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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大御葬歌萬葉挽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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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大御葬歌 萬葉 挽歌

「 」

이 권 희

*1)

국문초록

< >

일본문학사의 서술에는 한 가지 큰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 어떤 장르에 대해서도. 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원시적 형태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열 매김에 의 始原

한 수직적 문학사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각각의 문학 장르. 는 외부로부터의 傳受와 渡來라는 영향관계를 배재하고 유구한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자생적 전통을 확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근세의 국학자 모토오. 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꾀한 방법이었으며 대부분의 문학사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방법에 의해 기술되고 또한 연구되어지고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일본문학사의 수직적 자리매김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기 위하여 종 래에 일본 挽歌史의 최 정점에 위치시키고 있는 오미하부리우타(「大御葬歌」, 이하 「 로 표기 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는 의 최 정점에 위

大御葬歌」 「大御葬歌」 挽歌史

치시킬 수 없으며 挽歌와는 이질의 歌謠로서의 葬歌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원래 古代歌謠라 함은 집단성원 전부가 참가하는 일정한 場을 배경으로 그 어떤 집 단의 공공의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해 불리었던 집단의 문학이었다 이러한. 古代歌謠 는 歌謠가 아니면 실현시킬 수 없었던, 歌謠에 뭔가 특별한 呪力이 있다고 믿어졌던 시대의 사회적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순한 형태의 타악기를 이용해 가사와 리. 듬을 맞추고 때로는 규칙적인 몸동작과 일련의 퍼포먼스 등의 舞踏을 동반하여 불리 었던 歌謠는 형태적으로 보면 문학 이전의 문학으로서의 원시예술의 諸 形態에서 비 롯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古代歌謠는 그 대부분이 고사기(古事記, 112 )首 와 일본 서기(日本書紀, 128 )首라는 일본 最古의 역사서 속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총칭하 여 기기가요(記紀歌謡, 이하, 記紀歌謡라 함 라 한다 이 들) . 記紀歌謡는 모두 신화 전・ 설 설화를 포함하는 커다란 의미에서 고사기 일본서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 神이 나 인물들이 노래하는 형태로 전해지고 있으며 당연히 가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

* 단국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강사 동 대학 일본연구소 책임연구원, / koni60@hanmail.net

(2)

아 있지가 않다 이에. 記紀歌謡를 歌謠문학으로서 연구하기 위해서는 고사기 일본서・ 기 안의 이야기 속에서 歌謠를 때 내어 이야기와는 무관한 독립된 장르로서 연구를 하여야 하나 여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다.

차 세계대전 이후의 연구는 주로 이러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 왔으며

2 記紀歌謡

이러한 生態的 연구는 민요의 분석을 통해 歌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 노래불리어, 지는 장소 등을 규명하였으며 歌謠學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학문의 영역과 방법을 확 립하였고 나아가서 古代歌謠에서 萬葉集에 실려 있는 노래 이하( , 萬葉歌라 함 에 이) 르는 노래의 양식 원리와 변화 즉 노래가 집단적이며, 共産的인 問答歌에서 独唱的 인 歌謠로 더 나아가, 抒情詩로 발전 전개되어 간다고 하는 서정시의 성립의 문제까・ 지도 양식적으로 체계화시켰다 게다가 고사기 일본서기에 기록되기 이전의. ・ 歌謠에 관한 규명에 의해 歌謠가 노래불리어지는 「 」場 을 떠나 고사기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짐에 의해 歌謠가 어떻게 변용되었으며 반대로 문자화되어 기록되게 됨으로서 무엇 이 어떻게 가능해 졌는가를 규명했다는 점에서도 몹시 의미 깊은 선행연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는 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한 가 아니라 천황의 장가로

大御葬歌 歌謠 葬歌

「 」

서 처음부터 궁정의 喪葬儀禮에서 불리어진 歌謠였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드는 명칭 이다 이 들 노래가. 死者에 대한 표현으로써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은 필시 萬葉 挽歌의 前史로서의 記紀歌謠의 문제에 까지 연관되는 문제일 것이다. 「大 가 불리어진 으로서 를 상정하고 있는 논자들의 대다수는 결국 초

御葬歌」 場 殯宮儀禮

기 萬葉 挽歌의 효시로서 야마토 다케루 이야기1)의 「大御葬歌」를 파악하여 그 정점 에 두고 殯宮儀禮의 場에서 挽歌가 불리어졌던 전통이 그대로 만엽집 卷二의 挽歌群 에 이어져 가키노모토 히토마로(柿本人麻呂)의 「殯宮挽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 다는 문학사적 계열 매김의 최 정점에 「大御葬歌」를 위치시키려 한다 그러나. 歌謠 로서의 葬歌와 서정시로서의 挽歌는 궁극적으로 그 발생의 場을 달리하고 있으며 그 에 따른 生態와 발상의 방법이 다르다. 初期 萬葉에 있어서의 挽歌의 형성계기가 儀 의 을 매개로 하여 발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에서 로 라는 수직적

禮 場 「葬歌 挽歌 」

문학사의 자리 매김이 과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본 논문은 이러한 일본문학. 사의 수직적 자리매김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기 위하여 종래에 일본 挽歌史의 자리매 김의 최 정점에 위치시키고 있는 「大御葬歌」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大御葬歌」 는 挽歌史의 최 정점에 위치시킬 수 없으며 挽歌와는 이질의 歌謠로서의 「葬歌」라는 결론을 도출하여 일본문학사의 한 축을 이루는 와카의 성립과 발달에 관한 기존의 패러다임의 재고를 촉구하는 바이다.

1) 제12대 게이코천황(景行天皇)의 황태자로 고사기 게이코천황의 이야기는 계보의 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이 야먀토 다케루의 국내 征討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12

- -

(3)

목 차

< >

.

Ⅰ 들어가는 말 . 殯宮儀禮 歌謠

의 실체추정과

. 大御葬歌

「 」

. 大御葬歌 萬葉

挽歌의 이질

맺음말 .

들어가는 말 .

라 함은 집단성원 전부가 참가하는 일정한

古代歌謠 「 」場 2)에서 가사와 음악 이외에

몸동작과 일련의 퍼포먼스 등 舞踏을 동반하여 불리었던 것으로 형태적으로 보면, 문학 이전의 문학으로서의 원시예술에서 비롯되었다 집단의 공통된. 場을 배경으로 그 어떤 집단의 공공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해 불리었던 歌謠는 歌謠가 아니면 현실 시킬 수 없었던, 歌謠에 뭔가 특별한 呪力이 있다고 믿어졌던 시대의 사회적 산물이 었다 이러한. 古代歌謠를 많이 수록하고 있는 것이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

인데 )

書紀 3) 記紀歌謡는 모두 신화 전설 설화를 포함하는 커다란 의미에서 고사기 일․ ․ ・ 본서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神이나 인물들이 노래하는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이야기 구성의 한 因子로서 노래가 실려 있는 셈인데 실제로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이야기와 노래의 관계는 실로 복잡하고 다양하다 일본서기에는 보이지 않는. 「大御 는 이것은 노래이다 라는 의 이름은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노래가 끝난 葬歌」 「 ˜ 」 歌謠

후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노래는 천황의 大御葬에서 부른다」4)라는 地文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歌謠의 場으로써 「大御葬」이 명기되어 있는데 고사기와 일본서기 안에서 歌謠가 불리는 場을 분명하게 명기하고 있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歌謠 「 」이란 歌謠가 노래불리어지는 환경을 의미하는 말로 집단성원의 공통된 정서의 고양, (高揚) 의해 만들어진 歌謠를 한 번 부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존속케 했던 것은 계절적으로 반복해 치러지는儀禮 ,혹은 정기적이지는 않더라도 반복되어 치러지는 동안에 점차 형태를 갖춰 나가는 사 회적 행사의 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歌謠는 어떤 일정한 「 」에서만 歌謠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반면「 」에 의해 제약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歌謠「 」의 관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사기 일본서기 전부 의 노래가 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

2) (古事記) 112 , (日本書紀) 128 , 240 兩書

해지고 있으며 이 들을 통칭하여 記紀歌謡라 부르고 있다 중복되는 노래로 있고 원래 같은 뿌리에서 나. 온 같은 노래를 가사를 약간 바꾸어 싣고 있는 경우도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약 180 余 首의 노래가

의 대상이 된다.

紀歌謡

4) 今 至に るまで,其 歌の は,天皇 大御葬 歌 に ふぞ。

(4)

천황의 자격을 갖고 있지 않은 야마토 다케루의 죽음을 천황의 「大御葬歌」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고사기의 서술은 동서에서 날뛰는 악신과 禮儀를 갖추고 복속하지 않는 자들을 평정해 천황의 통치 영역을 국토 전체에 미치게 한 이에 대한 특별한 대우였 음을 알 수 있다. 「大御葬歌」라는 歌謠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들 4首의 노 래는 단순한 장가가 아니라 천황의 장가로서 처음부터 궁정의 喪葬儀禮에서 불리어 진 歌謠였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드는 명칭이다 야마토 다케루가 죽어 백조가 되어. 하늘로 비상한다는 소위 白鳥傳承은 구마소 征討 東國 征討, 등의 설화와 함께 독자 의 성립배경을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5) 게다가 전체가 한 편의 歌謠 이야기(歌謠物

)

6)의 형태로 되어 있어 고사기 안에서는 가장 문학적 정취가 넘치는 이야기로도 유명한데 고사기의 地文은 야마토 다케루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처음으로 「大御葬歌 가 노래 불리게 되었다고 하여 大御葬歌 의 기원을 야마토 다케루의 죽음에서 출

」 「 」

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사기의 기사를 그대로 믿는다고 한다면. 4首의 「大 가 천황의 에서 실제로 노래 불리었던 방증이 되는데 천황의 에서

御葬歌」 大御葬 葬儀

가 불리어졌다는 확실한 예는 이 야마토 다케루의 경우 이외에는 없고 더군다, 歌謠

나 그 밖의 葬儀의 기사 속에 노래가 불리어졌다는 習俗을 고사기 일본서기 이외에・ 서 찾기란 지극히 곤란하다는 이유로 고대의 喪葬에 있어 葬歌가 불리어 졌다는 전 통은 부정되어지고 있다.7)

종래에 이 4首의 歌謠에 대한 실체 추정이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필. 시 노래 자체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로서의 표현 방식이 충분히 해명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그와 관련돼서 노래가 葬歌

불리어진 場의 추정에 문제를 집약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들 노래가. 死者에 대한 표현으로써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은 필시 萬葉 挽歌의 前史로서의 記

의 문제에 까지 연관되는 문제일 것이다.

紀歌謠

의 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와 연관시켜 파악하려하는 움직임과

歌謠 場 殯宮儀禮 8)

과의 관련을 부정하는 입장

殯宮」 9)으로 크게 이분되어 있다. 「大御葬歌」가 불리어진 으로서 를 상정하고 있는 논자들의 대다수는 결국 의 효시로서

場 殯宮儀禮 萬葉 挽歌

를 의 에서 불리었던 라 상정해 그 정점에 두고,

大御葬歌 殯宮儀禮 場 歌謠 殯宮儀禮

「 」

5) 前川明久, ヤマトタケル白鳥 承 一考察 日本歷史 1965 9, 후에 日本文學硏究資料叢書 古事記 日 , 1975

本書紀 有 精堂

6) 단순히 이야기의 전개 속에 歌謠를 삽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歌謠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긴밀하게 기능하는 산문과 운문에 의해 한 편의 이야기가 구성되고 있는 이야기 모노가타, ( 리).

7) 土橋寬, 古代歌謠 世界 , 塙書房, 1968

8) 西鄕信綱, 古事記硏究伊藤博 挽歌 世界 解釋 鑑賞 437 阿蘇瑞枝 挽歌 歷史 論集上代文學

, ,1970, 2 , , 1976 .

第一冊 笠間書院 古橋信孝 記紀 万葉 シリ ズ 古代 文學 万葉 のことば 藏野書院 9) 神野志隆光 大御葬歌 の と場 成立 殯宮儀 說批判 論集上代文學 第八冊 笠間書院, , 1977.

114

- -

(5)

의 場에서 挽歌가 불리어졌던 전통이 그대로 만엽집 卷二의 挽歌群에 이어져 가키노 모토 히토마로(柿本呂)의 「殯宮挽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는, 문학사의 자리 매김의 최 정점에 「大御葬歌」를 위치시키려 의도하고 있다 그러나. 歌謠로서의 葬歌 와 서정시로서의 挽歌는 궁극적으로 그 발생의 場을 달리하고 있는 것에서 기인하는 생태적 차이와 그에 따른 발상의 방법이 다르다. 初期 萬葉集에 보이는 挽歌의 형성 계기가 儀禮의 場을 매개로 하여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葬歌에서 挽歌로 라는 종래」 의 수직적 문학사의 자리 매김이 과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여기 에서 제기하고 싶다 즉 그것은 일본문학사의 한 축을 이루는 와카의 성립과 발달에. 관한 기존의 패러다임의 재고를 요하는 挽歌史의 계보에 관한 문제이다.

의 과 . 殯宮儀禮 場 歌謠

먼저 문헌에서 볼 수 있는 고대 일본의 殯宮儀禮를 포함한 葬禮의 모습과 그곳에서 과연 歌謠가 불리었을 가능성이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야마토 다케루는 기나긴 여정 끝에 노보노(能煩野)에 이르러 돌아갈 수 없는 야마토 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망향의 노래와 辭世歌라고도 볼 수 있는 노래 5首를 남기고 죽음을 맞는다 야마토 다케루의 사후에 야마토에서 달려온 왕후와 자식들에 의해. 「 가 노래 불리어지게 되는데 노래로써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고사기의 大御葬歌」

독자적인 이야기 구성법이다.

이에 야마토에 계시는 왕후와 세자들께서 모두 내려오시어 능을 만들고 그 땅에 있는 나즈키 논을 포복하며 돌며 통곡하시고 노래해 말씀하시기를,

10)

(是 倭 坐に に しし后等 御子等と と,諸下 到り りて,御陵 作を りて,卽 其地ち のなづき を田 匍匐 廻ひ り て哭き,歌爲 曰て く),

나즈키논의 벼줄기에 벼줄기를 감아 휘도는 도꼬도마의 넝쿨 (記3 4)

(なづきの の田 稻幹に稻幹に 這 廻い ろふ 野老蔓)

이에 큰 백조로 변하시어 하늘로 날아올라 해변 가를 향해 날아가셨다 이리하여 왕후와 세자. 들께서 그 대나무를 자른 날카로운 대롱에 발이 찔리고 찢어지면서도 그 아픔을 잊고 통곡하 며 뒤를 쫓았다 이 때 노래해 말씀하시기를. ,

10) 본 논문의 모든 한국어 역을 필자.

(6)

(是に,八尋 白 鳥 化の ち と り,天 翔に りて,浜 向に ひて び きき飛 行 。爾くして の と其 后 御子らと,其の

, , , , ),

小竹 刈の り に杙 足 足非 破を り れども其 痛の みを れて忘 哭 追き いき。此 時の に歌ひて はく曰

낮은 이대 밭을 나가기 어렵구나 날아가지 말고 걸어서 가거라. (記3 5)

(淺小竹原 腰泥む 空 行は かず 足 行よ くな)

또 그 바다 속으로 들어가 힘겹게 나아가실 때에 노래해 말씀하시기를, ( ,又 其 海塩 入の に りて なづみ きし に, 行 時 ,歌ひて はく曰 ),

바다로 가면 나가기 어렵구나 널은 강 수면의 부초처럼 바다에선 나갈 수가 없구나. (記3 6)

(海處行けば腰泥 大河原 植 草海處む の ゑ はいさよふ)

또 날라 그 갯바위에 계실 때 노래해 말씀하시기를, ( ,又 飛びて の に し に其 磯 居 時 ,歌ひて はく曰 ),

해변의 물떼새는 해변을 가지 않고 바위 가를 따라 가누나 (記3 7)

(浜 千鳥 浜つ よは かず行 磯伝ふ)

이 4首의 노래는 모두 御葬에서 불렀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도 이 노래는 천황의. 大 에서 불렀다 이에 그 땅에서 날아올라 가와치의 시기에 머물렀다 그런 연유로 그. . 御葬

곳에 능을 만들어 안장했다 즉 그 능을 이름 하여. 白鳥御陵이라고 한다 그러나 또 그. 땅에서 하늘로 날아올라 날아갔다.

(是 四の つの は歌 ,皆其 御葬 歌の に ひき。故 今 至, に るまで,其 歌の は,天皇 大御葬 歌の に ふぞ。故 其,

, ,

國 飛 翔 行 河內國 志幾 留 故 其地 御陵 作 鎭 坐 卽 其 の より び り きて の に りき。 に を りて め せき。 ち の

, , )

御陵 名を づけて白鳥御陵 謂と ふ。然れども亦 其地より に に りて び きき更 天 翔 飛 行 。

11)

「大御葬歌」가 노래되었다고 하는 歌謠의 場으로서의 殯宮儀禮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에 앞서 고대 일본의 喪葬儀禮의 모습을 전하는 일본 국내외의 기사를 먼저 살펴보 기로 하겠다 우선. 中國의 사서에 보이는 기사부터 검토해 보자.12)

11) 일본어 본문은山口佳紀 神野志隆光校注 譯 , 古事記 新編日本古典文學全集 小學館1, ,1997에 의한다. 12) 魏志 倭人 後漢書 倭・ 伝 隋書 倭國 의 인용은 石原道博編譯 魏志倭人伝・後漢書倭伝・宋書

116

- -

(7)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으나 곽( )槨은 없고 흙을 덮어 매장한다 사람이 죽으면, . 10 여 일 동 안 喪을치룬다 이 때는 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는 곡을 하며 슬퍼하고 타인들은 음주와 가무. 를 한다 매장이 끝나면 집 안 사람 모두 물로 가 몸을 깨끗하게 씻는다. (其 死の には棺有るも

, , , ,

槨無く土 封を じて を る冢 作 。始 死め するや停哭十余日 時に りて を わず当 肉 食 喪主哭泣し他人

, , )

就いて歌舞飮酒す。已 葬に れば擧家水中 詣に りて澡浴し以って練沐 如の くす。

( 魏志 倭人・ 伝 )

사람이 죽으면 10 여 일 동안 곡을 하며 가인들은 곡을 하며 슬퍼하고 음주를 하지 않는다. 가까운 친인척과 동료들은 가무를 하며 즐긴다 뼈를 태워 점을 치고 길흉을 정한다. .

(其 死の には停喪すること十余日 家人哭泣, し,飮酒 進を めず。而して等類就いて歌舞 樂 爲し を す。

, )

骨 灼を いて って し以 卜 用って吉凶 決を す。

後漢書 倭

( ・ 伝 )

사자를 매장할 때는 棺과 槨을 갖고 하며 가까운 친인척과 동료들은 가무를 하며 처자와 형, , 제는 흰 천으로 옷을 만든다 귀인은. 3년 이상 殯을 하며 서민은 날을 점쳐 매장한다. 葬을 할 때는 시체를 선상에 놓고 육지에서 이를 끄나 경우에 따라서는 조그만 상여를 갖고 한다.

(死者 斂を するに棺槨 以を ってしを ってし以 ,親賓 屍, について歌舞し,妻子兄弟 白布 以は を って服

, ,

製 貴人 三年外 殯 庶人 日 卜 葬 及 屍 船上 置 陸地之 牽 を す。 は に し は を してうずむ。 に んで を に き を

,或 小轝 以 ) くに は を ってす。

隋書 倭國

( ・ 伝 )

이들 중국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 고대의 喪葬 풍속이 그 대로 궁정의 상장 의례를 반영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나중에 살펴보는 궁정의 殯禮와 공통되는 요소가 있고 적어도, 喪葬儀禮가 궁정의 의례로서 통일되고 정비되어지기 이전에는 민간의 喪葬風俗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공통되는 점도 있었다고 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7세기 초에 편찬된 隋書 倭國・ 伝의 기사는 고사 기 일본서기 편찬단계에 있어서의 고대 일본의・ 葬制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지는 기사이다 여기에서 주목되어지는 점은. 葬儀-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주로 殯禮

-에 즈음하여 歌舞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殯에서 행해지는 가무에 관한 성격 에 대해서는 死者에 대한 공포심을 떨어내고 心的 强健을 유지하며 病毒에 대한 저 항력을 증강하기위한 의미로서13) 死靈에 대한 慰撫14), 鎭魂의 의미15), 죽음의 불결

에 의한다 ,1951 . 倭國伝・隋書倭國 岩波文庫

13) 和辻哲郞, 日本古代文化 ,岩波書店, 1951. p.345

(8)

함 공포를 떨어버리는 행위에서 초혼 애석의 단계로 옮겨가는 행위로 보는 등 다・ ・ 양한 해석이 이전부터 시도되고 있으며 또한 해석되어질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의 가무가 행해졌는지에 대한 확실한 예가. 없기 때문에 가능성으로만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으나 殯의 內實을 고려할 때 가무의 주된 기능은 사자의 소생을 바래 혼을 불러일으키는 다마후리(靈振)의 요소 와 진혼의 요소가 강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상기의 기사는 분명. 殯禮에 있 어서 가무가 행해졌다는 사실을 전하는 기록으로서는 귀중하다 하겠으나 그것을 바 로 「大御葬歌」와 그에 동반되는 행위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일본 측의 자료로 눈을 돌려보면 아메노와카비코(天若日子)의 죽음을 전하 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사에서 日本 古來의 원시적 葬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 다.

이에 하늘에 계시는 아메와카비코의 아버지 아마쓰쿠니다마가미와 그 처가 죽음에 대해 듣( ) 고 내려와 울며 슬퍼하고 그곳에 모야(喪屋)를 만들고 강 기러기를 음식의 使者로 삼고 백로 를 청소하는 역으로 삼고 물총새를 死者를 위한 調理人으로 삼고 참새를 떡을 찧는 여자로 삼 고 꿩을 哭女로 삼아 팔일 밤낮으로 놀았다.

( ,故 是に,天 在に る,天若日子 父天津國玉神 其 妻子が と の と,聞きて,降 來り て,哭 悲き しびて,乃 其ち

, , , , ,

處 喪屋 作 手 河雁に を り をきさり ちと持 爲 鷺 掃持 爲 翠鳥 御食人 爲 雀 碓女 爲 雉 哭を と を と を と を

, , , )

女 爲 如此行 定と ひ めて日八日夜八夜以て遊びき。 ( 古事記 上卷)

아메노와카히코의 처 시타테루히메가 울며 슬퍼하는 소리가 천상에까지 닿았다 아마쓰쿠니다. 마 그 울음소리를 듣고 아들인 아메노와카비코가 죽은 것을 알고 바로 하야치를 보내 시체를 천상으로 갖고 오게 해 喪屋를 만들어 殯에 처했다. -중략- 이에 팔일 낮밤으로 啼哭하며 슬 피 울었다.

(天稚彦 妻下照姬 哭泣 悲哀が , き び,聲天 達に る。天國玉 其 哭 聲 聞, の く を き,則 夫 天稚彦已 死ち の に

, , ,

知 乃 疾風 遣 尸 擧 天 致 便 喪屋 造 殯 中略 而 八日 れるを り ち を し を げて に さしめ ち を りて す- - して

, , )

八夜 啼哭き悲 歌び ふ。 (日本書紀 神代

下)

이들 기사 이외에도 인교천황(允恭天皇)의 殯宮 시에 「哭泣或歌舞」, 덴무천황(天武天

의 시에 지토천황 의 시에 와

) , ( )

皇 殯宮 「奏種 歌舞々 」 持統天皇 殯宮 「樂官奏樂」 「歌舞」 을 연주해 바쳐졌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

樂 歌舞 遊ぶ

「 」 「 」 「

14) 橘守部, 稜威言別, 富山房, 1941

15) 本居宣長 古事記 平田篤胤 古史 全集 折口信夫 神道 民族 75全集 등에서.

(9)

는 어찌 보면 에서 노 )

悲 歌び ふ 喪葬

」 「 」 래가 불리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하는 증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노래가 가사를 동반하는 노래였는지 어떤 지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되진 못한다 그러나. 葬儀의 일환으로서의 殯宮儀禮가 확립되기 이전의 葬制 는 「八日八夜」라든지 「十余日」이라 하여 일수는 짧지만 분명히 複數葬制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으며 殯禮에 있어서 歌舞가 행해졌다는 점을 殯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상의 기사를 참고로 하여 알 수 있는 고대 일본의 喪葬儀禮는 사람이 죽으면 일차 적 喪禮인 殯의 기간을 거쳐 이차적 喪禮인 葬으로 이루어지는 소위 複數葬制를 기 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生과 死의 사이에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의 공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仮死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는 것인데 먼저 사람이 죽으면 일정 기간 동안 유해를 안치시키는 특별한 장소를, 만들고 -이것을 殯이라 하고 아메노와카비코의 기사에서 보이듯이 사체를 안치시키 는 곳을 모야(喪屋) 혹은 死者가 천황 황후 황자녀의 경우에는 모가리노미야・ ・ (殯宮) 라고 한다 -완전한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재생을 기원하는 여러 형태의 주술행위를 벌인다.16)마침내 재생이 어렵다고 판명된 후에는 死者를 葬地로 보내고 분묘에 모 시는데 이것이 「 」葬 인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보이는 殯의 古訓은 「모가리」 「아가리 이며」 , 殯宮의 경우는 「 모가리노미야」 「아라키노미야」17)인데 어원은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殯에 서 행해지는 의례는 육체에서 떨어져 나간 영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다마요비(魂呼 과 같은 다마후리의 성격을 갖는 가무와 등으로 아직 죽음으로 인정

) 招魂 哭泣

ひ ・

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蘇生儀禮가 주로 행해졌으리라 생각된다 여러 방법의 소생. 술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완전한 죽음을 확인한 후에는 이번에는 영혼을 慰撫하는 다 마시즈메(魂鎭め), 즉 鎭魂의 의례가 시작된다.

고사기 일본서기가 전하는・ 殯의 기간은 천황에 따라 다르나 비타쓰천황(敏達天皇)의 년 개월을 최장으로 하여 사이메천황 년 개월 덴무천황 년

5 8 (齊明天皇)5 3 , (天武天皇)2

개월 등 상당히 장기에 걸쳐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 가장 짧은 경우라 하더라도

2 ,

고토쿠천황(孝德天皇)의 2개월이다. 隋書 倭國・ 伝에 「貴人은 三年外로 殯에 처한다」 라고 보이는 것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서기 닌토쿠천황. (仁德天皇 卽)

에는, 位前紀

16) 「 」 字意그 자체는 사람이 죽어 매장하기 전까지 사체를 관에 넣어 安置해 놓는 것 이다 . 에서 행해진 의례로서 에 의하면 가 죽으면 이 행해진다.

代 中國 儀禮 卷十二 土葬禮 招魂儀禮

그 후에 入棺의 준비가 이루어지며 正殿西階 근처에 판 이라 불리는 仮埋葬되는데 이것을 이라 한다 그리고 약 개월 후에. 3 本葬이 행해진다.

17) 비타쓰천황(敏達天皇)・ 덴무천황(天武天皇)・고토쿠천황(孝德天皇)・닌토쿠천황(仁德天皇 卽位前紀) 喪葬 에 대한 기사에 모가리( )에 대한 기술이 보인다. 古訓 和名類類聚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

오사카키노미코토(大鷦 尊鷯 )는 太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나니와(難波)에서 달려와 우지노미야( 道宮)에 도착하셨다 벌써. 太子가 죽은 지 3일이 지났다 오사카키노미코토 가슴. 을 치며 통곡하고 머리를 풀고 시체위에 올라 세 번 부르며 말하기를 내 동생아 라고 하셨「 」 다. 그 때 되살아나 스스로 일어나 앉으셨다.

(時 大鷦 尊 太子薨に 鷯 , りましぬと しめして聞 ,驚きて難波より せて馳 , 道宮 到に りたまふ ここに。

, , , ,

太子薨りまして三日を たり経 。時 大鷦 尊に 鷯 みむねうちおらび きたまひて哭 所如知らに乃 髮ち

, ,

解 屍 跨 三呼 曰 我 弟 皇子 乃 時 活 自 起

を き に りて ばひて はく「 が の 」とのたまふ。 ち応 に きたまひ ら き )

居 て します

라는 기사가 보여 殯宮에서의 秘儀와 蘇生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奈良時代의 비교적 새로운 예이기는 하지만 니혼료이키(日本靈異記)18)의 下卷 第九・第二十二・

의 이야기 속에 에 처해 놓은 가 소생하는 이야기가 있고 또,

第二十三緣 殯 死者 中卷 第

의 이야기에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가 이미 육체를 잃어 다른 의 육

二十五緣 衣女 衣女

체로 소생하였다는 이야기와 下卷 三十六話에는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藤 의 혼이 이미 육체가 화장된 터라 를 떠돌았다는 이야기 등이 보인다.

原朝臣永手 中道

이들 이야기들은 불교적 색체가 짙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古代人들의 죽음에 대한 인 식과 더불어 재생이 가능한 시기로써의 殯이 갖는 의미를 엿 볼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嬪의 중요한 의례로서 匍匐禮가 있다 고사기 이자나미가 죽는 장면에. 「머리 쪽에서 포복하고 발 쪽으로 포복하며 곡을 했을 때(乃 御枕方 匍匐ち に ひ,御足方 匍へ 라는 기사가 보인다 일본서기의 에도 머리 쪽에서 포

) .

匐ひて哭きし時に 」 一書 第六 「

복하고 발쪽으로 포복하며 곡을 하셨다(則 頭ち 辺に匍匐ひ,脚辺に匍匐ひて,哭泣 流涕き 라는 고사기의 기사와 거의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어 주위에서

) 死者

したまふ 」 「

하는 것과 을 하는 행위를 확인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슬픔과 탄식의 표현. 匍匐」 「 」哭

처럼 보이지만 「歌舞」와 함께, 「匍匐」 「 」哭 은 死者의 혼을 불러들이는 다마요비(魂 라는 의례의 한 주술적 행위였을 것이다

) .

呼び 19) 또한 모야(喪屋)를 만들어 殯에 처하고 「八日八夜 啼哭, 하고 슬피 노래했다 는 이야기 다음에 조문을 하러 찾아온」 耜 을 보고 죽은 가 소생한 걸로 착각했다는 이야기는 다마요비 의

味高彦根神 天若日子

례에 의한 죽음으로부터의 소생이라는 모티브가 이야기의 기저에 깔려 있다고도 생 각할 수 있을 것이다.

18) 헤이안시대(794 1192)˜ 초기의 불교설화집. 3 . 僧景戒撰. 19) 守屋俊彦, 倭建命 葬送物語 甲南國文 , 1974 3

119

- -

(11)

의 의례는 시대의 추이와 함께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국의 인 시노비

殯 殯 儀禮

고토(「 」誄 , 이하, 誄라 함 등의 도입에 의해 질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문헌에 보이) . 는 「 」誄 의 初出은 비타쓰천황(敏達天皇)의 殯宮 기사에서 볼 수 있는데 궁정의례로 서 정비되기 시작한 시기는 도래인(渡來人)이 대규모로 건너온 유랴쿠천황 (雄略天

때의 일이라 생각된다

) .

20) 그 후 스이코(推古), 조메천황(舒明天皇)의 殯에 관한 기사에 誄에 대한 기사가 보이고 덴무천황(天武天皇)의 殯에서는 誄를 바치는 대상 과 내용에 관한 기술도 보이기 시작한다. 誄의 도입에 의해 殯宮의례의 분화와 질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주로 南庭에서는 誄 등과 같이 주로 남성에 의 한 公的인 성격이 강한 의례와 殯宮 시설 내부에서 행해지는 私的 성격이 강한 의례 로 분화라 할 수 있다.21)

이상으로 고사기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한 문헌을 통해 고대의・ 喪葬 儀禮에 대해 살 펴본 결과 분명 殯宮儀禮의 場에서 歌舞가 여러 의미를 갖고 奏上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무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기사는 그 어디에서도 찾. 아볼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가사를 동반한 것이었는지 어떤. 지도 현재로써는 알 수가 없지만 하겠으나 葬歌를 부르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은 틀 림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葬儀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로든 노래가 불리었다 는 확실한 예는 전술한 바와 같이 야마토 다케루가 죽었을 때 불렀다고 하는 4首의 노래 「大御葬歌」가 남아있을 뿐이다.

의 을 에서 행해지는 로써 파악하고 와의 관

大御葬歌 奏上 殯宮 呪術 儀禮 殯宮 儀禮

「 」

련 위에서 논을 전개해 결론적으로 萬葉 挽歌는 그러한 呪的 儀禮의 場에서 불었던 에 을 갖고 있다고 파악해 의 로서 를 위치시키려

歌謠 深淵 萬葉 挽歌 前史 「大御葬歌」

할 때 이상의 문헌자료를 통해 보여 지는, 喪葬 儀禮와 歌舞와의 관계를 검토해 봤 을 때 「大御葬歌」의 奏上을 殯의 儀禮와 결부시켜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그러한 결론은. 歌謠의 내실에 대한 검토를 통해 도출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래의 전후 지문의 해석에 집착해 나온 결론은 아닐까 지문을 존중. 하는 입장을 취한다면 오히려 고사기가 전하는 바와 같이 천황의 葬 - 殯宮 儀禮와 는 구별되고 가능성으로써 葬儀 葬送・ 의 儀禮를 포함하는 -을 배경으로 해 불린 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22) 최장 5년 8개월에 이르는 비타쓰

천황을 비롯해 사이메천황의 5년 3개월 덴무천황의, 2년 2개월 등 오랜 기간 행해 지는 殯宮 儀禮 동안에 殯의 내실과 그다지 관련성이 적은 「大御葬歌」가 되풀이되어

20) 和田萃 殯 基本的考察 論集 終末期古墳 塙書房, , 1973 후에 日本古代 儀 祭祀 信仰上 , 塙書房, 1995

21) 身崎壽, 宮廷挽歌 硏究 ,塙書房, 1994 22) 神野志隆光 前揭論文,

(12)

져 불리었다고 보기보다는 일회적 성격의 葬儀・葬送儀禮의 場을 염두에 두고 「大御 의 내실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가 노래 불리어진 의 문제에 대해

葬歌」 「大御葬歌」 場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의 실체 추정과

. 大御葬歌 場

의 실체에 대해 고찰을 하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들 4

大御葬歌 首

「 」

의 노래가 처음부터 葬歌로서 만들어 졌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노래의 내실에 대. 한 검토를 통해 명확해 질 것이다.

나즈키논의 벼줄기에 벼줄기를 감아 휘도는 도꼬도마의 넝쿨 (記3 4)

(なづきの の田 稻幹 稻幹 這 廻に に い ろふ野老蔓)

낮은 이대 밭을 나가기 어렵구나 날아가지 말고 걸어서 가거라. (記3 5)

(淺小竹原腰泥 空 行む は かず よ くな足 行 )

바다로 가면 나가기 어렵구나 널은 강 수면의 부초처럼 바다에선 나갈 수가 없구나. (記3 6)

(海處行けば腰泥 大河原 植 草海處む の ゑ はいさよふ)

해변의 물떼새는 해변을 가지 않고 바위 가를 따라 가누나 (記3 7)

(浜 千鳥浜つ よは かず行 磯伝ふ)

이 4首의 노래가 처음부터 葬歌로서 불리었던 것이 아리라는 것은 4首의 노래가 地 을 생략하고 노래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전체적으로 일관된 구성을 갖고 있지 않 文

다는 점 또한, 儀禮歌에 공통된 집단성이나 주술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으 로 보아 거의 분명하다 일관된 구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 들. 4首의 노래가 각각 독자적인 場을 배경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며 그 場에서 기능하는 독자적 성격 의 노래가 야마토 다케루 이야기 속에 흡수되어 동일한 테마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4首의 노래와 地文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략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별개의. 獨立歌謠23)

쓰치하시 유타가 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수록되어 있는 를 전체적으로 볼 때 전부가 이야

24) (土橋寬) 歌謠

기 속에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광의의 모노가타리우타(物語謠)라 정의하고 노래 하나하나를 면밀히 분, 121

- -

(13)

로서 재구성하여 궁정에서 관리하던 것을 나중에 야마토 다케루 이야기 속에 끼 葬歌

워 넣었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해 있던 歌謠가 야마토 다케루의 이야기 속 에 삽입됨으로서 葬歌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게 되었고 그 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천, 황의 葬歌로서 불리었다는 자격을 획득했다고 하는 것이다 양 쪽 모두 가능성이 있. 는 상정이다 이러한 상정이 가능할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서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먼저 성립의 場과 배경을 달리하는 4首의 노래가 일련의 葬歌로서 한데 묶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어떠한 표현상 혹은 내용상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일련의, 組歌가 되어 고사기라는 작품 속에서 새로운 위상을 획득했다는 것 인데 「大御葬歌」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개 獨立歌謠가 천황의 「大御 로 비약할 수 있었던 계기와 과정을 규명하는 작업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葬歌」

다 우선 이들. 歌謠에 대한 종래의 諸說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번 노래는 황후와 황 자녀들이 이세 의 노보노 에 능을 만들고 나

34 ( ) ( )

記 伊勢 能煩野

즈키의 논을 포복하며 돌고 곡을 하면서(「なづき田 匍匐 廻に ひ りて,哭きて」) 불렀다 는 지문을 갖고 있으며, 地文의 「포복하고 돌며」 「( 匍匐 廻ひ りて」)라는 부분을 殯宮 의 라는 의례적 행위와 결부시켜 이 노래의 을 으로 하는 것이

儀禮 匍匐禮 場 殯宮 比定

종래의 지배적인 견해이었다. 「御陵」을 「殯宮」이라 해석하고 황후 황 자녀의 행위・ 는 殯宮에서의 匍匐과 涕泣의 의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24), 御陵「 」을 이라 하고 있는 것은 상당한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 은 고

殯宮 比定 陵 殯

「 」 「 」 「 」

사기 안에서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서 구별되고 있기 때문이다.

번 노래는 황후와 황 자녀들이 백조로 변해 비상하는 야마토 다케루 35 36 37

記 ・ ・

를 쫓으면서 부르는 노래다. 記 36번 노래의 「대나무를 자른 날카로운 대롱에 발이 찔리고 찢어지면서도 그 아픔을 잊고 통곡하며 쫓았다 그 때. 」(小竹の り刈 杙に,足を 부른 노래이다 이 번

, , ) . 35

足非 破り れども其の みを れて痛 忘 哭き いき追 。此の に時 記 노래의 지문 「발이 찔리고 찢어지면서도 라는 표현을」 大化 2年의 「薄葬令」 속의 「 사람이 죽으면 머리를 자르고 허벅지를 찌르며 誄를 한다 이와 같은. 舊俗을 일절 금한다」 「( 爲亡人 斷髮刺股 而誄 如此 俗 一皆悉斷, , . 旧 , . )」라는 부분을 인용해 4首 전체를

의례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논자가 많다.

25)이것은 노래 불리었던 場을 殯으로 한 정시켜 「大御葬歌」에 다마후리(靈振) 혹은 다마요비(魂呼)의 성격을 부여하는 입장인 데 이들의 주장은 노래의 표현에 대한 고찰에서 얻어진 결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地

석하여 원래 민간에서 불리었던 민요나 궁정에서 관리되어 오던 노래를 이야기 속에 삽입한 것을 독립 이야기의 서술에 맞춰 술작자의 손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를 협의의 모노가타리 ( ),

歌謠 獨立歌謠

우타(物語歌)라 분류하였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거의 문학사의 용어로 정착했다, . 24) 西鄕信綱, ヤマトタケルの物語 古事記硏究 , 未來社, 1973

25) 伊藤博, 挽歌 世界 國文學 , 45 7, 守屋俊彦, 倭建命 葬送物語 甲南國文 , 49 3・ 「倭建命御

후에 에서는 에 의한 다마요비

, 61 8, ( ) .

葬歌とその辺」神道學 古事記硏究 哭女 魂呼 呪歌

(14)

의 로부터 받은 인상에 서 내린 해석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수긍하기 어려운 文 語句

점이 있다 가사 그 자체의 표현을 보면. 記 35 37˜ 番 노래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 다(「腰なづむ」)라는 말에 대표되듯이 보행에 곤란을 겪으면서 쫓아간다는 내용을 노 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사이고 노부쓰나. (西鄕信綱)는 「매장하는 장소에 서의 儀禮的 행위」 「새로 변한 혼을 涕泣하면서 뒤쫓는 擬態」라 하여 記 34番 노래 와 그 외의 3首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듯이26), 殯宮에서 행해지 는 呪的 요소라고는 인정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殯宮儀禮說을 비판하고 이 4首의 노래는 천황의 御葬에서 불리었다는 고사기의 場의 지적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오히 려 殯에서가 아니라 葬送의 場에서 불리어진 葬送의 노래라 봐야 한다는 고노시 다 카미쓰(神野志隆光)의 주장은27), 고사기의 地文과 4首의 노래에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는 보행의 어려움을 이 노래들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로 보고 내린 타당한 견해 라 하겠다.

종래에 「大御葬歌」의 실체추정 즉, 葬歌로서의 성립과 그 原義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관된 접근방식이 있었다 그것은. 「民謠轉用論」이라고 하는 말로 대표되는 접근방 식인데 葬儀와는 관계가 없는 場에서 불리던 민요가 야마토 다케루 이야기에 전용되 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大御葬歌」로서 노래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 태도 소위, 非葬 이 그것이다 이. 4 의 노래는, 1 모두가 내용적으로 소박하다는 점, 2 4 가

歌說 首 ) ) 首

모두 音數律이 고르지 않은 短詩形인 점, 3 4) 首는 일련의 場을 배경으로 해서 성립 되어 있는 점, 4)그 詞章에는 명료하게 주관을 나타내는 표현이 없고 일련의 동작 표현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獨立歌謠의 성격이 강한 노래라 할 수가 있다. 歌謠의 실체추정에 관한 종래의 연구는 고대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아이들의 노래라 보는 童謠說28)을 필두로 記34 35・ 番 노래가 우타가키(歌垣)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의 민 요, 記 36番 노래가 記 35番 노래를 전거로 해서 만들어진 모노가타리우타(物語

)

29), 記 37番 노래는 정체불명의 노래로 說30), 農業祭에 관계되는 呪歌說31), 민중 의 노동의 고생을 노래한 勞働歌說32), 사랑의 행로로 본 民謠說33) 등 「民謠轉用論」 에 입각하여 다각도의 접근이 이루어져 왔다 이렇게 다양한. 學說이 가능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노래 그 자체에 몇 가지의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

26) 西鄕信綱 前揭書, 27) 神野志隆光 前揭論文,

28) 高木市之助, 古代歌謠 於に ける童謠 痕跡 吉野 鮎 , 岩波書店 昭, 13 29) 주(24) 참조.

30) 土橋寬, 古代民謠 解釋 方法 立命館文學 , 26 2 倭建命葬歌 原歌 說林 , 26 5 후에

, , 1968 , , 1972 .

代歌謠 世界 塙書房 古代歌謠前注釋古事記編 角川書店 31) 吉井巖, 倭建物語 呪歌 國語國文 , 33 10

32) 神堀忍, 歌謠 轉用 關西大學 國文學 ,34 7

33) 吾鄕寅之進, 倭建命葬歌 原意 一 ( ) ( ) 國學院雜誌, 41,2 3 123

- -

(15)

인데 무엇 보다고 葬歌로서의 표현이 충분히 해명되고 있지 않은 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쓰치하시 유타카. (土橋寬)의 記34 35・ 番 노래가 사랑을 노래한 민 요, 記 36番 노래가 記 35 番 노래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物語歌 記, 37番 노 래가 정체불명의 노래로 보는 說이 類型의 어구와 類歌의 검토를 통해 실체를 추정 하고 있는 점에서 가장 유력한 견해라 받아들여지고 있다 쓰치하시는. 記34 番 노래 를 사랑의 민요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蔓性植物이 다른 식물을 휘감아 도는 모양 을 나타내는 「蔓 廻ひ ろふ」라는 어구를 相聞的34)인 「사랑의 자태 로」 「蔓延纏絡의 의 미 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식물이 휘감아 타고 오르는 모습은」 . 土橋의 지적처럼 의 자태에 대한 비유로써 에서 의 민요에 이르기까지 널리 존재

男女相聞 萬葉集 近世

하고 있고 쓰치하시가 예로 들고 있는 노래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35)

길가 가시나무 끝에 엉겨 있는 콩 넝쿨처럼 달라붙는 이와 이별해 가야하나

4352 萬葉集 ・ ) (道の の辺 茨 末の に 延 豆ほ の からまる を はかれか かむ君 行 )

고즈케의 아소산의 덩굴 풀은 들판이 넓기에 퍼져 있는 것인데 어찌 끊기겠는가 ( ・同 343 4)

(上野 安蘇山つづら 野 廣を み 延ひにしものを あぜか えせむ絶 )

배와 대추 기장에 조처럼 이어져 엉클어진 넝쿨 언젠가는 만나겠지 아욱 꽃 피네, ( ・同 383 4)

(梨棗きみにあは ぎ継 延 葛ふ の 後 逢も はむと あふひ花咲く)

기약이 있어 나뒹굴고 있는가 넝굴 풀과 나뭇가지가 우리와도 같구나 (永久百首 ・俊賴) (契りありて ひかかるとも ゆるかな や の這 見 葛 梢 妹背なるらむ)

자색에 이끌려 등나무를 휘감는 소나무도 정답구나 ( 金葉和歌集 「 」春 82・顯輔) (むらさきのいろのゆかりに の かかれる もむつまじきかな藤 花 松 )

그러나 이들 노래와 記 34番 노래를 비교해 보면 노래의 본질에 관계되는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우선 노래의 표현이라는 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 공감되어 존재할 수 있는 보편적 발상의 표현이 있는가 하면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

34) 字意는 남녀가 서로 소식을 교통(交通)한다는 의미이나 와카(和歌)에서는 男女相悅의 뜻 정도로 해석 할 수 있을 것이다.

35) 萬葉集 引用佐竹昭廣 木下正俊 小島憲之共著 , 萬葉集譯文 塙書房 昭, 47에 의한다.

(16)

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시대에 따른 어구의 변화를 무시하고 일률적인 해석을 내리 고 있는 점에는 찬성하기가 어렵다 비교의 대상으로써 삼을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의 표현과의 대비가 될 텐데 을 통해 보여 지는 노래의 표현의 주안은

萬葉集 萬葉集

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이 비유가 되어 정서를 전하는 구조로 되

實景表現 相聞的

어 있어 전반부의, 叙景 부분은 후반부의 주관을 유도하는 序詞的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叙景에서 主觀으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로지 叙景의 서술에만 머물고 있는 記 34番 노래와는 노래의 구조와 발상 을 달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당연히 노래의 주제도 다르므로 叙景의 부분만 으로 相聞의 노래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면 이. 記 34番 노래의 실 체는 단순한 叙景歌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자연을 呪的 대상이 아니라 個的 대상물로써 보는 시각을 갖게 된 후에 비로소 발생했다는 純粹 景歌叙 는

의 단계에서는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34 노래를

記紀歌謠 記 番 叙景歌

로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처럼 생각해 보면. 記 34番 노래는 어떤 일종의 譬喩 을 갖고 있으며 에 숨어 있는 그 이야말로 일련의 의

性 叙景 描寫 比喩性 「大御葬歌」

실체를 파악하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거친 바람이 부는 이세의 바닷가 큰 바위를 기어 다니는 납작 고둥처럼 기어 돌아가 쳐부수어 버리자

(神風の 伊勢 海の の 大石に 這 廻ひ ろふ 細螺の い ひ り這 廻 擊ちてし 止まむ) ( 13記 )

거친 바람이 부는 이세의 바닷가 큰 바위를 기어 다니는 납작 고둥 납작 고둥처럼 내 자식들 아 내 자식들아 기어 돌아가 쳐부수어 버리자

(神風の伊勢 海の の 大石にや い ひ る這 廻 細螺の 細螺の 吾子よ 吾子よ 細螺の い ひ り這 廻 擊 )

止 擊 止

ちてし まむ ちてし まむ (紀8)

아기처럼 뒹굴며 아침에도 저녁에도 소리 내어 웁니다 당신이 안 계셔. ( 萬葉集 卷三,458) (みどり の子 這いたもとほり 朝夕に音のみそ が く我 泣 君なしにして)

입에 담기에도 황공스럽고 하루 종일 사슴도 아닌데 납작 엎드려˜ ˜ 중략 ˜ 메추리처럼 납 작 엎드려 시중을 들지만˜ ( 、同 卷二 長歌、 199・柿本人麻 呂)

(かけまくも ゆゆしきかも˜中略˜あかねさす 日のことごと 鹿じもの い ひ しつつ這 伏 ˜中 )

略 鶉˜ なす い ひもとほり へど  這 侍 ˜

(17)

라는 표현은 사랑의 의 비유뿐만이 아니라 전장에서 숨죽여 우

蔓 廻ひ ろふ 姿態

「 」 「 」 「

회하는 모습 을 나타내기도 하며」 ( 13,記 紀8), 「갓난아기가 불규칙하게 기어가는 동 작」( 萬葉集 卷三・458), 「殯宮에서 悲哀의 상태를 나타내는 뜻」( 萬葉集 卷二・

등 다른 의미로도 쓰이는 말로써 아고

199) 도라노스케(吾鄕寅之進)의 지적처럼36) 는 匍匐徘徊 의 뜻으로 蔓延纏絡 의 의미가 아니다 라고까지는 はひもとほる

「「 」 「 」 「 」 」

말할 수 없더라도 「はいもとほる」의 多義性에 주목해 볼 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고사기의 지문. 「匍匐 廻ひ り」는 殯宮儀禮의 場 에서의 「匍匐」이라기보다는 難澁함 앞으로 나아가기의 어려움 등을 표현하는 의미, 로의 「匍匐 廻ひ り」라 생각해야 한다 또한. 天武記 十一年 九月條에는,

지금 이후로 跪禮 匍匐禮・ 등을 그만두고 難波 朝庭의立禮를 시행토록 하라 (今より以後 跪, 礼・匍匐礼,並 止に めて,更 難波朝庭 立に の 礼をもちゐよ)

라고 해서 跪禮 匍匐禮・ 를 금하는 詔가 보인다. 匍匐禮의 구체적인 내용은 推古紀 十 에 보이는 무릇 궁문을 출입할 시에는 양 손을 땅에 대고 양 발은 무릎 二年 九月條 「

을 꿇고 문턱을 넘으면 서서 가도록 하라 (」 「凡 宮門 出そ を で らむときは入 ,兩手 以を ち 라고 를 고치는

, , )

地 押 兩脚 跪 木困 越 立 行 朝禮 詔

て を し をもちて きて を ゆれば ちて け」

에 보이는데 「양 손을 땅에 대고 양 발은 무릎을 꿇고 (」 「兩手 以を ちて地 押を し,兩脚 라는 것이 바닥을 기는 뜻이 아니며 문턱을 넘으면 서서 가도록 하

) ,

跪 をもちて く」

라」 「( 木困 越を ゆれば ちて け立 行 」) 라 이어지고 있는 다음의 내용을 보더라도 정중히 를 갖추는 모습의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지 지면을, 禮

기거나 하는 자세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래의 경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라고 하는 유사

35 36 ( )

記 ・ 番 「場所+腰なづむ 」

한 구성과 표현이 「普遍的 戀歌의 패턴 이라 하여」 記35 番 노래가 原歌이며 그것을 바 탕으로 하여 記36番 노래가 모노가타리우타(物語歌)로 창작되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며

는 사랑의 의 고통을 노래하는 민요라 생각되어 지고 있다.

原歌 行路 37)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예로써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들 수가 있다.

바로 오지 않고 여기서부터 온다는 고세도를 지나 징검다리를 건너 고생하며 왔습니다 그리. 워 못 견디겠어서

(直 來に ず此 巨勢道ゆ から石橋踏み なづみぞわが し來 戀ひてすべなみ)

13 3257 萬葉集 卷

( ・ )

36) 吾鄕寅之進, 倭建命葬歌 原意 一 ( ) ( ) 國學院雜誌, 4,2 3 37) 土橋寬 前揭書,

(18)

우치히사스 미야케의 들을 맨발로 걸어 다리를 다쳐도 여름풀에 막혀 제대로 걷지도 못해도

( )

어떤 여자이기에 그리도 열심히 다니시는가 나의 님아~) ( , 13同 卷 ・ 3295)

(うち さつ日 三宅 原の ゆ ひた に土 足踏 貫み き 夏草を 腰になづみ いかなるや 人 兒故の そ 通は )

我子 すも ˜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여자이기에 미야케 길을 여름 들풀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오누나 (父母に 知らせぬ兒故 三宅道の 夏野 草の を なづみ るかも來 ) ( , 13同 卷 ・ 3296)

그러나 나즈무(「なづむ」) 란 말이 언제나 사랑의 행로의 고통을 노래하는 데에만 쓰 이는 표현이라 한정시킬 수는 없다.

이 세상 사람이라 생각했던 때에 바위를 헤치며 무리해 찾아 왔더니~ ( 萬葉集 卷2 210・ ) (うつせみと 思ひし に時 ˜中略˜岩根さくみて なずみ來 し˜)

내리는 눈이 허리까지 차 올라와도 왔다 그 보람이 있구나 새해 초에. . . (同19 423・ 0)

(降 雪る を腰になづみて 參 出來ゐ し驗もあるか 年 初の めに)

또한 35番 노래의 「날아가지 말고 걸어서 가거라」 「( 空は かず よ行 足 行くな」)라는 표 현에 대해서는,

시모즈케의 아소의 강가를 땅도 안 밟고 날아서 왔소 당신 마음을 들려주오. (同14、・342 5)

(下野の安蘇 河原の よ石踏まず 空ゆと ぬよ來 汝 心告が れ)

하늘도 날다 다니는 내가 너 때문에 하늘 강 길을 고생하며 왔다 (同10 200・ 1)

(大空ゆ通 我ふ すら 汝 故が に 天 川道の を なずみてぞ し來 )

등의 노래를 예로 상대방이 있는 곳으로 날아서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다는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해 사랑의 민요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萬葉集에서는 사랑의 通路로써 河路를 지나고 또 강을 건넌다는 예는 있어도 海水를 간다는 표현

126

- -

(19)

의 노래는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記 36番 노래를 記 35番 노래와 같은 場에서 불 리어진 35번 노래에 가사만 바꿔 부른 노래라 하고 있다. 萬葉集 卷2 210,・ 同 卷

의 라는 표현은 분명 의 어려움을 표현

19 4230・ 「なづみ し來 」 「腰になづみて」 步行

하고 있기는 하나 그것을 직접 사랑의 행로와 결부시키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나즈. 무(「なづむ」) 라는 동사의 원래의 뜻은 步行하기 어려운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고 그 러한 의미에 있어서 사랑 노래에 자주 쓰이는 것이지 언제나 「なづむ =」 「사랑의 행 로 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바로 사랑의 민요라 해석할 근거는 없다」 . . 그 외에 記 36番 노래가 仁德紀 歌謠 「나니와 사람아 방울선의 망을 끌어라 허리까. 지 물에 들어가 그 배를 끌어라 천황의 배를 끌어라. .(難波人鈴船取らせ腰煩みその船 의 표현과 일치하는 것에서 의 노동가요라 파악 51)

取らせ大御船取れ(紀 」 曳船 曳船

해 記 35番 노래는 記 36番 노래를 바탕으로 해 바다가 아닌 육지로 場을 옮겨 구 성상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物語歌로 보는 說38), 영혼의 화신인 새를 고생하며 쫓 아가는 劇的인 동작에 對応하는 노래로 보는 說39), 農業祭에 관련이 있는 呪歌說40), 노동에 동반되는 육체의 고통을 표현하는 노래로 보는 說41) 등 많은 해석이 이루어 지고 있다 이러한 해석 모두가. 「나즈무」 「( なづむ) )」 라는 어구에 착목하여 논을 전 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나즈무」 「( なづむ」)라 는 말이 여러 장면에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소위 언어의「 多義性」에 의한 해석의 확산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표현의 세부까지 면밀한 검. 토를 하여 무엇이 가장 적합한가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데 諸論에 공통하고 있는 것 은 「나즈무」 「( なずむ」) 라는 표현이 歌謠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것 으로 이 점이 「大御葬歌」의 場을 殯宮儀禮가 아닌 葬送儀禮를 포함한 葬儀의 場이라 상정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천황의 「大御葬歌」에 어울리는 자 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마지막의 37番 노래는 수수께기 노래로 불리어진 우타가키(歌垣)의 민요라 보 는 說,42) 해변의 漁民勞働歌說,43) 曳船歌說44) 등의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해변의 물떼새(「浜 千鳥つ 」) 인데도 해변을 가지 않고 해변 가의 바위를 간다고 하는 반전수법에 의한 수수께기 노래라 추정하고 있는데45) 이러한 반전수법은,

38) 山路平次郞, 記紀歌謠評釋 , 東京堂出版, 1973 39) 西鄕信綱, 記事記硏究 ,未來社, 1973

40) 吉井巖, 倭建命物語 呪歌 國語國文 ,33 10 41) 神堀忍, 歌謠 轉用 關西大 國文學 , 34 7   42) 土橋寬 前揭書,

43) 山路平次郞 前揭書, 44) 神堀忍 前揭書, 45) 土橋寬 前揭書,

(20)

먼 곳의 들판에 있는 꿩은 소리를 내지만 소리 내지 않고 나는 잤는데 사람들이 소리를 내는( ) 구나(遠方 淺野 雉響の の さず は しかど そ す我 寢 人 響 ) ( 11紀 0)

라는 노래를 보아 알 수 있듯이 民謠에 자주 보이는 수법이다. 37番 노래를 가사 대 로 해석하자면 바윗돌 위를 步行하는 어려움에 촉발된 怨望의 의미로 파악할 수 있 고, 記35 36・ 番 노래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어려움 보행의 곤란함을, 노래하고 있는 가사로 이해할 수가 있다.

이상으로 獨立歌謠로서의 4首의 노래가 葬歌로서 궁정의 葬儀에 도입되고 또한 葬 로서 성립할 수 있었던 어떠한 표현상의 특질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검토를 해 봤 歌

다. 記34 37˜ 番 노래 4首의 歌謠를 보고 알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 歌謠가 노래되 었던 場이 어디였는지 간에 4首의 노랫말 전체에서 보여 지는 공통된 주제는 앞으 로 나아가기의 어려움, 步行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실을 갖는 歌謠가 노래불리우기에 가장 적당한 場은 殯宮 儀禮의 場이 아니라 葬 의 이어야 하며 그 가운데에서도, 로 향하는 도중에 불리기에 딱 맞는

送 儀禮 場 葬地

의 내실

歌謠 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와 의 이질성

. 大御葬歌 萬葉 挽歌

원래 記紀歌謠 중에 歌謠名과 함께 전해지고 있는 歌謠는 궁정의 여러 의례를 배경 으로 해 의례의 場 내부에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 점은. 「大御葬歌」의 경우도 마찬가 지여서 개인의 감정과 서정이 불리어질 여지는 없다. 文選의 挽歌詩에 名義를 구할 수 있는 萬葉의 挽歌는 「관을 끌 때 에 불렀다는」 原義보다는 인간의 죽음에 관계된 노래의 총칭이라는 의미에서 哀傷歌에 가깝다. 萬葉集 卷二・145番 挽歌의 左注에 오른 쪽의 노래들은 관을 끌 때 짓는 노래들은 아니지만 노래의 의미를 准擬하여

로 분류해 싣는다( , ,

挽歌 右の の件 歌どもは柩を く挽 時 作に る にあらずといへども所 歌の 라는 해설이 보여 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

意 准擬を す。故以 挽歌 類 載に の に す。 」 挽歌

알 수 있다. 萬葉集의 노래 분류의 하나로서의 挽歌는 選者의 의지에 의한 분류이지 본래의 의미에 입각한 분류는 아니다 만엽집의. 는 게츄( )의

挽歌 挽歌 契沖 萬葉代匠

의 에 이 집에 분류를 종으로 나눌 수 있다 셋째로는 이

( ) 6 . ,

記 初稿本 「總釋」 「 ˜ 挽歌

것은 훗날의 哀傷이다. ˜ 중략 ˜ 中國에서와 같이 哀傷의 노래를 挽歌라 한다.(此 ,

集に部類を分つに六種あり。˜中略˜三には挽歌これは後の哀傷なり。˜中略˜か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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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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