축시장이 크게 확장된 시기

였다. 각종 경기장 건설과 더불어 서울 도심의 을지로, 소공동 재개발, 한강변 개발 등 올림픽 을 앞두고 시행된 도시정비 사업은 물론, 산업 발달로 인하여 건축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이때 건립된 대규모 오피스 빌딩 설계는 광화문 대한교보 사옥(1982)의 시저 팰리, 63빌딩 (1985)과 럭키금성 트윈타워(1986)의 SOM, 중 앙일보사(1985)의 베켓과 같은 외국 설계자들에 게 크게 의존하여 국내 건축가들에게 기회가 적게 주어졌지만, 대형 건축물의 구조적 측면과 설비를 위한 시스템적인 측면을 고려한 선진적인 설계 기 법을 학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1980년대 말 분 당, 일산, 평촌 등의 수도권 신도시 개발이 추진되 면서 대규모 아파트촌이 수도권 전역으로 확산되 었다. 이러한 5대 신도시 개발사업은 1963년 그린 벨트의 설치로 고정된 서울의 영역을 뛰어넘어 광 역 수도권을 형성하는 시초가 되었다. 1963년 체 제의 붕괴로 기록할 만하다.21)

1980년대 중반 이후, 김수근, 김중업, 김희춘

등 해방 후 1세대 건축가들은 차례로 은퇴하고 건 축계에는 국내파와 해외 유학파의 건축가들이 백 가쟁명하고 있었다.22)그 아래 세대에서는 건축계

의 활황, 특히 1970년대 오일쇼크에 따른 중동지 역의 건설시장 개척에 힘입어 크게 증가한 건축 관련 대학 졸업생들이 저변을 형성하였다. 현재까 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정림건축, 희림건축, 공간, 삼우설계, 범건축, 창조건축, 원도시건축 등 이 대형 건축사무소로 성장한 것도 이 시기다.

1977년의 남서울 대운동장(김수근) 설계공모

를 계기로 1980년대에는 도시적 종합기능을 담 고 대형화된 건축작품이 등장하였고,23)국립현대 미술관(김태수, 1982), 독립기념관(김기웅,

1982~1987), 예술의 전당(김석철, 1984~

<사진 9> 전쟁기념관(이성관, 1994)

<사진 10> 수졸당(승효상, 1993)

21) 5대 신도시 개발 이전의 서울과 관련된 교외개발은 중동대단지(성남)와 과천 행정도시 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 22) 안창모. 1996. 전게서

23) 원정수. 1998.

「한국건축 어디로 가고 있나」. 서울 : 미건사. p174

출처: 이로재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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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전쟁기념관(이성관, 1989~1994) 등 대규모 문화예술 관련 프로젝트들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들 설계안들은 그 외형, 입지,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대한 의문 등 정부건축주와 관련된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아직 오피스 빌딩 등에서 여전히 국제주의 양식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포스트모던이 국내에 소개되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포스트모던 건축 의 통일되지 않은 논의들은 풍남문의 형태를 본뜬 김기웅의 전주시청사(1981)24) 부터 한국 최초의 텐실 구조를 쓴 기술 미학적 외관으로 한국 전통의 차일을 형상 화한 류춘수의 강촌휴게소(1991)25)등 다양한 결과물을 낳았다. 하지만 1990년대 에는 차츰 모더니즘으로의 재귀현상,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적 모던이라 할 만한 반전이 나타나고,26)서양에서 포스트모던의 영향력이 퇴조하면서 국내에서도 직 설적인 포스트모던류의 작품 사례가 드물어진다.

마이카 시대의 도래와 함께 시작한 1990년대의 답사여행 유행은 국민들이 다 시금 전통적 건축미를 돌아보게 했으며, 전통을 재해석하고 역사적 건축경관을 보존하는 데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선비정신’에 근거한 염치와 절제의 건축을 추구한 승효상의 학동 수졸당(1993)은 이러한 경향을 잘 반영한다.27)반면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건물들은 개발에 밀려나거나 일제의 잔재로 백안시되었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논란 끝에 1995년 마침내 철거된 사례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세계화의 명암과 앞으로의 전망

지금까지 살펴본 현대 한국건축의 역사에서 미국을 위시한 동시대의 서구는 근대 화, 산업화의 과정, 나아가서는 근대로부터의 이탈에서까지도 금과옥조의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추종이 정부의 시책과 결합되어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독 재시대에는 도시적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새로운 외관을 경쟁하는 건물들이 어 지럽게 들어섰다. 지금은 다시 근대화의 결과물들을 밀어 내고 새로운 건축적 유 행과 경제적 이익을 쫓는 재개발의 움직임이 전국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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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박길룡은 이 건물이 복고적이지만 차입하여 재구성되는 어휘와 억양이 달라 기존의 전통적 접근과는 다르며,

마이클 그레이브스의 포틀랜드 시청사와 비교할 만하다고 하였다. 박길룡. 2005. 「한국현대건축의 유전자」. 서 울: 공간사. p262

25) 국립현대미술관. 전게서. p314

26) 박길룡. 2003.

“현대건축”. 「한국건축사 연구 1: 분야와 시대」. 서울 : 발언

27) 국립현대미술관. 전게서.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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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생태도시 사업을 진행 하고 있으나, 아직은 국지적 실험에 머물고 있 다.28)

1997년 동남아 외환시장의 위기로 촉발된 IMF체제 이후 들이닥친 세계화의 파고는 실무

와 교육, 양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형 설계사 무소들은 시장을 확대하기 위하여 충실한 기술 력과 선진국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개도국에 진 출하는 한편으로, 국내에서는 해외 유명 건축가

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29)

2002년 이후 많은 대

학에서 국제건축가연맹(U.I.A.)의 기준에 맞춰 건축가 양성의 학부과정을 5년제로 바꾸었고, 최근에는 국제기준에 따른 교육과정인증이 중요 한 이슈로 대두되었다.

절차의 투명성이 강조되면서 국가와 기업 등 발주처가 기존의 실적과 수행능력을 중시하게 되어 설계와 시공을 일괄 계약하는 턴키 방식이 공종발주의 방식으로 선호되었다. 이후, 대형 프 로젝트를 수주받을 수 있는 몇몇의 대형 설계사 무소와 소형 프로젝트로 운영 가능한 아뜰리에 들만이 살아남고, 중규모의 유수한 사무소들이 대거 도태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보이는 한 국건축계의 급격한 세대교체와 30대 건축가들의 부상30)은 이와 같은 세계화의 진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21세기 동북아 허브의 구축과 수도권 집중 해

소 등의 국가전략은 인천의 송도 국제도시, 행정 중심복합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 도시건설 붐을 일으켰다. 또한 전후 베이비부머(1954~

1963년생)의 중년층 진입과 함께 서울 강남 아파

트 단지의 재개발과 주상복합건축을 통한 중대형 아파트 건설붐이 일어났다. 이러한 새로운 건축 붐에 맞추어, 각 건설업체가 TV를 통하여 아파 트 브랜드광고를 내보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것도 21세기 초의 한국 건축계를 상징하는 사건 이다. 파주 헤이리 예술인촌과 파주출판단지는 국내외의 정상급 건축가들이 구체적인 도시설계

<사진 11> 서울대 미술관(렘 콜하우스+ 삼우, 2005)

<사진 12> 청암미디어 사옥 계획안 - 파주출판단지(조민석, 박기수, 매스스터디)

28) 권태환 외. 2006.

「한국의 도시화와 도시문제」. 서울 : 다해. pp335-339

29) 원정수는 기술력의 우위로 인한 것이 아닌 경우에도 외국 건축가들이 선호되는 것은 한국 건축가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본다. 원정수.

1998. 전게서. pp194-196 30) 박길룡. 2005. 전게서. p391

출처: 「공간」.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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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침 속에 한자리에서 경 연을 벌인 국제적인 기획 으로 한국 건축계의 잠재 력을 확인한 사건으로 기 록될 만하고, 이 와중에 렘 콜하스, 쟝 누벨, 마리오 보타 등이 함께 설계한 리 움 미술관(2004년 완공)의 성공은 우리 사회의 명품 열기를 건축계에 옮겨 놓 은 것 같이 보여 씁쓸하다.

최근의 도시보존 프로 젝트는 건축물 중심에서 경관중심으로, 역사∙문화 적 유적 중심에서 생활 및 생태 중심으로 옮겨가는 현상을 뚜렷이 보이고 있 다. 시기적으로도 전통시

대에 한정하지 않아서, 예를 들어 근대 건축물에 대한 등록문화재 제도가 2001년 부터 시행되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서울의 가회동과 계동에서 주민들의 참 여에 기초하고 수선∙설비개선에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북촌 살리기 운동 이 시작되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최근 또 다른 중요한 사업인 청계천 복원은 초기에는 사업추진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역사 복원을 강조하였으나, 차츰 역사 대신 환경∙생태를 강조하였다.31) 이후 서울의 도시보존사업은 일제와 조선, 혹은 근대와 전통이라는 오래된 대립 구조를 폐기하고 새롭게 개발과 환경이라는 구조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32)

보존의 대상을 개별 유물이 아닌 생활의 무대가 되는 유산의 군집으로 파악하 고 전체적인 경관과 환경으로 확대하며, 사업의 주체가 중앙정부에서 지방자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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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청계천 복원사업 도중, 시민위원회가 역사복원의 문제점을 들어 전원 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사업의

진행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사업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다시 시민위원회가 재소집된 일 이 없었다

32) 전봉희. 전게서. pp109-110

<사진 13>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홍례문을 복원한 경복궁 전경

<사진 14> 청계고가도로와 복개도로를 철거한 청계천

출처: http://cheongy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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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그리고 시민단체로 옮겨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시민사회의 건축환경 에 대한 자발적인 관심은 건축주들의 건축에 대 한 안목과 발상의 수준을 높여줄 것이며, 이는 도시의 역사적 경관 보존은 물론, 신축건물의 설 계와 주변과의 조화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혹은‘다 지워버려 도 되는’것들만 가득한 상태에서 시작한 우리의 근대가 이미 반세기를 지나면서 고려해야 할 것 들이 많은 상태로 바뀌었다. 건축가의 세대로 보 아도 이제 비로소 은퇴한 원로건축가에서부터 건축과 학생에 이르기까지 전 세대를 갖춘 완성 기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개발은 빈 땅에 마구잡이로 빠르게 짓는 행위에서 주위의 것들을 두루 살피면서 조심스 럽게 진행하여야 하는 일로 바뀌었다. 그 주위는 인근의 대지가 될 수도 있고, 세계가 될 수도 있 다. 교통과 통신의 속도가 빛처럼 빨라지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주위의 폭도 확대되었다. 다소 복합적이고 애매한 경계를 갖는 용어이지만, 광 의의 환경건축은 21세기 우리 건축의 화두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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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환 외. 2006. 「한국의 도시화와 도시문제」. 서울 : 다해. pp335-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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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 공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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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