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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질서와 죽음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05-110)

「꽃잎 속의 가시」는 모국에서 임종을 맞고 싶어 하는 화자 언니에 관한 이야기 다. 집, 고향, 고국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 노년의 특징이라고 볼 때, 언니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속하지 못한 고독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인에게 고국은 회귀(回歸)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노인으로서는 인지 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인생 여정의 귀결’ 같은 자연의 질서에 융합 하는 죽음 인식을 갖고 있다. 언니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힘겹게 살아온 이민자의 삶 그 자체이다. 이민을 간 게 60년대였으니 삼십 년 넘는 셈인데, 그동안 단 한 번도 고국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그런 언니의 귀향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특히 언니는

192) 이경호·권명아, 같은 책, 25~27면.

193)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같은 책, 201~204면.

고급스러운 새 가방에 대해서는 유독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뭔가 귀중한 것이 들어 있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에 결국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가방 안 물건을 꺼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방 안에는 누런 베옷들, 수의가 들어 있었다. 언니는 “원삼, 당의, 천금, 지요, 멱목, 악수…….” 한 가지씩 끄집어내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부른다.

큰아들네서 짐을 푼 언니는 그러나 이민가방만 풀고 그 고급스러운 새 가방에 대해서 는 누가 물어볼 엄두도 안 나게 이상하게 굴었다. 신주단지라도 든 것처럼 아이들 발 길에만 차여도 언짢아하다가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미리 발뺌을 하면서 구석빼기로다만 밀어붙이려 드는 게 영락없이 장물아비 장물 끼고돌듯 떳떳지 못해 보였다.194)

누런 베옷들이었다. 우리가 그 느닷없는 이물감을 미처 어째볼 새도 없이 언니는 그 안의 것들을 한 가지씩 끄집어내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원삼, 당의, 천금, 지요, 멱목, 악수……. 그것들은 수의였던 것이다.(224면)

이때 가족들은 수의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죽음을 상서롭지 못하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경사’와 대립되는 이미지다. 가족들은 경사스러운 일과 죽음에 연관 된 수의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다. 모두 당황하고 분노하기만 할 뿐, 노인의 행위 배 경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언니의 행동은 그 이면에 대해 소통하 지 않는 이상,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조카는 “어머니, 그만 하세요, 그만요.”라고 격양된 목소리로 어머니를 만류하고 나선다. 언니는 힘겹게 이민생활을 한 아픈 과거를 지닌 세대로, 그 주변인의 죽음 인식과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을 발생 시켰다. 수의를 고국 땅에 가져왔을 때는 나름 죽음에 대한 준비였지만, 이른바 소통되 지 않은 죽음관(죽음에 대한 입장이나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노인의 죽음관은 당사 자는 물론 주변에서도 드러내기가 조심스러울 뿐이다. 노인에게 백수, 천수를 누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는 더 그러하다. 또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미래지향적으로 말하는 노인 역시 드물다. 주체로서 죽음 준비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낯설다. 화자는 언니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카딸 얘 기를 듣고 비로소 언니의 수의에 큰 음모가 숨겨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수의 가 주는 이미지, 경사와는 너무 안 어울리는 생급스러움, 사위스러움의 충격 때문이었 을 것이라고 본다. 조카의 결혼식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조카며느리의 분

194) 박완서,「꽃잎 속의 가시」,『그 여자네 집』, 문학동네, 2013, 218~219면.

노는 시누이와 동서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어머니, 그만 하세요, 그만요.”

조카가 먼저 격양된 목소리로 어머니를 만류했고 질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방을 뛰쳐나갔다. 딴 식구들도 우르르 질부를 따라 나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이 왜 조카며느리가 울고불고 위로받아야 할 일로 둔갑을 했는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언니가 꺼내놓은 것들을 가방에 도로 쑤셔 넣기에 바빴다. 졸 지에 분란을 일으킨 것들을 우선 안 보이게 하는 게 수라고 생각했다.(224~225면)

“이왕이면 갖은 수의로 대달라고 했지.”

언니가 이를 악문 듯이 야무지게 말했다. 언니답지 않게 도전적인 표정이었다. 갖은 수 의란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식을 한 가지도 생략함이 없이 고루 갖춘 수의를 말한다.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장손의 경사를 앞둔 집에 수의가 아랑곳인가.(225면)

집에 오자마자 나는 식구들 몰래 내 방에서 미국으로 전화를 했다. (중략)

“엄마가 갖고 가고 싶으면 갖고 가는 거지 그걸 우리가 왜 말려야 돼. 수의는 죽어서 입자고 하는 옷이잖아. 엄마는 만약 한국에 나갔다. 돌아가시는 일이 생기면 그걸 입고 싶었나보지 뭐. 그게 거기 사는 아들 며느리 짐을 덜어주는 일도 되구. 살아생전 수의 를 장만하는 마음이 바로 그런 거 아니겠수. 꼭 돌아가실 날 받아놓은 것처럼 윤달 낀 해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자식들한테 보채다시피 해서 장만한 거거든.”(228면)

“당신은 꼭 한국산 안동포로 하고 싶다는 거야. (중략) 엄마가 애착을 가질 만하지 뭐. 근데 왜 난리들이야.“(228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태어나고 죽는다. 각기 주어 진 운명의 시간만 다를 뿐이다. 누군가는 좀 더 오래 살고 누군가는 좀 더 빨리 죽는 다. 더구나 나이가 들면 늙게 마련이고, 늙게 되면 죽는 과정을 거친다. 고대 한국인들 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별개로 보기보다 하나의 통일된 존재로 보았다. 부정일치, 생 사일여에서 인간은 한없는 공간 속에서 수많은 시간적 변화를 하고 있는 숙명적 존 재”195)이다. 화자는 언니와 같이 노년이지만 분란을 수습하기에 급급할 뿐, 언니와 제 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언니는 결혼식이 끝나고도 한 달 가량 별탈없이 아들네서 지냈

195) 배영기,『죽음에 대한 문화적 이해』, 한국학술정보, 2006, 477면.

지만, 달갑지 않은 짐이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 후 화자에게는 언니를 황망하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사건이 한 번 더 발생한다. 빨리 와달라는 질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언니는 “난만한 낙화 한가운데 사뿐히 앉아” 있었다. 사돈집에서 보내온 예단을 밤새도록 싹독 거려서, 분홍 꽃이파리들은 찍어낸 것처럼 괴기감을 더했다.

언니는 난만한 낙화 한가운데 사뿐히 앉아 있었다. 하필 사돈집에서 보내온 예단을 밤새도록 싹독거렸을 것으로 보이는 분홍 꽃이파리들은 찍어낸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일정해서 언니의 요망스러운 짓거리에 괴기감을 더했다. 언니는 그 옷감이 피륙일 때 몸에 걸쳐 보일 때처럼 하얗게 바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언니, 정말 왜 이래? 겁에 질린 소리로 부르짖으며 언니를 부둥켜안았다.(231면)

공항에 전송 나온 식구는 여럿이었지만 동기는 화자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니를 끌 어안고 서로의 존재를 느낌으로 간직하고 싶어 했던 건 서로에게 남겨진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뭉클했지만 언니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후 두 달도 안 되어 언니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된다. 언니하고는 오남매 중 맏이와 막 내이고, 가운데 세 남자 동기들은 다들 회갑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터였다. 화자는 혼 자 남았다는 것이 사실 막막하고 무서웠다. 언니는 분명 수의 가방을 가져온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그 누구도 소통하려 들지 않았다. 단지 노인의 기 괴한 행동으로만 여겨 미국으로 빨리 돌아가기만 희망했을 뿐이다. 화자는 언니가 마 지막으로 다녀간 걸 그렇게 보낸 것이 못내 아쉬웠다. 두 달이 짧은 기간이 아닌데 그 렇게 보내놓고, 그동안 한 번도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지 않은 것을 반성했다.

나는 남들이 하는 대로 언니를 포옹했다. 언니에게도 전송 나온 식구들은 남부럽지 않게 여럿 됐지만 끌어안고 서로의 존재를 느낌으로 간직하고 싶어 하는 동기는 나밖 에 없구나 싶은 게 뭉클하니 내 눈시울을 자극했다. 언니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233 면)

아침에 언니의 부음을 받았다. 언니가 미국으로 쫓겨간 지 두 달도 채 안 돼서였다.

(중략) 오남매 중 나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게 막막하고 무서웠다.(215면)

화자는 장례를 치르고 온 조카에게 이민 초기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언니를 이 해하게 된다. 조카가 전했던 것은 장례를 치르고 조카딸이 들려줬다던 이야기다. 언니

는 미국에서 수의 만드는 일을 했고, 기괴한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민 후 얼마 안 돼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양장점에 취직했는데, 특수한 고객만을 상대로 하는 맞춤 옷집이었다. 주인은 불란서 여자였고, 언니는 천을 재단하는 일을 맡았다. 좋은 일자리 덕분에 이민생활에서의 안정감을 맛볼 수 있었기에, 될 수 있으면 늦게까지 남아 마무 리 청소까지 끝마치고 퇴근하려 들었다. 언니는 밤늦은 시간, 아직 찾아가지 않은 맞춤 옷을 이것저것 걸쳐보곤 했는데, 서양 여자들의 체격에 맞춘 옷들은 터무니없이 컸지 만 고급천의 감촉만큼은 황홀했다. 하루 중 그 시간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 양장점은 생각했던 것보다 유명하여 어느 날, 지역 텔레비전 방송국 촬영팀이 들이닥친다. 그들 은 특이한 직업을 취재 중이었는데, 하필 그 가게가 부자들의 수의를 잘 만들기로 소 문났다는 말을 듣게 된다. 가게에 남아 입어본 야회복은 수의였던 것이다. 언니는 그날 로 그 양장점을 그만둔다. 직접 송장을 다루는 일도 아니고, “그만큼 편안한 일터를 놓 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송장에 대헌 금기가 워낙 격렬하고 유구한 고국의 문화를 극복한다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라고 여겼다.

얼마 안 돼 언니는 직업소개소 여자의 소개로 양장점에 취직을 할 수가 있었다. 특수 한 고객만을 상대로 하는 맞춤옷집인데 주인은 불란서 여자라고 했다. 불란서 양장점 은 일본인들 거주지역하고 가까운 깨끗하고 고요한 뒷골목에 있었다. 언니가 맡은 일 은 블란서 여자가 떠주는 본대로 천을 재단하는 일이었다. (중략)

언니는 남편은 아직도 방황 중이었지만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잡은 좋은 일자리로 인 하여 비로소 이민생활이 일단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정감을 맛볼 수가 있었다. 언니는 될 수 있는 대로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마무리 청소까지 끝마치고 퇴근하려 들었다.

아직 찾아가지 않은 맞춤옷을 이것저것 걸쳐보곤 했다. 계집앳적 엄마의 외출복을 몰 래 입어볼 때처럼 서양 여자들의 체격에 맞춘 옷들은 나에게 터무니없이 컸지만 고급 천의 감촉은 황홀했고 가슴에서 피어나는 코사지는 내 안의 남은 화냥기처럼 요요했 다. 나는 내 하루 중 그 시간을 얼마나 사랑했던가.(246면)

내가 가게에 혼자 남아 걸쳐본 야회복은 수의였던 것이다. 나는 그날로 그 양장점을 그만두었다.(247면)

직접 송장을 다루는 일도 아니겠다. 그만큼 편안한 일터를 놓친다는 건 어리석은 일 이었다. 그러나 송장에 대헌 금기가 워낙 격렬하고 유구한 내 나라의 문화를 극복한다 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2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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