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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죽음과 수용적 죽음 인식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에서 진태엄마와 성남댁의 극명한 죽음 인식 차 이를 드러낸다. 영감님이 돌아가시자 성남댁은 혼자서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한 반면 진태엄마는 위선적인 장례를 치른다. 영감님이 운명하자 진태엄마는 거의 난동에 가까 웠다. 성남댁은 영감님이 정말 숨이 끊어졌나를 확인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장례 절차 를 혼자 정성스럽게 했다. 그 이상은 잘 알지 못했다. “소리 죽여 흐느끼면서 할 일을 찾는다는 게” 사잣밥을 짓는 일이었다. 성남댁은 “영감님 시중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 다가 갑자기 놓여나니” 허전하여 뒤늦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날마다 함께 했건만, 진태엄마는 염습도 입관하는 것도 못 보게 했다. 입관 후 남들의 어깨너머로 얼핏 본

211) 서혜경,『노인 죽음학 개론』, 경훈사, 2009, 40면.

관은 엄첨나게 컸다. 관의 호사스러움과 크기는 더더욱 영감님이 죽은 게 아니라 사그 러졌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점점 부피와 무게가 줄다가 어느 날 마침내 사그러졌기 때문에, 그 관은 비어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성남댁에게 영감님은 죽은 게 아니라 사 라진 것처럼 여겨졌다.

허구헌 날 똥 치고 씻기느라 공깃돌 다루듯 하던 영감님이건만 염습하는 것도 입관하 는 것도 못 보게 했다. 입관 후 남들의 어깨 너머로 얼핏 본 관은 칠이 얼굴이 비치게 번들대고 자개로 된 무늬까지 박혀 있었고 엄청나게 컸다. 관의 호사스러움과 크기는 더더욱 영감님은 죽은 게 아니라 사그러졌다는 느낌을 더했다. 영감님은 점점 부피와 무게가 줄다가 어느 날 마침내 사그러졌기 때문에 저 관은 비어 있으리라고 성남댁은 생각했다.212)

사실 진태엄마가 성남댁을 맞아들일 때는 “단순한 시아버지의 시중꾼으로서가 아니 라 계모(繼母)로서”였다. 깍듯이 시어머니로 모시고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시아버지 명의로 된 “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주겠다는 조건”을 무수하게 되풀이했다. 고맙게도 영감님은 성남댁을 믿음직한 친구처럼 대해줬다. 열세 평짜리 아파트에서 단둘이 살 때는 그래도 행복했다. 이 년 남짓 그렇게 살다가 다시 한번 중풍이 도진 영감님은

“몸져누워서 의식이 오락가락했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되자 진태엄마는

“자식된 도리를 내세워 합치자고 했고 성남댁은 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내놓고” 진태네 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성남댁은 진태엄마처럼 귀부인 티가 철철 흐르는 여자를 감 히 며느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성남댁’이란 하대를 당하고도 분하고 괘 씸한 생각이 오래가지 않았다. 다만 영감님 장사나 지내고 셈이나 끝내자는 생각뿐이 었다. 그런데 하필 장례 도중, 진태엄마 친구들의 “열세 평 아파트를 벌써 팔아치웠 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결국 성남댁은 3년 간병기간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 사라지 고 말았다. 진태엄마는 그동안 성남댁의 희생을 무시하고 주기로 한 아파트를 팔아치 웠던 것이다. 성남댁은 당장 달려가서 따질 작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쩔 줄 몰 랐다. 하지만 진태엄마는 “둘이서만 맺은 약속쯤 감쪽같이 없던 걸로 하는 것은 문제 도 아닐 터”였다. 그녀는 조용히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양심과 분노의 결의가 자신 안에서 빠져나가는 소리 또한 듣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건 가차없이 무화 (無化)시키는 간악한 음모 앞에서 누가 흠씬 밟아놓은 것처럼 짜부라졌다. 한동안 그러

212) 박완서,「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저녁의 해후』, 문학동네, 2013, 193면.

고 있었다.

진태 엄마처럼 귀부인 티가 철철 흐르는 여자를 감히 며느리뻘이 된다고 생각해본 적 이 없었다. 그래 그런지 할머니를 뺀 성남댁이란 하대를 당하고도 분하고 괘씸한 생각 이 오래가지 않았다. 다만 영감님 장사나 지내고 셈이나 끝내고 나서 남 돼도 늦지는 않으련만, 하고 진태 엄마의 조급한 성미를 딱하게 여기는 게 고작이었다. 셈이란 물론 열세 평짜리 아파트의 인수인계를 의미했다.(190면)

“유산이 되기 전에 벌써 팔아치웠다더라. 중풍이 도져 이 집으로 합칠 때 다시 그 집 으로 들어가시게 될 것 같지도 않고 놔둔다고 큰 재산 될 것도 아니어서 후딱 팔아치 웠나봐.”(200면)

성남댁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진태 엄마한테로 달려가서 따질 작정이었다. 늘 반짝이 는 금줄이 걸린 희고 상큼한 진태 엄마의 멱살을 왁살스럽게 움켜잡고 들입다 흔들면 서 따지고 싶어서 근질대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쩔 줄을 몰랐다.(200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과 대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경멸한 사람, 죽음을 저항 없이 받아들인 사람, 죽음을 예찬한 사람, 죽음에 도전한 사람, 사랑 을 통해 죽음을 극복한 사람, 죽음의 신비에 승복한 사람, 죽음에 만족한 사람”213) 등 이 있다. 성남댁은 비로소 자신만 빼고 모든 사람이 진행시키고 있는 집안에서의 교묘 한 음모를 감지했다. 그 음모는 불과 이틀 전까지 집안을 지배하던 영감님을 흔적도 없이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영감님이 자신의 화장을 원하고 유언까지 남겼다는 건 새 빨간 거짓말이었다. 먼저 간 마나님을 영감님이 우겨서 화장을 한 터라, 얼마나 마음 속 깊이 후회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누라 혼백이라도 내 무덤에 불러들여 지난날 의 그 몹쓸 것을 사과하고 위로하고 잘해줘야지, 하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 다. 또한 영감님은 중풍이 들고 나선 임종 때까지 유언을 할 만한 의식은 돌아오지 않 았고, 임종이 임박한 걸 가족들에게 알린 것도 성남댁이었다. 성남댁은 집안의 교묘한 음모에 대한 체념의 너무 속도가 빨랐던지 “얼얼한 배신감이 남아 있었지만 덤으로 편 안”해졌다.

영감님은 성남댁에게 먼저 마나님과의 유별난 금슬을 숨기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213) 배영기, 같은 책, 426면.

마누라가 불구덩이에 들어갈 때 얼마나 뜨거웠을까 생각만 하면 금창이 미어지는 것 같다는 하소연을 자주 했었다. 나 죽거든 집도 없는 마누라 혼백이라도 내 무덤에 불 러들여 지난날의 그 몹쓸 것을 사과하고 위로하고 잘해줘야지, 하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다. 가끔 꿈에 뵈는 마누라는 이마가 지글지글 타고 있거나 불붙은 옷을 입고 뜨 겁다고 펄펄 뛰더라고 말하는 소리만 들어도 영감님이 마나님을 화장한 걸 얼마나 마 음 속 깊이 후회하고 있는지 알만 했다. 그런 영감님이 자신의 화장을 유언으로 부탁 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202면)

그 음모는 불과 이틀 전까지 이 집안을 드높은 기성(奇聲)과 지독한 똥구린내로 가득 채우고 거침없이 지배하던 영감님을 흔적도 없이 말살하려 하고 있었다.(203면)

다음날 성남댁은 “흰 치마저고리로 갈아입고 아무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영구차에 올 라”탔다. 장례식에서 주역은 망인이 아니라 진태엄마였다. 사람들은 크게 감동해서 기 를 쓰고 턱을 주억거렸다. 하지만 성남댁은 영구차 속에서 단 하나의 진짜였기 때문에 조마조마하고 무섭고 당당치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진짜임이 탄로날까봐 될 수 있 는 대로 몸을 작게 웅숭그리고 골똘히 창밖만 내다보았다. 화장장은 매점이나 화장실 등 부속건물 말고 크게 두 개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었다. 굴뚝이 높이 솟은 화장장 내 부는 바깥이 화창한 봄날인 것과는 상관없이 음습하고 썰렁한 회색빛이었다. 거기선 영구가 차례를 기다리기도 하고 간단한 종교의식도 치를 수 있었다. 영구를 밀어 넣을 수 있는 아궁이의 쇠문이 나란히 붙어 있는 벽만 아니라면, 화장장이라고 특별한 덴 없었다. 대기실에 붙어 있는 식당에선 음식 냄새가 지독했다. “찬합과 양동이를 끄르고 나물과 지짐질과 두부조림을 은박지 접시에 담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시뻘겋게 취한 얼굴에 건강한 이빨로 소주병을 따는 아저씨”도 있었다. 죽은 사람은 몰라도 산 사람 은 먹어야 했다. 화장장 굴뚝에서는 “깃털구름처럼 나부끼는 건 도무지 사람 타는 연 기 같지 않았고”, 그곳 역시 화장장 식당 같지 않았다. 화장장에 식당이 있다는 것부터 가 어울리지 않았다. “왕성하게 먹는 사람, 뭘 더 가져오라고 악쓰는 소리, 밀치고 뛰 고 장난치는 아이들, 서로 부르고 찾는 소리, 김치 냄새…….” 영락없이 시간이 많이 늦은 시골 소음의 결혼피로연장 같았다. 가끔 양복 소매에 헝겊을 감은 젊은 상제가 신랑처럼 피곤하게, 신랑보다는 눈치 보며 웃는 모습도 보였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고, 눈이 부은 어린 상제를 달래는 아주머니는 먼저 식사를 한 듯 번드르르한 입가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었다. 화장장 굴

뚝에서 깃털구름처럼 살짝 나부끼는 건 도무지 사람 타는 연기 같지 않았고, 그곳 역 시 화장장 식당 같지 않았다. 화장장에 식당이 있다는 것부터가 어울리지 않았다. 왕성 하게 먹는 사람, 뭘 더 가져오라고 악쓰는 소리, 밀치고 뛰고 장난치는 아이들, 서로 부르고 찾는 소리, 김치 냄새…… 영락없이 시간이 많이 늦은 시골 소음의 결혼피로연 장이었다.(205면)

아직 영구가 불아궁이로 들어가기 전의 가족이 모인 대기실은 시외버스 정류장처럼 붐비고 시끌시끌하고 초조해 보였다. 영구가 차례를 기다리고 늘어선 화장장과 대기실, 식당 사이를 사람들은 자주 오락가락했고, 장소에 따라 사람들은 헤까닥헤까닥 민첩하 게 잘도 표정을 바꾸었다. 화장장 쪽에선 울음소리, 염불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입 다물 고 있는 사람도 비통을 온몸에 예복처럼 걸치고 있었다. 어쩌다가 밤샘에 지친 상제가 꾸벅꾸벅 조는 게 약간 민망해 보일 정도였다.(206면)

식당과 화장장은 극과 극이어서 과연 완충지대가 있을 만했다. 표정을 바꾸는 일에 서투른 사람은 애매한 웃음과 애매한 근심으로 얼굴을 애매하게 흐리고, 효부 근처에 서 얼쩡거리면 됐다. 영구를 보자 진태엄마는 새로운 기운을 얻어 크게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말라버린 그녀의 울음은 슬픔이라기보다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그녀 는 영구를 따라 곧 불아궁이로 들어갈 듯이 날뛰었다. 문이 닫히고 문 위에 빨간 신호 등이 들어오자 결국 진태엄마는 정신을 잃는다. 이에 진태 아버지는 차를 대기시키고 아내를 부축했다. 혼자서 화장장 쪽에 남은 성남댁은 ”영감님 영구가 들어간 철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철문은 영락없이 그녀가 살던 아파트의 쓰레기통 문처럼 생겼다.

이에 성남댁은 “사람 팔자도 쓸모없어지면 버려지긴 쓰레기보다 나을 게 없다.”라는 죽음 인식을 드러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철문 위에 빨갛게 켜졌던 불이 돌연 나갔다. 성 남댁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서도, 영감님이 운명하셨을 때처럼 한 번 가슴 이 크게 내려앉았다. 벌써 유골이 나와 있었다. 그건 유골이라기보다는 재였다. 직원이

“할머니가 인수하실 거냐”고를 묻는다.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통으로 생긴 직원이 보통의 빗자루로 보통 쓰레받기에 쓱쓱 쓸어담기 시작했다. 보통 비질과 다르지 않은 직원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성남댁은 당초에 두려워했던 것과는 다르게 속 속들이 편안해졌다. ‘보통’은 죽음 앞에서 평등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상징한다. 성남댁 은 ‘그것을’ 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진태엄마한테도 뭔가 “청산되지 않은 감정 의 찌꺼기, 남아서 할 일이 있을 것 같은 치사한 미련” 등이 깨끗이 가시는 걸 느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