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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담론의 형성과 정치적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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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 사 학 위 논 문

제주 4․3 담론의 형성과 정치적 작용

제주대학교 대학원

사 회 학 과

고 성 만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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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담론의 형성과 정치적 작용

지도교수 조 성 윤

고 성 만

이 논문을 문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2005년 12월

고성만의 문학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심사위원장 _________인

위 원 _________인

위 원 _________인

제주대학교 대학원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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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ation of the Discourse on the Jeju

4․3 and Political Action

Koh, Sung Man

(Supervised by Professor Cho, Sung Youn)

A THESIS SUBMITTED IN PARTIAL FULFILLMENT OF

THE REQUIREMENTS FOR THE DEGREE OF

MASTER OF ARTS

DEPARTMENT OF SOCIOLOGY

GRADUATE SCHOOL

CHEJU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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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문초록】

Ⅰ. 서 론

··· 1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 1 2. 이전 연구 검토 ··· 4 3. 이론적 배경 ··· 7 4. 연구의 대상과 방법 ··· 10

Ⅱ. 지배 담론으로서 ‘폭동론’

··· 13 1. 지배 담론의 형성 ··· 13 2. 폭동 담론의 정치적 작용 : 국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 18

Ⅲ. 저항 담론으로서 ‘항쟁론’

··· 23 1. 저항 담론의 형성 ··· 23 2. 「이제사 말햄수다」가 선택한 4․3 ··· 27

Ⅳ. 합의 담론으로서 ‘양민학살론’

··· 33 1. 합의 담론의 형성 ··· 33 2. 수난사적 맥락 속에 가려진 ‘폭력의 역사’ ··· 43

Ⅴ. 합의 담론의 발전된 형태로서 ‘화해와 상생론’

··· 46 1. 화해와 상생 담론의 형성 ··· 46 2. 선택된 ‘4․3희생자’, 선택된 ‘4․3의 역사’ ··· 51

Ⅵ. 결론 : 제주 4․3 담론의 사회학적 분석

··· 57 【참고자료】 ··· 64 【Abstract】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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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문 초 록>

제주 4․3 담론의 형성과 정치적 작용

이 논문은 4․3 담론이 어떠한 정치 사회적 환경에서 누구에 의해 주도되어 형성됐고, 담론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정치적 작용이 이루어졌는 가에 대한 연구이다. 4․3이 진압된 이후 극우 반공 체제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구조 속에서 민주화 이행 시기를 거쳐 ‘화해와 상생’이 강조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4․3은 어떻게 조직적으로 이야기되어져 왔는가. 이 연구에서는 1989년 의 제1회 4․3추모제를 통해 민주화 단체들이 조직화 되고, 1994년의 ‘합동위령 제’, 1999년의 4․3특별법 제정, 그리고 2003년의 대통령 사과와 같은 현상들을 담론이 전환되는 중요한 과도기적 지점으로 인식하고 4․3 담론을 다음과 같이 ‘폭동론’과 ‘항쟁론’, ‘양민학살론’, ‘화해와 상생론’으로 구분하게 된다. 시기별로 전개됐던 4․3 담론은 그것의 사회적 표현 양식이나 상징체계를 통해 접근 가능 한데, 각각의 담론적 표현물들을 통해 담론의 ‘주체’, ‘정치’, ‘효과’를 포착하고 본격적인 담론 분석을 시도하게 된다. 그 결과 담론 주체는 자신들의 의도와 전략에 따라 조직적으로 담론을 전개 시켜 나가게 되는데, 현실의 담론 공간에서 투쟁하거나 타협하는 양상을 통해 실제적인 세력 관계에 대해 특정한 ‘효과’를 유포하고 확대 재생산시키게 된다. 역사적 사실의 경우, ‘담론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담론의 정 치’를 작동시키게 되는데, 이때 필연적으로 선택된 ‘사실’ 혹은 배제(거부)된 ‘사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의, 동일한 객관적 현상이라 할지라도 담론 주체가 작동시키는 정치적 작용에 따라 선택적으로 취사하여 부각시키거 나, 거부하여 배제시켜버리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4․3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4․3 담론에 대한 분석은 담론의 정치적 작용으로 인해 선택된 혹 은 배제된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여 밝혀내고 담론 구조 속에서 작동되어지고 있는 담론적 서열화를 해체시킴으로써,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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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한국 사회의 지배 집단은 자신들의 권력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 사회 적 질서를 구축해 왔다. 이와 함께 담론적 설득력을 통해서 권력에 대한 민중 의 동의를 창출하는 방식을 작동시켰다.(조희연 편, 2003) 그러나 지배화된 권 력 구조 속에서도 대항 담론이 지속적으로 성장했는데, 그 정점이 바로 1987년 6월항쟁이다. 지배하는 세력은 계속 지배하려 했고, 민주화세력은 지배세력에 저항하는 상황에서 ‘지배’와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정주신, 2004, p.67) 그 과정에서 민주화 요구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으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에 의해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경험해야 했던 제주 4․31)도 6월항쟁 이후에야 비로소 사회적 논의 를 조직적으로 형성할 수 있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와 전두환, 노 태우로 이어지는 군부 정권이 ‘반공’을 국시(國是)로 설정했고, 그들 권력에 기 생했던 수많은 우익 권력들이 손과 발이 되어 4․3의 사회적 소통을 차단시켜왔 기 때문이다. 1) 2000년 1월 12일 제정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법률 제 6117호, 이하 4․3특별법)은 ‘4․3’을 ‘제주4․3사건’으로 규정하고, ‘1947년 3월 1일을 기점 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 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동안 ‘4․3’은 ‘사건’ 이외에도 ‘항쟁’, ‘폭동’, ‘무장 봉기’, ‘민중 수난’, ‘양민학살’, ‘사태’, ‘반란’ 등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인식 주체의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논리를 배경으로 정명(正名)임을 자처했고, 투쟁을 통해 갈등하고 대립 하며, 때로는 전략적으로 ‘합의’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4․3’을 수식했던 각각의 표현들은 담론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사회적 구성물이자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를 달리해 왔다. 황상익(1999, p.304)은 ‘4․3’이라는 명칭에 대해 “잠정적인 것이다. 즉, 실 상과 성격에 걸맞은 이름을 갖게 되기까지의 한시적인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진상규명 등 지속적인 작업과 그 진실에 합당한 조치 등 사회적 합의를 촉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점에서 가장 적극적인 ‘현재진행형’의 명칭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사회학적 분석의 객관적 지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서 ‘4․3’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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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4․3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4․3은 공적 영역으로(양정심, 2000, p.272), 비합법적 영역에서 점차 합법적인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나간채 외, 2004, p.17). 가장 큰 이유는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가 발 간됐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기 때문일 것이 다. 그러나 ‘공적 영역’ 혹은 ‘합법적 영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4․3은 여전히 많 은 문제와 한계를 안고 있다. 일부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표현되 기도 한다.2) 오늘날의 4․3을 진단하는 데에는 어떠한 접근 방식이 유효할까. 이를 위해 이 연구는 4․3 담론에 주목하고, 4․3이 진압된 이후 극우 반공 체 제가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민주화 이행 시기를 거쳐 ‘화해와 상생’이 강조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4․3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이야기되어져 왔는가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4․3 담론이 어떠한 환경에서, 누구에 의해 주도됐고, ‘담론의 효과(effects of discourse)’를 위해 어떠한 ‘담론의 정치 (politics of discourse)’3)가 작동되어졌는가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담론 주체는 그들의 의도와 전략에 따라 조직적으로 담론을 전개시켜 나가 2) 일례로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이하 4․3유족회)가 2005년 7월14일부터 26일까지 4․3 유족회원 48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60.8%가 현재의 ‘4․3 해결 성과’에 ‘불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3유족회는 “진상조사보고서 확정이나 희생자 선정 이후 달라진 점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유족들의 입장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 한다. 4․3 희생자 선정, 4․3 평화공원 조성, 4․3 후유장애인의 의료지원금 산정, 4․3 피해 자에 대한 보․배상 등 관련 당사자들은 여전히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위한도민연대(이하 4․3 도민연대)가 2005년 3월 3일부터 12일까지 대구형무 소 수형 희생자 신고인 3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4․3은 특별법 제정․공 포에 따라 희생자 신고, 희생자 결정, 평화공원 조성,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대통령 사과 등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4․3 문제 해결의 성과에 얼마나 만족하십니까?’라는 질 문에 응답자의 70.4%가 ‘불만족’하다고 밝혔다. 4․3 도민연대는 ‘수형인을 별도로 취급하 는 희생자 선정 방식의 문제점, 진상조사 과정에서 행방불명의 실상을 거의 밝혀내지 못 했다는 점, 암매장지 발굴 등이 진척되지 못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불만이 고조됐다’고 진단했다.(4․3 도민연대, 2005) 3) 김영범(1998, pp.191~192)은 ‘기억의 정치’를 ‘집합 기억의 역사화나 무화(無化) 과정 에 개입하는 사회-문화적 및 정치적 힘들의 역학관계와 그것을 둘러싼 담론적 실천의 기제를 일괄하는 개념인 것’으로 정의했다. 이 점에서 ‘기억의 정치’는 ‘담론의 정치’에 수 반된다는 명제가 가능해 진다. ‘기억의 정치’가 주체, 대상, 전략, 효과 등을 파악하는 총 체적인 담론 분석을 위한 도구로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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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다. 또한 현실의 담론 공간에서 투쟁하거나 타협하는 양상을 통해 실제적 인 정치 사회적 관계에 대해 특정한 ‘효과’를 생산하게 된다. 4․3의 여러 담론 중에서 현재까지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폭동론’은 군․경과 우익 단체 등 4․ 3을 진압했던 핵심 세력들이 중심에 있는데, 반공 정치와 공포 정치를 통해 현 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재생산함으로써 담론적 효과를 얻게 된다.4) 대항 담론 으로 형성됐던 ‘항쟁론’ 역시 민중 사관에 입각하여 4․3을 해석함으로써 지배 담론의 현실 기득권에 도전하고 폭동 담론 하에서 의도적으로 은폐됐던 항쟁의 역사를 복원시키는 ‘효과’를 얻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담론적 질 서’5)가 수반된다. 이 연구는 구체적으로 다음의 것들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자 한다. 첫째, 한국 사회의 시대적 추이를 염두에 두고 각 시기별로 4․3 담론은 어떠한 정치 사회적 환경에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분석해 보 고자 한다. 둘째, 담론 주체에 의한 ‘담론의 정치’를 주목하고, 어떠한 정치적 작용을 통해 ‘효과’를 유도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셋째, 이 연구가 오늘날의 4․3을 담론을 통해 접근해 보고자 하는 시도인 만큼, ‘화해’와 ‘상생’이 시대 구 호로 주창되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심층적 으로 다루고자 한다. 특히 최상층부에 위치한 국가가 4․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 대단위의 물적 자원을 투입하고 일련의 ‘화합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있는 오늘날 어떠한 4․3의 역사를 선택하여 유포시키는지 주목하고자 한다. 4) 지배 체제의 재생산과 관련한 지배 담론의 속성은 다음의 연구에서도 제시된다. “지배 담 론의 경우 지배의 재생산과 관련하여 양면적인 효과를 갖는데, 지배 블록 내의 다양한 분파를 통합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에 대한 민중블록을 통합시키는 방식 으로 전개된다.”(조희연 편, 앞의 책, p.37), “지배담론은 정치적 동의의 획득과 대중동원 등을 통해 지배체제를 재생산하는 중요한 자원으로 작용한다.”(이영환 편, 2003, p.11) 5) 이진경(2002, p.347)은 ‘담론적 질서’를 ‘담론 자체에 권력이 내장되어 있다는 점뿐만 아 니라, 담론 자체가 권력에 의해 작동하며 정당화된다는 것’으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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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전 연구 검토 1990년대 이후 4․3을 주제로 한 연구 성과물은 계속 축적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다음의 연구들은 담론의 사회적 구성물인 언론, 선거, 학술 연구, 문화운동 등에 주목하고 있다. 김광우(1994)는 1948년 4월 3일부터 1993년 5월 31일까지 매해 4월과 5월에 보도된 일간지에서 4․3과 관련한 기사 를 분석했는데, 정치 사회적 흐름과 언론의 4․3 논의 수준이 유사한 맥락을 보 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김석준(1997)은 4․3을 절대 변수로 설정하여 1948년부터 1992년까지 제주 사회의 선거사를 분석했는데, 결국 4․3으로 인해 고착된 정치적 정체성으로 인 해 지역 주민들이 진취적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종민(1999)은 정치인들의 발언과 언론 보도, 연구 성과 등에서 보여지는 4․3을 각 시기별로 구분하여 분석했다. 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이제는 제주 민에게 화답할 차례’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했는데, 담론과 현실의 정치 사회적 역학관계를 설명했던 연구였다. 양정심(1998)과 박찬식(1999)은 4․3 관련 연구 성과들을 통해 담론 분석을 시도했다. 양정심은 4․3 항쟁의 주체, 중앙당․항쟁 지도부와 제주도민의 관계, 그리고 4․3 항쟁의 원인과 성격 등을 통해 접근했는데, 그러나 “그간의 연구 성 과물들이 1980년대의 학술적 성과를 뛰어 넘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레드콤플렉스(Red Complex)가 소장학자들의 4․3 연구에도 적용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찬식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격변 과정은 그대 로 4․3 연구에도 투영되었다”는 점을 전제하고,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4․3 진상 규명의 역사를 정리했다. 최근에는 ‘기억의 정치’ 개념을 통해 기억 주체의 현재적 관심 또는 기억 행위 의 현재적 맥락에 따라 ‘기억이 재구성된다’는 논지가 발전됐는데, 이를 문화운동 과 접목시켜 접근한 연구가 「기억 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나간채 외, 2004) 이다. 이 연구에서는 종래의 지배담론과 관제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된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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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운동을 통해 저항 담론의 양상을 분석하고 있는데, 위령 의례(현혜경)와 영 상(권귀숙), 4․3 극(박찬식), 미술(박경훈), 문학(김동윤)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 데 현혜경(2004)은 1987~93년, 1994~97년, 1998~99년, 그리고 2000년부터 현재까지, 4․3 위령 의례의 담론 지형의 변화를 총 네시기로 구분하고, 위령 의례 와 관련해서 폭동이냐 항쟁이냐 하는 기억 투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대부분의 4․3 위령 의례들은 양민학살의 기억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상의 연구 성과들은 4․3 담론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로는 아쉬움이 있다. 4․3 담론의 사회적 표현 양식에 대한 통시적 접근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 를 보이고 있지만 각각의 상징체계들에 대한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한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4․3 담론에 대한 논의는 김성례(1999)와 양정심(2000), 권귀숙(2001)의 연 구에서 진전된 성과를 보였다. 김성례는 국가 권력이 4․3 담론을 통제함으로써 자신들의 폭력에 대한 망각을 강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가 권력은 또 ‘용 서’와 ‘화합’이라는 담론을 조성시키며 폭력의 행위자와 그 폭력의 피해자를 동 일시함으로써 같은 피해 의식을 이끌어 낸다는 의미에서 ‘기만적’인 담론적 효 과를 창출한다고 강조했다. 양정심은 1980년대까지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4․3이 달리 해석되고 있음을 밝혔는데, 그 가운데 4․3특별법을 태동시켰던 양민학살6) 담론이 결국 국가에게 6) 김동춘(2000)은 ‘양민’을 ‘사상적인 순수성, 즉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한 다 음 좌익을 악으로 보고 그러한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전제한 뒤, 그렇다 면 ‘양민이 아닌 사람에 대한 학살은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양민’에는 어떤 가치를 절대선으로 놓고 그것을 어기는 사람들을 불순한 존재로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학살의 정당성이 충분히 용인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다. 이는 극도의 반공주의가 통용되는 한반도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국가주의 적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는 남북한 양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양민’ 개념을 재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에 대 한 대안으로 국제적인 규범에서 사용되는 ‘민간인(民間人․civilians)’ 개념을 제안한다. 이 로써 인권의 관점에서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3과 관련한 대부분의 표기에도 ‘양민학살’이 사용되어져 왔다. 위의 논리를 견지할 때, 4․3 역시 ‘양 민학살’의 개념을 유지할 경우, 극우 반공주의가 통용되는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다시 말해 ‘양민’ 개념으로는 4․3 당시 발생됐던 학살, 그 모든 죽음의 신원을 밝혀내는 진상규명 작업을 아우를 수 없다는 점이다. 실례로 4․3이 진압된 이후, 폭동 담론이 지배적이었던 군부 정권 시기에 ‘양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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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죄부를 주게 될 것이고 4․3의 민중들을 객체화시킴으로써 결국 이들을 역사로 부터 배제시킬 것으로 진단했다. ‘양민학살론’이 학살을 저지른 주체가 국가라는 점을 간과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제주 민중들의 항쟁 역사를 의도적으로 배제시키 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수난의 역사가 아닌 항쟁의 역사가 쓰여져야 한다” 고 강조했다. 그는 여기서 좌우의 편향된 시각에 입각한 역사 해석은 ‘4․3의 민 중들을 객체화시킴으로써 그들을 역사로부터 배제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에 ‘민중 들의 항쟁과 고통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4․3을 새롭게 볼 것’을 강조했다. 권귀숙은 4․3의 기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밝혔다. 경찰, 군인, 서 북청년단, ‘산사람(무장대)’, 좌익 단체, 우익 단체, 일반 주민 등 출신 성분에 따라 4․3에 대한 기억이 다르고, 가해의 기억이나 치욕적인 기억은 억압되어 있 는 반면 피해의 기억은 부각되고 강조되어진다고 분석했다. 또한 “담론과 증언 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 담론들이 나 오고 있다”(권귀숙, 앞의 글, p.208)며 담론과 기억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 니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도 전체적인 4․3담론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비록 개괄 적인 수준이라 할지라도 현재까지 논의되어지고 있는 4․3담론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성과는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4․3특별법 제정 이후의 상황 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특별한 연구 성과가 없다. 그리고 김성례를 제외한 다른 연구자들은 효율적인 담론 분석을 위해 동원되어져야 하는 ‘담론의 정치’에 대한 접근을 소홀히 했다. 특히 양정심의 연구는 어떠한 담론적 상황에서든 수용되거 나 혹은 배제되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게 된다는 ‘담론적 질서’를 간과했다. 항 쟁 담론의 회귀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담론 구조 역시 선택적으로 수용되 는 역사만이 유통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했던 당시 항쟁 세력들은 ‘빨갱이’로 매도됐고, 사건을 진압했던 것은 자유주의를 위한 수호요, 그 과정에서 발생했던 희생은 호국을 위한 장렬한 전사로 미화됐던 역사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반공 담론이 한국 사회의 지배 담론으로 위치하는 상 황에서 1990년대 중․후반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있어 ‘양민학살’ 표현의 사용은 적절하다 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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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4․3 이후의 담론적 상황을 전개함으로써, ‘주체-정치-효과’라 는 담론의 메커니즘이 결국 어느 담론에서나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현상인 점을 밝히고, 특히 오늘의 현실에 접근함으로써 기존 연구와의 차별성을 확보 하고자 한다. 3. 이론적 배경 담론이 어떻게 권력과 맞물려 작동하는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유물론적 담 론 이론이 유효하다. 그 점에서 유물론적 역사관을 주창했던 「독일이데올로기 Ⅰ」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된다.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은 곧 지배 계급의 사상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인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도 지배한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지배하고 있는 계급이 결국 정신적 생산수단도 관리하며, 그리하여 정신적인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그 지배 사상에 종속된다…그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지배하고 한 역사 시대의 범위와 한계를 결정하는 한, 당연히 그들은 모든 영역에 걸쳐 그 지배를 행할 것이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사고하는 자로서, 사상의 생산자로서 지배하 고, 그리하여 그 시대의 사상의 생산과 분배를 규제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의 사상이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된다.(Karl Marx․Engels, Friedrich 저․박재희 역, 2001, pp.82~83) 유물론적 담론이론은 담론과 담론 외적인 것 사이의 긴장적 접합을 뜻하는 담론적 실천의 중요성에 주목한다.(윤평중, 1988) 이러한 담론의 물질성은 이 데올로기가 ‘물질적’이라는 알뛰세르(L. Althusser)의 언급과 유사한데, 그는 이 데올로기가 종교-교육-가족-법률-정당-노조-문화 등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라는 물질적 실체의 형태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문제 틀로 기능하면서 우리의 인식과 행위를 결정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담론의 구성과 작동 방식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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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담론이 이데올로기적 종속의 직접적인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 다.(Louis Althusser 저․이진수 역, 1991) 라클라우(E. Laclau)나 무페(C. Mouffe)같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알뛰세르의 통찰을 전용해서, 담론을 ‘접합적 실천의 결과로 생긴 구조화된 총체성’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을 하나의 사회적 공간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바꿔 말하면 담론은 담론 구성체, 즉 헤게 모니 구성체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윤평중, 앞의 책, pp.167~168)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푸코(M. Foucault)의 담론 이론에서 방대하게 형상화된다. 그는 담론 형성을 위해 네 가지 차원의 규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대 상-주체-개념-전략이 그것이다.(M. Foucault 저․이정우 역, 2000) 그 가운데 서 본 연구의 주요한 관심은 ‘말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주체’와 담론 공간에서 특정한 형태의 실천을 가능케 하는 ‘전략’의 형성과 작동에 관한 것이다. 푸코의 담론 분석은 권력의 작동과 지식의 형성, 주체의 출현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은 권력 투쟁의 효과이거나 결과라고 주장하며, 주체 형성 역시 권력의 효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전략’은 담론 의 대상이나 주체의 위치, 개념 등을 가지고 그 담론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특정한 실천의 효과를 유도하는 일련의 체계를 일컫는데, 이러한 ‘전략’은 담론 내의 대상이나 개념들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거나 배제(거부)하는 규칙으로 작동 할 뿐 아니라, 특정한 형태의 실천을 유도시키는 기제로 작용하게 된다. ‘담론 적 질서’가 조성되는 것도 ‘전략’이 중요하게 관여하게 된다. 담론적 실천의 내용을 규정하는 요인에 비담론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이 개입 하게 되면 현실적으로 담론적 실천이 행해졌을 경우 그것은 곧 권력의 효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권력의 효과는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담론의 대상, 개 념, 주체의 형성에 작용함으로써 ‘담론의 정치’를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담론은 정치 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 효과를 극대화 시키기 위한 전략을 동원하게 되는데, 그것은 규율로, 지식으로, 혹은 권력으로 표출된다. 이것은 특 정 시기의 특정 담론이 정치 사회적 상황과 이데올로기 지형에 따라 다르게 형 성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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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게 모든 지식은 사회적․제도적․담론적 압력의 결합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여기에는 이론적 지식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지식 중 일부는 지배적 담론에 도전할 것이며 일부는 타협할 것이다.(Sars Mills 저․김부용 역, 앞의 책, p.57) 저항 담론이 지배 담론과 충돌하고 갈등하면서 지배 체제를 위협하고, 그런 가운 데 일부는 합의 과정을 통해 변증법적인 제3의 담론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이 점에서 담론 분석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 즉 담론이 위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조망할 때 비로소 완결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푸코의 담론 분석이 단순히 언어적인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비언어적 차원, 즉 외부적 조건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역사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는 점과 통 하는 부분이다. 맥도넬(D. Macdonell) 역시 담론들은 그것이 형성되는 제도와 사회적 실천의 종류에 의해, 그리고 말하는 사람과 그가 말을 하는 상대의 위 치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게 된다고 언급한다. 때문에 담론은 갈등을 수반한다. 담론은 내부적인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을 맺고 있 는 제도, 사건, 경제적 실천 등 정치 사회적 문제와 다양하게 연관을 맺음으로 써, 그것들에 따라 형성되고, 규정력을 발휘하게 된다. 즉, 담론은 진공 상태에 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 대해서 진리와 권위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 는 다른 사회적 실천과 다른 담론들과의 끊임없는 갈등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다.(Sars Mills 저․김부용 역, 2001) 결국, 담론은 사회적 산물로서 이해 가능하다. 정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담 론 주체들의 의식과 사고를 반영하게 되고, 이는 사회적인 언어나 기호로 조직 화되는 것이다. 때문에 담론은 단순한 말과 글의 조합 수준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내재한 상태로 유통될 수 있다. ‘담론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담론 주체는 정치적 행위를 한다. 때문에 동일한 역사적 사실일지라도 지배 담론의 전략에 따라 수용하여 조직화시켜 유 포되는 ‘사실’이 있고, 거부 또는 배제하여 일체의 사회적 논의를 차단시키는 ‘사실’이 있게 된다. 홀(S. Hall)에 의하면, 담론이 설정되면 그로부터 제외되는 주체가 있고, 특정 기억은 선택되지 않게 된다.(Stuart Hall 저․임영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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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푸코의 담론 역시 담론을 통해 생산된 지식이 대상을 한정하게 된다. 담론의 형성과 유포, 확장, 그리고 재생산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서 작동되는 ‘담론의 정치’는 현실적인 정치 사회적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 된다. 담론 주체의 의도와 전략에 따라 사회적 처리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되 어지기 때문이다. ‘담론의 정치’는 주체들의 현실적인 지위 유지와 담론의 조직 적인 유포․확대 재생산을 위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선택적인 수용 /거부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게 되는데, 이때 담론 구조에서 유통될 수 있는 사 실들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게 된다. 결국 담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데 있어 담론의 정치적 행위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데, 여기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성 여부는 필연적으로 ‘담 론적 질서’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담론은 사회적 관계와 실천의 구체적인 체계로서, 담론의 구성은 상이한 사 회적 행위자들 사이의 특정의 관계를 구조화한다는 의미에서 항상 권력의 행사 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최종렬, 2004) 그 점에서 4․3 담론에 대한 분 석은 ‘담론의 정치’로 인해 선택된 혹은 배제된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여 밝혀내 고, 계급화 혹은 서열화 구조를 해체시켜 객관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는데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담론 연구는 여러 제도에서의 담론과 지식의 가면을 벗기는 능력에서 중요한 기능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 이러한 제도의 담론과 지식은 사회를 갈라놓는 불평등, 즉 기본적인 계급간의 불평등, 민족성, 종교 등의 강요된 불평등은 모두 무시한 채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말한다고 주 장하고 요컨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우리는 모두 같다. 우리는 모두 같은 언어를 말하고 같은 지식을 공유하며, 항상 그래왔다.’(Diane Macdonell 저․임상훈 역, 앞의 책, p.20) 4. 연구의 대상과 방법 담론의 추이는 정치 사회적 지형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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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의 4․19혁명과 1987년 6월항쟁, 1993년에 민간정권으로 이양됐고 1998년에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던 한국 사회의 정치 변화가 거시적인 척도가 된다. 4․3의 경우는 1988년에 제주도4․3사건민간인희생자반공유족회(이하 4․3반공유족회)가 결성됐으며, 이듬해인 1989년에 제1회 4․3추모제를 통해 재야 단체들이 조직화 됐고 제주 4․3 연구소가 발족됐다. 1994년에 ‘합동위령제’가 봉행됐고, 1999년 에 4․3특별법 제정, 그리고 2003년에 대통령이 공식 사과한 것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담론의 중요 전환점이 됐다.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을 담론이 전환되는 중요한 과도기적 지점으로 인식하고 4․3 담론을 ‘폭동론’과 ‘항쟁론’, ‘양민학살론’, ‘화해와 상생론’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사회는 다양한 담론적 표출의 장(場)으로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각각의 담론이 분절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담론 공간 내에서 담론 간의 투쟁과 합의가 가능하고, 이를 통해 지배적 혹은 주변적으로 위치하 거나 변증법적 합의 절차를 거쳐 제3의 담론이 양산될 수 있는 특수성이 있다. 그 점에서 각각의 담론은 분리되어 독립된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연속성 속에 긴장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담론이 각 시기별로 전환되고 새롭 게 위치하게 되더라도 과거의 담론들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담론 공간 내에서 그 역량이 지배화되느냐 주변화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본격적으로 논의하겠지만 ‘양민학살론’은 양민학살에 대한 역사 인식을 일정 부분 공유하던 ‘폭동론’과 ‘항쟁론’의 일부가 합의 과정을 통해 재구성됨으로써 담론화 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이전 시기에 ‘항쟁이냐, 폭동이냐’와 같은 이 데올로기적 충돌로 인해 짜임새 있게 조직화되지 못했을 뿐이었다. ‘화해’하고 ‘상생’하며 ‘평화’를 지향하고 ‘인권’의 가치를 옹호하자는 오늘날의 구호도 이미 4․3 담론이 충돌하고 타협하던 지난 시기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다만 담론 공간에서 주변부로 위치 지어짐에 따라 현실적인 담론적 효과를 창출하지 못한 것뿐이다. 실제로 ‘화해와 상생’이 시대 구호로 주창되는 오늘날까지 간헐적으 로 나타나는 이념 대립과 같은 현상은 담론 공간 내에서 다양한 담론이 병렬적 으로 존재한다는 해석에 대한 실례로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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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음의 그림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림> 제주 4․3 담론 공간 각 시기별로 전개됐던 4․3 담론은 그것의 사회적 표현 양식이나 상징체계를 통해 접근이 가능한데, 각각의 담론을 구성하는 담론적 표현물을 통해 ‘담론의 주체’와 ‘담론의 정치’, ‘담론의 효과’를 포착하고 담론 분석을 시도할 수 있게 된다. 푸코는 담론적 실천을 지식 생산의 주체인 권력이 독점하고 있다고 설명 한다. 때문에 올바른 담론 분석을 위해서는 담론을 형성하고 유포하며 재생산 시키는 작업에 누가 참여하는가 하는 담론 주체에 대한 접근이 중요하다. 모든 담론적 행위가 주체의 판단과 전략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의 경 우, ‘담론의 정치’는 선택된 ‘사실’ 혹은 배제(거부)된 ‘사실’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는 ‘담론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담론 주체의 전략적 차원에서 작동되 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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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지배 담론으로서 ‘폭동론’

경찰 악대가 동원되고 일개 분대의 군인이 동원되어 조총을 쏘아 올리고 진혼 나팔곡 이 울려 퍼질 때 마치 당시의 영혼이 우리 몸에 엄습하여 오는 듯 한 숙연한 분위기를 연 출하여 주신 것은 합동위령제가 단순히 우리 유족만의 행사가 아니라 민, 관, 군이 혼연 일체가 된 전 도민의 행사로 승화된 영광된 행사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김병언, 1993) 1. 지배 담론의 형성 4․3을 진압했던 세력들은 그 과정에서 발생했던 폭력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동원했다. 이것은 비단 4․3 뿐 아니라 동시대에 발생했던 국가 폭력의 사실을 최소화하고 은폐시키기 위해 지배 권력이 고안한 최적의 정치 수단이었다. 이를 통해 4․3 시기에 통용됐던 진압 세력의 폭력과 권위가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탈바꿈 될 수 있 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군부 정권을 정점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지배 체제는 국가 이데 올로기인 ‘반공주의’로 통용되는 모든 것들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 사회 통합 역시 반공주의에 의해 가능했다.(문상석, 1999, p.110) 극우적 반공 규율을 일상에까지 적용시켰던 군부 정권은 4․3에 대한 사회적 소통을 선택적 으로 허용했다. 규율에 대한 저항적 움직임은 허용될 수 없었고, 반공 장치를 통해 억압함으로써 지배 담론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폭동 담론은 이러한 체제 속에서 지배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4․3이 진압된 이후 강도 높게 지속됐던 반공 규율은 4․3에 대한 역사 인식을 ‘남로당 공산분자들에 의한 폭동’에 한정 시켰다. 그 이상의 역사적 해석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환경이 조성됐기에 가능했다. 4․3에 대한 언설을 억압함으로써 ‘빨갱이 사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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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김성례, 앞의 글, p.244) 지배 담론 으로 위치를 굳건히 할 수 있었던 ‘폭동론’은 결국 폭력 주체가 스스로의 행위 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현실 기득권과 지위를 유지시키는 담론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4․3이 진압되면서 형성된 국가 기구는 제주민들에게 수세적이고 소극적인 태 도를 강요함으로써, 숙명론적인 패배의식을 강요했다.7) 4․3을 자유롭게, 조직적 으로 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제주민들은 지속적인 레드 콤플렉스의 자기 검열 을 강요받게 됐고 폭력과 권위 구조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폭력의 연장선상 에서 구축된 반공 정권은 이렇게 개별 역사 주체들로 하여금 담론적 환경을 통 제하고 폭동 담론을 사회의 규칙으로 전개시켜 나감으로써 담론적 효과를 달성 하게 된다. 제주 사회에서 폭동 담론이 어떻게 구축됐는가를 설명하는 데에는 친일 협 력자들의 반민족 행위에서부터8) 미군정 혹은 이승만 정권의 권위적인 반공이 데올로기9), 또는 4․3 과정에서 만들어진 극우반공체제10) 등 다양한 설명이 뒷 받침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설명은 4․3을 기점으로 형성된 제주 사회의 극우 반 7) 이러한 상황은 광주 5․18의 사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5․18의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17년간 5․18 담론의 가장 큰 부분은 침묵이었다. 침묵은 여러 방면에서 부과되었는데, 이는 언어의 부재라기보다는 사회 정치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최정운, 1997) 8) 4․3은 40년간 터부시되어 왔고, 그것은 권력 측이 철저하게 암흑 속에 매장시켜 왔었습 니다. 그리고 단편적인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권력을 유지해 온 자는 누구인가, 그 것은 일찍이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였던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서, 그들이 해방 후 오늘까 지 권력을 잡고 있으며 오늘날의 정권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김석범, 1998) 9) 한국의 처리에 있어 미군정 시기에는 미군정의 정책에 충실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되자 역시 이승만 정권의 정책에 충실하였다…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공히 4․3을 국내 치안 교란 정도가 아니라 공산주의 선동에 의한 반란, 즉 정부 전복으로 보아 이를 철저 히 진압하게 되며, 국민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인권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재단을 우선시 하였다.(안정애, 2002, p.11) 10) 이영권(2000)은 제주도 유력자 집단을 A그룹(건국준비위원회 간부), B그룹(국회의원, 도의회 의장), C그룹(도지사, 지방법원장, 지방검사장), 그리고 D그룹(도경찰국장, 지역 군사령관)으로 분류하고 유력자 충원의 방식과 부일 경력, 이념적 성향 등의 기준을 근 거로 성분 분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 B․C․D그룹은 극우세력의 주도기였던 1947년 3월 1 일 이후부터 주로 활동했고, 국가 권력의 지원이라는 외적 규정성을 통해 충원됐으며, 부 일(附日) 경력의 비중이 높고, 극우적 성향을 띤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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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기본 구조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제주 사회에서는 4․3반공유족회와 군․경 우익 단체들이 폭동 담론의 주요 집 단을 형성했다. 특히 4․3유족회는 4․3반공유족회라는 이름으로 1988년에 결성된 후 당시 제주 사회에서 폭동 담론을 형성하고 유포시키는데 비중 있는 역할을 했 다. 초대 부회장직을 맡았던 김병언 씨는 유족회 조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1) 우리는 4․3의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혈맹(血盟)이다. 당시 산사 람(화합차원에서 온건한 호칭으로 바꿈)들에게 피살된 가족, 반대로 산에 올라가서 그들 과 같이 행동하다가 진압대에 피살된 가족, 멋도 모르고 어슬렁대다가 피살된 가족 등 각 양각색의 4․3의 현장에서 피살된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4․3 현장에서는 적대적 상극된 앙숙관계였다. 그러나 40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같은 제주도민이라는 동향애가, 역 사의 한 순간에 시대를 잘못 만나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억울함이,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적 숙원이, 우리의 마음을 녹여 마침내 우리의 희생은 공산항쟁에 의한 희생이라는 공통 인식 하에, 말을 바꾸어 우리의 희생의 기초 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명예로 운 기치를 들고 우리는 뭉칠 수 있었다.(김병언, 1994, pp.110~111) ‘4․3 현장에서 피살된 가족들의 혈맹’임을 강조하면서도, 결국은 4․3을 ‘공산 항쟁’으로 인식함으로써, 그 희생이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됐다는 논리의 국 가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4․3유족회 조직의 주요 구성원이 11) 그러나 당시 항쟁 담론 측은 4․3반공유족회를 다르게 표현했다. “4․3 사건 당시 ‘산사람’ 들의 납치 또는 습격으로 피살된 민간인 가족(원호대상자 포함)을 대상으로 한 단체로 ’88년 10월 29일 반공희생자 합동위령제가 끝난 직후 반공회관 2층 사무실에서 결성됐 다. 이날 회장으로 송원화(66세, 전 반공연맹도지부 사무국장), 부회장에 김병언(61세, 현 오현중학교 교감), 오인규(55세, 농장경영) 씨 등이 선출됐다. “4․3사건 당시 반공 일 선에서 희생된 원혼을 위로하며 나아가 반공정신 함양을 도모한다”는 내용의 취지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반공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4․3 40주년을 기점으로 4․3 진상 규명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자, 여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시 토벌의 대열에 섰던 반공 세력 을 결집한 것 같은 인상이 짙다. 최근 내무위 국정감사에서 이군보 도지사가 도민화합의 차원에서 위령탑 건립 등을 유족회와 상의해서 추진하겠다고 밝혔는데, 이 ‘유족회’가 민 간인 반공 유족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져 주목을 끈다.”(제주 4․3 연구소, 1989a,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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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도 접근이 가능하 다. 4․3반공유족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송원화의 아버지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 고, 자신은 4․3 당시에 경찰 신분을 토벌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당해 현재까지 ‘후유장애자’로 살고 있다. 1990년 초․중반에 각각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 족회(이하 4․3민간인유족회)’의 회장과 사무국장을 역임했던 김병언과 박서동의 가족들 역시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고, 2002년에 결성됐던 ‘대한민국건국희생자 제주도유족회(이하 건국유족회)’의 주요 구성원인 오형인과 김성수 역시 무장대 에 의한 피해 가족이라는 사실은 이들의 반공 담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배경 이 된다. 1990년에 접어들어 4․3민간인유족회의 ‘공산항쟁’, ‘반공정신’과 같은 이념 지향은 지속적으로 유지됐다. 이러한 담론 인식은 폭동 담론을 유지하고 확대 재생산시키기 위해 다양하게 표출되어져 나타났는데, 4․3민간인유족회의 “정 관”(4․3민간인유족회, 1993)도 그 중 하나이다. 제2조(목적) - 본회는 1945년 8․15 광복 이후 4․3 사건과 관련하여 희생된 민간인의 원혼을 위로하며 나아가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좌경세력에 대처함은 물론 전후세대에 대한 국민정신 함양과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함으로써 4․3을 치유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제4조(사업) -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홍보 제35조(경과조치) - 본 회의 정관은 1988년 10월 30일 창립한 「제주도4․3사건민간인반공 희생자유족회」의 회칙을 그 모체로 한다 제37조(개정) - 본 회의 정관은 1991년 1월 21일부터 시행한다 조직 명칭에서 ‘반공’이란 단어가 삭제되기는 했지만, ‘4․3반공유족회의 회칙 을 모체로 한다’는 조항을 명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담론에서 단어의 정치 적인 차원을 고려할 때(Diane Macdonell 저․임상훈 역, 앞의 책, p.69), ‘자유민 주주의 체제 수호’, ‘좌경 세력에 대처’와 같은 반공 언어들은 폭동 담론의 은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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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표현에 다름 아니게 된다. 또한 텍스트가 정체성과 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에 서(Norman Fairclough 저․이원표 역, 2004, p.7) 폭동 담론의 주요 주체들이 언급하는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반공 논리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는 점은 유의 할 필요가 있다.12)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싼 변용 현상이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지속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문건은 1989년 당시 제주 4․3 연구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문건(홍만기, 1989)인데, 이를 통해 폭동 담론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역설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군, 경찰, 우익 청년 단체에 관계했던 인물들이 ‘월간 관광제주’란 도내 잡지를 통해 산 사람(폭도 표현)의 만행을 계속 소개하고 있고, 4․3 희생 반공 유가족회를 결성하여 자체 추모비 건립 움직임을 보이는 등 관변 우익집단의 대응 논리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음. ․올해 들어 관심과 홍보가 많이 이루어져, 4․3 사건에 대한 일반도민의 거부감은 젊은 세대들 사이에 많이 누그러지고 있으나 농촌의 기성세대들에겐 아직도 털어놓기에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어 버리고 있는 실정임. 위의 글은 ‘군, 경찰, 우익 청년 단체에 관계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관변 우익집단’이 편파적인 4․3 인식으로 ‘산사람의 만행’을 계속해서 소개하고 있고, 유족회 결성이나 추모비 건립과 같이 그들 집단만이 공유할 수 있는 방 식의 4․3을 유포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농촌 기성세대들’에 게 4․3은 여전히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되는’ 중압감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12) 해방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자유민주주의’는 ‘냉전 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체제 대결의 전장과 같은 당시 상황에서 자유의 의미는 반공을 전제로 한 집단과 구성원 에게만 향유될 수 있는 것이었다…이러한 미국자유민주주의의 선전의 전제는 미군정의 이해에 반하는 이데올로기와 의식에 대한 검열과 통제, 그리고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이 었다…이렇게 반공주의적으로 왜곡되고 축소된 ‘자유민주주의’는 이후 집권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유린되고 형해화되었다. 즉 1960년대 박정희 독재 체제에 이르러 ‘자유민주주 의’는 반공주의와 등치되고,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요소에 대한 탄압마저 반공주의 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이렇게 한국에 이식되고 전개된 자유민주주의는 탈급진화되 고 반공의 둘레에 의해 억압된 기형적 불구의 자유민주주의였던 것이다.(송병헌 외, 2004, pp.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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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 담론은 현재까지 4․3의 지배 담론으로 위치하고 있다. 지배 권력을 중 심으로, 그들만이 전유할 수 있는 담론을 유지하고 확대 재생산시키는 구조를 지속시켜 왔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지배 권력이 여전히 한국 사회의 거시적인 정치 사회적 틀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의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담론 주체들이 작동시키는 ‘담론의 정치’는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2. 폭동 담론의 정치적 작용 : 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4․3을 진압하고 건국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던 군․경, 우익 세력들은 반공 국가 의 지배 구조를 형성하며 자신들의 야만적인 폭력 행사를 은폐하고 최소화시키기 위해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항쟁으로서의 4․3,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서의 4․3은 금기시됐던 반면 공산 폭동의 역사 인식을 표방했던 개인 혹은 집단의 4․3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었다. 담론적 환경 이 주체를 형성하고,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는 점을 인지할 때, 극우 반공 체제 하에서 제작된 일련의 상징체계들은 담론의 성향과 전략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 가 될 수 있다. 4․3 직후 만들어진 비석13)이나 향토지, 각종 문헌 자료와 팸플릿 등이 이에 해당한다. 1989년 6월에 열렸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제주도민 대 회’에서 4․3반공유족회가 배포한 팸플릿 역시 주요한 담론 구성물이다. 13) 대정읍 충혼묘지의 ‘4․3충혼비’에는 “아 장하고 거룩하도다. 나라 위한 일편단심, 배달의 횃불이요 민중의 등불이요 멸공의 투사로다. 4․3의 붉은 마수 이 땅을 휩쓸 때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나무 아래서 성담에서 용전분투하다 놈들의 흉탄에 쓰러진 그대들의 충혼 만 세에 빛나리라”라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다. 4․3 당시 순직한 경찰관을 위령하기 위해 1956년 서홍 청년회에서 세운 ‘순직 경찰관 합동 위령비’(제주도 서귀포시 홍중로 243번 지 소재)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혀있다. “내고장 내형제 내손으로 지키려다/한라의 백록담에 젊은 넋을 잠겨놓고/고원의 꽃이 되어 곱게 산화 되었으니/장하도다 그대의 공 훈 천추에 빛나리”. 김동만은 비석과 관련하여 “각 읍 면마다 4․3 당시 순직한 경찰과 군 인들의 충혼비가 세워 있음은 물론 마을의 비석거리마다 각종의 공적비와 순직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어쩌면 그간의 4․3 위령 사업이나 추모 사업은 4․3의 토벌대 희생자들 중심 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일방적 충혼비 건립 사업은 4․3항쟁을 일방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거나 편파적으로 기록해왔다.”고 언급했다.((「한라일보」1999 년 6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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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 의 주 장 1. 정부는 사회 안정과 국가 보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라. 2. 정부는 민주화를 구실로 사회 혼란을 획책하는 민주화 저해 요인을 과감히 척결하라. 3. 50만 도민은 일부 좌경 세력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낙원 제주 건설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당시 4․3과 관련한 정치 사회적 지형을 고려할 때, 4․3반공유족회가 지칭하 는 ‘민주화의 저해 요인이자 사회 혼란을 획책하는 일부 좌경 세력’이 제주 4․3 연구소를 비롯한 재야 단체, 즉 ‘항쟁론’을 구성하는 담론 집단임을 쉽게 추측 할 수 있다. 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4․3의 서술 양상 역시 이러한 담론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다. 국사 교과서에 각 시대의 국가 권력과 지배 이데올로기 가 반영됐기 때문이다.(정경희, 2002, p.39)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기에 발행된 국정 교과서는 4․3을 각각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를 사주하여 제주도에서의 폭동과, 여수․순천에서의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 다.(국사편찬위원회, 1979) 남한의 공산주의자를 사주하여 제주도 폭동사건과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제주도 폭 동사건은, 북한 공산당의 사주아래 제주도에서 공산무장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작전 중의 하나였다. 공산당들은 도민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한라산 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후 우리나라는 군경의 활 약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국사편찬위원회, 1982) 지배 집단의 입장이 국사 교과서를 통해서 표현되는 방식은 특정 시대와 주제, 인물에 대한 강조와 배제, 그리고 특정 집단과 현상에 대한 전형화, 설명 없는 나열을 통한 단순화로 나타난다.(김영주, 1995, p.70) 1990년 노태우 정 권 시기의 5차 교육과정에서는 이전 시기의 ‘폭동’ 표현을 대신하여 비교적 중 립적 의미의 ‘사건’을 사용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4․3의 성격을 ‘무장 폭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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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 지으면서, 군․경의 ‘진압’을 ‘활약’으로, ‘공동체 파괴와 후유증, 침묵의 강 요 등’을 ‘평온과 질서’로 선택하여 표현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그들은 제주도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을 일으켰다. 제 주도 4․3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 폭동이었다. 그들은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군경의 진압 작전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국사편찬위원회, 1990) 위의 사례를 통해 군부 정권 당시 국사교과서에 기술된 4․3은 전적으로 진압 주체의 입장에서 기술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부 정권 시기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4․3 담론을 형성하는 직접적인 환경으로 작용하고, 다시 담론의 표현 양식의 하나로 국사교과서에 반영됐다는 점을 인지할 때, 이 시기 4․3에 대한 서술 양상은 담론 주체의 정치적 작용이 반영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14) 육은 국가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그 지배적 권력 구조의 정당화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국사 교과서의 서술 양상은 지배 집단 중심의 권력의 이해 관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한기한, 2003, p.55) 따라서 해방 직후 세계냉전체제 구도와 같은 외적 환경이나 미군정의 실책, 친일 관료들의 재등용,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과 같은 4․3의 내․외적 조건들에 대한 언급이 의 도적으로 생략되어 있었다. 4․3을 ‘공산폭동’으로 이해하면 충분하며, 자세한 내 용은 알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 역사 해석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아 온 것이 다.(조성윤, 2001, p.47) 그러나 1990년 중반에 민간 정권으로 이양되면서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14) 이 같은 현상은 역대 정권에 대한 국사 교과서의 서술 양상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박 정희 정권과 공화당 정부에 대해 5, 6차 교육 과정이 “유신체제는 권위주의적 체제의 경 직성과 각종 역기능이 심화”나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와는 달리 대통령에 강력한 통치권을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체제”와 같은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과는 달 리 3, 4차 교육 과정에서는 “군사 혁명의 이념과 혁명 정부의 의욕적인 정치”나 “정신 혁 명과 국민 의식을 고취”와 같은 표현을 통해 긍정적 서술을 하고 있다. 이는 4차 교육 과정에서 발행된 국사 교과서가 전두환 정권의 긍정적인 면만을 서술하고 있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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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도 바뀌게 된다.15) 그러면서 4․3에 대한 국사교과서의 서술 양상도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음은 김영삼 정권 시기 6차 교육과정에서 발행됐던 국사 교과서의 4․3 부 분인데,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처 음으로 언급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이 여전히 ‘공산주의자’의 ‘유혈 사태’로 인한 ‘무장폭동’이라는 점에서는 이전 시기의 서술 양상과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자들은 5․10 총선거를 전후해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한다는 구실로 남한 각지에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제주도 4․3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폭동으로서,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까지도 희생되었 으며, 제주도 일부지역에서는 총선거도 실시되지 못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1996) 노태우 정권부터 4․3이 ‘사건’으로 기술되고 있지만, 사건의 주체를 여전히 ‘공산주의자’로 언급하고 성격을 ‘무장폭동’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국사 교과서 의 4․3 인식은 1990년대 중반까지도 폭동 담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보아진다. 이러한 상황은 4․3특별법이 제정됐던 김대중 정권 시기의 7차 교육과 정에 가서야 중립적인 기술이 가능해짐으로써 극복되어질 수 있었다. 단독정부수립에 대해 가장 격렬한 반대투쟁이 일어난 곳은 제주도였다. 1948년 4월 3일 단독 정부수립반대와 미군의 즉시 철수 등을 주장하는 제주도의 공산주의자와 일부 주민들은 무장봉기 하여, 도내의 관공서와 경찰지서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무장 유격대를 조직하고, 한라산을 근거지 로 하여 경찰 및 군인들과 전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두 곳에서는 총선 거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들 지역의 선거는 1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행될 수 있었다. 미군정과 새로 들어선 정부는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단체들을 동원하여 유격대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과 정에서 수 만 명의 제주도민들이 함께 희생되었다.(김한종 외, 2002) 15) 6월 항쟁과 민주화 이행은 민주화 이전의 각 층위에 구조적 지형 변화를 일으켰다. 민 주화 이행 이후 국가는 과거처럼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자신의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반면 정치 사회와 시민 사회 영역은 그 자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정해구 외, 2004,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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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사건의 성격을 이전 시기의 ‘무장폭동’이 아닌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건 주체 역시 단순히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에서 ‘제주도의 공산주의자와 일부 주민들’로 수정됐다. 또한, 진압 세력으 로서 ‘미군정과 군인, 경찰, 우익청년단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희생자 규모 역시 ‘수만 명’으로 비교적 구체화됐다. 한국 사회의 지배 집단은 국사교과서의 발행권을 독점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쟁점들의 제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왔다. 그리하여 국 사 교과서와 같은 표현 양식을 통해 독점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여타의 역사 인식을 봉쇄함으로써 담론적 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김영주, 앞 의 글, p.70) 그러나 담론적 질서가 내재해 있는 억압적 특성으로 인해 외부로 부터 질서를 거부하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저항담 론으로서의 ‘항쟁론’이 형성 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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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저항 담론으로서 ‘항쟁론’

40여 년 전의 4․3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임을 간과하지 맙시다. 당시 <군정청>이라는 통치기구를 통해 4․3 학살을 배후 조종하였던 미 국은 수입개방과 ‘하와이형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40여년의 한을 간직한 우리들에게 또다시 보이지 않는 학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42주기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 1990) 1. 저항 담론의 형성 사회 민주화를 위한 시도가 6월항쟁을 정점으로 확산되면서 군부를 중심으 로 한 한국 사회의 지배 구도는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진보 진 영이 조직화되면서 대항적 위치에서 기존의 지배 담론에 대한 저항 담론을 형 성할 수 있게 됐다. 그로 인해 군부 정권에 의해 금기시된 언어들이 제한적으 로나마 소통되기에 이르렀고, 차단당했던 화두들이 조금씩 사회적 논의의 장으 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6월항쟁의 사회적 파장은 사회 민주화로의 이행과 함께 제주 사회 내의 진 보 진영을 조직화했고, 자치적 역량을 표출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게 됐다. 문화 일반에서는 4․3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생산됐으며, 민중항쟁 사관에 입각한 연구 성과물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16) 이 같은 움직임은 4․3이 공개적인 논의 공간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지배 담론으로 서 ‘폭동론’의 견고한 지배 체제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진보 세력의 대항 담론은 물리적으로 차단당해야 했던,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소통될 수밖에 없었던 4․3의 논의를 본격적인 저항 담론17)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 16) 4․3 관련한 연구 동향에 대해서는 양정심(1998)과 박찬식(1999), 김종민(1999)을, 문 화 활동에 대해서는 나간채 외(2004)를 참고할 것. 17) 저항 담론이라고 할 때는, 저항적 행위 혹은 사회운동을 하는 개인이나 집단들이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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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1989년을 기점으로 4․3을 ‘항쟁’으로 인식하던 집단들이 서로의 소통을 강화하고 공개적으로 조직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항쟁 담론은 또 지역 사회의 현실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일련의 저항 운동 이 4․3 당시 항쟁 주도 세력의 정신을 계승하고, 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인식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4․3에 대한 저항적 인식이 자신들 운동의 중요한 자산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박찬식, 앞의 글), 서서히 현실 운동의 추동력이 됐던 것이 다.18) 4․3의 진상을 규명하고 정신을 기리는 작업이 당면한 현실 모순을 해소 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파괴, 모 순된 정치 현실 등 제주 사회의 현안들이 결코 4․3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저항 담론의 형성은 결국 민주화 의지의 표출이자 지역 사회의 현실 모순 해소라는 두 가지 의미로 집약되게 된다. 군부 정권 하의 구조적 억압에 대항 하는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지역 사회 내에 잔존하는 모순된 현실을 극 복하기 위한 실천적 움직임으로서 4․3담론이 역할하게 됐던 것이다. 이는 4․3을 ‘항쟁’의 인식에서 담론화하려 했던 일련의 움직임을 통해 접근 할 수 있다. 우선 민중 사관에 입각한 소장학자들의 학술 연구는 저항담론으로 서 ‘항쟁론’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지적 토대가 됐다. 이 시기 4․3 연구는 반공 담론 하에서는 소통될 수 없었던 항쟁의 역사를 밝히고, 그 주체를 ‘민중’으로 집중시키면서 은폐됐던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민간인을 겨냥한 미군정과 경찰의 발포를 중요시하며 민중을 항쟁 주체로 설정 하고 단선․ 단정 반대와 자주적 통일국가 수립을 투쟁의 지향점으로 분석하는 등 기존의 역사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의 도적으로 차단됐던 4․3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동시에 현실 운동의 추동력으 (지배 혹은 국가, 체제)을 규정하고 해석하는 조직화된 말 혹은 체계화된 언술을 의미한 다. (조희연 편, 2004) 18) 김영범(2004, p.33)은 “4․3 진상규명 운동이 민주화운동과 발걸음을 같이하며 전개되었 고, 가장 큰 추동력도 그로부터 공급받았다.”고 설명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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