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분석
제 10 주: 윤리학 II: 가치론(Axiology)과 규범윤리학(Normative Ethics)
가치있는 것들: 예술, 음식, 우정, 놀이 등
어떤 대상들 혹은 사건들이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도스또옙스키의 죄와 벌은 감동적이다. 점심 때 후식으로 먹은 배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은 환상적이었다. 우리 부대원들은 정말 가족같은 전우애로 똘똘 뭉쳐 산다! 등산이 최고야. 천왕봉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지리산의 풍경은 정말 장관이거든. 또한 이런 대상들 혹은 사건들의 가치는 우리들의 행위와 관련해 중요한 도덕적 함의를 가지는 듯하다. 그것들의 가치로 인해서, 그런 대상들 혹은 사건들을 만들고/일으키고 획득하고/즐기는 것 (이하: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
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치있는 모든 대상들이나 사건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늘 추구할만한 것은 아니다. 첫째, 두 대상들 혹은 사건들이 각각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들을 모두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경우들이 있다: 너가 발레리나가 된다면 수학자의 꿈은 포기해야할 거야. 놀러가려면 산에 가든지 물에 가든지 하나를 골라야지, 하루 뿐인 공휴일에 둘다 갈 수는 없어. 하지만 위 경우들에서는 최소한 각각의 사건이나 대상이 그 가치를 계속 지니지만 단지 또다른 사건이나 대상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할뿐이다.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 (계속)
그런데, 둘째, 어떤 경우에는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이 가지는 가치 자체가 외적 조건에 의존적이다. A: 핵전쟁이 터졌지만 최소한 우리 집 금고에는 수십톤의 금괴들이 있어. B: 정신차려! 그걸 먹을 수 있니 입을 수가 있니? 이처럼 어떤 외적 조건이 성립하여야만 가치를 지니는 대상들/ 사건들은 외재적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며, 반면 그 가치가 외적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대상들/사건들은 내재적 가치를 띤다고 말한다.쾌락과 고통
외재적 가치만지니는 대표적인 사물은 돈이다. 지폐는 그 자체로는 이러저러한 문양이 인쇄된 종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 사건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가지 예로서 쾌락을 들 수 있다.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뜨의 춤 부분이 주는 감동은 정말 최고야. 우리는 정말 속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 이런 쾌락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쾌락이 언제나 추구할만한 것은 아니다. 백조의 호수 공연이 있을 때마다 보러갔더니 돈이 떨어져서 춥고 배고파. 우리 커플 속궁합은 잘 맞았지만 성격 탓에 결국 깨졌어. 너무 괴로워. 즉 어떤 종류의 쾌락은, 내재적으로 가치있을지는 모르지만,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추구할만 하지 않다.행복에 대한
잠정적 정의
앞 슬라이드에서 언급한 사실들은 행복을 쾌락과도, 고통의 부재와도 동일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사실 행복에 대한 그럴 듯한 정의가 얻어지려면, 쾌락과 고통 두 요인을 다 언급해야할 것이다. s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주체라고 해보자. 그러면 s의 행복=(s의 쾌락)-(s의 고통) 그런데 이 정의는 다음과 같은 가정들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정1. s가 누리는 행복은 s가 겪는 쾌락과 고통만 감안하여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정2. (a) s가 누리는 쾌락은 수량화할 수 있다 (b) s가 누리는 고통은 수량화할 수 있다. (c) s가 겪는 쾌락과 고통 사이에 덧뺄셈이 가능하다.행복의 총량에 대한
잠정적 정의
나아가서 s1, . . . , sn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n명의 주체들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s1, . . . , sn의 쾌락의 총량=(s1의 쾌락)+. . . +(sn의 쾌락) s1, . . . , sn의 고통의 총량=(s1의 고통)+. . . +(sn의 고통) s1, . . . , sn의 행복의 총량=(s1, . . . , sn의 쾌락의 총량)-(s1, . . . , sn의 고통의 총량) 이 정의는, 가정1과 가정2에 더하여, 다음 가정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정3. (a) si가 겪는 쾌락은 si 6=j가 겪는 쾌락과 덧뺄셈이 가능하다. (b) si가 겪는 고통은 si 6=j가 겪는 고통과 덧뺄셈이 가능하다. (c) s1, . . . , sn이 겪는 쾌락과 고통 사이에 덧뺄셈이 가능하다.이기주의
윤리적 이기주의(egoism)는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할 것이다: (E ) 시점 t에 행위주체 s의 행위 a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다 IFF (i) s는 t에 a1, . . . , an중 하나를 행할 수 있고, (ii) a1, . . . , an의 결과들 가운데 a의 결과가 s 자신에게 최선이다. s가 t에 실제로 행하는 행위는 s가 t에 행할 수 있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k ∈ {1, . . . , n}에 대하여 a = ak라는 점에 유의하라. Q. 조건 (ii)를 s의 행복에 의거하여 정의한다면?이기주의에 대한 오해
흔히 이기주의자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 거짓말하고 속이고 죽여도 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지레짐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기주의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뢰밭 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 순간에 불구가 되거나 죽을 수 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정직하게 대하지 않으면 그들도 당신을 정직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친구나 가족에게 무관심하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도 그들은 당신에게 무관심할 것이다.만
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면?
만일 당신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속이고 훔치고 죽이겠는가?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 등장하는 이기주의자 트라시마코스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다. 당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짓밟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당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정치권력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가 군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다른 사람들은 그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고, 그 대가로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정말 빠져나가진 못한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것으로 그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독재자는 누가 자기 편인지 전혀 알 길이 없고 자기편이 과연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자기네 가운데 누가 자기를 살해하거나 내쫓으려고 음모를 꾸미는지 전혀 모른다. 그는 누가 자기를 몰아내거나 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협력할까봐 결코 안심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광포한 이기주의”의 이런저런 사례를 인용하면서 그 같은 삶은 결국 불행과 좌절로 이어질 뿐이라고 결론지었다.정말로 자신에게 좋은 것은?
플라톤이 공격하는 것은 이기주의 자체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그들은 자신의 처신이 장기적인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무엇이 지신에게 행복이나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가라는 중대한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잘못된 계산을 한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정말로 자신에게 좋은 것은? (계속)
이 문제를 좀 더 현대적인 말로 설명해 보자. 사람들은 대부분 고속도로를 운전 할 때 일정한 “교통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이를테면 다른 차량을 추월할 때를 제외하고는 차선을 지켜야 한다, 야간 운전을 할 때 라이트를 켜야 한다, 등등. 나는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다른 운전지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원하는데, 교통 규칙을 무시하면 교통사고에 말려들 가능성이높기 때문에, 교통규칙을지키는것이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된다. 결국 윤리적 이기주의자라고 해도 살인과 절도 등을 일삼지는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이타주의
윤리적 이타주의(altruism)는 다음 형태를 취할 수 있다: (A) 시점 t에 행위주체 s의 행위 a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다 IFF (i) s는 t에 a1, . . . , an중 하나를 행할 수 있고, (ii) a1, . . . , an의 결과들 가운데 a의 결과가 s 이외의 다른 행위주체들 s1, . . . , sn에게 최선이다. Q. 조건 (ii)를 s1, . . . , sn의 행복의 총량에 의거하여 정의한다면?순수한 이타주의
다른 사람의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는 이타주의는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이기주의의 반대이다. 순수한 이타주의자는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이들에게 무엇이 좋은지만을 고려한다. 그녀가 (a) (자신을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커다란 이득이 되는 행위, 그리고 (b) (오늘 밤에 그를 콘서트에 갈 수 있게 하는 것 처럼) 자신에게는 전혀 이득이 없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는 행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녀는 (b)를 선택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심 없는 (selfless) 사람이어야 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 그녀는 오로지 다른 사람을 섬길 뿐 자신의 이익은 완전히 포기한다.순수한 이타주의의 문제점: 이타주의자는 생존불가능하다
순수한 이타주의자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고 잠을 자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음 식을 먹을 수 있다면 그들은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그들은 조만간 굶어 죽게 된다. 사실상 이타주의자만 있는 세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한 사람이 음식을 받으면, 그 사람은 “아니다, 당신이 먹어라”라고 말해야 한다. 그 다음에 다른 누군가에게 음식을 주면 그 사람 역시 이타주의자로서 “아니다, 당신이 먹어라”라고 말해야 한다. 음식을 받는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한다. 이타주의가 살아남아서 내일도 이타주의자가 되려면 제 자신의 필요를 아주 조금이라도 중요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온건한 이타주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는 그의 유명한 가르침에서 네 자신의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라고 말하지 않으 며, 네 자신만 사랑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대신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네 이웃을 사랑하라 고 말한다.온건한 이타주의: 누가 내 이웃인가?
그런데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은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나의 이웃이라는 것이다. 이 대답이 맞다면,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나는세상 모든 사람을 나 자신만큼 사랑하여야 한다. Q.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온건한 이타주의인가?)온건한 이타주의: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나에게 무엇을 하라는 명령인가? 그것은 나 자신과 내 가족에게 가지는 애정을 내 이웃—즉 모든 사람들—에게 가지라는 명령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심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 명령이 요구하는 바는 느낌보다 행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 가족을 사랑 하는 것과 똑같은 강도로 먼 곳에 사는 부족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마치 내가 내 가족에 가지는 관심과 동등한 관심을 그들에게 가진 것처럼 행위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어떤 행위일까? 내 자신과 내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먼 곳에 사는 부족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그것 역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온건한 이타주의의 문제점: 잘못된 결과가 산출될 수 있다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위에서처럼 해석하여 얻을 이론을 “온건한 이타주의”라고 부르자. 결국 온건한 이타주의는 다음과 같은 이론이 된다: 시점 t에 행위주체 s의 행위 a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다 IFF a는 만일 내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나 자신만큼 사랑했더라면 취했을 행동이다. 위 조건대로 행동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생각에는 잠재적 문제점이 있다. 그런 행위는 정말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일까? 이타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사랑하며 그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때때로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나온 행위가 그 자식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황금률
황금률(golden rule)은 남에게 대우받으려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우하라 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대우받고 싶은 그대로 행해야 한다. I 당신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남이 당신을 도와주기 원한다면 당신도 남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I 남이 당신을 인정해주기 원한다면 당신도 그들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I 남이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기 원한다면 당신도 남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황금률과 관련된 논란들
그러나 이 도덕원칙은 몇 가지 논란을 야기한다. 첫째는, 해석 상의 논란이다. (1) 당신이 남들에게 정직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그들에게 정직하기를 그들이 원하기 때문인가? (2) 아니면 당신이 그들에게 정직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당신을 정직하게 대하기를 당신이 원하기 때문인가? 둘째는, 보다 심각한 논란인데, 황금률을 어느 쪽으로 해석하건, 단지 x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y 가 원하기 때문에 x가 (또는 y 가)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반직관적이다. (1)의 해석을 채택해 보자. 즉 남들이 나에게 원하는 방식대로 나는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친절한 대접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한 대접을 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무관심해야 하는가? 반대로 (2)의 해석을 채택해도 비슷한 문제가 생긴다. 내가 학대받기를 즐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남들을 학대해야 하는가?보편화가능성과 윤리적의무
임마누엘 칸트는 부분적으로는 방금 제시한 이유들 때문에 황금률에 만족하지 못했다. 주체 s의 행위 a가 올바른지 여부는 s가 a를 행하기를 특정한 사람이 의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a를 행하라”라는 준칙에 따라 행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라”라는 준칙이 보편법칙이 된다고 상상해 보자. 그 경우 누구 말도 믿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거짓말은 신뢰에 의거한 의사소통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서는 역설적으로 거짓말이 불가능해진다. 즉, 그런 세상에서는 한편으로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해야 되지만 또한편으로 누구도 거짓말을 할 수없게 된다. 이것은 모순이기 때문에, 그 준칙은 보편화 가능하지 않다. *독일어 “wollen”은 원한다는 뜻과 더불어, 말하자면, 의지한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보편화가능성과 윤리적의무 (계속)
이것은 이른바 칸트주의라는 도덕이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K ) 시점 t에 행위주체 s의 행위 a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다 IFF
(i) 그 행위 a는 어떤 준칙(maxim) m에 부합하며
(ii) m은 보편화가능(universalizable)하다.
여기서 보편화가능하다는 것은 다음처럼 정의될 수있을 것이다: (U) 준칙 m은 보편화가능하다 IFF m이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하는 보편법칙이 된다고 하더라도 모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