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마의정치적변천로마의기원

전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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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정치적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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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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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문명 (1)

• 이탈리아 반도의 상황

후기 구석기 시대 - 인류의 거주 시작

신석기 시대 – 반도 전체와 도서 지역으로 인구 확장

청동기 시대 – 외부 민족의 유입 (인도〮유럽어족) – 로마인의 선조 BC 8세기

- 다양한 민족들의 모자이크와 같은 형태

- 중북부의 에트루리아인과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가장 강성한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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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의 이탈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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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건국신화 (BC 753년)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BC 1세기)

• 트로이가 함락되었을 때 트로이의 왕족 안티세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네아스가 앙키세스 와 함께 트로이를 탈출 – 배를 타고 트라키아, 크레타, 델로스, 북아프리카(카르타고), 시칠리아 등을 거쳐 헤스페리아(이탈리아)에 도착 – 테베레 강가에 도착

•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의 약혼자였던 트루누스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 라비니아와 결혼 – 아이네아스 의 아들 율리스가 알바롱가 시를 건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2세기)

•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딸이자 왕녀인 레아 실비아와 마르스 사이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탄생

• 왕위를 탐낸 누미토르의 동생 아무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아들을 죽이고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신전의 무 녀로 만듬 – 아무리우스는 레아 실비아와 마르스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로물루스와 레무스)를 강가에 던져버리도록 하지만 이들은 늑대의 젖을 먹으며 자랐고 이후 목동 파우스툴루스가 데려다 기름

• 리비우스, 『로마사』(Ab urbe condita) (BC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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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니 족 여인의 강탈

•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일행은 결혼 적령기의 전사 집단으로 여자가 부족

• 로마 북쪽에 거주하던 사비니족을 초대한 후 습격하여 여인들을 강탈

• 로물루스는 성급하게 반격했던 사비니족 전사들을 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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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강독 – 로마 문화의 혼종성

로마의 세력이 현저히 확장된 것은 사비니인들과의 동맹을 통해서였다. 사비니인들은 선조인 라 케다이몬(스파르타)인들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호전적이었다. 로물루스는 그때까지 쓰던 아르고 스(그리스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도시)식 소형 방패를 버리고 훨씬 더 큰 사비니인들의 원형 방패 를 쓰기로 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가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을 찾아낼 수 있 다. 거의 모든 민족들과 부단히 싸우는 과정에서도 그들은 적에게서 자신들 것보다 더 나은 제도 를 발견하면 주저하지 않고 즉시 자신들의 것을 포기할 줄 알았던 것이다.

- 몽테스키외, 『로마의 성공, 로마 제국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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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1627-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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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생,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 (16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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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 루브르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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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볼로냐, 『사비니 여인의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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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정치적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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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왕정 (Regnum Romanum)

• BC 753년부터 BC 509년까지

• 초기 로마는 양을 키우는 목축업에 종사 – 양떼를 모으는 목장 혹은 강가 를 중심으로 주거지 형성

• 에트루리아의 영향으로 도시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

- 성벽의 확장, 도로와 수로의 건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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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정치적 변천 – 공화정 로마

• BC 509년 공화정으로 이행 – Res Publica Romana

-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폭정에 항거한 귀족들이 그를 죽이고 공화정 성립

- 실질적인 귀족 과두정 형태

집정관 - 임기 1년이던 두 명의 집정관이 왕의 역할을 대체

원로원 - 귀족들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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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로마의 사회 구조

귀족(Patricus, Patrizi) – 공권(선거권과 피선거권) / 사권(통혼권과 사유권) 평민(Plebs, Plebei) – 사권만을 인정, 병역과 납세의 의무

예민 – 법적으로 귀족의 보호와 물질적 도움을 받는 사람들, 소작농이 대다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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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하에서 평민의 권리 신장

• 호민관

- BC 494년 소집된 평민 군대가 해산하지 않고 농성 – 호민관 창설 요구 - 점점 수가 늘어나 최대 10명까지

- 행정적 군사적 권한은 없었으나 거부권(veto) 행사 – 원로원의 결의가 평민의 권익과 어긋날 때 거부 가능

• 12표법

- BC 450년

- 귀족들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막았으나 여전히 차별조항들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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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강독 – 호민관의 권리

• 호민관은 원로원 의사당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의사당 문 앞에 앉아 원로원의 결정을 꼼꼼히 검토하였고 자신들이 승인할 수 없는 건에 대해서는 비토권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옛 날에는 ‘C’라는 문자가 원로원의 포고문에 부기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것은 호민관들이 포고 문을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호민관이 평민을 위해 감시를 계속 하고 정무관들을 억 제하는 데 전념하였을지라도, 정무관이 은장식과 금귀고리를 달고서 공공장소에 나오는 일은 허용하였다. 그런 복장으로 정무관들의 권위에 한층 위엄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 발레리우 스 막시무스, 『업적과 명언』,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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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강독 - 12표법

• 제 4표

IV.1. 마치 12표법에 의하여 특히 기형인 아이가 신속히 살해되었듯이.

IV.2.a. 부에게 동 법률은...자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주었다.

IV.2.b. 부가 자를 3차에 걸쳐서 매각한 경우에는 자는 부권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IV.3. 그녀<그의 처>에게 그는 12표법에 따라서 그녀의 물건을 가지고 가라고 명하였고, 열쇠를 빼앗고, (가에서) 축출하였다.

IV.4. 나는 그 여자가... 부의 사망후 제11개월 째에 출산을 하였고, 이 사실은 그녀가 부의 사망후 비로소 임신한 법률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법률<12표법>제정십인관이 사람은 10개월에 출생하며 11개월에 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법정하였기 때문이다

• 제 9표

IX. 1.2. 개인법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 가장 큰 인민 집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시민의 머 리에 관한 법을 제안하게 해서는 안된다.

IX.6. 판결을 선고받지 않은 누구든 ... 살해하는 것을 금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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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강독 – 12표법에 대한 평가

• 12표법에서 전해지는 가장 훌륭한 법 두가지가 있네. 그 중 하나는 개인에 관한 법들을 폐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의 머리에 관한 한 가장 큰 민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법을 요구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지 - 키케로, 『법률론』 3.19.44.

• 12표법의 의의 –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12표법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10인의 위 원이 그리스 법률 등을 참조하여 BC 451년 10표법을 제정하였으며 다음해 2표가 추가되어 12 표법이 되었다. 제 1표는 소송에 관한 규정, 제 3표는 채무 변상에 관한 규정, 제 4표는 민법에 관한 규정이었다. 로마인은 씨족제를 유지하여 가호는 마치 하나의 작은 국가와 같은 것으로, 가부장의 권한은 거의 무제한으로 보장되었다. 또한 귀족과 평민의 통혼 금지 규정과 같이 양 자간의 차별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다만 법의 성문화를 통해 적어도 귀족의 자의성 에 한계를 그었다는데 12표법의 의의가 있다. (차하순, 『서양사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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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00년 경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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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팽창

공화정 하에서 정치적 안정을 이룬 후 본격적인 정복활동 시작

BC 265년 –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정복 BC 264년 – 제 1차 포에니 전쟁

BC 218년 – 제 2차 포에니 전쟁 – 한니발의 침략

그리스와 소아시아 정복,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BC 149년 – 제 3차 포에니 전쟁

BC 2세기 – 지중해 전역을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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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강독 – 한니발의 알프스 행군

• 한니발은 이제 자신의 모든 병력을 장악하고 계속 하산하여, 바로 앞에서 기술한 절벽으로부 터 사흘간 행군하여 평평한 곳에 도착하였다. 그는 여러 강을 건너다가, 그리고 전반적으로 행 군 도중에 적군의 손에 의해 병력을 많이 상실하였다. 알프스의 절벽과 난관들은 그에게 병력 손실만이 아니라 더 많은 수의 군마와 짐 부리는 가축의 상실을 가져왔다.

• 노바 카르타고에서부터 이어진 행군 기간은 총 다섯 달이었으며, 알프스를 넘는 데는 열닷새 가 걸렸다. 그리고 과감하게 포(Po)강의 평원과 인수브레스(Insubres)인의 영토에 안착한 지금, 잔존한 병력은 아프리카은 보병 1만 2000명과 이베르인 8000명이었으며, 기병은 전부 해서 6000명을 넘지 못하였다.

• 이 수치들은 그가 라키니움에 있는 비문에서 자신의 병력 수와 관련하여 직접 언급한 것들이 다. - 폴리비오스, 『역사』, 3.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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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강독 - 노예징병

• 2차 포에니 전쟁 도중에 군 복무에 적합한 로마 청년들이 여러 불운한 전투로 인해 고갈되었 다. 이에 원로원은 콘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제안에 따라 노예들을 공공자금으로 구매하 여 적을 몰아내자고 선언하였다. 호민관들의 간섭으로 이 문제에 관해 인민에 의해 평민의 결 의가 통과되고 난 후에, 2만 4000명의 노예를 구입하기 위해 3인위원이 선임되었다. 열과 용 기를 다해 복무하겠으며 이탈리아에 카르타고인이 있는 한 무기를 들겠노라고 노예들에게 맹 세하게 한 후, 그들을 병영으로 보냈다. 아풀리아인과 파이디쿨리인(Paediculi)들 중에서도 노 예 270명을 구입하였는데, 이들은 기병을 대체하였다. ……

• 이제까지 재산이 없는 자유인을 병사로 삼는 일을 무시했던 로마는 노예 숙사에서 모집한 자 들과 목동의 오두막에서 모은 노예들을 주요지지 세력으로 군대에 더했다. - 막시무스, 『업적 과 명언』, 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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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64년의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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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강독 – 포에니 전쟁의 전후처리

• 그렇게 해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원로원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 다. “카르타고가 점령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이 보고서를 읽고 나자 원로원 의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논의했다.

• 카토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 사람들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반면 에 스키피오 나시카는 카르타고인에게 여전히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이를 둘러 싸고 의원들은 격론을 벌였다.

• ……

• 토론의 결과, 모든 사람이 카르타고를 파괴하는데 찬성하였다. 그 주민들이 완전히 평화로운 상태로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시 전체가 철저히 파괴되어 없어졌으며 그 지역에 어느 누가 정착하든지 저주받은 행위가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사로 잡힌 자들의 대부분은 투옥된 곳에서 죽었으며 소수는 매각되었다. - 조나라스, 『요약집』,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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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년의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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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BC 2세기 후반)

• 공화정 하에서 달성한 귀족과 평민 사이의 평등

- 경제적 평등이 아닌 정치적 평등

• 토지 집중화 현상

- 정복활동을 통해 로마에 병합된 토지가 소수의 귀족들에게만 분배

•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Tiberius Gracchus / Gaius Gracchus)

- 귀족들의 토지를 빼앗아 평민들에게 분배하는 개혁

- 귀족들의 폭력적인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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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강독 –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개혁

• 그의 동생 가이우스가 어떤 책에 기록하기를 티베리우스는 티레네를 경유하여 누만티아로 갈 때 농토가 황폐해진 모습과 수입된 야만인 노예들이 경작하고 목축하는 모습을 보고서, 공화 국이 수많은 미천한 출신의 노예들에 의해 타격을 받기 시작했음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 그[티베리우스]는 빈민에게 이렇게 호소하였다.

• “이탈리아에 떠도는 야생 짐승들도 저마다 은신할 굴이나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거나 죽은 사람들은 공동의 공기와 햇빛을 향유할 뿐,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 니다. 그들은 집도 없고 가정도 없고 처자식과 함께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장군들은 전쟁터 의 병사들에게 적에 대항하여 묘지와 신당을 방어하라고 촉구합니다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병사들 중에는 아무도 세습되는 재산을 가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다 른 사람들의 부와 사치를 위해 싸우다 죽을 뿐입니다. 그들은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들 자신의 소유라고 할 만한 땅은 단 한조각도 없습니다.” - 플루타르코스, 『티베리우스 그라쿠 스』, 8.7.;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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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의 위기

• 군인정치가의 등장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하자 평민들은 군사적 힘을 가 진 지도자를 지지 – 마리우스(평민)와 술라(귀족)

• 이후의 정치적 혼란

- 다수 권력자들 사이의 세력 균형 상태가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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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의 삼두정치

• 1차 삼두정치 –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 유럽 대륙이 지중해 문명권 속으로 편입 – 폼페 이우스가 카이사르를 제거하고 단독 지배자가 되려 하자 루비콘 강을 건 너 진격

• 2차 삼두정치 –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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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로마

•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황제 아 우구스투스로 즉위

• 팍스 로마나 (Pax Romana) –

AD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

우스가 세상을 떠나고 친자 코

모두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

며 정치적 혼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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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쇠퇴

• BC 2세기 말 - 군인황제 시대 (원인 – 외세로부터의 위협) [내란 지속]

• 285년 –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 서로마와 동로마를 분리 [내란 지속]

• 콘스탄티누스 황제 – 콘스탄티노플 천도

• 476년 서로마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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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멸망의 원인

• 게르만족의 침입 (BC 375년 이후)

• 제위 계승의 문제 – 양자가 제위를 잇는 제정 초기의 전통이 무너진 후 군대가 제 위 문제에 깊숙이 개입 – 게르만족의 침입을 방어할 여력을 상실

• 제국의 확대와 통치의 비효율성 – 교통과 통신 미비

• 그리스도교의 전파 – 내세 지향적 태도와 현실의 패배의식 확산

• 도덕적 타락과 해이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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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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