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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인식과 진정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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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모자로 살아남은 당신」은 “의연한 죽음에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확인 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198) 야스퍼스는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상황을 한계상황이라 고 규정했는데, 여기에는 죽음도 포함된다. 인간은 그 한계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그 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한계상황을 비약하는 계기로 삼느냐, 무의미하게 받아들이느 냐는 오직 존재에게 달려 있다. 화자는 남편이 죽음에 점점 다가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어떻게든 그를 삶의 영역에 붙들어보려 한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서 화자는 지칠

196) 배영기, 같은 책, 478면.

197) 정병석,「論語와 莊子에 보이는 죽음관」,『東洋哲學硏究』제55권, 2008, 66~67면.

198) 정호웅, 같은 책, 359면.

대로 지친 남편에게 몸에 좋다는 한약 생약을 다 실험하려 든다. “꼭 고쳐놓고 말 테 니 두고 보라.”고 장담하곤 한다. 하지만 남편을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처럼 굴면서” 뒤로는 조금씩 장사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종의 장소를 자식들과 의논하 기도 했다. “미리 만든 영정사진을 받아보고 그만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뜨 끔하기도 한다.

병원 약과 방사선 치료만으로도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 좋다는 한약 생약을 다 실험 하려 들었다. 탕약 환약 인삼 영지 어성초 알로에, 온갖 채소와 약초의 녹즙을 그의 입 에 처넣으면서 꼭 고쳐놓고 말 테니 두고 보라고 장담을 하곤 했다.199)

이렇게 결코 그를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처럼 굴면서 나는 뒤로 조금씩 그의 장사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298면)

임종의 장소를 집으로 할 것인가 병원으로 할 것인가를 자식들과 수군수군 의논하기 도 했다.(298면)

미리 만든 영정사진을 방아보고 나는 그만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이 뜨 끔하고 말았다.(298면)

병든 육체 자체를 강렬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자주 발견되는데, 이 점이 한국문학의 주된 특성을 이룬다. “병에 의한 죽음을 애절하게 그려낸 한국소설의 예로는 박완서의 단편을 들 수 있다. 화자는 남편의 죽음을 지연시키려 하는 등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 에 저항한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멜랑콜리 한 심리 상태”200)를 짐작하게 만든다. 죽음을 앞둔 남편을 대하는 화자는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현실적인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서, 일상의 가치들은 달라졌다.

그것은 행복과는 다른 감정들이었다. 작가는 실제 경험했던 폐암으로 죽은 남편과의 동일한 투병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담담하게 생을 마감하는 남편에 대한 기억을 묘사 하며, 죽은 날을 정해놓은 사람과의 마지막 시간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이 빠른 물살처럼 느껴질 만큼 자주자주 시간이 빛났다. 그것은 애달픔이었다. 남편은 무 서운 속도로 죽음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화자는 무서운 얼굴로 신효한 약들을

199) 박완서,「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문학동네, 2013, 297면.

200) 최문규,『죽음의 얼굴』, 21세기북스, 2014, 482~486면.

강조하며 남편을 윽박지르기도 했다. 곧 죽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거짓 희망으로 들 볶았다. 투병은 곧 전쟁이었던 셈이다.

마지막 일 년은 참으로 아까운 시절이었다. 죽을 날을 정해놓은 사람과의 나날의 아 까움을 무엇에 비길까. 애를 끊는 듯한 애달픔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빠른 물살처럼 느 껴지고 자주자주 시간이 빛났다. 아까운 시간의 빛남은 행복하고도 달랐다. 여덟 개의 모자에는 그 빛나는 시간의 추억이 있다. 나만이 아는.(281면)

아닌 게 아니라 투병은 곧 전쟁이었다. 항암제가 몸 안으로 흘러들면 환자는 곧 오장 육부까지 쏟아낼 것처럼 심한 구역질을 시작했고 항암제와 함께 빠른 속도로 주입되는 링거 때문에 변기를 줄창 대고 있어야 할 만큼 오줌 마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놈의 대포알이 암을 명중시키기 전에 사람 먼저 잡을 모양이었다.(284면)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는 순간의 시간이 있고, 죽는 순간의 시간이 있다. 카이로스는

“의미, 사건, 체험, 관계, 경험, 몰입, 질적, 내적인 시간이다. 인생에서 다양한 사건을 만나서 내적인 나만의 관계를 맺고, 관계를 통해서 체험과 경험을 하고, 그것에 몰입하 고 새로운 인생의 의미가 되고, 한 인생의 역사를 남기는 시간이다.”201) 카이로스에서 일상은 매일매일 감동의 날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깊이나 밀도 로 만나는 일이다. 화자가 치료를 위해 부질없는 노력을 다한 것은 환자를 위한다기보 다 혼자 남겨질 사별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이 하고자 한 것은

“별게 아니라 보통 때처럼 구는 거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늘 주어지던 것들도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상은 다른 가치 로 빛난다. 그런 이유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일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불멸이 아니라 소멸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역산하여 일상의 가치에 대해 새롭게 눈 뜰 수 있다.

그가 하고 싶어한 게 별게 아니라 보통 때처럼 구는 거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보통 때처럼 바라볼 수 없었다. 내 눈엔 그의 모습이, 그의 존재가 시간과 마찰하면서 빛을 내는 것처럼 빛나 보였다. (중략) 달라진 게 있다면 달라진 게 아무것 도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거였다. 너무 감지덕지해서 감히 입 밖에 내서 말하기도 겁났다.(286~287면)

201) 김정섭, 같은 논문, 86면.

죽어가는 자를 지켜보는 우리는 결국 “모든 인간의 참된 연대성, 즉 인간의 연약함 과 사멸성에 대한 진리에 공감하게 된다. 리쾨르는 죽어가는 자와 함께 할 때 진정한 자기 존중이 타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실현된다고 말한다. 그 순간은 그가 살아온 고 유한 인격에 대한 존중과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멸성에 대한 깨달음을 주고받으며 진정 한 공감의 상태에 도달한다.”202)는 것이다. 타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마치 잠에서 깨 어나듯 자신의 삶에서 깨어나게 된다. 화자는 숱 많은 남편의 머리칼이 수시로 “한웅 큼씩 빠져 단시일 내에 아주 없어져가는 걸” 지켜보면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우울 하고 참담했다.” 남편은 암주사를 맞고 나서부터는 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죽음은 그 어떤 인위적인 지연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남편은 “현 대의학 하나만 믿어보도록 하자.”고 한다. 그것은 “현대의학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식들 에 대한 애정과 자기 목숨에 대한 담담함”에서 연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숱 많은 머리칼이 수시로 한웅큼씩 빠져 단시일 내에 아주 없어져가는 걸 지켜보는 마음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우울하고 참담했다. 무성하던 한 오라기도 안 남은 늙은 남자의 두상은 그 나이에 흔한 대머리하고는 또 달랐 다.(288면)

여보, 제발 우리 현대의학 하나만 믿도록 합시다. 이왕 자식을 둘씩이나 의학공부시켰 으니 그 정도의 의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소. 별, 말도 안 되는 의리였다. 그런 태도는 현대의학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과 자기 목숨에 대한 담담함에 연유했 음직하다.(300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에, 남은 시간을 어떤 가치로 보느냐는 각자의 관점 에 달려있다. 특히 죽음에 임박한 자에게는 순간에서 영원성을 만나는 시간 개념이 필 요하다. 화자는 남편이 보통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자신 곁에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 이 새삼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이었다. 비록 “늙은 얼굴 에 걸맞지 않은 갓난아기 같은 민둥머리를 하고 있을망정” 남편은 매일 멋있어졌다.

“너무 멋있어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황홀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연애할 때도 신혼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다. 아직 남편이 살아 있음에 감사와 사랑으로 잠 깐이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곧 눈앞에서 사라질 한 사람에 대한 절절한 202) 공병혜,「리쾨르의 이야기적 정체성과 생명윤리」,『철학과 현상학연구』제24권, 2005, 74면.

마음이 감사로 녹아나기도 한다. 남편이 죽음에 대응한 가장 인간다운 최선의 선택은 가장 아까운 시간을 “보통 때처럼 구는 거”였고, 화자 역시 최선은 “그에게 순간순간 열중하는 것이었다. 부부에게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열 달이나 계속됐다.” 죽음 은 살아있는 것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볼 때 부부는 순간을 아까워했다. 남은 시 간에 “어떻게 독창적으로 살아 있음을 누리고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건 인간 만의 비장한 업”이라는 사유 역시 작가의 죽음 인식이다. 죽음 앞에서 크로노스냐, 카 이로스냐에 따라 시간은 무한 가치를 지닌다.

그가 지금 가장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일은 병나기 전의 보통 때처럼 사는 거였다. 보 통 때 그는 집에서 저녁을 억을 때 제일 흡족하고 살맛이 나 보였었다.(300면)

보통날 저녁은 꼭 별식을 한두 가지쯤 장만한 내 집 식탁에서 이 홉들이 소주를 반병 이 채 안 되게 비우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한없이 오래 하며 먹고 싶어 했다.

(중략) 아아, 오늘도 그가 무사히 보통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내 곁에 돌아오고 있 다. 그동안 그를 기다린 타는 목마름은 그가 휘적휘적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도 탐조등 처럼 그를 비추며 좇았다.(301면)

비록 늙은 얼굴에 걸맞지 않은 갓난아기 같은 민둥머리를 하고 있을망정 그는 매일매 일 멋있어졌다. 너무 멋있어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황홀할 적도 있었다. 일찍이 연애 할 때도 신혼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건 순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매 혹이었다. 그러고 나서 풍성한 식탁에 마주 앉으면 우린 더불어 살아 있음에 대한 안 타까운 감사와 사랑으로 내일 걱정을 잊었다. (중략) 남들이 십 년 후를 근심하고 백 년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우리는 순간을 아까워했다. 죽음은 모든 살아있는 것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301면)

죽음을 앞둔 시간의 아까움을 느끼고 그 아까운 시간에 어떻게 독창적으로 살아 있음 을 누리고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건 인간만의 비장한 업이 아닐까. 그가 선 택한 인간다운 최선은 가장 아까운 시간을 보통 때처럼 구는 거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에게 순간순간 열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에게 일생 중 가장 행복 한 시간이 열 달이나 계속됐다.(302면)

“육체가 정상적으로 존재할 때 삶이 가능하고 육체의 활동이 중지되면 삶도 끝난다 는 것, 이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이지만 영혼불멸의 사상 때문에 인간이 어쩌면 오랫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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