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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성 문화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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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도 여성 문화에 관한 고찰

가족과 결혼생활을 중심으로

-지도교수 송 성 대

이 논문을 교육학 석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04년 5월 일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전공

제출자 박 정 희

박정희의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2004년 7월 일

심사위원장 인

심 사 위 원 인

심 사 위 원 인

(2)

<국문초록>

제주도 여성 문화에 관한 고찰

- 가족과 결혼생활을 중심으로 -*1) 박 정 희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전공

지도교수 송 성 대

산업화, 정보화 및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역의 특이성이 희석되어 가고 세계화, 국제화의 외침 속에 국적 또는 출처가 불분명한 문화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바로 이 때에 제 주도의 전통 문화, 그 중에서도 여성문화를 찾아 정리하고 다듬는 일은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본 논문에서는 “제주”, “여성”,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가족생활과 결혼생활을 중심 으로 제주 여성들의 삶과 문화를 재조명하고, 향토전통문화에 대한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 도록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상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주도 여성 문화에 해당하는 요소들 가운데 가족과 결혼생활에 해당하는 것을 추출한 문헌연구를 주로 하였고, 1900년대 초부터 제주도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인 196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에 주로 나타난 문화현상을 다루었다. 제주도는 반도부와 다른 지리적 조건과 역사적 사건으로 특이한 생활양식을 낳았다. 일찍부 터 여자가 밭농사와 잠수 등으로 생산 활동을 주도하였고, 한 울타리 두 살림과 같은 분가제 도, 마을내혼, 외가친족과 처가친족과의 긴밀한 관계, 반도부와 다른 혼례문화와 고부관계, 첩 제도, 암창개 등의 독특한 여성문화를 형성하였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문화적 특이성이 희석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렇다 고 아예 잊어버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아무리 훌륭한 전통문화가 있다 하여도 그것을 * 본 논문은 2004년 8월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위원회에 제출된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임.

(3)

계승ㆍ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전통의 계승이란 자체가 해로운 것은 버리고 이로운 것은 이어가며 새롭게 적용하는 부단한 선택과 창조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전통의 가치를 발견하고 선택하여 전승하기 위한 방안이 마 련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제주의 전통문화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제언을 하 고자 한다. 첫째, 지리 교과에 향토 문화 단원을 두고 내용을 체계화하여 후세들에게 제주도의 전통문화 (여성문화 포함)를 배울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대 간의 문화의 단절 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둘째, 전통 문화와 현대의 조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정확대가족의 채택이나 제 주의 전통 노동복인 갈옷이나 메밀로 만든 빙떡의 대중화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지나친 상업 위주의 문화 축제를 지양하고, 체험 위주의 문화 이벤트를 개최하여 우리의 전통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자연과 역사, 생활 문화를 이해하게 되 면 공동체의식과 더불어 제주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넷째,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내 고장의 구석구석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설명 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주가 지녀야 하는 문화 정체성을 찾아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지침이 될 수 있도록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

(4)

목 차

I. 서론

···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 1

2. 연구 방법 ··· 3

3. 연구 동향 ··· 3

II. 가족생활과 여성

··· 6

1. 여다의 섬 ··· 6

2. 해녀의 생산 활동 ··· 9

1) 해녀의 특성 ··· 9

2) 해녀 사회의 민간신앙 ··· 14

3. 분가제도 ··· 17

1) 한 울타리 두 살림 ··· 17

2) 분가 형태 ··· 20

4. 외가친족 및 처가친족과의 관계 ··· 21

1) 마을내혼 ··· 21

2) 친족호칭 ··· 25

5. 여성의 경제권 ··· 27

III. 결혼생활과 여성

··· 32

1. 혼례문화 ··· 32

1) 사주고남과 이바지 ··· 32

(5)

2) 가문잔치와 사돈잔치 ··· 35

3) 혼수 ··· 37

2. 고부관계 ··· 38

3. 첩제도 ··· 40

1) 첩의 존재 요인 ··· 40

2) 첩의 사회적 지위 ··· 43

4. 이혼과 재혼 ··· 45

1) 이혼 ··· 45

2) 재혼 ··· 49

5. 암창개 ··· 52

IV. 결론 및 제언

··· 54

참고 문헌

··· 57

<Abstract>

··· 60

(6)

표 목 차

<표 1> 제주도와 전국의 성비 비교(1925~1966) ··· 6

<표 2> 제주도의 연령별 성비 추세(1925~1966) ··· 7

<표 3> 제주도 잠수표 ··· 11

<표 4> 부조 양상 ··· 30

<표 5> 잔치 과정 ··· 36

<표 6> 혼수의 변화 ··· 38

<표 7> 각도별 결혼과 이혼 및 결혼건수에 대한

이혼건수의 백분율(1929년) ··· 46

<표 8> 제주, 전국의 이혼율, 1946~1966 ··· 47

사 진 목 차

<사진 1> 제주도의 해녀군단 ··· 10

<사진 2> 해녀의 아기와 애기구덕 ··· 13

<사진 3> 해녀굿(수굿) ··· 15

<사진 4> 마라도의 할망당 ··· 17

<사진 5> 제주도의 고팡 ··· 18

그 림 목 차

<그림 > 제주도의 완전분리형 전통살림집 ··· 19

(7)

I.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반도부와 다른 지리적 조건으로 제주는 특이한 생활양식을 낳았다. 제주도는 유라 시아 대륙의 동단부인 북서태평양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열도 그리고 한반 도를 연결하는 삼각형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태평양 연안의 여러 나라와 아시아 대륙을 연결시키는 거점이 되고 있다. 이러한 위 치의 특징은 북방문화와 남방문화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임과 동시에, 섬이 라는 고립된 환경은 고유문화를 형성하고 보존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곧 섬이 갖 는 개방성과 폐쇄성이 공존하는 문화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1) 제주도는 한국에서 가장 큰 섬으로 한복판에는 1,950m의 한라산이 우뚝한데, 이 산이 완만히 뻗어내려 바다로 이어지는 해안가에 많은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자주 태풍이 불어제치는 제주도는 한국에서 가장 바람이 많이 불고 비 내리는 시 간도 길다. 제주도의 지표는 대체로 현무암과 조면암으로 이루어졌다. 내리는 빗물은 흔히 땅속으로 스며들어 흘러가다가 바닷가에 이르러 솟아난다. 따라서 마을 대부분 도 해안선을 따라서 들어섰으며, 혈관처럼 뻗어 내린 많은 소하천들은 거의가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야 갑자기 흘러넘치는 이른바 건천이다. 논이 드물고 밭농사를 치러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런 까닭에 제주도의 여 성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거의 모든 일을 담당하다시피 하였다. 밭농사는 힘을 요하는 밭갈이를 제외하면 남성 없이도 가능한 일이다. 남성들도 보리 베기 등 일손 을 거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밭농사에서 그들의 전담 역할은 밭갈이에 불과하다고 1) 김혜숙(1993), “제주도 가정의 혼인 연구”, 박사학위논문, 성신여대 대학원, p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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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들은 농사의 주책임자로서 뿐만 아니라 잠수 활동까지 떠 맡아 경제 체계의 주요 부분을 담당해 왔다. 따라서 여성들의 생계유지에 대한 자신 감은 남성에게 경제적 의존심을 그만큼 덜어줌으로써 철저한 자립심을 기르는 동인 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육지의 논농사 지역에서는 계절적으로 많은 노동력의 집중적 투입이 요구되므로 가족의 크기가 대가족일 때 노동력 확보가 수월하다는 점에서 유리하지만, 제주도는 밭농사 위주이기 때문에 소규모 가족 단위가 생존에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주도 가족은 산업화와 무관하게 이전부터 핵가족을 유지해 왔다. 척박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가족형태라 생각한다. 핵가족 형태에서는 가족생활이 부부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비교적 수평적인 가족관 계가 형성되어 가족 내 여성의 지위도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상당히 자율권이 있 다. 제주도의 전통문화는 탐라국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기마다 그 나름대로의 개성을 띠고 나타났던 문화 현상들을 관류하면서 이어지고 있는, 큰 맥락을 가지고 있는 생활 문화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한 시기의 문화 현상을 외세에 의한 강 점 문화, 무역의 항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입된 반도부와의 교류 문화, 풍랑과 난파 에 의해 우연히 표류해 들어온 표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탐라의 풍속ㆍ 신앙ㆍ언어ㆍ물질ㆍ생산ㆍ예능 등으로 나타나는 전통문화는 자생적인 생활문화에다 북방 또는 남방으로부터 흘러들어 온 문화들을 수용하면서, 반도부와 다른 제주의 전통문화를 만들어 왔다고 할 수 있다.2) 급변하는 사회에서 생활하는 현대인들은 아노미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많으며, 또 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럴 때면 자연 속에서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거 나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을 떠올릴 때가 많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바로 고향 같다 는 생각이 들게 한다. 2) 제주도교육청(1996), 「제주의 전통문화」, 제주도교육청 pp.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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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정보화 및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역의 특이성이 희석되어 가고 세계화, 국제화의 외침 속에 국적 또는 출처가 불분명한 문화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 다. 바로 이 때에 제주도의 전통문화, 그 중에서도 여성문화를 찾아 정리하고 다듬는 일은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본 논문에서는 “제주”, “여성”,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가족생활과 결혼생활 을 중심으로 제주 여성들의 삶과 문화를 재조명하고, 향토전통문화에 대한 교육 자 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2. 연구 방법

이상과 같은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본 연구는 첫째, 기존문헌자료를 통하 여 제주도 여성의 전통문화에 해당하는 요소들 가운데 가족과 결혼생활에 초점을 맞 추어 이에 해당하는 것을 추출한 문헌연구를 하였다. 둘째, 이와 관련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통계자료를 수집하고 비교 분석하였다. 셋째, 보충이 필요한 부분은 주민과의 면접을 통하여 자료를 수집하였다. 본 논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화는 1900년대 초부터 제주도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인 196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에 주로 나타난 문화현상에 국한시킨다.

3. 연구 동향

최재석(1984)3)은 제주도의 한 촌락을 대상으로 5년 동안 방학을 이용하여 현지조 사를 통하여 얻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가족의 유형, 가족의 역할구조, 잠녀가족의 권력구조, 혼인의례, 이혼과 재혼 등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3) 최재석(1984), 「제주도의 친족조직」,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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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1993)4)은 사회 조직원리의 하나인 혼인 제도를 연구하면서 혼인 의례, 이 혼, 통혼권 등의 분석을 통하여 제주도 가족과 친족의 성격을 구명하고 제주도의 사 회 구조 전반을 이해하는 모형을 찾아내었다. 이창기(1999)5)는 제주도의 인구 및 가구와 가족제도로 나누어 인구성장과 인구구 성, 인구이동 및 가구의 크기와 가구구성, 가족제도의 형성배경 및 가족제도의 특징 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송성대(2001)6)는 지리적 공간상에서 지역마다 지니고 있고, 또한 지녀야 하는 문 화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 규명하며, 또 그 구조와 기능, 의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도 록 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문화의 원류 찾기를 시도하였고, 그 결과로 표상할 수 있 는 제주 선민들의 정신으로 해민정신을 들었다. 제주도 여성의 이혼과 관련하여 제주도의 이혼율 추세와 이혼율이 높은 원인을 분 석하고 있는 것으로는 한삼인(1985)7), 이태영(1981)8), 권귀숙(1998)9)의 연구 등이 있다. 제주도(2001)10)는 기존의 제주여성에 관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가족과 결혼생활”, “속담으로 만나는 제주 여성어”, “제주 여성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노래에 나 타난 제주 여성”, “제주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문화영웅으로서의 여신들”로 주제를 나누어 제주여성문화 전반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그밖에 제주도(1993, 1994)11)는 세시풍속, 통과의례, 전승 연희 등 제주의 민속에 4) 김혜숙(1993), 전게논문. 5) 이창기((1999), 「제주도의 인구와 가족」, 영남대학교출판부. 6) 송성대(2001), 「문화의 원류와 그 이해」, 도서출판 각. 7) 한삼인(1985), “이혼에 관한 연구 Ⅱ ; 제주도에 있어서의 이혼율과 재판상이혼에 관한 실태분석” 제 주대사회발전연구. 8) 이태영(1981), “한국의 이혼율 연구”, 사단법인 한국가정법률상담소 . 9) 권귀숙(1998), “제주도 이혼의 구조적 원인 분석”, 한국가족학회. 10) 제주도(2001), 「제주여성문화」제주문화자료총서8, 제주도. 11) 제주도(1993), 「제주의 민속」Ⅰ, 제주도(1994), 「제주의 민속」Ⅱ,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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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하여 정리 하였으며, 제주도교육청(1996)12)는 제주의 전통문화를 의ㆍ식ㆍ주, 생산

기술, 통과의례ㆍ민간신앙, 세시풍속ㆍ민속놀이, 민속공예, 민요, 방언ㆍ속담, 설화, 유적ㆍ유물로 나누어 향토교육자료를 만들었다.

(12)

II. 가족생활과 여성

1. 여다의 섬

제주의 결혼풍습이나 가족생활은 한국 전통가족의 모습과는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다른 점이 많다. 가부장제 사회이면서도 실제 생활내용에서는 여성의 목소리가 컸던 제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가.13)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피기 전에 우선 여 다의 섬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여성 인구가 남성 인구보다 많음으로써 가족이나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여성 인구가 남성 인구보다 많은 곳이다.(<표 1> 참조) <표 1> 제주도와 전국의 성비14) 비교(1925~1966) 년도 제주 전국 1925 86.6 104.65 1930 85.4 103.58 1935 83.6 103.05 1940 87.5 101.12 1944 85.7 99.38 1949 82.08 102.10 1955 108.06 100.03 1960 87.41 107.79 1966 90.92 101.44 자료 : 통계청 1955년도의 성비가 다른 해에 비해 높게 나타난 것은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 가 생기면서 현주조사인구에 의해 군인이 포함되어 나타난 현상이라 예외로 보아야 할 것이다. 13) 제주도(2001), “가족과 결혼생활”, 「제주여성문화」제주문화자료총서8, 제주도, p.15. 14) 여자 100명당 남자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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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시의 자연성비는 인종에 관계없이 대체로 105 전후를 기록한다. 남자가 여자보다 약 5% 정도 많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연령이 상승함에 따라 성비가 점차 낮아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남성의 사망률이 여성보다 높기 때문이다.15) <표 2> 제주도의 연령별 성비 추세(1925~1966) 1925 1930 1935 1940 1944 1949 1955 1960 1966 0-4 104.6 102.5 102.9 106.8 104.3 99.1 112.6 104.4 103.0 5-9 109.1 105.2 104.4 107.8 106.6 99.1 103.9 103.5 105.3 10-14 100.6 101.8 105.6 108.6 108.6 103.5 107.7 106.1 104.2 15-19 78.5 82.6 90.5 86.5 84.0 84.0 124.9 114.9 110.7 20-24 70.3 69.4 70.3 68.0 60.4 67.1 78.2 111.4 119.5 25-29 70.0 66.6 64.2 62.4 57.1 68.3 79.2 89.9 103.4 30-34 75.2 69.9 66.2 64.6 57.8 66.8 74.3 69.3 97.5 35-39 80.2 74.9 71.9 72.0 67.3 63.2 71.2 61.2 70.8 40-44 84.5 80.6 78.6 77.6 75.2 65.6 61.4 65.3 61.8 45-49 80.3 80.1 82.0 82.5 84.5 70.0 64.8 59.8 64.6 50-54 85.2 84.5 86.0 83.5 83.4 74.8 65.0 60.2 57.9 55-59 79.2 78.7 80.1 83.7 80.0 72.2 66.9 60.0 57.3 60-64 77.3 78.5 81.3 77.5 76.3 72.8 65.9 60.5 56.0 65-69 76.0 75.4 76.9 75.5 76.3 68.6 63.6 56.5 53.1 70-74 66.0 66.2 67.8 71.4 74.0 64.0 62.1 58.1 51.0 75+ 57.8 57.6 58.7 63.6 63.7 55.5 53.5 50.1 44.2 자료 : 이창기(1999), 제주도의 인구와 가족, 영남대학교출판부, p.76에서 재구성함. ※ 1955년의 수치는 군인들을 상주지로 환원시켜 재집계한 것임(전체 성비 88.7) 그런데 <표 2>에서 보듯이 제주도에서는 1925년부터 1949년까지 전 기간을 통해서 청장년층의 성비가 매우 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노년기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성비가 갑자기 낮아지는 15세부터 49세까지의 연령층은 50세 이후보다도 더 낮은 성비를 기록하고 있어서 제주도 인구구조의 한 특징을 15) 이창기(1999), 전게서,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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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고 있다. 이것은 이 연령층의 남성인구 결손이 매우 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 주된 원인은 일제시대의 과도한 도외이출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하의 도외이출과 4ㆍ3사건에 의한 희생이 참으로 오랫동안 제주도의 인구구조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여다의 섬 이면에 숨겨진 이런 고난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원래 여다(女多)란 제주의 남자들이 바다로 나가서 어로작업 중 많이 조난, 사망하 여 여자가 수적으로 많았던 데 연유한다. 어쨌거나 성비의 불균형으로 인해 1950~ 60년대에 남성들의 외도나 취첩 현상을 제주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이와 관련 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선별적인 사회적 인구이동 외에 잦은 해난 사고, 빈번히 일어났던 민란, 근세 이후 일본으로의 출가, 태평양 전쟁 및 4․3사건이나 6․25전쟁으로 인해 남성 인구의 사 망, 행방불명 및 지역적 이동이 많았고, 전쟁 이후에도 복구사업 등으로 일자리를 찾 아 남성들의 육지 전출이 잦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보다는 제주의 생활환경이 각 박하여 여자들도 남자와 함께 일터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데서 붙여진 측면이 더 크다. 또한 여다(女多)는 인구통계의 비교 결과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보다는 제주 여성들이 근면하게 일한다는 비유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어획 하는 해녀(海女)는 여성들이 바다로 나가서 일하는 여다(女多)의 섬 제주를 표상하 는 이름이기도 하다.16)

A. A. Pieter 목사는 1899년 “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글에서 “제주도는 한국의 시실리이며, 여성들은 (조선반도의)육지 여자들보다 더 튼튼하고 훨씬 잘 생 겼다. 길거리에서는 남자 하나에 여자 3명이 같이 있게 된다”라고 하여 제주도가 여 자 천국임을 말하고 있다.17) 이것은 제주 여성들의 바깥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었나 를 짐작하게 한다. 16) http://jejugo.netian.com/jejudo/je13.htm 17) 김영돈(2000), 제주도 제주 사람, 민속원, p.40.

(15)

2. 해녀의 생산 활동

1) 해녀의 특성

제주도는 몽고의 30년간의 통치, 왜인의 부단한 침입, 조선왕조 500년간의 잦은 민 란, 그리고 해방 후 4・3사건에 이르기까지 시련이 이어졌지만 도민들의 생활 의지는 줄기찼다. 해녀(잠수18))는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의연히 건재하고 있는 제주의 대 표적인 상징이며, 비바람과 성난 물결을 이겨내는 굳건한 여인들이다. 망망대해 속에 생명을 걸고 싸우는 잠수들의 싱싱한 모습들은 한라산의 딸들이요, 제주도 근로의 여신이다. 이 세상에 사람살이의 직종이야 갖가지로 숱하지만, 잠수(해녀)는 가냘픈 여인들이 면서도 창망한 바다를 생업의 장으로 삼아 깊숙이 무자맥질하면서 해산물을 캐어낸 다는 점이 색다르다. 이러한 나잠어업은 제주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확실한 직업이 라고 할 수 있다. 잠수들의 어획물들은 판로가 넓다. 따라서 해녀들은 바다에서 잡아 오는 것을 팔아서 의, 식, 주를 해결했고, 식용으로 이용해 왔다. 특히 옛날부터 본도 에서 생산되는 미역은 범선에 실리어 목포, 강경, 해남, 군산 등 상업도시를 그 판로 로 했다. 전남북과 충남북 지방 이외에도 중국인에게까지 본도의 미역은 판매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조합이 설립되면서부터는 조합에 위탁 판매하여 왔다.19) 해촌 해녀들의 해산물 채취에 의한 소득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가정소득의 1/3에 해당했다.20) 또한 제주도의 잠수들은 도내에만 머물지 않고 육지부 및 일본의 여러 지방으로 진출하였으며, 우수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곳곳에서 실권을 장악해 왔다. 장기간 출가할 때는 선중에서 기거하거나 해안의 조그마한 집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근검절약하였기 때문에 많은 수익금을 가지고 돌아 올 수가 있었다. 1936년 18) 강대원(1973),「해녀연구」, 한진문화사, p 34. 여자로서 바다 속에 들어가 해조류 및 패류를 잡는 사 람들을 잠녀라고 한다. 여기서는 잠수, 잠녀, 해녀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 19) 강대원(1973), 상게서 p.91. 20) 송성대(2001), 전게서,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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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에 의하면 이러한 출가 잠수는 한 해 동안에 3,360여명으로 추산된다. 제주 해녀들은 바닷물속 15~20피트21)에서 물질하는 게 일반적이지마는, 필요에 따라서는 재래복을 입고도 70피트(약 21m)까지 무자맥질한다. 물질이 극성스런 바닷 가 마을에서는 열두 길(약 22m)까지 들어가는 해녀도 드물지 않다. 물 속 22m까지 들어가서 2분 남짓 견딘다.22) 제주의 해녀는 임신도 아랑곳하지 않고 만삭임에도 생계를 위해 무자맥질한다. 아 래 <사진 1>에서 보면 임신한 여자도 여럿 보인다. <홍정표 사진> <사진 1> 제주도의 해녀군단 자료 : 제주도(2001), 「제주여성문화」제주문화자료총서8, 제주도, p.117. 물질에 열심이다 보면 제대로 진통할 겨를도 없이, 혹은 배 위에서, 혹은 집으로 21) 1피트는 0.3048 m 22) 김영돈(2000), 전게서,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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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축항에서, 혹은 길가에서 애를 낳는다. 배에서 낳았으니 ‘배선이’, 축항에서 낳았으니 ‘축항둥이’, 길에서 낳았으니 ‘질둥이’, 또는 ‘길둥이’란 별명을 지닌 이들이 해녀 마을마다 드물지 않다. 또한 일본의 해녀보다도 추위에 강하며, 애를 분만한 직후에도 사철 조업을 대수롭지 않게 하고 있다. 월별 작업과정을 보면 <표 3>과 같다. <표 3> 제주도 잠수표 월 별 잠수일수 일별잠수회수 채취물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20일 14일 28일 28일 28일 28일 28일 28일 15일 15일 17일 17일 2회 2회 2회 2회 3회-4회 〃 〃 〃 1회 〃 〃 〃 미역 〃 〃 〃 천초 〃 전복, 소라 〃 〃 〃 〃 〃 자료 : 강대원(1973),「해녀연구」, 한진문화사, p.72. 제주도에서는 농번기와 해조의 채취기가 거의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간에 여 자들의 일손은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아무리 여자들의 일손이 모자란다 하더라도 잠수가 중지되는 일은 없다. 7, 8월 잠수의 하루를 살펴보면, 잠수들은 밀물, 썰물 때는 밭갈이 등으로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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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다. 그러다가 누군가 몸을 털고 일어나서 “바다로 가지” 라고 외치면 여기저기 서 삼삼오오 때로는 수십 인의 잠녀들이 일어서서 바다로 달린다. 바다가 가까운데 있는 잠녀는 집에서 잠복을 입고 오는 게 보통이다. 집이 먼 잠수들은 바가지가 달 린 망 속에 옷을 넣어가지고 나왔다가 바위 사이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잠수를 2회 혹은 3회(일반적으로 1회는 약 1시간 정도의 잠수 작업과 30분 정도의 휴식이며, 10 월~2월은 1회 작업 시간이 30분 정도) 가량 하게 되면 벌써 해는 해상에서 넘실거 린다. 잠수들은 현무암의 돌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온다.23) 제주도의 여자들은 강인하면서고 부지런하며 인내력이 강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밭일을 하는 것은 물론 바다에 나가 전복, 소라, 천초 등을 따서 가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이러한 근면한 기질은 제주도 여성들만의 특질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해녀의 강인함과 근면성을 알 수 있는 속담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년 애기 나뒁 사을이민 물에 든다. (해녀는 아기 낳아서 사흘이 되면 바다에 들어간다.) 녀 애긴 사을이민 체에 눅저뒁 물에 든다. (해녀가 낳은 아기는 사흘이 되면 삼태기에 눕혀 두고 바다에 들어간다.)24) 이 이야기는 해녀의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해산물을 채취하는 시기가 있어서 그때 반드시 일해야 함을 뜻한다. 아기를 낳았다고 해서 마음 놓고 산후조리 를 할 수 있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뜻한다. 여성이 아이를 낳은 것도 엄청 난 일인데 육체적으로 고달픈 물질까지 해야 하는 상항에서 제주 여성의 강인한 생 활력을 짐작할 수 있다. 산모가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갓난아기라고 해서 안정된 보살핌을 기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아기들도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며 스스로 알아서 자란 것 같다. 23) 강대원(1973), 상게서 p.40. 24) 제주도(2001), “속담으로 만나는 제주여성어”, 「제주여성문화」제주문화자료총서8, 제주도,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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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현실적응력이 뛰어나다고도 볼 수 있다. <사진 2>에서 보는 애기구덕은 제주도의 육아용 요람으로서 대나무로 짜서 만들었고, 해녀들은 아기를 이곳에 눕히 고 물질하러 간다. <홍정표 사진> <사진 2> 해녀의 아기와 애기구덕 자료 : 제주도(2001), 「제주여성문화」제주문화자료총서8, 제주도, p.109. 잠수가 되는 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7, 8세부터 훈련을 쌓아 올려 고생한 끝에야 비로소 한 사람의 잠수로서 구실을 할 수가 있다. 해녀들의 물질 기량은 혈통에 따라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소녀들이 어렸을 때부 터 꾸준히 수련을 거듭함으로써 익혀나간다. 물질을 얼마나 능란하게 치르느냐에 따라 대체로 하군ㆍ중군ㆍ상군으로 구분한다. 계층 구분이 엄격해서인지 군(君)자 가 쓰인다. 해녀들이 물질을 시작하는 연령은 개인이나 지역마다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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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 살을 전후하여 하군 해녀가 되면 자력으로 제 삶을 알뜰히 추스른다. 세월에 따 라 익숙해져 가면 점차 중군이 되고 그 기량이 썩 뛰어나게 되면 상군이다. 그런데 해녀의 계층은 연령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얼마나 잘 치르는가의 기량 여 부에 달렸다. 해녀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어서 상군이 되어서 소라 닷 섬, 전복 여든 섬을 잡고 풍족하게 살림을 살아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반적으로 해녀계층은 하군ㆍ중군ㆍ상군으로 구분하지만 상군 가운데도 특출하 게 뛰어난 해녀를 대상군(大上軍)이라 한다. 물질이 극성스런 마을에서도 대상군해 녀는 드물다. 대상군해녀는 해안마을의 왕자로 군림하면서 해녀집단의 부러움을 한 몸에 모은다. 이런 해녀 계층은 해녀 사회의 온갖 집단규범을 낳는다. 탈의장이면서 불을 쬐는 < 불턱>만 하더라도 <하군덕(하군불턱)>ㆍ<중군덕(중군불턱)>ㆍ<상군덕(상군불턱)>으 로 나뉜다. 모든 해녀들이 같은 <불턱>에서 불을 쬘 경우라면 으레 연기가 덜 나는 자리에 상군해녀를 앉도록 모시는 게 불문율의 관행으로 뿌리내렸다. 이 <불턱>동아 리에서 어린 해녀들은 물질의 요령과 사람 삶의 규범을 터득한다.25) 바쁜 일상 속에서 도 자연스럽게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인간적인 정을 나누는 장이라 여겨진다.

2)해녀 사회의 민간신앙

해녀사회의 신앙심의(信仰心意)는 농촌의 경우에 비하여 훨씬 두텁고 강력하다. 바다는 풍요로운 해산물을 선사해 주는 한편, 언제나 위험이 도사린 곳이어서 생명 의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거친 바다에서 안전 조업과 더불어 해조류와 패류의 풍부한 수확을 바라는 해녀들의 기원은 간절하며, 이 깊숙한 신앙심의는 해녀들에게 한결같이 배어 있다. 해녀사회의 민간신앙은 개인의례와 집단의례로 나누어진다. 개인의례로는 해마다 25) 제주도(1994), 상게서, pp.196-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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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초가 되면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을 택일하여 새벽에 바닷가로 나가서 빌거 나 집안에서 치성하거나 <할망당>에 가서 비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또한 그해 들어 처음으로 물질을 시작할 때, 개개인이 이른다<요왕(龍王)>에게 <지드린다>고 쌀 을 한지에 싸서 남몰래 바닷속으로 던지면서 물질의 안전과 해산물의 풍요를 빌기 도 한다. 집단의례로는 수굿(<사진 3>)이나 영등굿을 해녀마을 공동으로 치르는 경우다. <김기삼 촬영> <사진 3> 해녀굿(수굿) 자료 : 김영돈(1993), 제주민의 삶과 문화, 도서출판 제주문화, 화보 집안에서든 바닷가에서든 치성하는 데에는 반드시 생기복덕일을 택한다. 심방을 빌거나 해녀들 스스로 메ㆍ사과ㆍ생선ㆍ돌래떡ㆍ삶은 계란ㆍ콩나물ㆍ고사리ㆍ제주 등과 함께 한지에 쌀을 싸고 새벽에 바닷가로 향한다. 바닷가 바위 위 알맞은 곳에 자리를 잡아 제물을 진설하고 한 해 동안 물질을 치르는데 용왕할머님이 잘 보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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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무사고와 해산물의 풍요를 이룩해 주도록 간절히 빈다. 기원하고 나서 한지에 싼 <지>를 용왕께 드리는 뜻으로 바닷속으로 던진다. <지드림>은 그해 들어 처음 입 어하는 날, 또는 금채(禁採)했던 미역을 허채(許採)해서 처음으로 캐기 시작하는 날 치러지기도 한다. 또한 정성을 다하는 해녀 가운데는 한 달에 몇 차례 <요왕지>를 마련하여 물질 나갈 때 물속에 던짐으로써 용왕에 치성한다. <육지물질>, 곧 한반도 곳곳의 해안이나 일본ㆍ중국ㆍ러시아로 물질 나가서 첫입어할 때에도 <지드림>의 의례를 치른다. <지>를 쌀 때에는 용왕을 위한 <요왕지>를 먼저 싸고 자신의 몫인 <몸지>를 나 중에 싼다. 쌀을 외부에서 사들이고 난 다음 이를 쓰기에 앞서 맨 먼저 떠서 <지> 를 마련할 쌀로 정성껏 미리 비축해둔다. <요왕지>는 용왕할머니 몫인 <요왕할망지 >와 용왕할아버지 몫인<요왕하르방지>를 따로 마련함이 원칙인 듯하지만, 일반적으 로는 <요왕할망지>와 <몸지>만을 마련한다. <요왕지>와 <몸지> 외로도 그 무렵 가까운 바다에서 해녀의 사고가 있었을 경우면 액궂게 목숨을 잃은 해녀 몫의 <지> 도 함께 마련해서 던지곤 한다. 용신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이어서 물질하다가 우연히 거북만 보여도 이른바 “요왕 할망의 말잿애기(용왕할머니의 네딸 가운데 제3녀)”로 간주해서 정중히 모실뿐더 러, 어쩌다가 거북이 바닷가에 오를 때면 막걸리나 소라를 정성껏 대접하면서 기원 하기도 한다. 거북은 “요왕부원국 삼체 거북제”라고 일컬어지듯이 용왕의 사자라 고 관념한다. 해녀들 물질 소득인 해산물로 생계를 지탱하는 마라도 주민들의 경우를 보면 물질 의 안전과 해산물의 풍요로움을 비는 마음이 절실하고 할망당 (<사진 4>)에 기대는 마음도 유별나다. 오늘날에도 마라도 주민들은 극성스럽게 이 신당을 섬길뿐더러, 외래인사들도 당을 찾아 정중히 배례하면서 원하는 일의 무사형통을 빈다. 주민들은 집안 식구들이 앓 거나 불운한 일에 부딪쳤을 때, 또는 해녀ㆍ어부들의 안전과 해산물의 풍요를 빌 필 요를 느낄 때면 부정기적으로 이 할망당을 찾으며, 달마다 7일, 17일, 27일에는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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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마련 하고 치성한다. <사진 4> 마라도의 할망당 자료 : 김영돈(1993), 제주민의 삶과 문화, 도서출판 제주문화, 화보 마라도는 섬 해안이 대부분 단애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위험하지만 낙석사고가 없 는 일, 해녀들의 물질 때 사고가 별로 없는 그 모든 은덕을 할망당 당신의 보살핌으 로 돌리고 있다.26)

3. 분가제도

1) 한 울타리 두 살림

제주도에서는 분가현상을 가리켜 <솥 가른다>고 한다. <솥을 가른다>는 것은 경 지와 가재도구의 분할을 의미하는 것이고 한 울타리 안에 거주하더라도 안거리, 밖 26) 김영돈(1993), 「제주민의 삶과 문화」, 도서출판 제주문화, pp.14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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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생활공간을 분할하는 것이다.27) 제주도에서는 경제권이 신부에게 주어져 있어야 살림살이가 시작되고, 분가를 해 야만 혼인이 완성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여성 중심의 생활단위 분리는 울 타리 밖으로 분가하지 않고도 취사와 경제권을 독립시켜 자신의 삶은 본인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고 있다. 즉 동거와 분리의 현명한 절충이 나타나고 있다.28)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자료사진> <사진 5> 제주도의 고팡 자료 : 제주도(2001), “제주여성문화”「제주도문화자료총서」8, 제주도, p.301. 제주 농촌의 전통적인 가옥구조는 한 울타리 안에 안거리라고 부르는 안채와 밖거리 라고 부르는 바깥채가 있는데, 두 가옥 모두에 정지(부엌)와 고팡(광)이 각각 있다. 안 거리와 밖거리에 각각 정지와 고팡(<사진 5>)이 있다는 것은 식사를 제각각 할 뿐만 27) 최재석(1984), 「제주도의 친족조직」, p.31. 28) 제주도(2001), 전게서, pp.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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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경제 활동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한 지붕 밑이라 할지 라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따로 밥을 해 먹는다. <그림 > 제주도의 완전분리형 전통살림집 자료 : 송성대(2001), 「문화의 원류와 그 이해」, 도서출판 각, p.389. 위의 <그림>은 한림 귀덕리 조씨가로 안거리에는 분가 독립한 자식 세대가 살고 밭(밖)거리에는 은퇴한 노부부 세대가 산다. 정지라는 부엌은 물론 식량을 저장 관리 하는 고팡이 각기 있고 장독대 또한 분리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솥을 갈라 살림이 분리되면서 시작되는 철저한 독립정신은,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 엄격한 수직구조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런 분가 상태에서는 부모 또한 노동력이 있는 한 혼인한 자식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생활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 로 해결하여 자녀에게 기대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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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것은 서로의 생활공간을 인정하고 부모가 자녀의 내적 생활에 통제나 간섭이 적어짐으로써, 오히려 갈등이 줄어들고 정서적 유대가 강화될 수 있다. 70ㆍ80대의 노인들이 자녀의 부양을 거절하고 독립생활을 하는 모습은 여전히 목격 되는 현상이다. ‘움직일 수 있는데 무엇 하러 자녀들의 집에 가서 불편하게 지내겠는가. 나 먹고 싶을 때 먹고 놀고 싶을 때 놀아야지’라는 노인들의 공통된 응답으로 구속당하 기를 싫어하는 기질과 심리를 드러낸다.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독립하려 하며 끼니조차 마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식의 부양을 받는다. 다른 사람에게서 신세진 것은 반드시 갚아야만 하 는 사고는 자식에게조차 적용된다. 육지에서는 부모의 노동력이 상실되지 않더라도 직계가족을 형성한다. 시어머니가 아주 고령이 되거나 사망한 후라야 안방과 광 열쇄를 며느리가 차지하나, 제주도는 혼 인 즉시 공간의 독립, 경제권의 독립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방물림이라 는 것이 제주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29)

2) 분가 형태

제주도에서는 장남도 그 부모가 노동력을 상실하지 않는 한 서로 독립생활을 유지하 면서 분가유형을 취한다. 부모의 능력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더 이상 분리생활을 지속 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거하는 현상은 제주도의 가족제도에 있어 분 가의식이 철저한 독립의 의지를 나타낸다. 이는 가족을 최소 생계단위로 분산시켜 그 규모를 가능한 줄이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여성 중심의 경제 체제로 대가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은 감당하기 어렵기 때 문이다. 이와 같이 상당히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육지와는 반대의 현상들로 나타난다. 나이든 시어머니는 밖거리로, 식구가 많아진 며느리네가 안거리로 옮겨가는 역현상도 29) 제주도(2001), 상게서,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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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다. 가족주기로 볼 때 혼인 후 얼마 안 되어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형성기의 가족 을 어린살림이라 한다. 반면 확대기에 이르러 가족원의 규모가 커질 뿐만 아니라 사회 적 경제적으로 기반을 잡게 되면 살림이라 한다. 식구수가 많은 살림은 안거리에, 갓 혼인한 아직 어린 살림은 규모가 작은 밖거리에 거주한다. 점차 살림은 가족 축소기에 접어들게 되고, 밖거리에 사는 아들 부부 이외의 자녀 들은 혼인하여 울타리 밖으로 독립해 나가게 된다. 반면 밖거리의 어린살림이었던 아 들부부가 가족 확대기에 이르면, 대개 축소기에 이른 부모세대가 밖거리로 옮기고  살림이 된 아들부부가 안거리를 차지한다. 거주 장소의 교체는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제주인의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드 러낸다. 이 때 주거 형태상 윗세대와 아랫세대 간 상하 서열의식은 거의 작용하지 않는 다. 부모세대가 밖거리로 옮긴다하여 그 권위마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족수가 적 은 쪽이 작은 공간에 기거하는 것이 관행화 된 사고방식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변화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안거리와 밖거리의 차이는 그 규모나 식구수의 크기에 따른 장소 의 이동일 뿐 권력이동과는 무관한 것이다. 나아가 마당을 완충지역으로 삼아 정서적 으로는 한 가족으로 여기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부모가족과 자식가족간의 철저한 독립 성을 보장한다. 이는 육지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서 오랜 기간동안 유지해온 핵가족의 전통에서 형성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4. 외가친족 및 처가친족과의 관계

1) 마을내혼

사회적 유대 형성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통혼권이란 남녀가 배우자를 선택해서 혼인이 이루어지는 범위와 집중도를 일컫는 것이다. 통혼 권역의 형성은 해당 지역 사람들에게는 생존전략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권역 파악은 여성의 혼입과 혼출의 자료가 되며, 생태학적 의미와 사회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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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이루어진 양가의 지역적 거리 정도는 인척 관계와 외척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 을 미친다. 마을내혼제를 취하는 사회라면 동일 마을 내에 친가, 외가, 처가(시가)가 함께 존재하며 보충적인 인지의 정도가 커질 가능성이 증가할 것이고, 마을외혼제라 면 친인척간의 유대는 이와는 상반되게 나타날 것이다. 통혼권 분석은 외가친족이나 처가친족과 어떻게 친밀도 유지가 가능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이해하는 것은 가족이나 친족 집단의 성격, 나아가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관건 이 된다고 할 수 있다.30) 제주 결혼과 가족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같은 마을에서 혼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부락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부락의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고 각 성이 모여 사는 부락의 경우에는 절반 정도가 마을내혼을 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31) 마을 내혼은 육지의 농촌지방에도 존재하지만 도서지방과 같은 고립된 지역에서 비교 적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고립성이 강하지도 않은 제주도의 마을에서 마을내혼 이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고립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제주도 특유의 혼인양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친구끼리도 사돈이 되는 등 같은 마을이나 이웃마을의 잘 아는 사 람들끼리 사돈을 맺게 되어 독특한 제주 가족의 모습을 띠게 된다. 남성의 입장에서는 동네 친구의 부모가 장인, 장모가 될 수 있고, 여성의 입장에서는 친구의 부모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된다. 친구의 어머니가 시어머니가 된다면, 어렸 을 적부터 보아온 친구의 딸이 며느리가 된다면, 그 고부관계는 분명 전통 한국가족에 서의 시어머니-며느리와는 다를 것이다. 처갓집 대사 시에 사위는 ‘손님’이 아니라 처 남의 친구로서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제주에서는 사돈집 제사 참석이 가능한 것이고, 사돈이면서도 친한 이웃이므 로 양 집안의 대소사에 관여하여 함께 도와주게 된다. 특히 복친인 근친이 별로 많지 않은 집안이라면 사돈이 마치 가까운 친척처럼 일을 거들게 된다. 동네사돈을 맺음으로서 같은 마을 안에서 친척과 인척이 함께 살다보면 결속의 장점 30) 김혜숙(1993), “제주도 가정의 혼인 연구” , 박사학위논문, 성신여자대학교대학원, p.149. 31) 신행철 외(1995), 「제주사회론」, 한울아카데미,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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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구속의 단점이 모두 노출될 수도 있다.32) 같은 마을 또는 인접한 이웃마을과 혼인이 이루어지는 것은 제주의 마을이 육지 반촌과는 달리 대부분 한 마을에 여러 성씨가 모 여 사는 각성바지 마을이기에 가능하다. 또한 마을의 규모가 비교적 커서 가구 수가 많 으므로 같은 동네에서도 신랑과 신부를 고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을내혼도 1960년대를 기점으로 근대화, 산업화에 따라 통혼권의 확 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남성에 비해 여성이, 중산간촌에 비해 어촌에서의 통혼권 확산 이 보다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즉 섬이라는 폐쇄성 구조에서 보다 넓은 세계인 뭍이 라는 개방성 사회구조에로의 이행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을내혼은 시집살이와 처가살이의 교묘한 절충이라 할 수 있다. 마을내혼은 여성에 게 시집살이를 완화시키고 출가외인의 관념을 약화시켜 주었던 것이다. 반면 남성에게 는 처가살이는 피하면서도 혈연에만 의존할 수 없는 좁은 사회에서 문중만이 아니라 생활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범위를 처가 쪽까지 넓힐 수 있는 이점이 있게 된다. 따라 서 여성이 남편 또는 시집에 복종적이거나 열등한 위치에만 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평등한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제주에서는 친척을 나타내는 독특한 궨당이라는 말이 있다. 궨당은 육지의 친족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부계혈족의 친족과 결혼으로 맺어진 인척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범위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아버지쪽 친족이면 성펜궨당〔父系親〕, 어머니쪽 친 족은 외펜궨당〔外戚〕, 남자가 결혼해서 생긴 처가 쪽은 처궨당〔妻族〕, 여자가 시 집을 가서 맺어진 친족은 시궨당〔媤家〕이라고 구분해서 쓴다. 좁은 지역에서 같은 마을 또는 이웃마을과의 혼인은 친척과 사돈이 하나의 그물망처 럼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지게 된다. ‘사람들은 사돈에 팔촌으로 걸린 궨당’이란 말 을 곧잘 사용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 할지라고 서로의 고향마을을 밝히고 친척관 계를 따지다 보면 어디서 어떻게 얽혀졌든 사돈의 팔촌이라도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인근마을이나 같은 마을 안에서 혼사를 치르다보면 부찌사돈이 생긴다. 부찌사돈이 란 한 집안에서 다른 어떤 한 집안으로 여성 두 사람이 혼인하거나 두 집안에서 서로 32) 제주도(2001), 전게서,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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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교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한 번 이상의 혼인으로 인해 사돈 관계가 중 복되는 일이 왕왕 발생하게 된다. 친정에서는 육촌 자매간이었는데 같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어 시집 쪽으로는 삼 촌과 조카 사이가 되었다는 식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두 가문의 혼 맥은 같은 마을이나 인근 마을과의 연줄혼인에 따른 부찌사돈 관계망을 근친끼리 형성 함으로써 독특한 궨당이 되는 것이다. 성펜, 외펜 구분하지 않는 이들의 공동체 의식이 일상생활에 강하게 작용하여 인간 관계나 사회조직에도 영향을 미친다. 동네혼사인 마을내혼이 잦다 보니 ‘마을 안에 매 놈이 없어(마을 안에 완전한 남이 없어)’ 하다못해 사돈의 팔촌관계라도 될 수밖에 없 는 것이다. 마을내혼의 혼인망은 같은 마을이나 이웃마을에 성가, 외가, 처가, 시가가 함께 거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친정집은 물론 시집간 자매끼리 같 은 동네나 이웃마을에 살게 된다. 제주 역시 부계사회이므로 일상생활에서는 시집 궨당과 상호작용의 빈도가 잦으면서 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친정 궨당과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딸을 사돈집으로 들여보내는 입장이므로 딸 가진 사람은 마치 죄인 처럼 저자세를 취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마을내혼에다 부찌사돈까지 겹치고 보면 집 안끼리 서로가 딸을 주고받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사돈관계가 서로 대등하게 된다. 고 부간 갈등이 육지 전통가족에 비해 적은 것도 통혼권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한 어촌마을에서 나타난 사례처럼 사돈집이 울타리를 경계로 한 바로 옆집이라면 남편이 부인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며, 시어머니의 며느리 구박도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는 제주출신 재일 동포들이 타 지역보다도 많다. 재일 제주 출신 동포들의 고 향사랑은 유별스러울 정도로 크다. 제주출신 재일 동포들이 일본 내에서의 강한 결속 력도 결국 궨당 의식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33) 33) 제주도(2001), 전게서, pp.7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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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친족호칭

마을내혼 중심의 통혼권은 같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에 혈족과 인척이 중첩되게 된 다. 이는 곧 마을내혼에 따른 혼인망으로 지연과 혈연에 중복이 생김을 의미한다. 이 중복 현상을 구분하기 위하여 어떤 용어들이 쓰이는가, 제주도에서 친척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궨당, 일가, 방상’ 등이 있다. 궨당이란 말은 친인척 모두를 포괄하는 가장 넓 은 범위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방상에는 ‘성, 외, 처, 시’ 등의 접두사를 붙여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부계친만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일가는 성펜궨당 전체를, 방 상은 그 중에서도 근친을 일컫는다는 차이만 있다.34) 제주에서는 친척에 대한 지칭이나 호칭에서 세대별 구별만이 뚜렷할 뿐 친족용어가 비교적 단순하다. 곧 손지(손자), 조케(조카), 성님(형님), 삼춘(삼촌), 하르바님(할아버 지) 등으로 나누어지고 같은 세대에서의 구별은 거의 없다. 조부세대 이상에서는 남성 이면 모두 하르바님이고 여성이면 할마님이다. 소위 ‘반촌의식’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나 글을 아는 남성의 집안에서는 하르방이나 할망으로 호칭하지는 않는다. 부모세대에서는 아버지의 형제자매인 백숙부모, 고모, 고모부 그리고 사촌 이상의 형 제들인 숙항(종숙, 재종숙, 삼종숙)은 모두 ‘삼춘(삼촌)’으로 통칭한다. 즉 부모세대의 모든 친족원들을 성별이나 촌수에 관계없이 삼촌으로 칭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광복이후 무렵부터 아버지의 형제와 그 배우자에게는 순서 개념인 ‘큰ㆍ셋 ㆍ말젯ㆍ족은’을 붙이고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 칭한다. 즉 큰아버지, 큰어머니 하는 식 으로 부모의 형제자매에게는 형제서열만 구별될 뿐 아버지, 어머니가 붙고 있다. 부모 의 세대에는 촌수로는 3촌이더라도 부모와 동격으로 보고 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5촌 이상은 실제 촌수에 상관없이 모두 삼춘(삼촌)으로 호칭하고 있다. 흥미 로운 점은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의 친족원을 나타내는 지칭어에서는 ‘5촌 삼촌’, ‘7촌 삼 촌’ 등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당숙, 재당숙 등에게 촌수를 구별하는 5촌, 7촌을 붙여 당 34) 김혜숙(1993), 상게논문,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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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를 구별하지만 촌수 뒤에는 삼촌을 붙이고 있다. 직접 대면해서 본인을 부를 때는 모두 삼촌으로 호칭하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어떤 삼촌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만 삼촌 앞에다가 촌수를 붙여서 ‘5촌삼촌’, ‘7촌 삼촌’으로 지칭한다. 그러니까 3촌은 부모와 다름이 없고 5촌 이상이 되면 촌수에 상관없이 모두가 삼촌 으로 인식하는 즉 가능하면 친족원의 분류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를 통해 맺어진 친족원들 즉 외펜궨당에 대해서도 성펜궨당에서 사용되어지는 것과 차이가 없다. 다만 지칭어 앞에 ‘외’자를 붙이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실제 호칭에서는 ‘외’자의 사용을 기피한다. 성가(친가), 외가에 따라 삼촌이나 외삼촌의 구별은 곧 사촌의 범주에도 적용되어 ‘사촌’과 ‘외사촌’으로만 대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가, 외가, 처가[시가]가 한 마을에 서 서로 얽혀서 살게 되면 일상생활에서 소속과 촌수를 따져 거리를 두어서는 안 되었 을 것이다. 촌수 다음에 붙이는 ‘삼춘’의 의미는 숫자상으로의 3촌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사람이 라는 개념이다. 촌수를 따진다면 5촌이나, 7촌으로 간격이 벌어질 수 있지만 아버지의 형제와 똑같이 삼촌만큼 가깝다는 뜻이다. 굳이 따져서 먼 촌수로 구별하는 것을 회피 하려는 의식의 반영이다. 육지에서 쓰이는 아저씨라는 어휘를 제주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 이에 상응하 는 것이 바로 삼춘인 것이다. 삼춘이란 호칭은 친족용어에서 아주 특이한 것으로 보인 다. 촌수를 알 수 없는 친척이거나, 설사 친척이 아니더라도 동네 사람으로서 그냥 성 님이라고 부르기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분들에게는 ‘삼춘’이라고 부른다. 남녀에 따른 구별이 없지만 남자삼촌을 가리키는 것인지, 여자삼촌을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 될 상황에서만 남성에게는 ‘소나이 삼춘(남자 삼촌)’, 여성에게는 ‘예펜 삼춘(여자 삼 촌)’이라 하여 성별만 나타낼 뿐이다. 동네사돈은 부찌사돈을 낳게 되고 부찌사돈의 혼인망은 곧 동네사람들이 모두 사돈 에 팔촌으로 걸린 궨당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동네 어른은 모두 친척이나 다름없게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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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되는 것이고 어른이면 모두 삼촌, 손아래 사람이면 아시나 조카로 부르게 된다. 부계혈족의 폐쇄적이고 좁은 집단만을 고집하기보다 친척과 인척이 함께 어울려 살 아가는 폭넓은 궨당의 범주를 형성한다. 나아가 마을 내의 모든 사람이 친척이 아니더 라도 동네 어른에게는 모두 삼촌으로 호칭하면서 동네사람 모두를 하나의 궨당처럼 여 기는 강한 지역공동체 의식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35) 현대 사회에서는 예전의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퇴색된 지 오래되었고, 친척 간의 유대 관계도 많이 약화되었다. 궨당 의식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범죄가 발생하거나 소외된 이 웃이 생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통혼권이 달라지면서 궨당의식이 약해질 것은 당연할지 모르나 앞으로도 꾸준하게 계승해 나갈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하겠다.

5. 여성의 경제권

제주에는 ‘동촌여자 앉았던 자리엔 풀도 안 난다’는 말이 있다. 특히 동부지역은 토지 가 척박하여 옛날에는 여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듬북(해초)이나 솔잎 한 짐 또는 쇠똥 이라도 주워 와야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여자에게 심하게 대한 이유는 남자 에게 자질구레한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남성존중의 관념도 있었겠지만 남자만 믿고는 살 수 없었던 환경이 그만큼 여자들에게 어려서부터 생활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훈 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섬이라는 환경조건은 남성은 언제 바다에 나가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인 것이 고, 남성들의 높은 사망률은 남편만을 믿고 의지할 수 없으므로 여성들에게도 강한 노 동경제력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생활을 책임질 딸은 그래서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이고, 강하게 키워야만 했을 것이다. 딸들은 시집가지 전에도 바쁜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고, 물 길어오기, 밭 에 김 매기 등 집안 일은 물론이고 물질이나 고사리를 꺾어 돈도 벌어들이는 생산자의 35) 제주도(2001), 전게서, pp.7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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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에 있었다. 부모들은 딸들이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을 결코 가계에 포함시키지 않 는다. 반드시 큰 딸이 번 것, 작은 딸이 번 것을 구분하여 따로 관리해준다. 그 돈은 시 집갈 때 비용으로 하거나, 부지런한 처녀들은 노동으로 모은 돈으로 밭을 사 재산을 형 성하기도 한다. 여성, 특히 딸의 몫으로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당시 제주 가족의 남 녀 평등성, 즉 여성의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 환경적 조건을 어떻게든 극복해 내야만 생존이 가능했던 제주인들에게는 남녀를 막 론하고 기력이 남아있는 한 노동에 의지해야만 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여성의 역 할도 남성과 대등하게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사회의 기대가 증대되고 적극적 활동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그들에게 칠거지악이라든가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주자주의적 원리가 강하게 작용할 입지는 상대적으로 적어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지형상 대규모의 집약농업 형태가 아니라 밭작물을 위주로 하는 자연적 조건 에서는 여성의 섬세한 노동력이 오히려 더욱 중요하게 요구된다. 심지어 해녀가족이라 하더라도 농사에 필요한 여성의 몫을 모두 감당하면서 물질을 하는 이중 삼중의 역할 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가정에 대한 여성의 경제적 기여는 그 역할에 걸맞게 매우 컸던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뛰어난 노동경제력은 여성들로 하여금 성격적 특질 면에서도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기질을 형성하게 하여 그들 자신의 삶이나 가족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부부간의 권력구조에 있어 서로의 결정권이 거의 대등하게 행사되고 있다는 사실도 이 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서, 부부관계의 저변에 남녀평등의식이 잠재되어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가문을 위해 이른바 ‘귀먹어 3년, 눈멀어 3년, 벙어리 3년’으로 시집살이 를 해야 했던 전통사회의 여성과는 특질 간에 커다란 차이가 드러난다. 주체적 삶의 의 지를 자신에게 두려는 여성의 자의식이 나타난다. 이러한 여성의 강한 자의식은 고령이며 1인 가족이 된 여성노인들도 움직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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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생활을 한다. 제주여성들은 물질, 밭일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해왔고, 여성들의 강한 자의식이 가족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었다.36)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는 강한 개인의식은 가계관리에 있어서도 가족원들이 수입을 하 나로 통합하지 않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부부가 주머니를 따로 하여 살아가면서도 별로 큰 마찰은 없어 보인다. 소를 판돈은 남편이, 보리나 콩 등을 팔아서 생긴 돈은 부 인이 관리하면서 집안의 목돈이 필요한 경우는 남편이, 일상생활비는 부인이 제공한다. 어떤 계약이 따로 있는 게 아니면서도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심지어 ‘부자간에도 범벅 에 금을 긋는다.’는 속담도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그릇에서 범벅을 먹으면서도 숟가 락으로 가운데 금을 그려 아버지가 먹을 몫과 아들이 먹을 양을 구분해서 서로 침범하 지 않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개인의식이 강하다는 의미이다. 과거 육지의 농촌지역에서는 가계관리의 주도권은 세대주가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었 다. 그러나 제주의 가계관리 실태를 살펴보면 부부가 제각각이거나 부인이 총수입의 관리자가 되는 가정이 많다. 부인이 남편에게서 생활비를 타서 쓴다는 개념이 희박이 다. 오히려 남편이 생계 책임자로서의 의식이 약하고 부인이 더 책임감을 갖는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생계비 부담이나 관리에 부부 이외의 다른 가족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도 제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살아가는 과정에 부모의 특별한 지원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다. 가족생활에 시부모가 관여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제주 가계는 부부중심으로 운 영되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부조도 부부, 부모자녀 각각 따로 한다. 과거에는 부조의 내용도 주로 곡식으로 한다 던가, 또는 인력제공, 예를 들어 물 부지(물 부조)라 해서 상수도 시설이 안 되어 있던 시절 허벅(물동이)으로 물을 길어다 주는 것은 큰 부조 중의 하나이다. 육지와는 달리 자식이 결혼 후에는 분가하여 핵가족을 형성하므로 장남이라 할지라 도 기혼자식과 부모세대 또한 부조를 따로 한다. 36) 제주도(2001), 전게서, pp.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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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부모의 집과 자식의 집이 각자 알아서 부조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동네의 한 집안(B)에서 혼례를 치르게 되거나 상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웃 집(A)의 부조는 <표 4>와 같다. 이와 같이 혼례와 장례 시의 부조 양상이 다르다. 잔치 때는 철저한 독립 부조가 나 타나지만 장례 때는 여성은 개인단위로, 남성은 가족단위로 한다. 잔치에는 남편과 부 인이 따로 부조를 받는다고 해도 한 집안의 부부이므로 별 문제가 없으나 장례에서는 입장이 달라진다. 여성이 받은 부조는 여성이 갖게 되나, 남성이 받는 부조는 형제들이 공동으로 받은 것이므로 장례비용으로 사용한다든지 또는 남자 상주들을 중심으로 분배한다. 물론 집 안에 따라서 분배 방식에 차이는 있다. 남성들의 가문단위 부조는 의례적 영역에서보 다 남성적, 가문 중심적 사고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미혼의 성인자녀가 독립적으로 부조하는 것은 스스로 번 돈을 따로 관리하여 각자의 몫을 분명히 하는 데서 가능한 것으로 경제적 독립이 일찍부터 확립된 데 따른 것이다. <표 4> 부조 양상 구분 A 집안 B 집안 혼례식 남편 → 남편 부인 → 부인 미혼의 성인자녀 → 미혼의 성인자녀 장례식 남편 → 시신 앞에 놓인 상위에 부조 봉투 한 개만 올리고 절한다. 부인 → 여 상주(모친, 며느리들, 기혼 딸들) 각각에게 부조 미혼의 성인자녀 → 생략경향 자료 : 제주도(2001), “제주여성문화”「제주도문화자료총서」8, 제주도, p.50에서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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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활발한 부조 활동은 경제적 독립성이 확보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여성들의 독립된 부조관행을 통해 집안 대소사에서 여성들의 책임완수가 가능하다. 부조를 해주 는 것은 일종의 적금이자 보험의 성격을 띤다. 평상시 궨당이나 이웃에 대한 부조는 장차 자신이 잔치나 장례 등 큰일을 치를 때 그에 대한 보답이 기대된다. 적금을 타는 것과 같은 장치가 되므로 목돈이 필요할 경우 를 대비해서 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 부조 역시 마찬가지다. 음식을 장만해주고 물을 길어다 주는 등의 인력제공 역시 자신도 언젠가는 돌려받을 것이 기대되는 행위이다. 일종의 수눌음(품앗이)으로서 상부상조의 생존전략이라 볼 수 있다. 여성들이 부조를 개별적으로 하는 것 자체가 여성들의 경제권, 결정권뿐만 아니라 실질적 생활의 책임자로서의 위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37) 현재도 이런 부조 관행이 행해져서 부조로 인한 비용 때문에 생활비가 많이 든다 는 말도 많다. 부부는 일심동체이고 같은 생활단위를 구성하는데 굳이 남편 따로 아 내 따로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조는 일종의 이자 없는 적 금이기 때문에, 즉 부조한 것만큼 돌려받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서 정하기 나름 아 닌가 생각되어지며, 앞으로 합리적인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7) 제주도(2001), 상게서, pp.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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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결혼생활과 여성

1. 혼례문화

1) 사주고남과 이바지

통과의례의 주체는 개개인이면서도, 실상은 그 관습을 이룩하고 있는 집단의 사회 적 현상이기 때문에 사회성을 짙게 띤다.38) 제주의 결혼 풍습이나 가족생활은 한국 전통가족의 모습과는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다른 점이 많다. 가부장제 사회이면서도 실제 생활내용에서는 여성의 영향력이 컸다. 자녀가 혼인 적령기에 접어들면 부모들은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자녀의 혼사를 부탁하게 된다. 혼인은 반드시 중매인을 통해 성립하여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중매인의 비중을 중시한다. 중매인은 연령이 지긋한 동네 유지격인 남성이 맡으며, 가 능하면 결혼생활을 원만하게 유지해 가는 사람, 자녀 복이 많은 사람이라야 좋다는 생 각을 한다. 혼처가 다른 부락인 경우는 남자의 부친이 그 마을의 친구에게서 중매인을 소개받고 그 사람을 찾아가 주석(酒席)을 마련하여 중매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신부는 가문의 도덕성이나 명예를 중시하여 하인, 백정이나 무당가 같은 집안은 피 하고 건강하여 일 잘하는 처녀를 선호한다.39) 신랑 측에서 신부감을 물색하여 신부 측에 청혼하는 과정까지는 중매인을 앞세우지 만 신부 측에서 일단 구두 허혼이 있게 되면, 신부의 사주를 받는 절차부터는 신랑 부 친이 직접 신부 부친을 만나 모든 일을 의논하며 진행시켜 나간다. 사돈간의 접촉이 매 38) 제주도교육청(1996), 「제주의 전통문화」, 제주도교육청 p.346. 39) 김혜숙(1993), 상게논문, pp.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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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절제되는 육지에 비해 직접 접촉이 빈번하였는데, 이는 유교원리의 지배를 덜 받는 다는 측면과 더불어 마을내혼제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양가가 평소 에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굳이 중매인을 사이에 계속 놓아 격식을 고집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40) 중매와 청혼 과정에서의 주축은 부친이 되어 부인과 의논하며 일을 처리한다. 부인 이 배제되고 의논 범위가 당숙 정도까지 확대되는 육지의 동족촌락과는 큰 차이가 있 다. 혼인은 가까운 집안 어른들과 부친이 주로 정하며 부친 사망 시에는 모친이 결정한 다. 이때 모친도 가까운 집안 어른들과 의논을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문중보다는 모친 이 갖는다. 신부 측이 허혼의사를 표명하면 중매인이 신랑부친과 함께 내방한다. 신랑부친의 첫 방문시 신부 집에서는 보통 술이나 음식 등의 접대는 하지 않는다. 혼사를 위한 최초 대면에 음식 대접을 하면 ‘새(잡귀)’가 붙어 혼사가 깨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이는 신랑 감의 첫 방문에도 적용되어 오늘날에도 지키는 집안이 있다. 한국 전통혼례에서는 신랑감의 사주단자를 신부 집에서 받아서 택일하고, 혼인 일자 와 납폐월일을 적은 연길단자를 신랑 집으로 보낸다. 그러면 신랑 집에서 혼서와 폐를 함(봉채함)에 넣어 혼인 전날 밤에 신부 집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그 순서가 이와는 반대로 진행된다. 신부 측의 사주를 신랑 집으로 보내고 신랑 집에서 사주를 ‘고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궁합을 보는 것이다. 일단 사주가 전해지면 혼인 의 성사 여부는 궁합에 달려 있게 되고, 그 결과에 따른다. 함도 홍세함이라 부르며, 혼 인 당일 신랑 일행이 가져간다. 궁합을 봐서 서로 맞지 않다고 하면 신부 쪽에 사주를 되돌려주게 되고 이로서 그 혼인은 성사되지 않고 없었던 일로 원점 회귀하는 것이 원칙이다. 궁합을 보기 전에 “친심”이란 절차가 있을 수도 있다. 친심이란 신랑될 사람이 신부 될 규수를 보러 가는 것으로 선보는 것과 흡사하다. 친심은 일정한 형식이 없다. 여가 (女家)에서 “총각을 한번 보고 싶으니 아무 때고 한번 놀러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40) 김혜숙(1993), 상게논문, p.22.

(40)

총각이 슬그머니 다녀오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중매인과 함께 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 느 날 간다고 예고하고 가는 경우는 없다.41) 궁합이 맞고 좋으면 혼인 날짜를 정한다. 혼인 날짜는 1~3년 정도의 기간을 두어 정해지는 일이 보통이다. 경제적으로 생활의 여유가 그다지 없던 시절이라, 잔치에 드 는 물종을 자체 생산하는데 일정한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개 자녀의 혼기가 되면, 혼례식 잔치에 쓸 돼지는 집에서 미리 사육한다. 택일하는 사람에게는 혼인 일자나 출 행과 도착 시간 등 절차상 지켜야 할 시간까지 의뢰하여 정하며 이를 엄격하게 지킨다. 정해진 시간을 잘 맞추어 시행해야 화를 막고 복이 들어온다고 믿는다. 이는 오늘날에 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택일이 되어 혼인일자가 결정되면 신부 집으로 막편지를 가져간다. 막편지는 사주가 맞아 혼인 성사를 알리는 편지로서 택일(혼인일자)을 정식으로 통보하는 서식이다. 막편지 전달은 보통 중매인과 신랑 부친 또는 신랑이 같이 가기도 하고, 신랑집 근친 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막편지 전달이 일종의 약혼식으로 간주될 때는 양가 모두 참석 범위가 넓어진다. 약혼의례에 해당할 경우에는 돼지다리, 술 한되, 쌀 한말과 신부의 옷 감 한 벌 등을 마련한다. 신부 집에서는 신랑 집에서 가져온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대 접한다. 막편지를 주고받은 후부터 양가는 정식 사돈관계를 맺은 것으로 여기며 정중 한 태도를 취하고 사돈으로 부르게 된다. 잔칫날이 다가와 가면 혼인에 필요한 음식물을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데 이를 이바지라 한다. 이바지를 보내는 것은 딸을 데려오는데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예 물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제주의 남성들은 어로 작업이나 출륙을 하다가 바다에서 죽는 일이 많았다. 결 국 여성들이 밭농사나 물질 등으로 직접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으므로 여성들의 노동력 과 생계유지 능력이 그만큼 중요하다. 이바지를 많이 받을수록 신랑 쪽이 부자이며 권세 있는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이라 여겨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으나, 차츰 이바지를 받는 것이 신부 측의 가난함을 들어내 41) 최재석(1984), 전게서, pp.112-1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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