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한국 근대화와 여의사들의 역사적 발자취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한국 근대화와 여의사들의 역사적 발자취"

Copied!
6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서론

전통적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로 전환되는 시기인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비로소 우리나라도 근대화에 들 어서게 되었다. 격동의 시기에 사회의 근대화에 주요 역할 을 해온 여의사들의 발자취를 문헌고찰과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한국 근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시작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여성노동력의 수요가 생겨나고 여성의식이 새롭게 깨어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세계적 여성해방운동도 여 성교육의 실시와 여성의식의 확대를 비롯해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개화기 개명된 지식인들뿐 아니라 여 성단체에서도 여성의 사회경제활동 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 하였다. 이 시기 특히 교육계와 의료계에서 활동한 여성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직 여성들이었다[1].

한국 근대화와 여의사들의 역사적 발자취

임 선 영1,2·김 숙 희1,3·김 봉 옥1,4·신 현 영1,5 | 1한국여자의사회, 2임선영산부인과의원, 3서울시의사회, 4충남대학교병원 재활의학과, 5명지병원 가정의학과

Historical footsteps of Korean women doctors

during modernization in Korea

Seon Yeong Rim, MD1,2 · Sook Hee Kim, MD1,3 · Bong-Ok Kim, MD1,4 · Hyun-Young Shin, MD1,5

1Korean Medical Women’s Association, Seoul, 2Dr. Rim's Obstetrics & Gynecology Clinic, Seoul, 3Seoul Medical Association, Seoul, 4Department of Rehabilitation Medicine,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Daejeon, 5Department of Family Medicine, Myongji Hospital, Goyang, Korea

Received: January 2, 2018 Accepted: January 17, 2018 Corresponding author: Hyun-Young Shin

E-mail: shy801117@gmail.com © Korean Medical Association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 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Women doctors played an exceptional role during the period of modernization in Korea, making tremendous contributions toward the development of Korean society. The first woman doctor, Esther Park, started a community service program for women in adverse circumstances, but later, expanded it to serve both men and women equally. Esther Park’s spirit of service earned her tremendous respect and inspired later generations of women doctors, whose contributions and competences have been acknowledged, and who made steps toward establishing and demanding sexual equality between men and women. In addition, women doctors have contributed to informing people on about important health issues, administering treatment, and preventing of disease. All these considerations demonstrate that during the modernization of Korea, women doctors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this period was that women became role models in many parts of society and pioneered the path toward sexual equality. They became a symbol of responsibility and collective leadership for the following generations, and women doctors, in particular, were notable examples of the spirit of leadership.

(2)

근대 여성교육의 시작과 전문직

그동안 내외법에 묶여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지 못하고 여 성의 활동 범위가 가정 내에 한정되어 있다가 근대 교육의 혜택을 받은 여성들이 졸업 후에 처음으로 전문직에 진출하 게 되었다. 근대 여성교육의 효시는 1886년 스크랜튼 선교 사가 세운 이화학당으로 가부장적 인습에 얽매인 열악한 여 성들의 형편을 타개하기 위해 한 사람의 여학생으로 시작하 였다. 내외법으로 부모들이 어린 여아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 이다. 점차 여성교육기관이 확대되면서 여성의식이 깨어나 고 여성해방의 계기가 되었다. 여성교육의 시작은 내외법에 의해 안에서만 유폐되어 있던 여성들에게 밖으로 활동범위 를 넓혀주었다. 교육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 회를 제공하였고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기회와 전문직에 뛰 어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가부장적 굴레에 얽매 어 있던 여성들에게 주체의식을 심어주기도 했으며 여성의 지위를 남녀평등의 단계에까지 가까이하게 해주었다. 이 시 기는 여성들이 직접 사회변화를 선도하고 계몽해 나갔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전문직 여성들은 위기에 처한 국가 를 구하기 위한 구국운동에 앞장섬으로써 사회지도층의 역 할을 담당하였다. 그 영향으로 많은 여성이 3·1운동을 비롯 한 독립운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1].

전통시대의 의료와 의녀제도

개화기 여의사의 출현 전 유교 전통시대인 조선시대에는 의녀들이 활동하였다. 의녀제도는 조선왕조 전 시대를 통해 서 지속하였던 의료제도이고 우리나라 의학사상 그 의의가 컸으며 여성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2]. 내 외법으로 여성들은 병이 나도 남자 의사에게 보이기를 꺼려 서 희생자가 생기기도 하였다.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6년에 일반 민중들의 의료기관인 제생원에 남자 의사의 보조역할 로 의녀제도가 창설되었다[2]. 처음엔 관비에서 선발하였는 데 점차 필요에 따라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대되어 의녀 선발 이 이루어졌다. 세종 5년엔 영특한 관비의 어린 소녀들을 선발하여 맥경 및 침구법을 가르쳐 부인들의 질병을 진료케 하였다[2]. 세 조 5년엔 제생원을 혜민국에 병합시켜 의녀교육도 혜민국에 서 담당하게 하였다. 성종 9년엔 의녀의 자격조건에 대하여 몇 가지 조항을 추가하였다. 세종, 세조, 성종 3대를 통하여 내의녀, 간병의녀, 초학의녀 세 종류로 나누었다. 영조 때에 는 내국의녀와 혜민서의녀를 구분하였으며 내국의녀는 정원 이 12명으로 왕실 여성의 질병치료에 종사했으며 혜민서의 녀들은 정원이 70명으로 궁중 이외의 양반가나 일반 부인의 질병치료에 종사하였다. 의녀는 남성의원의 보조역할이었기 때문에 항상 남성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입장에서 사대부가나 양인의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비 중에서 선발하였 다. 신분적 한계가 있었음에도 의녀들은 당시 여성으로는 최 고의 지식층이었다. 의녀는 인명을 다루기에 의술뿐 아니라 덕을 갖추어야 했기에 의술을 닦기 전에 천자문 효경 정속 편의 한자를 익힌 뒤 산서를 비롯한 의학서와 간병 침술을 습득하였다. 그리고 기초교양으로 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읽히기도 하였다[1]. 의녀는 처음에는 남성의원과 동행하여 특히 여성환자를 직접 대면하고 진찰하는 일, 치통이나 종기같이 직접 피부를 접촉하는 일을 맡았다. 아이 출산에 조산원 역할과 진맥과 침을 놓는 일을 의녀들이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계 발을 통해 남성을 능가하는 전문성을 발휘하여 이름을 날린 의녀들도 많았고 그 의술의 재능을 전수하기 위해 국가가 관 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의녀들을 공식 연유에 참가 하도록 제도화하였다[1]. 연산군 이후 중종 때에 와서는 의 녀들의 연유 참가를 엄금하였지만 공공연하게 의료와 가무 를 즐겨 조선 후기에 와서는 약방기생이라고 불리게까지 되 었다. 의녀의 지위는 천류라는 전통적 관습에 얽매여 남성의 관과 같은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하고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개화의 신풍조가 들어오면서 노비제도가 폐지되고 서양의학 에 의한 근대식 왕립병원이 생겨나면서 의녀제도 자체가 역 사 속으로 사라졌다[3]. 위와 같이 전통사회 의녀의 잠재력 이 개화기에 근대의학이 도입되어 기회가 열리자 여성들의 능력이 한꺼번에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3)

서양의학의 도입: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1876년 조일 수호조약 이후 일본이 원산, 인천 등 개항지 에 서양식 병원을 개설하면서 우리나라는 일본을 통해 먼저 독일 의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3]. 그 후 갑신정변을 계 기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1885년 제동에 광혜원이 세워지 고 알렌, 스크랜튼 등의 서양의사들이 참여하여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의 의료사업이 시작되었다. 1887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파송된 의료 선교사 스크랜튼은 여성들 과 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하기 위한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이화학당 구내에 세웠다.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에 명성황후 가 보구여관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곳에서 미국 선교사이며 여의사인 메타 하워드가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치료 하다 과로로 건강이 악화하여 귀국한 후 그녀를 뒤이어 로제 타 셔우드 홀(닥터 홀)이 일하게 되었다[3]. 한국 여성을 위한 실제적인 의학교육은 1890년 닥터 홀 에 의해 보구여관에서 이화학당의 네 명의 조선인 소녀들과 한 명의 일본인 소녀에게 임상실습을 한 것으로부터 시작되 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이나 중국에도 여성을 위한 의학교가 생기기 이전이었다[4].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1900년에 와서야 출현하였다. 그녀가 바로 박에스더이다. 그녀의 본명 은 김점동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 과대학을 입학 4년 후에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박에스더는 선교사인 아펜젤러 밑에서 일하며 일찍이 서양사상에 접했 던 아버지 덕분에 1886년 11월 한국 근대 최초의 여학교로 설립된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박에스더는 특히 영어 에 능숙해 보구여관의 의사이자 이화학당의 교사로 취임한 닥터 홀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3]. 닥터 홀은 철저하게 격리된 채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해온 한국 여성들을 진료하기 위해서는 여의사가 필요하다고 판 단하여, 우선 박에스더에게 의학을 가르치고자 했다. 박에 스더는 그때부터 보구여관에서 의료보조원으로 일하며 기 초의학과 의료기술을 습득했고,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했 다. 박에스더는 로제타가 언청이 수술을 하는 것을 보고 감 동하여 의사가 되는 꿈을 키워나갔다. 닥터 홀 내외가 평양 선교기지 개척 담당자가 되어 평양 유일의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하자, 1894년 5월 박에스더도 평양으로 함께 갔다. 당 시 청일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닥터 홀 내외 와 박에스더는 수많은 부상자를 간호하며 헌신적인 의료활 동을 펼쳤다. 박에스더는 닥터 홀이 소개한 박유산과 결혼하 여 1894년 말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4]. 미국에 도착한 박에스더는 1895년 2월 뉴욕의 리버티 공 립학교에 입학했고, 9월부터 뉴욕시 유아병원에 들어가 생 활비를 벌면서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했다. 1896년 10월 박에스더는 신설학교였던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대학교)에 입학해 의학을 전공했다. 유학생활 중 아내의 장래를 위해 농장일을 하며 박에스더의 의학공부를 뒷바라지하던 남편 박유산은 먼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박 에스더는 역경을 딛고 1900년 6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 여 한국 여성 최초로 의사가 되었다[2]. 1900년 11월에 조선으로 돌아온 박에스더는 미국 감리회 여선교부의 정식 파송을 받고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여 성들이 남녀유별의 내외법에 젖어 남자의사를 피하는 상황 에서 여의사인 박에스더의 활약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서울 정동의 보구여관에서 헌신적으로 진료활동을 펼치던 박에스 더는 1903년경 콜레라가 유행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평안도 와 황해도의 구석진 촌락까지 환자를 찾아다니며 무료 순회 진료를 하였다. 상하수도시설이 없었던 그 시절에 무지한 국 민들에게 위생계몽 강연을 실시하며 국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여러 분야에서 맹활약하였다[1]. 1903년 박에스더는 닥터 홀이 의료사업을 벌이고 있던 평양 의 광혜원으로 옮겨 일했으며 이곳에서도 박에스더는 10개월 동안 3천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다고 하며, 아마도 당시 여의사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진료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 실, 한국의 의료에서도 ‘남성환자는 남자가, 여성환자는 여 자가’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의료현장 곳곳에 남아 있었는 데, 오히려 이 시기 여의사는 대중 속으로 직접 들어가 이러 한 경계를 넘어서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 의 사로서 명성을 쌓은 박에스더는 우리나라 최초로 장애자들 을 위한 특수교육을 위해 닥터 홀이 세운 맹아학교 운영에도 그리고 교사로도 참여했다[4]. 또한, 닥터 홀과 함께 장차 한

(4)

국 의료계를 짊어질 여성의료인력의 보급을 위해 간호학교 의 설립을 주도하였다[1]. 활발한 의료활동이나 사회사업 외에도 박에스더는 항상 여 성의 계몽과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박에스더 스스로 한 국 최초의 여의사로 활동하며 여성의 우수한 능력을 입증했다. 여러 곳에서 강연을 통해 한국의 장래를 위해 무엇보다 여성교 육이 급선무임을 주장하며 건강계몽활동에도 앞장섰다. 또한, 의료활동과 함께 선교활동을 펼치며 기독교의 보급에 힘썼다. 조선 사람들이 접한 최초의 의사이자 계몽 사상가로서 그리 고 교육자로서 평가될 수 있는 박에스더는 1906년 과로로 얻 은 폐결핵으로 인해 1910년 4월, 34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 을 떠나고 말았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여성 의료에 헌신한 박에스더의 역할은 근대 조선 땅에서 소외 당한 여성들에게 생 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역사적 업적으로 길이 남아있다[1].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의학교육과 여의사들의 활동

박에스더의 사망 이후 1918년까지는 대를 이을 여의사가 없었다. 여성을 위한 공식적인 의학교육기관이 마련되기 전 에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여성들은 외국, 주로 일본에 유학하 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가장 많은 여성이 동경여자의학전문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한국 근대문학의 대가인 이광수의 부 인이었던 허영숙이 1918년 동경여의전을 졸업하여 첫 번째 의사가 되었다[2]. 1920년 5월 처음으로 영혜의원을 개원하 였다. 1921년에는 정자영, 현덕신, 김복인, 박정자, 변석화 가 졸업하였다. 정자영은 돈화문에 1923년 진성당 의원을 개 원하여 소아과 산부인과 진료로 명성을 날렸다[2]. 김복인은 1970년대까지 원남동에 개원하였고 현재 한국여자의사회의 전신인 대한여자의사회에 참가하여 이사를 역임했다[3]. 1923년 동경여의전을 졸업한 길정희, 한소제는 대한여자 의사회 창립회원으로 수년간 활동하였다. 같은 해 졸업한 유 영준은 동경유학시절 여자계라는 여성지의 편집을 하기도 했다[2]. 길정희는 우리나라 여성의학교육에 지대한 공을 세 웠으며 닥터 홀이 창설한 경성의학강습소(1928년 창설)의 부소장으로서, 1933년 닥터 홀이 떠난 후에는 의학강습소를 인수하여 경제적인 난관에도 불구하고 제3회까지 졸업생을 배출하여 조선총독부 의사 검정고시에 전원 합격시켰다[3]. 1934년 방덕홍, 주명길, 박정신, 방순정이 동경여의전을 졸 업하였으며, 1935년에 김효순이 졸업하였다. 1934년에 졸업한 손치정은 훗날 대한여자의사회 초대회 장을 지냈고[3] 194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한국 최초의 여자 의학박사가 되었으며 같은 대학 약리학교실에서 일했다[1]. 손치정은 여성들이 사회경제적 활동을 중시하여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을 비판하고 일과 가 정 영역에서 의사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의 역 할을 모두 충실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동기생인 이채희는 대한여자의사회 제2대 회장을 역임했다. 강주심은 대한여자의사회 창립회원 겸 이사로서 실무에도 열성을 아 끼지 않아 공이 많았으며 1970년대 후반까지 서울 인현동에 서 강주심산부인과를 개원하였다[3]. 1940년 동경여의전을 졸업한 장재섬은 한국여자의사회 제 8대 회장으로서 군사정권에서 해체되었던 대한여자의사회를 사단법인 한국여자의사회로 재등록하는데 성공하였다. 1970년 대까지 서울 중구 필동에서 장재섬소아과를 개업하였다. 그 외에도 성형외과 개원의였던 정성채, 한국여자의사회 경남지 회 초대회장을 지낸 마산의 이성숙의원장이었던 이성숙 등이 동경여의전 출신이다. 그 외 동경여의전 출신은 김애희, 김옥 련, 김명실, 오무희, 고실여, 김필례, 전풍자, 송영희, 이강순, 조영선, 차인실, 홍규옥, 홍규보, 박봉식, 문귀순 등이 있다[3]. 두 번째로 많은 한국 학생이 졸업한 학교는 제국여자의약전 문학교이다. 제2차 대전 후에 남녀종합대학인 동방대학이 된 이 학교는 동경여자의전보다 역사가 짧다. 장문경, 김용희가 이 학교에 최초로 입학한 한국유학생이다[2]. 1930년 제1회로 졸 업한 김용희는 닥터 홀의 권유로 신설 학교인 이 학교로 갔다. 김용희는 53년간 서울 서대문에서 부인병원을 개원했다. 장문 경은 1934년부터 서울 관훈동에 정화산부인과의원을 개업하 고 있으면서 장학사업으로 많은 학생을 길러냈다. 1983년에 는 정식으로 장학법인 장문경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사회에 많 은 공헌을 하다 수년 후에 타계하였다. 대한여자의사회 제4대 회장을 역임한 외에도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대한결핵협의회 서울시지부장 외에도 많은 활동을 했다. 제9대 김동순 회장

(5)

때인 1978년, 국제여자의사회에서 각국의 선구자(70세 이상 여의사) 소개 책자 Women Physicians of the World에 한국 여의사의 선구자로서 수록되었다[3]. 1942년 제국 여자의약전문학교 출신이며 대한여자의사회 창립과 초창기에 많은 열성을 보인 최옥자는 1947년부터 교 육계에 투신 1961년부터는 수도여자사범대학장으로서 의사 로 활동하기보다 교육자로서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후에 세 종대학교로 발전시켰으며 물론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목사로 서, 화가로서도 활약을 계속하면서 세종재단의 이사장 직도 맡았다. 이 외 제국 여자의약전문교 출신은 거의 30명이 되며 대한여자의사회에 참가한 수도 10여 명으로 서준영, 서정아, 임신화, 서영옥, 임복자, 김학수, 박봉서, 정신영, 윤병숙 등으 로서 임신화는 대한여자의사회 서울시지부 제2대 회장을 지 냈다. 제2차 대전 중에 설립된 대판여자의학전문학교는 종전 후에 몇몇 한국인 학생이 서울여자의과대학으로 편입했다[3].

국내의 여자 의학교육과 여의사들의 활동

1916년 4월 정식인가를 받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청강생 자격으로 소수의 여학생이 있었다. 여자 의학교육기관이 없 었던 이 시기에 이들은 졸업 후에 의사 검정고시에 합격해야 만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1918년 제2회 졸업생으로 서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 세 여학생이 있었는데, 이들은 닥 터 홀의 간청으로 검정고시 없이 졸업과 동시에 면허를 취득 했다고 전한다. 이들은 국내 의학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후 의사가 된 최초의 여의사들이었다[3]. 일본 요시오까전문학 교를 다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편입, 1926년 졸업하여 의 사가 된 고수선은 독립운동뿐 아니라 고향인 제주에서 제주 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신생활운동을 펼쳤다[5]. 박에스더 사망 이후에 1918년까지 우리나라에 여자의사 배출이 없었고, 그 후에도 극히 소수의 일본의 여자의전 졸 업생뿐이어서 여성이 사회참여와 여자의사의 필요성을 강조 해온 닥터 홀이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가까워진 길정희와 상 의하여 1928년 9월 4일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열게 되었다. 강습소 소장에 닥터 홀, 부소장에 길정희가 맡아 운영했다. 제1회 입학생 15명이 1931년 졸업 때는 6명이 되었고 총독 부 의사시험에 전원 합격했다. 2회 졸업 15명, 3회 졸업 8명 이 나왔으나 4회, 5회로 입학한 학생은 강습소 폐소로 졸업 을 못한 채 검정고시를 치렀다[5].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정식 학교가 아니므로 매년 총독부 학무국에 설립허가 신청을 해야만 하였고, 닥터 홀이 1933년 68세로 은퇴하고 귀국하게 되어 닥터 홀로부터 강습소 운영 을 위임받은 길정희는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려고 많 은 애를 썼다. 정구충 등 유지들과 함께 재단법인을 발기하 였고, 1934년 재단법인 설립위원회를 발족하였으나 한국인 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을 위험시하던 총독부의 반대로 강습 소 지속도, 전문학교로서의 승격도 어려웠다. 재단법인 설립위원회는 강습소가 중단된 수년 후 당시 교 육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독지가 호남의 부호 김종익을 소개 받아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의논하게 되었다. 어렵사리 김종익, 박춘자 부부의 도움으로 총독부에 건의하여 1937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허가를 받았다. 1938년 5월에 개교하게 된 이 학교는 경성여자의학강습소와는 관계없이 설립된 전문학교이나 길정희, 김택원 부부가 강습소를 운영 하면서 전문학교 승격을 위해 큰 노력을 하였다[3]. 그 결과 여자의사 양성을 위한 교육체계가 더욱 단단해졌다. 경성여 자의학전문학교는 해방 후 1948년 서울여자의과대학이 되 었고 1957년 남녀공학 수도의과대학으로 바뀌었다. 1971년 에 학교법인 우석학원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의 합병으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2].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졸업하고 의사 검정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총 21명이었고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응하여 합격한 사람은 7명으로서 이들 중 김금선, 신금자, 윤영은, 이인숙, 정남술은 대한여자의사회 창립회원이다. 검정고시 제도는 1946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2]. 조선 내에서 여의사 양성을 위한 근대 의학교육이 처음 시 작된 것은 1890년 외국인 선교사 닥터 홀이 보구여관(이대 병원 전신)에서 이화학당 졸업생 5명에게 의학을(생리학과 약리학)을 가르치면서부터인데[1]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 학은 1945년 제2차 대전 종료 직후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 하여 향림원이 설립되면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의학부와

(6)

약학부를 두어 같은 해 10월 15일 첫 입학생을 맞이하였고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2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는 우리나라 유일의 여자 의과대학으로 남아있다[2].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의사들은 주로 관립, 공립 의원에 서 일했으며 국내외에서 근대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여 성들은 관립 혹은 공립병원에서 일정 기간 실습 혹은 근무 를 한 뒤에 경성이나 혹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대부분 작은 규모의 개인의원을 개원하였다[1]. 여성의사들이 주로 담당했던 분야는 산부인과 소아과였다. 이는 가정 내에서 아이들의 건강을 살피고 출산을 돌보아왔던 전통적인 여성 의 역할과 부합돼 있다.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탁아소 주치 의 그리고 자신의 모교인 여학교에서 교의로 일하면서 근 대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며 국민의 보건향상에 기여했다 [1]. 여의사가 되는 과정도 힘들었지만 사회 경제활동을 하 면서 가정과 일을 양립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 역시 매우 컸 다. 그러나 굳센 의지로 양립해 나간 여의사도 있었고 의료 활동과 여성단체 활동에 더 많은 정열을 쏟은 여의사도 있 었다. 물론 일과 가정영역에서 모두 다 충실히 해야 한다 고 주장하기도 했다. 3·1운동 및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여 성해방운동회의 창립을 주도하기도 하였다[5]. 이처럼 여의 사들은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며 리더십을 발휘하여 인술 을 펴나갔다.

결론

한국 근대화시기에 여의사들의 역할은 실로 놀랄만한 것 이었으며 한국 근대사회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의 역할로 시작된 봉사와 헌신의 정신은 처음엔 병들고 어려운 처지의 여성을 구하기 위해 시 작하였으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널리 인술을 펼쳤다. 이 정 신은 귀감이 되어 후대 여의사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여의사 들은 실력을 당당히 인정받으면서 남녀평등구현에 다가갔 다. 국민의식의 계몽활동으로 건강과 질병관리, 질병의 예방 에 앞장서며 근대적 생활의 합리화에도 기여했으며 3·1 운 동 및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이 사 회의 주체 및 주류가 되는데 롤모델이 된 것이다. 여의사들 은 여성이 전문인으로서 책임의식과 공동체적 리더십을 발 휘하여 미래 세대에 희망의 등불이 된 것이다. 찾아보기말: 역사; 한국; 사회적 변화; 여성; 의사 ORCID

Seon Yeong Rim, https://orcid.org/0000-0002-3261-9110 Sook Hee Kim, https://orcid.org/0000-0003-4411-5240 Bong-Ok Kim, https://orcid.org/0000-0002-4831-5023 Hyun-Young Shin, http://orcid.org/0000-0001-7261-3365

REFERENCES

1. Lee BY. Women doctors, being the social leader during the modernization period. Seoul: Korean Medical Women's Association; 2017.

2. Korean Medical Women’s Association. 90 Years of Korean medical women doctors 1986. Seoul: Korean Medical Women’s Association; 1986.

3. Korean Medical Women’s Association. 50 Years of Korean women medical doctors 1956-2005. Seoul: Korean Medical Women’s Association; 2005.

4. Park JH. Dr. Rosetta Sherwood Hall. Paju: Dasan Books; 2015. 5. Won DO, Kim EK. Passionate Korean doctors who fought

for independence. Seoul: Foundation for Commemorating Korean Doctors’ for Their First Century of Achievements; 2017.

Peer Reviewers’ Commentary

본 논문은 한국 근대화 시기에 여의사들의 주요 역할을 문헌 고 찰을 통해 소개한 것이다. 근대 여성 교육의 시작과 전문직의 역 할, 전통시대의 의료와 의녀제도,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의 봉 사와 헌신의 정신, 일제 강점기의 의학교육과 여의사들의 활동에 대해 잘 고찰하고 있다. 근대화 시기에 여의사들은 인술뿐 아니 라 국민의식의 계몽활동, 근대적 생활의 합리화에도 기여했으며 3.1 운동 및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여의사들 은 사회의 주체 및 주류가 되는 롤모델이 되었으며, 전문인으로 서 책임의식과 공동체적 리더십을 발휘하였음을 잘 소개하고 있 어서 좋은 지침이 되는 자료라고 본다. [정리: 편집위원회]

참조

관련 문서

- 복식에도 이전의 과도한 장식적 화려함 보다는 인간 본연의 자연미 추구 - 여성 인체에 만족스런 기하학적인 형태와

정신

한국 기독교 대안학교의 비전과 목표, 설립 바탕을 살펴 보면서 네덜란드 교육과 비슷하게 가정, 학교, 교회(혹은 선교센터)의 세 영역에서 아이들을 관리한다.

귀하는 자신의 도박하는 방식이나 도박을 해서 발생한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8. 하지만 도박을 자주 한다면 도박 관련

넷째,자발적이고 선도적인 활동인 선제적 활동에 이르는 심리적 프로세스 를 개인-업무환경 적합성 관점으로 규명한 최초의 시도로 지금까지의 선제적 행동의

일반적으로 타이타늄 합금이 대기중에 노출되면 타이타늄 표면에서 산소와 결합 하여 2~5nm의 Ti O 2 라는 자연적인 산화막을 형성하여 내식성을

그러나 호남이 주체적으로 추상회화를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미술사에 있어서 크게 재평가되지 못하였다.1966년『공간』창간호에 실린 박서보의

특히,본 시스템은 국내에서 최초의 단상 중규모 태양광발전시스템의 설치 운전된 시스템으로 배전계통과 원거리에 설치하고자 할 경우에는 시 뮬레이션에서 확인한바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