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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 대규모 면방직 공장의 고급기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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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 전후 대규모 면방직 공장의 고급기술자

徐 文 錫

*1 )

국문초록

< >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의 경제적 유산이 해방 이후에 어떻게 변천되는가를 해방 전후 대 규모 면방직공장에서 근무하던 고급기술자들을 통해 확인해 본 것이다.

연구결과 1938년에는 16명의 고급기술자가, 1954년에는 24명의 고급기술자가 연구대상 공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섬유관련분야 고급기술자. 4명만이 해방 전후의 두 시기에 대규모 면방직공장에 근무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업계 전체적으로 100여명이 넘는 고급기술자와 개별 공장 내에서의 중요성 그리고, 대규모 공장이 가지는 면방직산업에서의 절대적인 비중에도 불구하고 명이라는 인원은 이4 들의 해방 전후 연관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한다 이것은 일반. 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인적유산이 해방 이후까지 강하게 남아있었다는 일반론은 사실과 다 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목차

< >

서론 .

고급기술자의 정의와 존재형 .

Ⅱ 태

고급기술자의 정의 1.

고급기술자의 존재형태 2.

고급기술자들의 해방 전후 활동 .

일제강점기 대규모 면방직 공장 고급기술자들의 해방 이 1.

후 활동

해방 이후 대규모 면방직 공장 고급기술자들의 일제강점 2.

기 활동 결론 .

서론 .

해방 이후 한국은 세계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킬 정도의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 러나 이런 경제적 성장을 일본제국주의의 유산으로 평가하는 내외부의 시각이 점차 확산 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시각은 경제성장과정에서 엄청난 노력과 댓가를 지불했던 한. 국인들의 모습을 감추고 마치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의 고도성장기가 직접 도출된 것처 단국대학교 연구교수

* / seoms85@hanmail.net

논문을 보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익명의 세 분 심사자께 감사드립니다.

65

- 66 -

- -

(2)

럼 서술하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과연 일제강점기의 유산이 실. 질적으로 어떤 것이며 그것이 해방 이후에는 어떻게 변천되었는가를 가장 대표적인 경제 적 유산인 대규모 면방직 공장1)들을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한다.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 경제적 유산에 대한 연구는 일본인 소유 공장들의 소유권 문제, 한국정부로 귀속되는 과정에서의 탈루나 유실문제 주요 설비의 변화문제 개별기업의, , 운영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졌다.2)

하지만 이런 연구들은 주로 물적 측면이나 제도적 측면에 한정되었고 인적 측면은 검토 되지 못하였다.3)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측면 에서 인적 측면의 연구는 미흡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적 자산과 제도. 를 운영하는 주체는 바로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의 문제는 급변하던 당시의 환경 속에서. 개별기업의 변화를 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연구대상이 되는 인적 자산은 고급기술자 로 한정한다 여기에서 고급기술자 란 전문대‘ ’ . ‘ ’ 학 이상의 고등공업교육을 받고 졸업한 이후에는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서 최고 수준의, 기술자로 활동하여 그 實名이 거론되는 최상위 수준의 기술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당. 시에 섬유관련전공이 제국대학에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주의 형성기의 대표적인 산업분야인 면방직분야의 첨단 이론을 접한 것이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자본주의 기계제 대공장의 전형적인 형태인 일관생산체계가 가동되 는 현장에서 실무경험을 축적하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시기의 여러 가지.

1) 여기에서 특히 면방직업이 선택된 이유는 첫째 일제강점기에 일관생산체계를 갖춘 기계제 대공장이 먼저 설, 립된 분야가 면방직업이었다는 점이다 영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성립을 주도했던 산업이 면. 방직업이었다 둘째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된 대규모의 경공업분야 중에서 면방직공업이 가장. , 대표적인 분야였다 셋째 해방 이후 남한에 남겨진 귀속재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력이 컸던 분야가. , 면방직공업이었다 넷째. , 1950년대를 대표하는 귀속재산과 원조기업이라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대표 적인 분야가 면방직공업이었다.

2) 해방 이후 일본인 소유 공장들에 대해서는 김기원, 「美軍政期 歸屬財産에 관한硏究 企業體: 의 處理를 중심으 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1989 ; 공제욱, 1950년대 한국의 자본가 연구 , 백산서당, 1993 ; 김대래배석만․ , 「귀속사업체의 연속과 단절」, 경제사학 33 ,집 경제사학회, 2002 ;서문석,「귀속 면방직공장 의 설립과 변화유형에 관한 연구」, 경영사학 16 ,집 한국경영사학회, 1997 ; ______, 「해방이후 귀속재산의 변동에 관한 연구」, 경영사학 17 ,집 한국경영사학회, 1998 .; ______, 「귀속재산의 소멸에 관한 연구」, 경 영사학 20 ,집 한국경영사학회, 1999. 裵錫滿, 1950「 년대 大韓造船公社의 자본축적 시도와 실패원인 : 자본 축적과정에서歸屬企業體의 역할 분석」,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3 ; 박순원,「해방 후 삼척시멘 트공장의 재건과정」, 경제사학 17 ,집 경제사학회, 1993등이 있다.

해방 이후 귀속기업체가 되었던 대규모 면방직공장들의 식민지시기 상황에 대해서는 김경남, 1920 30「 ․ 년대 면방직공업의 일관생산체계의 완성과 노동조건의 변화」, 부산사학 25 26,‧ 합본호, 1993 ; 鄭安基, 「戰間期 의 사업경영과 금융구조, 30 , 2001 ; ______,호 의 과 의 전

朝鮮紡織 」 經濟史學 「朝鮮紡織 戰時經營 資本蓄積

개」, 경제사학 32 ,호 경제사학회, 2002 ; 주익종,「後發者와後後發者-일제하 朝鮮紡織 株( )와 京城紡織 株( )-

호 박순원 의 오노다 시멘트 공장의

, 經濟史學 32 , 2002 ; , 日帝下 朝鮮人 熟練勞動者 形成: (小野田) 勝湖里

」 「

배석만 해방 후 조선방직의 경영과 그 성격 지역과 역사 제 호 부경역사

, , 1994 ; , , 9 ,

事例」 國史館論叢 「 」

연구소, 2001등이 있다.

3) 기술자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최근의 연구는 김근배(1996), 「일제시기 조선인 과학기술인력의 성장」, 서 울대학교 이학박사학위논문, 1996 ; 김병관, 「일제하 조선인기술자의 형성과정과 존재양태」, 충남대학교 경제 학과 박사학위논문, 1996 등이 있다 그리고 개별 산업과 기업 측면에서 분석한 연구로는 일제강점기의 개별. 공장 고급기술자의 존재형태에 대해서 분석한 서문석,「일제하 대규모 면방직공장의 고급기술자 연구」 『, 경 영사학』30 ,호 한국경영사학회, 2003과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유일하게 고급섬유기술자를 양성했던 경성고공 방직학과 졸업생들의 활동상황에 대해 분석한 서문석,「일제하 고급섬유기술자들의 양성과 사회진출에 관한 연구」 『, 경제사학』 34 ,호 경제사학회, 2003가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대규모 공장에서 활동했던 고급기. 술자들 중에서 조선인 만을 대상으로 이들의 활동을 정리한 서문석,「일제하 대규모 면방직공장의 조선인 고 급기술자 연구」 『, 경영사학』31 ,호 한국경영사학회, 2003 등이 있다.

(3)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시계열적 분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연구의 대상이 된 대규모 면방직 공장은 1954년 당시 경성방직 조선방직 부산공장, (舊

동양방적공사 전남방직

), ( ), (

朝鮮紡織 釜山工場 舊 東洋紡績 仁川工場 舊 鐘淵紡績 全南工

고려방직공사 제일방적공사 등 그 규

), ( ), ( )

場 舊 鐘淵紡績 京城工場 舊 東洋紡績 京城工場

모면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일제강점기 소위 ‘4대방’4)을 그 대상으로 한다 단. 소멸된 공장은 분석에서 제외한다.5) 1930년대 말이나 해방 당시에도 방기 30,000 ,추 직 기 1,000대 이상6)의 대규모 설비를 갖춘 공장은 이 공장들 이외에는 없었다.7)

그리고 연구를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두 개의 시점 즉 해방 이전에는, 1938 ,년 해방 이후에는 1954년을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두 연도가 선택된 이유를 보면 먼. 저, 1938년은 식민지기 면방직 공업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이후. 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戰時期이기 때문에 군수산업이 본격화 되는 시기이다 또한 국민총동원법이 시행되어 기술자들이 징용과 징병으로 전쟁에 동원되었. 기 때문에 이전 시기와는 다르다.

다음으로 1954년은 戰災復舊 과정에서 여전히 식민지기에 설치되었던 설비들이 그대로 운영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이후에는 신규설비가 수입되기 때문에 이 시기는 중요한 의. 미를 가진다.

따라서 이 논문은 제Ⅰ장 서론에 이어 제Ⅱ장에서는 고급기술자의 정의와 해방 전후의 존재형태에 대해 살펴본다 제. Ⅲ장에서는 고급기술자들의 해방 전후 연관성을 검토한 후 에 제 Ⅳ장에서는 이상의 연구결과를 정리하고 결론을 맺는다.

고급 기술자의 정의와 존재형태 .

기술자는 자본주의 기계제 대공업 시스템에서 소유주와 더불어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축이다 그리고 기술자의 최상층인 고급기술자는 현장을 책임지며 공장의 가동과 상품의. 생산을 기술적으로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자. 본주의 시스템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건이 될 것이다.

또한 이들이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각각의 상황 속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했 는가 하는 것은 이들을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개별 고급기술자들의 활동을 4) 소위‘4대방 은 일제강점기 일관생산체제를 갖춘 대표적인 면방직기업들이었다 조선인 자본에 의해 운영되었’ . 던 경성방직 이외에 조선방직 동양방적 종연방적은 일본인 소유기업이었다 이들만이, , . 1940년대 이전에 일 관생산체제를 갖추고 생산을 하였을 뿐 나머지 기업의 공장들은 일관생산체제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일부 설 립된 기업들도 모두1940년대 전시기에 설립된 회사들이다 이 대방의 비중을 해방 당시 설비규모로 살펴. 4 보면 파악가능한 전체 공장의 방기 253,848 ,추 직기 9,609대 중에서 이 공장들이 보유했던 설비가 방기 추 직기 대로 전체 방기의 직기의 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인 규모를 가지고 있었 249,008 , 8,207 98%, 85%

다.

5) 단 소멸되어 분석에서 제외된 공장은 제일방적공사, (舊 東洋紡績 京城工場)인데 설립당시(1935년 7 )월 에 추의 방기와 대의 직기로 출발해 해방 당시에 추의 방기와 대의 직기를 보유한 최대

30,240 600 48,320 1,525

규모의 회사였다 이 공장에서 활동하던 고급기술자는. 黑田賤夫 太田豊太 植野正三 落合次郞 森田四郞, , , , 등 의 명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는 일본인들이었으며 조선인 고급기술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서문석5 , ( ,「일제하 대규모 면방직공장의 고급기술자 연구」 『, 경영사학』30 ,호 한국경영사학회. 2003, 162 ).쪽 이 공장은 한국전 쟁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고1952년 월에 남은 자산이 불하된 뒤 소멸되었다3 .

6) 전세계적으로 대규모 방직공장의 경우 최대규모인A급을 50,000 -1,500 , B추 대 급을 30,000 -1,000추 대 규모 로 보고 있으며 이 정도의 규모가 되는 것을 대규모공장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은행, ( , 면방직공업에 관한 조사

쪽 , 1953, 450-452 ).

7) 서문석,「해방이후 귀속재산의 변동에 관한 연구」, 경영사학 17 ,집 한국경영사학회, 1989, 239 .쪽 67

- -

(4)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고급기술자의 정의에 대해 살펴보고 이들의 해방 이전과 이후의 존 재형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고급기술자의 정의 1.

기계제 대공업에서 기술자들이 보유하는 기술은 생산체계 내에서 습득되기도 하고 생산 체계에 편입되기 이전에 이미 갖추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기술자는 생산체계에 편입되기. 이전에는 연령 교육연수 등에 따라 유형화되며 생산체계에 편입이 된 이후에는 경력연, , 수 근속연수 임금 자격증 등을 통해 유형화된다, , , .

이렇게 형성된 기술자는 생산과정에서의 숙련(skill)8)의 정도에 따라 나뉘어지는데 Braver- man9)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분리되고 이것 이 ‘構想’과 ‘實行’의 구분을 만들어 내었다고 보았다 구상은 생산의 설계 고안 기획. , , 등을 하지만 실행은 구상에 의해 정해진 것을 실행하기만 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 결과 노동을 숙련노동 과 반 미숙련노동 으로 나누고 숙련노동을 정신노동 과 구상노동‘ ’ ‘ ․ ’ ‘ ’ ‘ 으로 반 미숙련노동을 육체노동 과 실행노동 로 (conception labor)’ , ․ ‘ ’ ‘ (execution labor)’

분류하였다.

이런 논의를 근거로 본 논문에서는 생산공정을 구상 고안 기획 등을 할 수 있는 노동, , 자를 기술자 로 정의하기로 한다 그리고 고급기술자 란 기술자 중에서도 체계적인 이론‘ ’ . ‘ ’ 연구를 통해 현장에서 창안 신제품개발과 공정개선 등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 로 이론적인 역량 뿐만 아니라 실무에서의 숙련도까지 갖춘 기술자로 정의한다.

그리고 학력 경력연수 근속연수 등의 인적자본의 지표가 그 소유량과 사용량이 동일하, , 다는 가정아래 학력면에서 전문학교나 고등공업학교 이상을 졸업하고 경력면에서는 자, 본주의적 생산과정이 행해지는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진 기술자들을

고급기술자

‘ ’10)로 분류하기로 한다.

고급기술자의 존재형태 2.

섬유관련 고급기술자

1) 11)

8) 기술자가 가지고 있는 숙련을 노동자 개인의 인적 특성 으로 볼 것인지 노동자들의 직종특성 으로 볼 것인‘ ’ , ‘ ’ 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숙련을 개인의 인적 특성 으로 보는 경우에는 그 소유량과 사용량이 같은 경우에만. ‘ ’ 정확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숙련을 노동자들의 직종 특성 으로 파악할 경우에. ‘ ’ 도 각 직종별 특성을 파악하고 드러낼 수 있는 자료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김형기( ,『한 국의 독점자본과 임노동』, 까치, 1988, 46-51쪽 유장수; ,「한국노동시장의 숙련별 분단구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1992, 8-36쪽 김종한; ,「한국 생산직노동자의 숙련형성 유형 연구」, 경북대학교 경 제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 9-23쪽 참조).

9) Braverman. H., Labor and Monopoly Capital-The Degradation of Work in the Twentieth Century, Monthly Review Press, 1974, pp. 50 51, pp. 113 114.~ ~

10) 이들 고급기술자들이 체계적인 기초연구와 이론을 습득하였던 전문학교나 고등공업학교 등은 대학에 섬유관 련 전공이 없었던 당시에는 최고 수준을 보유하고 있던 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활동하였던 대규모. 공장은 전형적인 의미의 자본주의적 기계제 대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관생산체제를 갖춘 공장들이었기 때 문에 이 공장에서의 경험은 수작업장 수준의 단품제조 목적의 다른 공장에서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11) 섬유관련 전공자란 방적 정방 방직 직포 염색 표백 등의 공정에 직접 관여하는 기술자들이고 비섬유관련, , , , , 기술자란 섬유관련 전공자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 분야의 기술자를 가리킨다.

68

- 69 -

- -

(5)

년 월 연구대상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서 활동하던 섬유관련 고급기술자들은

1954 12 18

명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표 1>과 같다. 이들을 담당기술별로 구분해 보면 방직‘ ’ 이 10명으로 가장 많고, ‘방적 이’ 4 , ‘명 정방’ ‘・직포’ ‘・염색’ ‘・표백 이 각각’ 1명씩으로 구성 되어 있다.

학력별로 보면 대학 졸업자가 9 ,명 고등공업학교 졸업자가 9명이 있었는데 고등공업학교 졸업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식민지기 京城高等工業學校 방직학과 출신들12)이며 대학 졸 업자들의 대부분은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 출신들이었다.

< 1> 대규모 면방직 공장의 섬유관련 고급기술자(1954 )년 순

번 성명 연

령 학력 경력

연수

담당 기술

소속회

사 직명

1 손진현 47 고등공

업 29 정방 조방 부

산 생산부장

2 서정익 45 고등공

업 21 방직 동방 인

천 이사장

3 진재홍 44 고등공

업 20 방직 경방 상무취체역

4 김병운 43 고등공

업 19 방직 경방 상무취체역

5 홍정모 49 고등공

업 17 방직 고려방 이사장

6 장석윤 39 고등공

업 13 방직 동아방 공장장

7 김의극 41 고등공

업 12 방직 동방 인

천 이사겸 공무부장

8 이대호 35 대학 9 방직 동아방 공무부장

9 최경휘 29 고등공

업 8 방직 고려방 상무이사

10 김남진 34 공과대

학 7 방적 전방 광

주 과장대리

11 김영조 32 공대전

문부 6 방적 동방 인

천 방적과장

12 홍용운 35 공과대

학 6 방적 전방 광

주 방적과장대리

13 윤태석 32 공과대

학 4 염색 조방 부

갱생가공과 갱생 주임

14 남천조 33 고등공

업 4 표백 조방 부

갱생가공과 표백 주임

15 최병두 29 공과대

학 4 방직 조방 부

산 시험연구실 주임

16 함인식 29 대학 3 방직 동아방 사원

17 윤여경 29 공과대

학 1 방적 동방 인

천 공무원

18 김두기 28 공과대

학 1 직포 동방 인

천 공무원

자료 : 대한방직협회, 『방직기술자 및 기능자 명부』, 1954에서 작성.

연령별로는 30대가 7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40대가 6 , 20명 대가 5명 등으로 비

12) 서문석, 「일제하 고급섬유기술자들의 양성과 사회진출에 관한 연구」 『, 경제사학』34 ,호 경제사학회, 2003.

(6)

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50대 이상의 고급기술자는 전체 면방직 공장으로 범 위를 확대해 보아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경력연수별로 보면 5년 미만이 6 , 6명 년~10년 사이가 5명으로 10년 미만의 고급기술 자가 11명으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1년~15년 사이가 2 , 16명 년~20 년 사이가 3 , 21명 년 이상이 2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즉 해방이 된. 1945년 8월 15일 이전부터 근무했다고 추정되는 10년 이상의 고급기술자는 7명으로 약 31%에 불과하였 다.

공장별로 보면 조선방직 부산공장에 4 ,명 동양방적에 5명과 이 공장의 疏開動産으로 운 영되던 동아방직에 3 ,명 전남방직에 2 ,명 고려방직에 2 ,명 경성방직에 2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1938년13)과 비교해 보자 당시 일본인들이 설립하고 운영했던. 5개의 대 규모 면방직공장에서 활동하던 고급기술자는 총 32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섬유관련 전공 자는 22명이었고 조선인 고급기술자는, 5명에 불과하였다.14) 구명회와 정호종 진재홍과, 이병기 서정익 등이 그들이며 이들은 모두 방직학과 출신들이었다, , .

이들이 졸업한 직후부터 대규모 공장에서 경험을 쌓았다고 가정할 때 이들의 경력은 년에 졸업하여 약 년에 가까운 구명회를 제외하면 모두 년대에 졸업하였기

1921 20 1930

때문에 3 7~ 년 정도가 되었다.

그 외에 朝鮮紡織 釜山工場에서 활동하다가 경성방직으로 옮긴 김규선을 포함한다고 해 도 1938년 당시 일본인 자본이 경영했던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 근무하거나 근무했던 조 선인 고급기술자는 6명에 불과했다.

이 상황을 당시 조선인 자본으로 운영되던 경성방직과 비교해 보면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1938년 당시 京城紡織 한 공장에서 활동한 섬유관련 고급 기술자는 일본인이 경 영하던 다른 공장 전체인원보다 많은 6명이나 되었으며 모두가 조선인들이었다 이 외에. 도 朝鮮技術家名簿 에는 근무처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京城高等工業學校一覽 으로 대조해 본 결과 京城紡織에 근무했던 사실이 드러난 고급기술자 현득영과 유홍 등을 더, 하면 모두 8명의 섬유관련 조선인 고급기술자들이 경성방직에서 활동하였거나 활동하고 있었다.

년 당시 대규모 면방직공장에서 활동하였거나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고급기술자는 1938

모두 13명이었다 이들을 출신학교별로 보면 구명회와 정호종은. 東京工業大學을 서정익, 은 名古屋高等工業學校를 졸업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는 경성고등공업학교 나. ‘ ’ 그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를 졸업한 고급기술자들이었다‘ ’ .

염직학과가 개설되어 있던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생들은 염직 으로 방직학과가 개설되‘ ’ , 어 있던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들은 방직 으로 되어 있지만 이들의 교과과정에는 별‘ ’ 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 학교 졸업생 중에서 경성방직 이외의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서. 활동한 사람은 진재홍과 이병기 뿐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항은. <표 2>에 나타나 있다.

13) 1938년은 식민지기에 가장 효율적인 생산이 이루어지던 해였다 방기와 직기의 운전율이 각각. 96.32%와 를 기록하여 이후에 나타난 전반적인 침체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 결과 생산액에 있어서

96.21% .

도 최고수준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전시상황으로 이어지면서. 1944년에는 방기와 직기의 운전율이 각각 64%

와54%수준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大韓紡織協會, 1957: Ⅰ-61).

14) 서문석,「일제하 대규모 면방직공장의 고급기술자 연구」 『, 경영사학』30 ,호 한국경영사학회, 2003.

70

- 71 -

- -

(7)

순 번

姓名 出身學校 專攻 卒業年

勤務處

1 玄得榮 京城工業專門學校 染織 1918

京城紡織 2 金奎善 京城工業專門學校 染織 1920

3 尹柱福

京城高等工業學校 紡織 1923 九州帝國大學 應用化

學 1929 4 柳 鴻 京城高等工業學校 紡織 1924 5 金奭勳 京城高等工業學校 紡織 1933 6 金丙運 京城高等工業學校 紡織 1935 7 金鍾奎 京城高等工業學校 紡織 1938 8 兪鍾萬 京城高等工業學校 紡織 1938

9 具明會 東京工業大學 紡織 1921

朝鮮紡織 釜山工場 10 鄭浩宗 東京工業大學 紡織 1932

11 徐廷翼 名古屋高等工業學

校 紡織 1932 東洋紡績 京城工場

12 陳在洪 京城高等工業學校 紡織 1934

鐘淵紡績 全南工場 13 李秉器 京城高等工業學校 紡織 1936

자료 : 朝鮮工業協會, 朝鮮技術家名簿 , 1939 ; 京城高等工業學校一覽 , 에서 작 1933-1934, 1935-1936, 1937-1938 ; 京城紡織五十年 , 1969

성.

< 2> 대규모 면방직 공장의 섬유관련 조선인 고급기술자(1938 )년

비섬유관련 고급기술자 2)

대규모 귀속 면방직 공장의 고급기술자들 중에서 섬유관련 분야를 제외한 비섬유 관련 분야의 고급기술자들은 모두 5명이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표 3>에 나타나 있다.

< 3> 대규모 면방직 공장의 비섬유 관련 고급기술자(1954 )년 순

번 성명 연

령 학력 경력

연수

담당기

술 소속회사 직명

1 신문

철 45 고등공업 20 건축 전방 건축과장

2 석남

린 41 고등공업 16 전기 고려방 공무부장

3 김성

우 30 대학 7 방직 경방 직기과사원

4 신복

찬 27 공과대학 3 전기 조방부산 원동과사원

5 김세

원 29 공대전문

부 2 전기 동방인천 1급공무조수

6 박원

우 35 대학 1 원동 조방부산 원동과장

자료 : 대한방직협회, 『방직기술자 및 기능자 명부』, 1954에서 작성.

(8)

담당기술별로 보면 전기 가‘ ’ 3 , ‘명 원동 과 건축’ ‘ ’, ‘방직전반 이 각각’ 1명씩 활동하고 있 었다 이들의 연령은. 20대가 2 , 30명 대가 2 , 40명 대가 2명으로 연령별로는 골고루 분포 되어 있으며 역시 50대 이상의 기술자는 없었다.

경력연수별로 보면 5년 미만이 3 , 5명 년 이상 10년 미만이 1 , 16명 년~20년 사이가 2 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절반이상의 고급기술자가 해방 이후 대학을 졸업한 경우. 이고 해방 이전부터 현장 경험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10년 이상의 고급기술자는 2 명에 불과하다.

공장별로 보면 조선방직 부산공장에 2 ,명 동양방적에 1명과 전남방직에 1 ,명 고려방직에 명 경성방직에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1 , 1 .

이러한 상황을 식민지기 1938년과 비교해 보기 위하여 朝鮮技術家名簿 를 분석해 본 결과 1938년 당시 비섬유 관련분야 전공으로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고급기술자는 이강현 황영모 김선태 등 총, , 3명이었다 이들의 구체적인 사항은. <표 4>

에 나타나 있다.

번 姓名 出身學校 專攻 卒業年

度 勤務處

1 李康

賢 東京工業大學 機械 1911 京城紡織

2 黃泳

模 京都帝國大學 機械 1931 京城紡織

3 金善

泰 早稻田大學 電氣 1932 京城紡織

자료 : 朝鮮工業協會, 朝鮮技術家名簿 , 1939에서 작성. 표

< 4> 대규모 면방직 공장의 비섬유 관련 조선인 고급기술자(1938 )년

비섬유관련 조선인 고급기술자는 경성방직에만 3명이 근무하고 있었을 뿐 일본인 소유 공장에 근무하던 조선인 고급기술자는 전혀 없었다.

경성방직에서 근무하던 3명을 전공별로 살펴보면 기계 전공자가‘ ’ 2 , ‘명 전기 전공자가’

명 등이다 출신학교별는 졸업생이 각각 명

1 . 京都帝國大學 早稻田大學 東京工業大學, , 1

씩이며 졸업연도별로 보면 1910년대 졸업생이 1명이고 나머지 2명은 1930년대 졸업생 이다.

이강현은 20여년 이상의 경력이 있지만 나머지 두 졸업생들은 30년대에 졸업하였기 때 문에 당시로는 경력이 7 8~ 년에 불과하였다.

고급기술자들의 해방 전후 활동 .

이 장에서는 각 공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고급기술자들의 해방 전후의 활동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이들은 해방 이후 각 공장에서 일본인 기술자들의 귀국으로 나타났던 기술. 적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장의 제 절에서는 일제강점기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서 활동하던 고급기술자들의 해1 73

- 72 -

- -

(9)

방 이후 활동에 대하여, 2절에서는 해방 이후 대규모 귀속 면방직 공장에서 활동하던 고 급기술자들의 해방 이전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면방직 공장 고급기술자들의 해방 이후 활동 1.

섬유관련 분야의 고급기술자 1)

개관 (1)

년의 경우 대규모 면방직공장에서 활동하던 명의 고급기술자 중에서 섬유관련

1938 43

고급기술자는 모두 29명으로 전체 기술자의 67.4%를 차지하였다 이들 중에. 18명은 방 직을, 8명은 색염 염색 을 전공한 기술자들이었고 견방직 기직 제사 등을 전공한 기술( ) , , , 자들이 각각 1명씩 활동하고 있었다.15) 여기에서 조선인은 13명에 불과했다 표(< 2> 참 조).

각 공장별로 보면 경성방직에 7 ,명 조선방직 부산공장에 6 ,명 동양방적 인천공장에 3 ,명 동양방적 경성공장에 4 ,명 종연방적 전남공장에 5 ,명 종연방적 경성공장에 4명이 근무하 고 있었다 당시 개별 공장에는. 3 7~ 명 정도의 섬유관련 분야의 고급기술자들이 있었다.

년의 경우 섬유관련 고급기술자는 모두 명으로 전체 기술자의 를 차지하였

1954 19 79.2%

다(<표 1> 참조). 이들은 대학졸업자가 10 ,명 고등공업졸업자가 9명이었으며 담당기술별 로 구분해 보면 방적이 4 ,명 방직이 11 ,명 정방과 직포가 각각 1 ,명 염색과 표백이 각각

명이었다

1 .

각 공장별로 보면 경성방직이 3 ,명 조선방직 부산공장이 4 ,명 동양방적공사와 동아방직 이 5명과 3 ,명 전남방직 광주공장이 2 ,명 고려방직공사가 2명 등이었다 개별공장에는.

명까지의 섬유관련 고급기술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2 5~ .

이런 상황을 전체적으로 평가해 볼 때 전체 고급기술자들 중에서 섬유관련 분야 전공자 가 차지하는 비중이 1938 (67.4%)년 에 비해 1954 (79.2%)년 이 약 12% 정도 높은 것으 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1938년에 8명이 있던 색염 염색 전공자들은( ) 1954년에는 2명 에 불과할 정도로 감소되었다 이것은 전후 복구과정에서 섬유의 상품성을 높이는 것보. 다는 복구를 통해 생산량을 늘리려고 했던 데에서 나타난 상황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별 공장별로 살펴보면 경성방직의 기술자 감소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 다 이것은 먼저 당시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소규모 섬유산업이 활발하게 나. 타나고 있었다는 사정에 기반한 것이다 둘째로는 다른 대규모 면방직공장에서 경성방직. 의 기술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경성방직 영등포공장 뿐만 아니라 만주에 설립했던 남만방적의 기술자들도 다른 공장으로 보냈던 당시 사정에 기인한다. 그리고 셋째는 년에는 경성방직이 방적공장을 신설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고급기술자들을 필 1938

요로 했지만 해방 이후부터는 급격한 증설이나 변화가 없었으며 한국전쟁의 피해를 복구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추정된다.

각 공장별로 고급기술자들의 담당기술을 분석해 본 결과가 <표 5>에 나타나 있다.

15) 서문석,「일제하 대규모 면방직공장의 고급기술자 연구」 『, 경영사학』30 ,호 한국경영사학회. 2003, 164 .쪽 74

- -

(10)

工場

專攻 京紡 京紡 朝紡 釜山

朝紡 釜山

東紡 仁川

東洋紡 績公社

東亞 紡織

東紡

京城 消滅 鐘紡 全南

全紡 光州

鐘紡 京城

高麗紡

織公社 合計 % 合計 % 1938년 1954년 1938년 1954년 1938년 1954년 1954년 1938년 1954년 1938년 1954년 1938년 1954년

纖維關聯 7 3 6 4 3 5 3 4 5 2 4 2 29 67.4 19 79.2

機械 2 1 4 1 1 9 20.9 0 0.0

原動 1 0 0.0 1 4.2

電氣 1 1 1 1 1 1 3 7.0 3 12.5

應用化學 1 1 2 4.7 0 0.0

建築 1 0 0.0 1 4.2

合計 11 3 7 6 7 6 3 6 0 7 3 5 3 43 100.0 24 100.0 자료 : 朝鮮工業協會, 『朝鮮技術家名簿』, 1939 ; 『京城高等工業學校一覽』, 1933-1934, 1935-1936, 1937-1938 ;

대한방직협회, 『방직기술자 및 기능자명부』, 1954 ;『京城紡織五十年』, 1969에서 작성.

1938년 1954년

< 5> 고급기술자의 공장별 담당기술 분석

개별 공장의 고급기술자

(2) 16)

해방 이전부터 대규모 면방직공장에서 활동했던 섬유관련 분야를 전공한 조선인 고급기 술자는 모두 13명이다 경성방직에 이강현 현득영 김규선 유홍 김석훈 김병운 김종. , , , , , , 규 유종만 등, 8 ,명 조선방직에 구명회 정호종 등, 2 ,명 종연방적에 진재홍 이병기 등, 2 명 동양방적에 서정익 등이 있었다, .

이들 중에서 먼저 경성방직에 근무했던 고급기술자들을 보면 이강현은 1935년 3월 김성 수를 대신해서 김연수 사장이 京城紡織의 운영을 맡게 되자 京城紡織을 떠났다 이후에. 는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해방이후에도 직접 생산현장에 있지 않았으며 유홍과 주로, 같이 활동하였다.17)

현득영은 경성방직18)의 기록에 의하면 경성방직의 창업 때부터 기술진으로 참여한 것으 로 나오고 있다. 1935-1936년 사이에 京城紡織에서 활동19)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이후 업계의 활동기록이 전혀 없는데 그의 나이가 1940년대에 이미 40세를 넘겼고, 년 후배인 김규선과 년 후배인 진재홍과 김병운이 공장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것으

1 15

로 미루어 해방 이전에 업계활동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규선은 조선방직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1933년 경성방직의 방적공장 설립과정에 합류 하여 1936년 5월부터 1941년까지 공장장으로 활동하였다.20) 해방 후 그는 미군정청 초 대 섬유과장21)을 지내고 이후 조선후직 대한모방 등을 창업해서 자영을 하였다, .22) 유홍은 1923년 경성고공을 졸업한 직후 경성방직에 입사하였다가 김연수 사장 부임 이 후 회사를 떠나서 三河興業株式會社를 운영하였다 광산개발과 기업에도 관여하여 이강.

16) 이하 일제강점기 조선인 고급기술자 개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서문석, 「일제하 대규모 면방직공장의 조선 인 고급기술자 연구」 『, 경영사학』31 ,호 한국경영사학회, 2003을 참조.

17) 柳鴻,『暮歲의回顧』의당 유홍 회고록, 1989, 97-102 , 114-118쪽 쪽; 『京城紡織五十年』, 1969, 81 .쪽 18)『京城紡織五十年』, 1969, 51 , 58 .면 면

19)『京城高等工業學校一覽』, 1924-1925, 37 , 1933-1934, 52 , 1935-1936, 36면 쪽 면 ; 「거리의 女學校를 차저, 纖纖玉手로 짜내는 紡織女學校」 『, 삼천리 제 권 제 호』 8 2 , 1936.2.1;「남편의 말 中에 니치지 안는 말」 『, 별건곤 제』 26 , 1930.2.1호 ;「京城名流 人物白話集, 」 『, 별건곤 제』 27 , 1930.3.31) ;호 李鐘麟辛鳳祚․ ․

권 호 년

, , 4 5 , , 1932

白鳳濟徐相天李廷紀金明德玄得榮鄭世權柳光烈․ ․ ․ ․ ․ ․ 「學生敎育問題座談會」 『實生活』 獎産社 월 쪽

5 , 2 .

20)『京城紡織五十年』, 1969, 87-88쪽; 366-367 .쪽 21)「思見德化願書」 『, 반민특위조사기록』-김연수 관련자료.

22) 주 공업신문사 편( ) ,『한국주요공업인명감』,형문출판사, 1978, 503 .쪽 75

- -

(11)

현 민규식 등과, 豊林鐵工會社를 창설하고 이강현과는 小電球工場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조선공업기술협회를 창립하고 조선공업신문을 창간하기도 하였으며 줄곧 정 치에 투신하였다.23)

김석훈은 京城高等工業學校 방직학과를 1933년에 졸업하고 당시 경성에 있던 대창직물 공장에서 활동하다 京城紡織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1940 1941~ 년 사이에 사망하였다.24) 김병운은 松都高等普通學校의 松高實業場에서 半工生25)으로 이미 현장감각을 익히고 있 었으며, 1935년 경성고등공업학교 방직학과를 졸업하고 경성방직에서 활동하였다. 京城 에서 이사 상무이사 전무이사 기술고문 등을 맡으면서 핵심적인 요직을 담당하였, , , 紡織

으며 특히 한국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26) 이후 그는 중앙염색 가공주식회사 사장 대한합성섬유 전무이사 등도 지내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27) 서울 대학교 섬유공학과 강사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71년에는 방직기술을 혁신한 공로로 국회의장상을 수상28)하기도 하였다.

김종규는 경남출신으로 1938년 경성고등공업학교 방직학과를 졸업하고 경성방직에서 활 동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 1942년에 설립된 吳羽紡績株式會社의 후신인 대전방직의 기술책임자로 부임해서 부사장까지 지냈다 섬유제품을 생산하는 신광산업 대표 무디코. , 리아 고문 영남방직 회장 등을 맡으며 섬유업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29)

유종만은 충남출신으로 1938년에 京城高等工業學校 방직학과를 졸업하고 京城紡織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직후 그는 섬유관련 인사들의 모임인 대한섬유공업연구회의 설립을 발. 의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한국전쟁기에 부산에서 결성된 대한방직기술협회의 이 사로도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피복공장인 대광직물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산업계에서 지. 속적으로 활동하였다.30)

는 1921년 에서 방직을 전공하고 돌아와 에서 활동하였다.

具明會 東京工業大學 朝鮮紡織

하지만 그는 이후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1940년대에 이미 조선방직에 서는 활동하지 않았다고 한다.31)

정호종은 1932년 東京工業大學에서 방직을 전공하고 朝鮮紡織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이. 후에 그는 조선방직 내에서 유일한 조선인 고급기술자로 평가되었으며 그 결과 자치관, 리위원장이 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신임도 받았다고 한다.32) 이후 그는 1948년 4월에 管

23) 그는 1945년 그는 조선광업협회의 감사 탁치배격 각당 각계층 대표자회 의 상무집행위원 기미독립선언기, ‘ ’ , 념 전국대회 준비위원회의 총무부 활동, 己未獨立宣言記念事業會의 대표 한국민주당 서울시당부 감찰위원장, , 한민당 중앙집행위원 독촉국민회의 후생부장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 . 1950년 월 제 대 국회의원 선거6 2 에서 영등포 을에 출마하여 당선될 정도로 정치에 관여하였다.

24)『京城高等工業學校一覽』, 1933-1934, 55쪽; 1935-1936, 55쪽 ; 1937-1938, 54쪽 ; 1939-1940, 59쪽 쪽

; 1941-1942, 67 ; 朝鮮工業協會,『朝鮮技術家名簿』, 1938, 250 .쪽

25) ‘半工生’이란 松都高等普通學校의 학생들 중에서 수업시간 이후에 수익의 일부를 받으면서 松高實業場에서 일했던 학생들을 말한다 그 외 송고실업장에 대해서는 우지형. , 松都民報, 제10호를 참조.

26) 경성방직50년사, 1969, 138쪽; 경성고공 졸업생 우지형 인터뷰2002.4.20, 2004.7.3.

27) 大韓紡織協會, 紡協創立十周年記念誌, 1957, 69쪽; 대한방직협회, 섬유연보, 1967, 736 .쪽 28) 조선일보 , 1971.4.21.

29) 우지형 인터뷰 2002.3.19 ; 섬유연보 , 1954, 69쪽 ; 大韓紡織協會, 紡織技術者 및 技能者名簿, 1954,

쪽 쪽 섬유계인사록 섬유연보 서울대총동창회

69 ; 大韓紡織協會, 紡協創立十周年記念誌, 65 ; 「 」, , 1971 ; , 회원명부 , 1990; 1997;서울대공대 동창회, 회원명부 , 2001;우지형 인터뷰2002.4.3.

30) 대한민국 학술원, 한국의 학문연구, 2002, 21 , 85쪽 쪽; 서울대총동창회, 회원명부, 1990 ; 서울대공대 동창회, 회원명부 , 2001.

31) 1943년 경성고공 방직학과 졸업생李德基 인터뷰2004.5.24

32) 中尾美知子 「, 1951-52년 조선방직 쟁의 현대 한국 노사관계의 스타트 라인- 」, 1989, 고려대 석사논문, 1 76

- -

(12)

에 의해 조선방직이 주식회사로 환원되면서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여 실질적으로 이 財令

공장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1951년 조방사건‘ ’33)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1950년 대 중반까지 대한방직 대구공장(朝鮮紡織 大邱工場의 후신 에서 상무취체역으로 활동하) 였다.34)

은 1934년에 방직학과를 졸업하고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일본인

陳在洪 京城高等工業學校

소유 대규모 방직공장인 鐘淵紡績 광주공장에서 공장 건설 임무를 맡았다 만주 총지배. 인 자리를 권유받자 이를 거부하고 京城紡織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에서 공장장 이사 전무이사 상무이사 고문 등을 맡으면서 핵심적인 역할을, , , , 京城紡織

하였다.35)

는 진재홍과 함께 종연방적 전남공장에서 활동하였는데 1936년에

李秉器 京城高等工業學校

방직학과를 졸업하고 직조부 견습생으로 鐘淵紡績 광주공장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곧 만. 주에 있는 大東貿易株式會社로 옮겨갔다 그는 해방 이후 조선 섬유산업건설동맹회를 결성. 하여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동양방적 인천공장에 있다가 한국전쟁 이후에는 북한, 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6)

서정익은 1932년 名古屋高等工業學校에서 방직학과 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 東洋紡績 인 천공장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에는 中國 山西省의 北支開發公社에서 공장장으로 활동하 였다 해방 직후 귀국하여. 1946년 2월부터 인천공장의 차장으로 복귀한 그는 해방 이후 에 귀속기업체가 된 이 공장의 공장장 중역 관리인 등을 거쳐, , 1955년에 이 공장을 불 하받아 운영하였다 이후 그가 이 공장을 직접 운영하여 이후 동일방직으로 발전시킴으. 로써 고급기술자로서 직접 기업을 소유하고 경영에 성공한 유일한 경우가 되었다.37) 따라서 1938년 이전부터 시작해서 해방 이후까지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서 계속 근무했 던 고급기술자는 경성방직에서 근무했던 진재홍과 김병운, 朝鮮紡織 釜山工場에서 활동 하던 정호종, 東洋紡績 仁川工場에서 활동하던 서정익 뿐이었다.

비섬유관련 분야의 고급기술자 2)

개관 (1)

비섬유 관련분야에서는 1938년과 1954년이 몇 가지 점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였다

쪽 2 13 .~

33) 배석만,「해방 후 조선방직의 경영과 그 성격」 『, 지역과 역사』, 2001;『부산일보』, 1951.3.2;『동아일 보』, 1951.8.15;한국일보사,『재계회고』6, 1980, 114-116 .쪽

34) 이 공장은1940년 월5 郡是工業株式會社의 분공장으로 마방을 주로 하던 회사로 해방 이후에 대구방적공사, 조선방직 대구공장을 거쳐 1955년 월에 조선방직으로부터 이 공장을 임대하였다가 그 해 월에 정부사정자5 8 격 억환으로 설경동에게 불하되었다 서문석7 ( ,「귀속면방직기업의 변천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1997, 200쪽 한국은행; ,『면방직공업에 관한 조사』, 1953, 476-483쪽 대한방직협회; ,『방협창립10주년 기념지』, 1957, 2부 회원공장편, 91 ).쪽

35) 당시 일제의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 일본에서 고급공업교육을 받고 돌아와 취업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임시직 형태인 촉탁으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진재홍 인터뷰( , 2000.5.19).

36) 京城高等工業學校一覽, 1937-1938: 56 ; 1939-1940: 60) ; 『매일신보』, 1945.9.21 ; 1934년 경성고 등공업학교 방직학과 졸업생 陳在洪 인터뷰, 2000.5.19 ; 1942년 졸업생 禹志亨 인터뷰, 2002.3.19 ; 1943 년 졸업생 李德基인터뷰, 2004.5.24.

37) 조선기술가명부 에서는名古屋高等工業學校에서 기계 를 전공 조선공업협회‘ ’ ( , 조선기술가명부, 1939, 266 쪽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名古屋高等工業學校의 一覽에서1932년 名古屋高等工業學校방직과를 졸업한 것이 확인되었다( 名古屋高等工業學校一覽 1935-1936: 255) ; 동일방직사사 1982: 52-53 .쪽

77

- -

(13)

표 표 참조 그 첫째는 년에는 전기 를 전공한 고급기술자들이 상대적 (< 3>, < 4> ). 1954 ‘ ’

으로 감소했다. 1954년에 전기 를 담당한 고급기술자들이‘ ’ 14.3%를 차지한 것에 비해 년에는 약 정도에 불과했다 이것은 북한의 송전 중단 이후 면방직공업에 전력

1938 9% .

부족 사태가 초래되어 일제강점기부터 자가발전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던 鐘淵紡績 全南工 과 , 등에서 자가발전을 위해서 이 분야의 고급기술자들을 場 京城工場 朝鮮紡織 釜山工場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는 1954년에는 기계 를 담당기술 로 하고 있는 고급기술자가 없다는 것이 두드러‘ ’ ‘ ’ 진 차이점이다 이런 결과는. 1938년이 공장 설립 초기였기 때문에 기계 전공자가 많이‘ ’ 필요했을 것이며 특히 1934년과 1937년에 조업을 시작했던 東洋紡績株式會社에는 많은 기계 전공자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년의 경우 기계 전공자들이 다른 산

‘ ’ . 1954 ‘ ’

업분야의 공장들로 진출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38)

하지만 1938년과 1954년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구대상 공장들에는 절대다수의 섬유관련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공장에서 필요한 다른 분야의 고급기술자들이 이들을 보 조하는 방식으로 고급기술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즉 대규모 면방직 공장의 경우 고급. 기술자들의 존재형태는 그다지 크게 변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별 공장의 고급기술자 (2)

비섬유관련 기술자들은 모두 경성방직에서 활동하였는데 윤주복은 경성고공 방직학과를 나온 뒤에 일본의 九州帝國大學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하고 중앙상공의 공장장으로 활동하 다가 1933년부터 경성방직의 공장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김규선을 초청하여 방적공장. 을 신설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개별 공장을 벗어나서 한국, 섬유공학회의 모체인 대한방직기술협회의 2대 회장을 맡으며 학회의 발전에 공헌을 하 였다.39)

황영모는 京都帝國大學에서 기계 를 전공하고‘ ’ 1931년 졸업한 후에 조선에 들어와 京城 에서 근무하였다 해방 후 그는. 1946년경부터 1959년경까지 경성방직의 이사로 재 紡織

직하면서 서울대학교 공대에서 근무하였는데 1954년부터 1958년까지는 서울대학교 공 과대학장을 맡았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내외방적에서 이사를 맡기도 하였는데 이 공장. 은 식민지기에 조선방직 대구분공장으로 설립되었던 공장이다. 1949년 8월에는 중앙경 제위원회 기계공업분과의 서울공대 기계 대표를 맡기도 하였으며 1950년 1월에는 문교 부에서 미국에 파견하는 고급기술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40)

김선태는 1932년 早稻田大學에서 전기를 전공하고 京城紡織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월에는 해외에 있는 기술자들을 위한 의 결성에 참여

10 朝鮮戰災技術者協會 41)하였으나

그 이후의 활동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방 이후 대규모 면방직 공장 고급기술자들의 일제강점기 활동 2.

38) 해방 이후까지도 국내의 기계공업의 발전이 미약했기 때문에 기계 분야의 전문가는 항상 부족했다고 한다‘ ’ 년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한면방직협회를 거쳐 소장을 지낸 장철식 인터뷰

(1955 KOTITI ,

2004.3.25).

39) 대한민국 학술원,『한국의 학술연구 섬유공학- 』, 2002, 79-87 .쪽

40) 서울大學校 工科大學, 서울大學校 工科大學史 學科史中心- , 1987 ; 745쪽 ; 자유신문, 1949.8.5 ; 서울 신문 , 1950.1.13.

41) 매일신보 , 1945.10.2.『 』

78

- 79 -

- -

(14)

섬유관련 분야의 고급기술자 1)

해방 이후 대규모 면방직 공장에서 활동하던 고급기술자들은 모두 24명이었다 이 정도. 의 인원은 1938년의 경우 이 공장에서 활동하던 고급기술자들이 모두 43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지만 식민지기에 조선인 고급기술자가 16명에 불과하였던 것에 비하 면 그나마 늘어난 것이다. 23명의 고급기술자 중에서 섬유분야를 전공한 고급기술자가

명이고 비섬유분야를 전공한 고급기술자가 명이었다

18 , 6 .42)

하지만 1954년 12월말 당시 경력이 최소한 10년 이상은 되어야 식민지기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판단해 보았을 때 경력이 10년 이상인 고급기술자는 섬유관련 분야 7명과 비섬유관련 분야 고급기술자 2명으로 전체 9명이다.43)

섬유관련 고급기술자는 진재홍 김병운 손진현 서정익 홍정모 김의극 장석윤 등, , , , , , 7명 이다 이들 중 앞에서 언급되지 않은 홍정모 김의극 장석윤 손진현에 대하여 살펴보자. , , , . 홍정모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1928년 경성고등공업학교 방직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 후 1935년 경까지 평안북도 영변 산업조합에서 근무하다가 1936-37년 사이에 평양의 서경염직소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44) 해방 이후 그는 식민지기 鐘淵紡績 京城工場의 42) 1954년의 경우 방직기술자 및 기능자 명부 에는 이들의 구체적인 졸업학교와 전공학과는 밝혀져 있지는 않 고 다만 공장 내의 담당기술 만 밝혀져 있다 이들의 공장 내에서의 비중을 볼 때 전공과 다른 담당기술을‘ ’ .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조선기술가명부(1938 )년 의 전공학과 와 방직기술자 및 기능자 명‘ ’ 부(1954 )년 의 담당기술 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

이 시기 섬유관련 고급기술자를 국내에서 양성할 수 있는 곳은 국립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가 유일한 경우였 다 이 학과는 식민지기에 유일하게 섬유관련 고급기술자를 양성했던 경성고등공업학교 방직학과 가 해방 직. ' ' 전인 1944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 방직과’(「京城高等工業學校規程中左 通改正ノ ス」, 朝鮮總督府官報, 로 바뀌었고 해방 직후에 경성공업대학 방직학과 로 그리고 년 국립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

1944.6.30) , ‘ ’ , 1947

로 편입되면서 섬유공학과 로 변경된 것이다 이 때 전문부 가 함께 설치되었는데 이 곳을 졸업하거나 이곳‘ ’ . ‘ ’ 에서 년 수료한 후 섬유공학과 학년에 편입하거나 혹은 졸업 후 섬유공학과 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이2 1 2 . 전문부를 졸업한 사람은 1947년 월에 명7 5 , 1948년 10월에 명1 , 1949년 월에7 28 , 1949명 년 11월에 명3 으로 총 37명이었다 그리고 섬유공학과 학년 입학은. 1 1947년 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때 학년으로 편입9 2 한 5명의 학생이 1950년 5월에 졸업하였는데 이들이 이 학과 최초의 졸업생들이었다 서울대학교( 50년사 1996).

이 외에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다른 대학교에 섬유공학과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는데 전남대(1952 ),년 부 산대학교(1953 ),년 충남대학교(1954 ),년 한양대학교(1958 )년 등에 섬유공학과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연구의. 대상 시기가 되는 1954년에는 해방 이후 한국에서 양성된 고급기술자는 국립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에서 양 성된 기술자들뿐이다.

43) 경력이10년 이하인 고급기술자들을 보면尹台錫은195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를 졸업 서울대( 학교총동창회, 서울大人名錄, 2003, 234 )쪽 한 직후 조선방직 부산공장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崔炳 는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공대 전임강사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조선방직에서 활동하, 斗

다가 후에 대한방직에서 상무이사를 지낼 정도로 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섬유연보( , 1977, 681 ).쪽 김남진은 일본 法政大學을 졸업하고 경성방직의 사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 학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전남방직 이사공무부장 공장장 섬유연보․ , ( , 1967, 735 )쪽 등을 지냈으며 전무이, 사 부평공장장 전남중고등학교 이사 합동방직 부사장 섬유연보, , , ( , 1977, 639 )쪽 을 역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홍용운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전남방직 가공과장 일신방직 기획조사부장 섬유연보. , ( ,

쪽 등으로 활동하였다 최경휘는 일본의

1967, 774 ) . 濱松高等工業學校1)를 졸업하고 일본의 鐘淵紡績株式會社 에서 근무하다가 해방 이후 고려방적공사 상무 조선방직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삼호방직주식회사 대표, ,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김영조는 서울대 섬유공학과 전문부를 마치고 동양방직 인천공장에서 생산부장을 역. 임하였다 섬유연보( , 1967, 739 ).쪽 김두기와 윤여경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동양방직 인천공장에 근무하기 시작하여 이후 이 공장의 상무를 맡는 등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섬유연보( , 1977, 640, 663 ).쪽 함인식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동아방직에서 근무를 시작하였으며 대한방직에서 생산부장 상무이, , 사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섬유연보( , 1966, 774쪽; 1977, 684 ).쪽

44)『京城高等工業學校一覽』, 1933-1934, 53쪽 ; 1935-1936, 54쪽 ; 1937-1938, 53쪽 ; 1939-1940, 57 쪽;朝鮮工業協會,『朝鮮技術家名簿』, 1938, 199 .쪽

80

- -

(15)

후신인 고려방직공사 영등포공장의 이사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것을 계기로 1949년 4월 부터 1955년 5월까지 대한방직협회 1 5~ 대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서선직물 삼광직물. , 등을 운영하면서 한국섬유공학회의 전신인 대한방직기술협회의 회장을 1957년부터 년까지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방직기술협회가 년 한국섬유공학회로 재

1961 . 1961

창립될 때도 회장을 맡아 1963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이 공학회가, 1963년 사단법인 한 국섬유과학기술협회로 개명될 때도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68년 사단법인 한국섬유 공학회가 재창립되어 장석윤 회장에게 이어질 때까지 회장을 역임함으로써 이 분야에 중 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상공부 산업자원부의 전신 의 표준국 출범과 동시에. ( ) 한국공업규격 제정업무의 섬유부문 심의부회장을 맡으면서 섬유기술계의 원로로서 인정 받았다.45)

김의극은 1937년 경성고등공업학교 방직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종로의 ‘和信布’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38년경부터 전라북도 정읍의 산업조합에서 활동하였다.46) 해방 후 그는 동양방직공사의 이사 겸 공무부장 공장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동인염색주식회사 전무, , 이사 삼희염공사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지속적으로 업계에서 활동하였다, .47)

장석윤은 경남 출신으로 1938년 경성고등공업학교 방직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동경공 업대학 방직학과로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하였다.48) 해방 직후 그는 경성고등공업학교 의 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교수를 역임하고 1946년부터는 이 학교의 후신인 서울대 학교 공과대학에서 1954년까지 교수로 활동하였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동양방적공 사 기술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1951년부터 1955년까지 동양방적공사의 소개시설로 운 영되던 동아방직주식회사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하였다. 1955년부터 1958년까지는 동아 대학교 공대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58년부터 1961년까지는 국립중앙공업연구소에서 활동하였다. 1960년부터 한양대학교 공대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주로 학계에서 활동하 였다 그는 많은 논문과 저서를 발간했으며. 1980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49)

그리고 손진현은 정확한 학교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등공업 방직학과를 졸업한 것 으로 알려져 있다 경성방직과 남만방적에서 활동했다가 해방 이후에는 조선방직 뿐만. 아니라 朝鮮製麻에서 공장장을 맡았다.50)

결론적으로 1954년 당시 연구 대상 대규모 면방직공장에서 활동했던 고급기술자들 중에 서 해방 이전에 대규모 면방직공장에서 활동했던 기술자는 경성방직의 진재홍 김병운과, 동양방적에서 활동했던 서정익 등이다.

비섬유관련 분야의 고급기술자 2)

대규모 면방직공장에서 근무하던 비섬유관련 고급기술자 중에서 1954년 당시 10년 이

45) 대한방직협회,「섬유계인사록」 『, 섬유연보』, 1967 , 775년 쪽 ; 대한민국학술원, 『한국의 학문연구 섬유공- 업』, 2002, 79-80 .쪽

46)『京城高等工業學校一覽』, 1937-1938, 56쪽 ; 1939-1940, 60쪽;朝鮮工業協會,『朝鮮技術家名簿』, 1938, 쪽

250 .

47) 大韓紡織協會, 紡織技術者 및 技能者名簿, 1954, 39 , 65쪽 쪽 ; 대한방직협회,「섬유계인사록」 『, 섬유연 보』1967 , 775년 쪽; 섬유연보 , 1967, 741 .쪽

48)『京城高等工業學校一覽』, 1939-1940, 61 .쪽

49) 大韓紡織協會, 紡織技術者및 技能者名簿 , 1954, 83쪽; 대한방직협회,「섬유계인사록」 『, 섬유연보』1967 년, 767쪽; 서울大學校 同窓會(1990),『會員名簿』; 서울大學校 工科大學 同窓會(2000), 會員名簿 . 50) 「思見德化願書」 『, 반민특위조사기록』-김연수 관련자료.

81

- -

(16)

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고급기술자는 건축 분야의 신문철과 전기 분야의 석남린 등‘ ’ ‘ ’ 2 명이었다.

은 이 공장에서 유일하게 해방 이전에 현장경험을 가지고 있던 고급기술자로 추정 申文徹

되는데 해방 이후 전남방직에서 고급기술자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53년 이 공장의 불하 후 최초로 구성된 임직원 명단에는 없었지만 1954년 경에 당시 건축과장이었던 최 석원의 뒤를 이어 건축과장이 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 본사업무가 광주공장에서 서울 본사로 이전되자 이 공장을 그만두고 새로 설립되어 부산물 판매를 담당하는 방계회사 광주면업주식회사의 주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60년부터 학계로 자리를 옮겨 전남대학교 건축학과에서 1976년까지 활동하였다.51)

이들의 해방 이전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구대상 대규모 면방직 공 장에서 활동한 기록은 없다.

결론 .

년 당시 경성방직 조선방직 부산공장 동양방적공사 전남방직 광주공장 고려방직

1954 , , , ,

공사 등 대규모 면방직 공장의 고급기술자들에 대하여 1938년의 상황과 비교하며 진행 한 이상의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54년 연구대상 공장에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섬유관련 분야의 고급기 술자들이 18명 있었고 비섬유 관련분야의 고급기술자들은 6명이 있었다 그리고. 1938년 에는 섬유관련 분야에 13 ,명 비섬유관련 분야에 3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둘째 연구대상 공장에서, 1938년과 1954년에 모두 근무하고 있었던 섬유관련 분야 고 급기술자들은 진재홍 김병운 서정익 정호종 등, , , 4명이었다 그리고 이 두 시기에 모두. 근무했던 비섬유 관련분야의 고급기술자들은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최고수준의 섬유기술자를 양성했던 경성고등공업학교 방직학과의 졸업생 명 과 해외에서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섬유기술자들의 수를 감안하면 해방 전후 섬유 (87 )

관련 고급기술자의 수는 100여명을 넘어선다.52) 또한 이들은 현장의 기술과 운영의 실 질적인 책임자로 그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1954년 당시 대규모 면방직공장들은 섬유공업 내에서 생산과 고용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렇게 100여 명이 넘는 인원과 개별 공장 내에서 중요성 대규모 공장의 산업 내 비중, 에도 불구하고 이 공장들에서 해방 전후에 지속적으로 근무한 고급기술자가 4명에 불과 하다는 사실은 이들의 해방 전후 연관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한다.53) 이것은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인적 유산이 해방 이후까지 강하게 남아있었다는 일반론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1) 전남대학교30년사, 1982, 844쪽; 전방30년, 1984, 42-43 .쪽

52) 서문석,「일제하 고급섬유기술자들의 양성과 사회진출에 관한 연구」 『, 경제사학』34 ,호 경제사학회, 2003.

쪽 대한민국 학술원 한국의 학문연구 섬유공업 쪽

98 ; , - , 2002, 10-12 .

53) 물론 고급기술자 이외의 공장 내부 인원에 대해서는 추후연구에서 밝히겠지만 면방직공장의 기능공이나 여 공의 기술이 고난도의 장기 훈련을 필요로 하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해방 전후 연관성의 문제는 큰 고려사 항이 될 수 없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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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주제어 : 고급기술자 대규모 면방직 공장 해방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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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953), 70 , . 編修委員會 『東洋紡績 年史』 東洋紡績株式會社 한국섬유기술진흥센터(1982), KOTITI 20『 년사』. 한국은행(1953), 면방직공업에 관한 조사 . 한국일보사(1980), 재계회고 1, 6.

이 논문은 2006년 5월 30일에 투고 완료되어

년 월 일에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2006 6 21

년 월 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06 7 15

년 월 일에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게재가 결정된 논문 2006 7 25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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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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