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대응방식으로서 희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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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을 퇴행과 해찰로 대응하고자 한다. 소멸의 어두움 을 해학과 풍자로 잠시 환기시킬 수 있다. 이러한 서술은 곧장 죽음으로 향하는 카운 트다운 과정에서 마치 딴짓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죽음 희화화하는 빈번하게 마주치 는 죽음에 대한 방어라고도 볼 수 있다. 죽음이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식 의 한 단면인 것이다. 일상에서의 죽음 끼고 살기는 역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 이 그만큼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종교’나 ‘자연’에 의지하지 않는 작 가의 ‘무’나 ‘끝’으로서의 생사관에 기인한다.「사진」에서 민 선생은 친구의 문상을 가 며 아내와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죽음을 한없이 가볍게 끌어내리면서 까분다. 자해한 친구의 죽음을 놓고 농담까지 하며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수다로 풀어간다. 헐거운 말 투는 죽음이 주는 중압감의 또 다른 반사로 볼 수 있다. 타인과 이야기를 공유할 수밖 에 없는 소란스러운 지하철이란 공간에서 부부가 주고받는 대화는 자연스럽기까지 하 다. 그들은 “자해를 하다니 흉내내기 힘들잖아요.”라든가 “요담에 해후하거든 물어보지 그래”라고 대화를 주고받는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끝’을 장식하는 게 죽음이라고 볼 때, 가볍게 처리될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들은 희화화로 대응하고 있다.

“에이그 그 허풍쟁이 양반. 생각할수록 끔찍한 죽음이에요.”

“허풍으로 감싼 해학적 언동이 기막혔던 만큼 비극적으로 사람들의 의표를 찔렀지.”

“맞아. 그 나이에 자해를 하다니 흉내내기 힘들잖아요. 어떻게 동맥을 잘랐을까.”

“요담에 해후하거든 물어보지 그래.”

“저 세상에 가서? 그게 무슨 소용이래요. 거기 가서 또 죽을 것도 아닌데.”(50면)

민 선생 부부의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조어법은 의도적으로 깊이를 제거함으로써 죽음의 무거움에 어깃장을 놓는 것이다. 말하자면 놀이형식의 담합(談合)이요, 역설과 역리의 어법이다. 적극적인 자세로 죽음에 대처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아마 그 자세는 공포에 질려 이빨을 앙다운, 그러면서도 웃음으로 대처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172) 이러한 희극적인 대응은 상충되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세계를 아울러 인식하 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이다. 죽음 앞에서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도 동시에 포착하고자 함이다. 민 선생 부부는 죽은 친구가 고향 선산으로 간다는 말에 죽음처리

172) 황국명, 같은 논문, 77면.

절차에서 고인의 생사관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을 추론한다. 결국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 위주로 처리되어야 할 무감각해진 문화인 것이다. 고인을 기린다고 치르는 장례 는 정작 형식만 남은 가짜 휴머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근수로 무게를 재기보다는 모양새로 비유하는 쪽이 실감은 더해요. 인간은 대하로 흘러드는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하다고 쓴 사람도 있으니까. 바다로 스며든 물 한방울이 하늘로 기화했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는 상상이 얼마나 그럴싸해.”

“부처님 같은 말씀. 오늘 가는 상가의 그분은 무슨 병을 앓다가…….”

“신장이 나빴어. 어지간히 깔끔덩어리여서 자신의 죽음을 처리하는 절차나 의식에도 꼼꼼한 성깔이 반영되리라 여겼는데 아닌가 봐. 듣자니 고향 선산으로 간대나.”(51면)

아침 화두로는 썩 어울리지 않지만 민 선생 부부에게는 흔한 대화이다. 그들은 시 립장례식장 시설에 대해서도 “식당에서는 구수한 곰국 냄새는 풍기지 않나, 동네의 별 난 잔칫집을 상상하게 만들더라.”와 같은 반어적 서술을 한다. 살아있는 사람 위주로 흐르는 편리한 장례문화에 대한 소회인 것이다. 형식만 남은 그것은 현대사회가 죽음 을 바라보는 태도를 알 수 있게 만든다. 반어는 세계에 대한 희극성과 비극성을 함께 포함한다. 이러한 서술은 최일남의 소설에서 독특한 의미를 생성해내고 있다. 반어적 대립물들은 긴장과 갈등을 야기하면서 대화 너머의 의미를 포착하게 한다. 작가 자신 의 뜻과는 다른 반어적인 서술로 그 맞은편 세계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특히 “관째 들어갔다가 고운 가루로 나오는 일괄작업, 목관 화장은 두 시간이고 지관 은 삼십 분”이라는 대화에서는 죽음까지도 효율적인 방식으로 처리되는 죽음문화를 보 여준다. 신자유주의 시대, 포디즘(Fordism, 표준화된 제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제) 이 죽음의 처리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이로 처리하는 30분짜리 ‘지관’ 역시 죽음에 무게감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왕 태워 없앨 것 나무면 어떻고 종이면 어 때.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기 위해서도 빠를수록 좋지”라는 대화에서는 산 자들을 위해 부수적으로 행해지는 죽음에 대해 알 수 있게 한다.

“기억력 한번 자상하다…… 굴뚝이 사라진 정도가 아냐. 관 하나씩을 실은 수십 대의 영구차가 광장에 가득한 풍경을 생각해봐. 그런 장관이 없더라구. 매일 백 구 가까이 밀려든다는데 도무지 송장 냄새를 맡을 수 없을 만큼 시설이 현대적이고 환경 또한 밝 더라니까 그러네. 애들이 시끌짝하게 뛰어놀지를 않나…… 식당에서는 구수한 곰국 냄 새는 풍기지 않나…… 간간히 터지는 곡성만 빼면 특별한 동네의 별난 잔칫집을 상상

하게 만들더라구. 옛날식으로 절구에 뼈를 빻는 게 어딨어. 관째 들어갔다가 고운 가루 로 나오는 일괄작업인데.”

“그걸 두고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건가요. 죽은 사람이 무얼 알길래.”

“왜 몰라. 다 알걸. 하여간 굉장해. 소각로가 모두 스무 개가량 되는데 옆에서는 따로 증설공사를 벌이더만. 목관 화장은 두 시간이고 지관은 삼십 분이래요.”

“지관이라면.”

“종이로 만든 관이 지관 아닌가.”

“그런 관이 생겼어요? 처음 듣네.”

“실은 나도 금시초문이었는데 골판지로 만든거래. 기왕 태워 없앨 것 나무면 어떻고 종이면 어때.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기 위해서도 빠를수록 좋지. 안 그래?”

“거기까지 갈 것 뭐 있수. 병원에 누웠다가 해부학 교실로 직행하는 사람도 더러 있 습디다. 빠르기로 따지면야 그게 제일이겠네.”

“암. 맘먹기에 따라서는.”

“화장 다음엔 납골당인가요.”

“그렇지. 값의 고하에 따라 재질이 다른 단지에 가루를 담아 가까운 납골당으로 향하 는데, 개중에는 장례장 안에 붙은 작은 동산에 올라 그 자리에서 뿌리는 사람도 있더 라구.”

“산에다 곧장?”

“아냐, 바로 뿌리면 산을 오염시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산림법제 몇 조에 걸린대나.”

“비료 구실을 해서 토양이나 나무에 이로울 텐데.”

“그쯤 여기는 게 보통인데 실지로는 그렇지 않은가 봐. 별도로 마련해 놓은 대형 단 지 투입구에 촉감이 아직 따끈따끈한 뼛가루를 조르르 쏟게 되어 있어요. 그것으로 끝 이야. 손 탈탈 털고 돌아서는 거지. 먼 하늘로 눈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엉엉 우 는 얼굴로 계단을 비틀비틀 내려오는 유족이 있지.”

“얼라. 흐르는 강물에 뿌리면? 물고기는 좋아한대요?”

“그건 나도 몰라. 물고기한테 물어보지 않은 담에야 난들 어찌아누. 산은 늘 거기 있 고 내는 쉬지 않고 흐르는 차이가 있을까.”

“세상에나. 말짱 헛거네.”(52~53면)

“병원에 누웠다가 해부학 교실로 직행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는 말은 현대인의 죽 음문화의 한 단면을 비춘다. “대형 단지 투입구에 촉감이 아직 따끈따끈한 뼛가루를 조르르 쏟게 되어 있어요. 그것으로 끝”이라는 희극적인 사실 또한 비극성을 더한다.

“흐르는 강물에 뿌리면 물고기는 좋아할까”, “말짱 헛거네”, “공수래공수거”는 무화되

는 죽음에 관한 인식들이다. 또한 납골 서랍을 빗댄 “겨우 단지 하나를 넣으면 그만인 네모진 구멍이 오십 개? 칠십 개? 쥑여주더만”이라는 말 속에서는 “죽어도 죽었달 것 이 없다”는 반어를 통한 죽음 들여다보기에 관한 실체가 있다. 무거운 죽음을 가볍게 표현하는 이러한 반어들은 두 의미가 대립관계에 놓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의미 전도 는 표면적으로는 긍정적이고, 이면적으로는 부정적인 형태를 취한다. 반어적 대립물들 은 긴장과 갈등을 야기하면서 그 너머의 의미들을 생성해내고 있다.

“공수래공수거의 절정이지. 땅으로 스며들든 물로 흐르든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런 이들에겐 적어도 납골당의 답답함에서 해방된 기쁨이 여간 아닐 거야.”

“어떻게 답답합디까.”

“숨이 막혀.”

“숨은 버얼써 막혔는데 새삼스럽게 트일 것도 없잖아요.”

“죽은 자만 들어가라는 납골당인가. 산 자를 위한 곳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장정 대여 섯이 들어서면 입추의 여지가 없습디다. 그렇게 좋은 칸막이방의 양벽이 온통 납골 서 랍이에요. 겨우 단지 하나를 넣으면 그만인 네모진 구멍이 오십 개? 칠십 개? 쥑여주 더만.”

“가족 납골당도 있다던데.”

“돈이 많으면 무슨 호사를 못 해. 단돈 만오천 원에 십오 년 보관을 책임지는 시립으 로서는 그 정도가 끽이지. 십오 년 후에도 딱 한 한번은 연장할 수 있다든가.”

“죽어도 죽었달 것이 없네요.”

“누가 아니래.”(54면)

민 선생 부부는 죽음을 한없이 가벼운 존재로 끌어내리고자 까분다. 그들은 공기받 기놀이를 하듯 경망을 떤다. 도통한 경지에 들어선 건지, 아니면 “언젠가는 찾아올 사 멸에 적응하기 위해 연습용 가사(假死) 체험”인지 알 수 없다. 소극적이기보다는 적극 적인 자세로 죽음에 친해지자는 심보일 수도 있다. 또한 “혼자 남았을 때에 대비한 단 독 비행 요령을 서로 그때그때 일깨우는 걸로 미루어 짐작하면 죽음 끼고 살기 훈련의 일상화를 웬만치 믿어도 될 것 같기는 한데, 강퍅하면서 헛된 세상사를 뉘 알랴.”173) 이것은 서울이라는 삶의 최전선을 떠나 당산이라는 후방으로 나앉은 노인들이 가진 여 유의 한 산물일 수도 있다. 작가는 기존의 의미를 해체하기 위해 언어를 무의미하게

173) 최일남, 같은 책, 5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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