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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 精 神 分 析 :第 14 卷 第 2 號 2 0 0 3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14, No. 2, Page 194~203, 2 0 0 3
성과 지성의 변증법:D.H. 로렌스와 T.S. 엘리어트를 중심으로
李 炳 郁
*On the Dialectic of Eroticism and Intellectualism:
D.H. Lawrence and T.S. Eliot
Byung-Wook Lee, M.D.*서 론
20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동시대의 작가로서 시인 T.S.
엘리어트와 소설가 D.H. 로렌스는 작품경향이나 삶의 방향 및 성격 면에서 전혀 상반된 길을 걸었던 특이한 예에 해당 된다. 엘리어트(1888~1965)는 미국의 명문가 태생이지만 영국으로 귀화하여 성공한 시인으로서 한평생 영예로운 삶 을 누린 반면에 로렌스(1885~1930)는 그와 반대로 영국의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작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급진 적인 에로티즘을 표방함으로써 보수적인 영국사회에서 따돌 림을 당했으며 결국 조국을 떠나 해외를 전전하다 미국의 뉴멕시코 땅에 묻혔다. 엘리어트와 로렌스는 삶의 행로도 전혀 반대였지만, 그들이 작품에서 보인 사상이나 성향도 양극단에 위치한다. 엘리어트는 주지주의를, 로렌스는 반지 성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또한 두 사람은 출생 및 성장 배 경이 다르지만 기본 역동면에서는 모두 오이디푸스 갈등과 관련된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러한 특성들이 각자의 작품 경향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로서의 명성도 보수노 선을 대표하는 엘리어트가 노벨상이라는 명예를 거머쥐고 영국왕실로부터 귀족 칭호까지 받는 영예를 안았으며 죽은 후에도 유명인사들만 묻히는 대성당 묘지에 묻히는 등, 온 갖 사회적 예우를 다 받고 살다 간 행운아였다면, 진보적 노 선을 걸었던 로렌스는 일찍부터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심한 모욕과 추방까지 당하는 수모를 감수하며 살아야했던 불행한 운명을 걸었던 작가다.
전혀 상반된 운명을 걸었다는 의미에서 두 작가의 사상적 및 심리적 배경을 탐색해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로렌스와 엘리어트는 20세기 영문학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각기 성과 지성의 추구를 자신들의 기본 명제로 삼았지만 서로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 양극단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들 이 보인 극단적인 입장은 현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성과 지성의 대립과 모순, 그리고 그 러한 갈등을 해결하고 조화와 통합으로 이끄는 노력이 더욱 절실해진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성과 지성의 변증법적 시도에 실패한 두 사람의 행보는 혼란의 시대를 살 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숙제를 남겨두었다고 여겨진다.
지성파 시인으로서 엘리어트는 主知主義를 대표하는 작가 이다. 반면에 동시대를 살았던 D.H. 로렌스는 성을 찬미하 는 반지성의 선두대열에 올라섰던 작가였다. 부유하고 교양 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엘리어트와는 달리 로렌스는 탄광 촌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귀족이나 지성 인들의 질식할 것 같은 허구성과 기만성에 강한 반발과 혐 오감을 보였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 엘 리어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지성과 도덕적 질서였다면, 로 렌스에게는 육체적 만족과 희열, 그리고 자유가 더욱 중요했 다. 따라서 정신분석적으로 말한다면 엘리어트는 반리비도 적 태도를 견지한 반면에, 로렌스는 리비도찬양론에 기울었 던 것이다. 당연히 엘리어트는 반기독교적이며 범색론에 치 우친 것으로 여겨졌던 프로이트이론에 찬성할 수 없었으며 로렌스는 비록 전적인 찬성은 아니었지만 정신분석을 지지 하였다.
두 인물이 가장 창의적인 활동을 보였던 20세기 초반의 서구사회는 사상적으로도 극도의 혼란을 보였던 시기였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가치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서로 상충 되는 사상과 이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갈등 및 충돌을 보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최초의 세계대전은 서구의 몰락이 현실로 다가온다는 위기의식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神經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Neuro-Psychiatry, College of Medicine, Hallym Universit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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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낳았으며, 그런 점에서 미국인 부크먼이 영국으로 건
너가 1921년에 옥스퍼드에서 일으킨 도덕재무장운동(MRA) 은 그같은 시대적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념적으로 본다면 엘리어트 역시 동시대의 역사학자 토인 비와 같은 노선에 서있는 지식인이었다고 평가된다. 엘리어 트를 적극 후원하고 그와 오랜 기간 교분을 나누었던 현대 모더니즘 문학의 효시였던 미국시인 에즈라 파운드 역시 새 로운 질서의 회복을 드높이 외치던 나치 이념에 동조하여 이태리에서 활동하다 전후 미헌병대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 고 조국에서 추방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엘리 어트는 에즈라 파운드의 구명운동에 적극 앞장서기도 하였다 (김영민 1998).
어쨌든 20세기 전반부는 정치적 혼란 못지않게 서구지식 인사회 내에서조차 극도의 혼미상태를 보이고 있었던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리고 학문적으로는 프로이트주의가 서구인들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세계관의 변화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 으키고 있었던 시대였다. 특히 성에 대한 태도 변화는 프로 이트의 이론에 영향받은 바 크며, 격렬한 찬반논쟁의 불씨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그의 성이론은 오늘날에 이 르러서는 오히려 진부한 느낌을 주기까지 하지만 종교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특히 예술가들에게는 상당한 예술적 영 감을 불어넣어주는 결과를 낳기도 한 게 사실이다. 현대 서 양문학에서도 지성과 반지성 문학을 대표하는 T.S. 엘리어 트와 D.H. 로렌스는 특히 성에 대한 태도면에서 극명한 대 조를 보인다.
로렌스의 작품들은 당시만 해도 외설로 취급되어 출판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반면에 성적 타락을 경고하고 도덕적 가치의 정립을 강조했던 엘리어트는 노벨문학상을 수 상하는 등, 보수적 성향의 사회지도계층의 지지를 얻으며 승 승장구하는 영예를 안았다. 엘리어트는 그의 대표작‘황무지 (1923)’ 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Eliot 1971).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인간의 모든 욕정이 움트는 4월의 봄을 그는 냉소적인 시 선으로 바라보면서 만물이 얼어붙은 추운 겨울이 오히려 따 뜻했었다고 실토한다. 차가운 지성의 금욕주의자가 던지는 경 고의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D.H. 로렌스는 그
의‘겨울 이야기’ 라는 시에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 의 욕망을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어제 들판은 오직 흩어진 눈으로 희뿌옇더니 지금은 가장 긴 풀잎도 거의 내다보이지 않는다.
허나 그녀의 깊은 발자국은 눈을 밟고 흰 언덕 끝 솔밭을 향해 걸어갔구나.
눈위에 드러난 여인의 발자국을 뒤따르는 한 남자의 모습 이 추위마저 물리치는 듯 하다. 차가운 눈의 감촉과 남자의 뜨거운 열정이 하얀 솔밭길을 따라 서로 갈등하며 끝없이 이 어진다. 마치 이성과 감성의 대립과 반목에 번뇌하는 인간 심성의 보편적 갈등을 나타내는 장면같기도 하다. 이처럼 현 대 영국문단의 두 거물이 성에 대한 태도면에서 극명한 대 조를 보인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20세기 전반은 엘리 어트의 승리인 듯 보였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대중들의 성에 대한 인식이 급변함으로써 로렌스의 입장이 우위에 서 게 되었다. 이른바 성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한 혁명 의 불씨는 단연 프로이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다. 왜냐하면 로렌스가 프로이트의 학설에 동조하고 무의 식적 환상에 대한 저술도 남긴 것으로 봐서 그는 정신분석 이론에도 남다른 관심과 공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아는 것이 힘’ 이라는 모토아래 인간은 지식을 연마하기 위해 수명의 절 반 이상을 교육에 투자한다. 그러나 지식도 그 정도가 지나 치거나 타인을 지배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면 인간을 고통 과 불행에 빠트리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특히 동양의 불 교사회는 수천 년간 탈지식, 탈사고 등의 무사무념을 기치로 내세운 전통에 입각하여 해탈의 가장 큰 장애물을 지식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지식화 intellec- tualization는 특히 강박적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자주 사용 하는 자아방어기제 중의 하나이다. 지식화의 주된 목적은 감 정을 회피하는데 있다. 강박적 성격은 감정적 소용돌이에 휘 말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강렬한 성적 흥분이나 불안, 분노 등의 감정을 억압하는데 지식화는 아주 긴요한 방어기 제이다. Freud(1909)는 쥐 사나이 증례의 분석에서 고전적 인 강박증 환자의 주된 갈등의 근원과 방어 전략을 자세히 기술한 바 있다.
엘리어트는 이러한 지식화 작업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적
경험을 회피하고 승화시키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반면에 로
렌스는 그러한 지식화의 허구성과 위선적인 본질을 간파하
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로렌스가 보기에 엘리어트
같은 사람은 점잔빼는 위선자이며 엘리어트가 보기에 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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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같은 사람은 천박하고 부도덕한 인간쓰레기에 불과했을 것 이다.
지성과 품위, 이성과 질서의 땅을 찾아 미국을 등지고 영 국에 귀화한 엘리어트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이 있다.
바로 D.H. 로렌스가 그 사람이다. 그는 영국 노팅검에서 태 어나 교육받고 자란 후 성을 찬미하며 반지성주의를 외치는 작품활동으로 영국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다가 결국 영 국을 떠나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 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미국 뉴멕시코주의 타오스에 안장되 었다. 엘리어트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로렌스는 영국에서 미 국으로 삶과 죽음의 행로가 정반대이듯이 그들의 신조 또한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한사람은 질서를 찾아서 또 다른 사 람은 자유를 찾아서 제각기 다른 길을 찾았다. 그러나 엘리 어트는 영국에서 성공하였지만 로렌스는 미국에서도 환영받 지 못하였다. 그가 묻히고 싶어했던 곳은 뉴욕이나 샌프란시 스코가 아니라 푸에블로 인디안들이 살던 뉴멕시코의 땅이 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이 사는 미국은 로렌스에게는 이미 죽 은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성주의를 추구한 엘리어트는 성과 무질서의 낭비를 피하여 귀족의 땅 영국으로 도피하였 지만 모든 영국인들이 귀족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더욱이 로렌스는 한때 힐다 둘리틀의 아파트에 얹 혀사는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그녀는 프로이트에게서 분석 을 받은 몇 안되는 미국인 중의 한사람이다. 작가였던 그녀 는 열렬한 프로이트 숭배자였다. 로렌스 역시 프로이트의 정 신분석에 흥분하였다. 프로이트의 성이론과 무의식, 환상이 론은 로렌스에게는 백만 원군이라도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半자전적 소설인 [아들과 연인]은 외디푸스 갈등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자신의 내적 갈등을 심도있게 파헤친 게 아니라 오히려 외부 세계로 투사함으로써 자신과의 직면을 회피하고 말았다. 그 는 냉소적인 시각으로 마치 자신의 인격적 결함이 아니라 인 류 전체의 우둔함으로 문제를 일반화시키면서 스스로 우월 감에 빠져 있었다. 그가 빈정거리듯 자주 사용한‘hollow men 머리가 텅빈 인간’ 이라는 표현은 자신에 대한 자조적 인 표현이 아니라 엘리어트 자신의 우월의식을 반영하는 것 이다. 그러나 그가 취한 의식적 태도는 자신의 내면에 감춰 진 열등감에 대한 반동형성일 따름이다. 미국의 중서부 변방 도시에서 태어나 귀족적인 영국사회로 귀화한 엘리어트는 영국인답게 살기 위해 무던히 애썼지만 결혼 및 성문제의 실 패와 좌절은 그로 하여금 더욱 더 보수적인 방향으로 삶의 진로를 택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문학에서의 고전주의자, 정치적으로는 왕당파, 종교적으로는 영국국교회파임을 누차 강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사람들의 시선을 지나
치게 의식하는 편이었다. 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엘리어 트나 로렌스 모두에게 주어진 화두와도 같은 주제였다. 로 렌스는 오히려 성에 집착함으로써 정면돌파를 꿈꾸었지만 여 의치가 않았고 엘리어트는 성을 혐오하고 회피하는 동시에 지성으로 과대 포장하고자 했다.
다만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성 일변도의 찬양이나 지성 일변도의 강요가 아니라 성과 지성의 적절한 조화와 통합적 노력에 실패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영과 육의 갈등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였다.
프로이트는 그러한 인간적 갈등의 근원을 탐색하는데 일생 을 바쳤지만 그러나 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지성의 무 가치성을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인간정 신의 건강은 강력한 이드의 압력과 가혹한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아의 적절한 균형 유지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점 을 누누이 강조하였다(Freud 1923). 물론 문화적 억압구조 로서의 일부일처제 이데올로기에 강력히 대항하면서 성 해 방운동의 선도자 역할을 자처했던 Reich(1945)는 이러한 성문제의 해결을 도모하기 하기 위해 극단적 방향으로 치달 았다. 그러나 청소년들에게 금욕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오히 려 성교를 권장하고 더 나아가 자연에 반하는 인위적인 결 혼제도의 붕괴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그가 말한 성 해방은 또다른 신경증적 자아의 조짐을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라이히는 프로이트가 후기에 가서 리비도설을 포기하고 자아의 현실원리를 강조하기 시작한 구조이론에 대 하여 수정주의적 현실타협이라며 맹공을 퍼붓기도 하였다.
시대가 바뀌어도 영육의 갈등은 특히 수많은 청소년들을
고통과 위기에 빠트리는 주범이 아닐 수 없다. 성과 지성의
문제야말로 그러한 청소년기적 갈등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
서 Blos(1962)가 청소년기 갈등의 핵심을 변증법적 단계로
파악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아이도 아니
고 어른도 아닌 미완성의 시기에 청소년들이 겪어 나갈 과
제는 부모에 의존적인 아이의 단계에서 점차 부모로부터 독
립하여 독자성을 추구해 나가는 과도기적 혼란을 극복해야
하는 변증법적 노력의 시기라는 점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청소년기 혼란의 시기
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겪어나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감수성이 유달리 민감한 일부 창조적 인간들은 보다 큰 위
기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그러한 위기의 탈출구로서 자신들
의 열정적인 창조적 작업을 통한 해소책을 강구하기 마련이
다. 인류는 그들의 자발적인 희생의 산물인 창조적 업적을 소
중한 문화 유산으로 선사받은 셈이다. 엘리어트와 로렌스 두
사람 역시 성과 지성의 대립과 반목, 그리고 갈등 해결에 적
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그러한 실패를 자신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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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작품활동을 통하여 승화시키고 자기치유의 한 수단으
로 유효적절하게 활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T.S. 엘리어트의 주지주의
엘리어트의 대표작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했던 [황 무지]의 심리역동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에서도 연구 된 바 있다(이병욱 2001). 엘리어트의 강박적 특성은 감정 의 회피를 지성화로 방어하는데 있다.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 던 시인 Spender(1976)는 엘리어트에 대한 인상을 매우 수 줍어하고 냉소적이며 너무 심각하지만 헌신적인 인물로 평하 면서 그의 보수적인 생활스타일, 겸손한 태도 등에서 보이는 엄밀성과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현란한 시적 농담과는 흥 미로운 대조를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아이러니칼 하다고 하 였다. 엘리어트가 표방한 주지주의의 근원은 스스로 직면하 고 싶지않은 자신의 감정적 고통을 지성화 작업을 통하여 은 폐시키는데 있었다. 그와 같은 감정적 교류의 회피는 강박 적 성격의 소유자들이 흔히 보이는 방어기제에 속한다. 강 박적 시인은 자신이 부르는 노래에서조차 감정적 요소를 배 제시킨다. 엘리어트의 난해시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없으 면 이해가 불가능하다. 특히 무수히 동원되는 라틴어 및 고 대신화의 내용들은 지식이 짧은 대중들로서는 손쉽게 접하 기 어려운 부분들이며 자세한 주석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 다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엘리어트의 시는 감정을 노래하 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강요하는 시이다. 그것을 세간에서는 주지주의 또는 지성주의라고 부른다. 시인의 정신상태가 그 의 예술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 있다는 증거는 엘리어트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Eliot 1988).
엘리어트는 1930년대초 버지니아 대학 강연에서 로렌스 에 대하여 역겨운 인물이라고 혹평했는데 이는 나중에 [異 神들을 찾아서 After Strange Gods(1934)]라는 글에서 로 렌스를 전통과 권위를 파괴하는 위험인물로 평가하고 특히 불건전한‘채털리 부인의 사랑’ 은 폐기시켜 마땅하다고까지 혹평하는 쪽으로 발전했다(Eliot 1934). 뿐만 아니라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강박증세이기도한 완전벽과 결벽 증을 일반화시켜 혐오스런 불결함과 오염으로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엘 리어트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태어난 미국사회를‘자유주 의라는 벌레가 갉아먹는 사회’ 라고 하면서‘외국 인종의 침 략’ 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한 국가는 단 일민족이어야 되며 다른 인종과 뒤섞이지 않는 순순한 혈연 관계로 구성되어야함을 역설하고 더 나아가 유태인이 많은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까지 하였다. 이 부분에서 그는 당 시 득세하던 나치즘의 아리안 인종주의와 맞닿는다. 그는 이후에 가서도 유태인에 대한 자신의 언급을 결코 철회하지 않았다(Ackroyd 1984). 적어도 그 자신의 개인적 사유세 계에서 순수와 청결, 그리고 질서에 반하는 가장 주된 대상 은 다름아닌 여성과 유태인의 존재였다. 그들의 존재야말로 엘리어트가 지향하는 이상적 사회, 즉 경건함과 순결성, 도 덕성 및 질서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 이 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Julius 1995). 순결과 질서에 대한 그의 집착은 단순히 그가 살았던 시대적 분위기의 영 향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물론 엘리어트의 문학활동이 최 고의 황금기를 맞고 있을 당시의 유럽은 파시즘 열풍에 휘 말리고 있었으며 동시에 몰아닥친 반셈주의는 결국 부도덕한 유태인의 학문으로 간주된 정신분석마저 구대륙에서 모조리 추방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Frosh 2003),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상황뿐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형성된 엘리어트의 강박적 성격은 이 세상의 모든 무질서, 불결성, 타락성, 혼 합성, 혼잡성, 불순성, 혼미성, 그리고 온갖 비틀림에 대하 여 근본적인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어트의 주지주의는 동시대의 도덕적 타락과 전쟁의 광
기에 혐오감을 느끼고 동시에 서구의 몰락이라는 위기감에
빠져있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또한
그의 엄격한 기독교신앙과 도덕성의 회복을 구하는 경건주
의는 종교계의 지지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엘리어트의 귀족
정신은 속물근성에 대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
였는데 일반대중들로서는 그의 시가 너무 난해하고 현학적
이며 고도의 고전지식을 요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에 대
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는 결점이 있었다. 지성 그 자체는
인간 고유의 특성이며 동시에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
다. 지성주의를 표방한다는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권장되어야할 사항이기도 하다. 문제는 지
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또 다른 중요한 본성
인 성을 억압하고 혐오하도록 강요하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태도를 결정짓는 초자아의
기능이 지나치게 확대되어도 곤란하고 지나치게 위축되어도
문제다. 초자아 기능이 보다 탄력성을 잃고 심하게 경직될
때, 인류는 가혹한 고통을 겪는 수가 많았으며, 풍부한 감정
의 표현보다 잔혹한 초자아의 징벌 때문에 온갖 비극이 초
래되는 경우가 많았음은 인류역사가 증명해주는 바이다. 지
성이 반대하는 것은 인간의 야수성 및 야만성이다. 그러나
엘리어트가 살았던 시대는 그가 그토록 외치던 지성은 사라
지고 야수성이 활개를 치던 시기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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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여 서구사회는 몰락의 징조를 뚜렷이 보이고 있었던 것 이다. 순수한 도덕성의 회복을 희구하던 엘리어트의 입장에 서는 그러한 야만성을 부추기고 인간의 지성을 파괴하는 원 흉의 하나로 프로이트와 로렌스를 지목했던 것 같다. 인간의 본성, 그리고 성을 그토록 강조했던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어트는 인간의 성에 대하여 상당히 강박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성직자나 수도승의 금욕적인 태 도와 비슷한 데가 많다. 그는 성이야말로 인간을 타락시키 는 원흉으로 간주하였으며 그러한 금욕주의는 자신의 불행 했던 결혼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동시에 여성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도 그의 중요한 작품 배경을 이루는 것이 특 징이다. 그는 마치 타락한 인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호 천사와도 같이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질타하였지만 그처럼 타락한 인간들의 도덕성에 의해 억압받고 온갖 수모를 당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나 동정심도 보이 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과연 진정으로 도덕적인 사 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기도 하며 적어도 따스한 인간적인 면모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는 차갑고 냉소적이며 농담을 할줄 모르는 신경질적인 사 람으로서 그 자신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의 작가들에 대한 논평에서도 죄와 악마라는 종교 적인 용어를 자주 사용했으며 이단이라는 표현도 즐겨 사용 하였는데 기묘하게도 선과 성스러움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한 현상이기도 하다. Gordon(2000)도 지적하였듯이 엘리어트의 작품들은 그 자신의 자전적인 요 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자신의 불완전한 삶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그 의 완벽주의는 자신의 불완전한 내면세계에 대한 반동형성 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어트 자신도 어렴풋이 詩作에 관련 된 개인적 어려움을 논한 바 있는데 그는 현대시의 난해성 에 대한 변명 비슷하게 말하기를, 시인 자신을 드러내고 표 현하기 불가능한 그래서 모호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 도록 만드는 개인적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Eliot 1964).
여성과 유태인에 대한 병적인 혐오감 및 성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은 그의 사유세계를 상당히 제한적으로 묶어두는 효 과를 낳았지만 반면에 인간의 공격성에 대해서 그는 별다른 인식을 지니지 못한 듯하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성장 한 그에게 인간적 학대나 굶주림의 공포에 대하여 이해를 기 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인간 심성에 내재된 가혹한 초자아 의 도덕적 요구와 이드의 무자비한 공격성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결여는 결국 귀하게 자란 막내아들로서의 심성적 한
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마치 순례자와도 같은 행적을 보여 준 그의 고결한 삶의 흔적에 있어서 옥의 티를 보는 느낌이 다. 자신도 예기치못한 성공과 영예로 점철된 그의 인생 역 정은 서구사회의 과잉보호로 인해 통렬한 자기 반성 및 탐 색 과정이 조기에 차단된 채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적 평가 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점들이 엘리어트로 하여 금 전인류적인 통찰을 할 수 없도록 만든 개인적, 환경적 요 인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최근까지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있는 뮤지컬 [캣츠]는 그 의 작품 [늙은 주머니쥐의 고양이에 대한 지침서(Old Pos- sum’ s Book of Practical Cats) 1939]를 개작한 것인데 원 작은 일종의 넌센스 詩로 알려져 있으며(Eliot 1961), 엘리 어트가 본래 의도한 것은 여흥거리나 즐거움을 주고자 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흥미로운 볼거리를 요구하는 오늘 날 대중들의 욕구에 맞추어 적절히 변질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삭막한 심성을 빈정거리듯 풍자하는데 있어 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엘리어트의 뛰어난 재능은 작가 자신의 내면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에 더욱 대중들의 공감 을 불러 일으키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강박적인 성격의 엘리어트가 강박증의 대표적인 증례로 제 시한 프로이트의 쥐 사나이에 대한 정보를 접해본 적이 있 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특히 쥐와 고양이를 주제로 작품 을 남겼다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원래 늙은 주머 니쥐는 친구인 에즈라 파운드가 그에게 붙여준 별명으로 주 머니쥐의 특징은 적을 만났을 때 일부러 죽은 체하는 버릇 이 있다고 한다. 엘리어트는 자신이 어릴 때 그의 아버지가 고양이를 기르며 취미삼아 고양이를 그리기도 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 자신도 고양 이를 키우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Ackroyd 1984). 고양이 와 순교자는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인데 그에게 고 양이는 아버지를, 그리고 순교자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떠올 리는 상징적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엘리어트의 주지주의는 성을 배제시킨 순수한 영적 진화
를 추구한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가 보
낸 경고는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
대의 성적 타락은 오히려 프로이트가 우려했던 부분이다. 그
가 바란 것은 성본능과 초자아의 횡포를 견고한 자아로 하
여금 적절히 타협해 나갈 수 있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Fr-
eud 1923). 그런 점에서 엘리어트와 로렌스는 너무 극단적
인 방향으로 앞서 나간 것 같다. 성의 탐닉이나 성의 배제
모두 통합적 자아의 발전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로렌스
는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일찌감치 배척당했지만 엘리어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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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함께 맞물려 성공을 거듭
했기 때문에 거시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더욱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D.H. 로렌스의 에로티시즘
로렌스는 귀족적 인간 및 지식인들의 위선과 기만에 염증 을 느끼고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의 모토는 결 국 모든 위선을 떨쳐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로렌스의 대표작 [아들과 연인(1913)]은 그 자신의 가족적 배경에서 비롯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그대로 반영한 소 설이다(이재우 1988). 아버지에 대한 반항 및 적개심, 어머 니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 이성관계에서 드러난 미해결의 콤플렉스 등, 로렌스는 자신의 성장배경 자체가 정신분석이 론의 고전적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탈취할 수 없는 대신에 스승의 아내를 유혹하고 대리 정복함으로서 아버지에 복수 한다. 로렌스의 에로티시즘 예찬은 그의 모든 작품에 반영된 다.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그로서는 교양과 지성으로 무장한 귀족계층과 지식인사회의 허구적인 의식세 계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모든 권력을 독차지한 권위 자체에 대해 강한 염증을 느낀 것이 분명하다.
한동안 외설시비에 휘말려 출판이 금지된 그의 대표작 [채 털리 부인의 사랑(1928)]도 산지기의 원초적인 사랑에 힘 입어 성의 희열에 눈뜬 귀부인의 행로를 밝히고 있는데 이 는 아들의 입장에서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누구의 남근이 더 큰가 경합을 벌이는 아버지와의 경쟁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또한 아무도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귀부인은 어머니를 나 타내며 남편이 모르는 사이에 산지기와 불륜의 관계를 벌이 는 두 사람은 금지된 관계인 동시에 위험한 관계이기도 한 모자관계를 상징한다. 금지된 사랑은 영원히 깰 수 없다. 그 것을 파기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환상의 세계에서나 이 루어질 수 있다. 로렌스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들이 추구하 는 창조적 작업에는 이같은 무의식적 욕망과 환상이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오로지 자발적인 충동에 내몰리는 작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로렌스의 성생활은 과연 성공적이었는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삶의 철학으로서 성을 찬미했던 로렌스 입장에 서는 자신의 은밀한 성생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모험을 시도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가 보여준 것은 작품속 의 가공적인 인물들을 통하여 성의 희열이 어떠한 것인지를 짐작 가능하게 해줄 뿐이다. 그것이 실제 그의 삶의 모습을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 자신의 환상을 옮긴 것인지 여 부를 판단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다만 추론컨대, 그가 자신의 스승인 위클리교수의 부인 프 리다와 사랑에 빠진 것이 그의 나이 27세 때였으며 정식 결 혼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으로 그의 나이 29세 가 되던 해였다. 당시 프리다는 세 아이의 어머니였으며 로 렌스보다 4년이나 연상이었으니 성의 절정기를 맞고 있을 때 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로렌스 자신은 어려서부터 허 약한 체질과 폐질환으로 고통받아 왔으며 결국 45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작 품에서 보여주는 왕성한 성적 활동을 실제 생활에서도 이루 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죽기 전에 완성 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산지기 멜러스의 실제 모델은 그가 알고 지내던 이태리인 군인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1922년 그가 결핵으로 몹시 고생하고 있을 때, 자신의 부 인과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던 마부였다는 주장도 제기 되었다(이지형 2001). 투병생활로 지중해 연안을 전전해야 했던 그의 신체적 상태로 보아 로렌스 자신의 성적 활동은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 지할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된 남편 클리포드의 모습은 거세 된 남성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라는 설정도 매우 시사적이다. 그 전쟁은 어머니를 사 이에 둔 부자간의 치열한 전쟁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에로티시즘은 외면적으로는 금욕적이나 실제면에서
는 성적으로 문란하기 그지없던 시대적 위선과 기만성을 여
지없이 타파했다는 점에서 성해방론의 선구자로 여길만도
하다(이재우 1996).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성의 찬미는 자
신의 근친상간적 욕망이 차단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요 화풀
이일 수도 있다. 그의 생애 자체도 영속적인 성의 희열로 이
어진 실천적 철학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맴
돌고 말았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다. 로렌스 자신의 실제 인
생은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의 호소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주변인물들로부터도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다. 그는
고립되었으며 안주할 땅도 마땅치 않았다. 물론 오늘날에
이르러 로렌스의 문학을 외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공개적으
로 읽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성은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개하기 꺼림직한 은밀한 그 무엇이
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행위 자체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더욱 심층적인 무의식 내용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내밀한 부분과 연계되는 것에 대
하여 원초적인 불안을 지니기 마련이다. 로렌스는 누구나 잊
知性과 反知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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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싶어하는 그러한 부분을 계속해서 두드리고 자극한다. 그 러한 부분에 과민한 사람들은 로렌스의 문학을 외설이라고 경계하고 익숙한 사람들은 예술이라고 찬미하는 것인지도 모 르겠다.
삶의 행로
엘리어트와 로렌스의 삶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기이하게 도 두 사람은 전혀 상반된 노선을 따라 살았음을 알 수 있 다. 엘리어트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으로 귀화하여 시 인으로 성공한 후 유서깊은 교회사원에 묻혔고 로렌스는 영 국에서 태어났지만 추방되어 여기저기 전전하다 폐병으로 죽 어 결국 미국 뉴멕시코주의 황폐한 인디언 땅에 묻혔다. 엘 리어트는 천박한 미국이 싫어 점잖은 영국인이 되었고 로렌 스는 위선적인 귀족들이 싫다며 보다 야성적인 인디언 사막 지대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들이 내세운 예술철학도 전혀 달 랐다. 지성을 앞세운 엘리어트의 주지주의에 반해서 로렌스 는 지성을 타파하고 성을 찬미하였다. 그러나 전혀 상반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심리적 근저에는 동일한 오이디 푸스적 갈등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보다 원초 적인 대상관계에서 비롯된 감정적 문제도 있겠지만 기록으 로 알려진 자료만으로는 추론키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그러 나 오이디푸스적인 갈등 해결에 두 사람 모두 실패했었다는 점은 분명한 듯 싶다.
엘리어트는 원래 미국 중서부의 명문가 출신으로 유복한 가정의 막내아들로 성장하면서 어려서부터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고전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아 대학 을 졸업한 이후에도 지식에 대한 갈증으로 유럽을 전전하며 배움의 폭과 시야를 넓혔다. 다소 신경질적이며 깔끔한 외모 의 엘리어트는 당시 유럽의 고전지식을 습득하므로써 서구 지식인들의 지적으로 고상한 분위기에 매료되었으며 천박한 물질주의로 북적대는 미국사회와는 자신이 무언가 맞지않는 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따라서 젊은 나이에 귀국하지 않고 영국에 살기로 결정하고 눌러앉고 말았다. 그는 영국시민으 로 귀화한 것에 그치지 않고 영국국교로 개종하기까지에 이 르렀다. 철저한 영국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반면에 로렌스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전 형적인 영국서민 출신이었다. 그는 외모도 그리 보잘것 없었 으며 쾌활한 성품도 아니었다. 말을 유창하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허약한 체질로 병치레가 잦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여성들을 추구하였으며 또한 상대 여성들로부터 모성애를 발휘하도록 자극하는 재주가 있 었던 것 같다. 엘리어트는 여성에 관심이 없었으나 로렌스는
여성에 집착하는 편이었다. 엘리어트는 성에 대하여 부정적 인 입장으로 수도승과 같은 금욕적 자세를 견지했으나 로렌 스는 성의 찬미를 극단적인 방향까지 몰고 갔다. 엘리어트 는 로렌스 문학을 외설로 단정지었다. 엘리어트는 자신의 작품속에서도 성을 불결하고 타락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 을 보였으며 그에게는 성이야말로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 다. 그는 성에 오염되고 타락한 현대인의 모습을 계속해서 조 소와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따라서 이단으로부터 정통 을 보호하고자 애쓰며 기독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던 엘리 어트의 입장에서는 로렌스야말로 전형적인 이단자로 비쳐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황철암 1994). 성이야말로 인간의 유일한 구원이라고 믿었던 로렌스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엘 리어트는 성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던 인물이었다.
그들은 무엇에 쫓기듯이 자신들이 태어난 조국을 등지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항상 모국을 그리워했다. 다시 말해서 본의건 아니건 간에 조국을 등진 것은 아버지의 나라에 등 을 돌린 것이다. 반면에 항시 마음속에 간직된 모국에의 항 수 및 그리움은 어머니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그들 은 경멸과 그리움이라는 양가적 태도를 자신들이 태어난 땅 에 대해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과 경멸 그 리고 질투심은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나라에 함께 몸담고 살아가기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 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친근감으로 인해서 모국을 잊지 못 하고 그러한 그리움을 모국어로 작품을 쓰면서 달랬을 것이 다. 그들 모두는 아버지의 나라, 조국을 배신하고 떠났지만 어머니의 나라, 모국을 잊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국어인 영 어로 일생동안 작업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갈등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은 자전적인 소설이다. 그의 아버 지는 거칠고 무식한 광부에 주정뱅이였으며 어머니는 중류 가정 교사 출신으로 남편에 대한 실망을 아들에게서 보상받 고자 한 여성이었다. 로렌스는 실제로 청년이 될 때까지 어 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 사이에서 엄청난 갈 등을 겪으며 성장했다. 이성에 대한 그의 집요한 추구와 성 에 대한 미화는 결국 자신의 근친상간적인 욕구의 좌절에 대 한 보상과 대리충족의 결과로 보인다(Panken 1974).
그는 결국 자신의 어머니가 사망한 직후 스승의 아내를 가
로채어 도주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조국에서 추방되고 이국
땅을 전전하게 된 것도 결국은 아버지의 아내를 가로채고자
하는 자신의 해결되지 못한 근친상간적 욕구와 무관하지 않
다. 이는 결국 폭군적인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구원해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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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로렌스 자신의 구원환상을 행동화한 것이다. 그러한 행
동화는 구원의 대상인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 제목인 [아들과 연인]이 의 미하는 것이 아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입장에서 본 아들이자 동시에 연인이기도 한 관계를 뜻한다고 볼 때, 제목 자체가 이미 투사적 방어기전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 본다. 왜냐하면 근친상간적 욕망은 어머니의 책임이지 아 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렌스의 삶을 전, 후반기로 나눈다면 오이디푸스 갈등 해 결에 실패한 전반기 인생, 그러한 갈등을 행동화시킨 결혼생 활 및 작가의 길로 들어선 후반기 인생으로 구분할 수도 있 겠다. 그런 점에서 로렌스의 창작 활동은 자신의 갈등을 해 소하기 위한 자기치유책도 되는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로렌 스의 성장과정에서 겪게된 부모와의 갈등은 마치 프로이트 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전 형적인 삼각구도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로렌스 자신도 프 로이트의 이론에 공감하고 [정신분석과 무의식], [무의식의 판타지] 등을 쓰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신분석이론의 모든 것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Lawrence(1991)는 [무 의식의 판타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의 일부분은 진실이다. 빵이 없 는 것보다는 반 쪽이라도 있는 게 낫다. 그러나 빵이 없는 다른 반 쪽도 생각해야 한다. 성이 모든 것은 아 니다. 논쟁할 필요도 없이 성적인 동기가 모든 인간 활 동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중략- 대 성당을 세우는 것이 과연 성교행위를 위해서인가? -중 략- 융은 대학교의 가운을 벗고 성직자의 흰옷을 택했 으나 프로이트는 과학자 편이다.”
여기서 로렌스는 성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성적 동기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적 동기를 인정한 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는 횃불을 들고 기름독 안으로 뛰어 드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심층 내면을 직면할 준비태세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다. 그대신 로렌스 는 소설속의 주인공을 대리인으로 삼아 자신의 근친상간적 욕망을 합리화시키면서 결국 모자간의 사랑은 영원한 것으 로서 단지 사회적 윤리라는 이름으로 억압된 보통 남녀간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반면에 엘리어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랐지만 그 역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질투심 및 혐오 감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성장했다. 어머니를 가로챈 아 버지의 존재를 엘리어트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으며 결 국 그는 자신의 조국인 미국을 버리고 영국에 귀화하고 말
았다. 그의 어머니는 신앙심 깊은 현모양처로 문필에도 재능 을 보인 여성이었지만 아버지는 신체장애자였다. 아버지보다 월등히 우월한 지적 능력을 확보한 이후에도 엘리어트는 어 머니를 소유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독일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다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런던에 눌러앉고 말았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여성은 매우 히스테리적인 여성 비비안 헤이우드로 엘리어트는 부모가 결사적으로 반대한 결혼을 무 릅쓰고 강행시킴으로써 부모에게 복수했다. 그러나 복수의 대가는 너무도 컸으며 그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지옥과도 같은 체험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결코 용서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아들과 서신교환을 나 누었다. 1915년에 이루어진 그녀와의 결혼은 그에게는 그야 말로 둘도 없는 악몽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Bergonzi 1972).
신경쇠약에 빠진 엘리어트는 1921년 스위스의 비토즈 박사 에게 치료를 받기도 했으며 그 유명한‘황무지’ 는 그 후에 완 성된 것이다. 결국 엘리어트는 1933년부터 아내와의 별거를 결심하였으며 그 후 비비안은 발작증세의 악화로 1939년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끝에 1947년 그곳에서 죽었다. 엘리어트의 출세작 [황무지 (1923)]는 이 러한 그의 결혼배경을 토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작품 이다(Trosman 1974). 당시 그는 매우 심각한 신경쇠약 및 우울증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시인 자신의 창작 경위를 들어보면 그러한 심리적 배경이 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어떤 형태의 질병은 종교적인 깨달음이나 예술적 문학적 창작에 매우 바람직하다. 몇 달 혹은 수 년 동안 진척이 없 던 계획된 작품이 갑자기 형태와 말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 리고 이런 상태에서 다시 수정할 필요가 없는 긴 문장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김영민 1998).
오이디푸스 갈등 차원에서 본다면 로렌스나 엘리어트 모
두 그 해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탁월한 재
능의 예술가였고, 각자 창의적인 작품활동을 통하여 자신들
의 미해결된 갈등을 해소하고 승화시키는 행운을 누렸던 인
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슷한 오이디푸스적 갈등 상황에
놓였던 두 인물이 성장한 후에 겪어나간 행로가 전혀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우선 초자아 형성 과정에 차
이가 있을 수 있다. 엘리어트의 집안은 경건한 기독교신앙
의 분위기속에 도덕적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그
러나 로렌스의 집안은 윤리도덕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경건
한 종교적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엘리어트의 부모는 사
회적 지위와 신분이 높은 나름대로의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
었지만 로렌스의 부모는 가난한 서민출신으로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그럴 입장이 못되었다. 따라서 엘리어트는 보
수적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입장인 반면에 로렌스는 진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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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계층을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엘리어트가 차갑고 냉 소적이라면 로렌스는 열정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고 보여진다. 엘리어트가 일생동안 추구한 좌우명은 질서의 확립이었다. 그러나 로렌스는 그러한 질서를 무시하고 과소 평가하였다.
두 사람 모두 막내아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엘 리어트는 7형제 중 막내이고 로렌스는 5남매 중 막내아들이 다. 형제 순위가 인격 발달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에 대하여 아들러가 이미 오래 전에 언급한 바 있다(Ansbacher와 Ans- bacher 1956). 그는 특히 열등감을 강조하였지만 인격의 성 장에는 보다 근원적으로 부모와의 갈등이 선행한다고 볼 때, 이론의 지나친 단순화가 오히려 인간 심성을 이해하는데 장 벽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아들러가 촉발시킨 형제 순위에 관한 의문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광범위한 연구조사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현재로서는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지는 못한 듯하다. 그러나 막내의 특성으로 아들러가 지적한 내용은 가족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막내들은 의존적이기 쉬우며 다른 형제들에 비해 특히 열등감이 심하 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경쟁적이기 쉽다고 하였다. 어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는 점에서 엘리어트 와 로렌스 두 사람 모두 공통되겠지만 막내아들이라는 위치 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전오이디푸스 단계인 조기 모자관계에서의 유아경험이 그들 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으로 남겨진 뚜 렷한 증거가 없어 분명하게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그들이 사랑과 미움의 통합적인 시도에 미숙하였다는 측면에서 본 다면, 자신들의 이성관계에서 보여준 신경증적 경향을 설명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 중의 하나인 사랑과 미움의 통합에 실패하게 되는 경우,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는 점에서 성과 지성 모두 어느 양극단에 기울어진 삶의 철학을 지녔던 두 인물의 행보는 유아기적 대상관계가 여의치 못하였음을 짐 작케 해주기도 한다.
결 론
20세기 영문학사에 뚜렷한 개성을 남긴 두 작가 D.H. 로 렌스와 T.S. 엘리어트는 동시대를 살다간 인물들이면서도 삶 의 철학 및 인생경로가 전혀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는 점에 서 매우 흥미롭다. 로렌스는 인간의 성을 찬미하며 무위자 연의 낙원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엘리어트는 인간의 타 락한 성을 배제하고 이성과 지성으로 새로운 낙원의 건설을 호소한다. 로렌스는 에로티시즘이야말로 인간을 구원하고 해
방시키는 지름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반면에, 엘리어트는 주지주의야말로 불결한 성과 탐욕에 오염되고 황폐화된 영 혼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던 두 사람 모두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 트의 정신분석이 기반을 다지던 시기와 일치하여 활동했다 는 점도 흥미롭다. 왜냐하면 로렌스는 프로이트에 지대한 관 심을 표한 반면에 엘리어트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로렌스가 主情派라면, 엘리어트는 主思派인 셈이다. 이처 럼 상반된 삶의 철학을 지녔기에 두 사람은 삶의 행로 자체 도 전혀 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미국 명문가 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 모르고 자란 엘리어트는 정통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속물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미국사회가 싫어 귀족의 나라 영국으로 귀화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영예로운 생애를 살다가 사후에는 런던 성마이클교회에 안장되었다. 영국의 탄광도시에서 무식한 광부의 아들로 태 어난 로렌스는 위선과 가식의 귀족국가 영국에서 추방되어 외국을 전전하며 살다가 결국 미국 뉴멕시코주의 어느 인디 언 목장에 묻혔다.
죽어서도 엘리어트는 교회에 묻혔고 로렌스는 황무지에 묻 혔다. 엘리어트가 신의 품에 귀의했다면 로렌스는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처럼 서로 상반된 태도로 각기 다른 삶의 행로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성장과정에서 겪게된 부모와의 갈등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며 그 결과로 나타난 내면적 고통을 자신들 의 창작활동을 통하여 해소시켰다는 점에서 그들은 공통분 모를 지녔다고 본다. 그들이 각자 평생동안 집착했던 성과 지성의 문제는 인간심리의 보편적 화두라 하겠다. 그러나 이 러한 성과 지성은 선택의 문제라기 보다는 통합과 조화의 문제임에 틀림없다. 사랑과 미움의 통합이 인간심성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듯이 성과 지성의 조화, 역시 심리적 건강을 좌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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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On the Dialectic of Eroticism and Intellectualism:
D.H. Lawrence and T.S. Eliot
Byung-Wook Lee, M.D.D.H. Lawrence and T.S. Eliot were famous contemporary writers in 20th century English literature, but for this study the main point of interest is their contrary basic life philosophies, life courses and literary tendencies. D.H.
Lawrence was a flagman of eroticism and the anti-intellect in modern literature;on the other hand, T.S. Eliot was a standard-bearer of intellectualism and rationalism. Their unique positions were based on reason and sensibility.
D.H. Lawrence was born in England and buried in New Mexico in America, and T.S. Eliot was born in America and buried in St Michael’s Church in England. After their deaths, Eliot was buried in a church with the embracement of God, but Lawrence was buried in a wasteland, in a state of nature. The period in which both were active is coincident to the take-off stage of Freudian psychoanalysis, which Lawrence was interested in but Eliot was indifferent to. Al- though they led contrary life courses, they have common ground in their basic conflicts. Both repeated the compulsion of unresolved Oedipal wishes, and they held fast to issue of sexual preoccupation or aversion all through life. They reveal the failure of dialectical resolution and integration of love and hate, but they were both successful in sublima- ting their own partial conflicts through their creative works. I believe that the dialectical harmony of sexuality and reason with the appropriate integration of love and hate is a key issue in mental health in modern times.
KEY W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