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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정리와 부채의식의 청산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80-88)

『아주 느린 시간』에서 작가는 무감각해진 죽음문화를 주체로서 받아들이고자 한 다. 그것은 신변정리와 함께 과거사 정리로 나타난다. 타자의 관념적인 죽음이 ‘나’의 구체적인 죽음관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작가는 종교관 또는 자연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서 함께하는 사람들과 현존으로서의 삶 자체에 대해 몰두할 뿐이 다.「사진」에서 오늘 죽은 친구는, 스무 남은 살 서울에 와서 곡절 많았던 생을 나누 었던 고향 친구이다. 그 친구가 비장암으로 진단 난 것은 반 년 전 일이다. 발견이 늦 은 까닭에 잘해야 고작 두 달이라는 의사의 선고와는 달리 석 달을 더 끌었다. 친구 부인과의 “신변정리를 비로 쓸 듯 하고 갔다.”는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친구가 남긴 것 이라곤 사진 몇 장뿐이었다.

“신변 정리를 비로 쓸 듯이 하고 갔답니다.”

“그게 어쨌게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투로 물었다.

“사진 몇 장밖에 안 남겼는데두요?”

“네에?”

“사람이 평생을 지내는 동안에 따라붙는 잡동사니 부스러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손때 묻은 일용품이며 기념물이며 편지 등속이며 이루 다 셀 수가 없지요. 그것들을 모조리 치웠어요.”

“한 집 안에서 그러도록 모르셨습니까.”

발병 초기, 혼자 집에 있는 시간에 모조리 찢어발기고 태워버린 것 같다고 했다.(127 면)

친구는 발병 초기, 집에 있는 시간에 자신만의 죽음 의식을 끝냈다. 죽음과 일대일 마주했던 그 시간은 지독한 고독감이 담긴 혼자만의 죽음을 향한 절차였다. 친구의 어 디에 “그만한 견딤의 담력이 숨어 있었던가 괄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죽은 친 구와의 기억을 더듬었다. 병문안을 갔을 때 친구의 표정은 매우 덤덤했다. 친구는 각오 하고 있었지만 의사의 얄팍한 인정주의가 뒤늦게 암이라는 것을 알려줬다고 했다. 그 런 친구는 괜찮다면서도 몸을 병상에 비스듬히 부리고 의외로 또렷한 눈망울을 그에게 로 돌렸다. 그 눈빛은 무참하고 눈이 부셔 정시하기 어려웠다. “내쏘는 시선에서 일순 적의 비슷한 걸 느꼈”기 때문이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 그를 겨냥한 응시는 무척이나

어리둥절하고 뜨악하게 만들었다. 당황한 그는 내리깔았던 눈을 한참 만에 들어올렸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보이는 태도랄까. 그는 “사형선고를 받 은 병자가 일쑤 던질 법한 억울한 눈초리”를 대신 뒤집어쓴 꼴이라고 치부하고 싶었 다.

“에이. 인제사 암이래잖아. 진작 일러줄 일이지. 나는 일찍부터 각오하고 있었는데 의 사의 얄팍한 인정주의가 그걸 막았겠지.”

“각오하다니. 암을?”

“응. 필링이 심상찮았거든.”

매우 덤덤한 표정이었다. 약골이 일낸다더니 이 친구의 어디에 그만한 견딤의 담력이 숨어 있었던가 괄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128면)

괜찮다면서도 친구는 몸을 병상에 비스듬히 부리고 의외로 또렷한 눈망울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때다. 갑자기 무참하고 눈이 부셔 친구를 정시하기 어려웠다. 내쏘는 시선에 서 일순 적의 비슷한 걸 느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많이 바스라졌으되 그를 겨 냥한 응시는 무척이나 어리둥절하고 뜨악했다. 살짝 배튼다 싶은 입매와 더불어 어찌 보면 이쪽을 비웃는 듯한 감마저 주었다. 당황한 그는 하릴없이 내리깔았던 눈을 한참 만에 들어올렸다. 친구의 표정은 그 사이에 도로 풀려 있었다. 어째서 그랬을까를 추심 하려던 그도 자기의 착각이 시킨 짓이거니…… 마음을 돌렸다. 상대가 누구이든, 사형 선고를 받은 병자가 일쑤 던질 법한 억울한 눈초리를 자기가 대신 뒤집어쓴 꼴이라고 치부하고자 애썼다.(129면)

병상에서의 친구는 ‘죽음까지 가는 과도적 프로세스’를 문제 삼았다. 죽을 때는 혼 자라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남은 제한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감당해야 했던 그 외롭고 힘든 과정에서 가장 버거운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죽음은 “내 안에 있는 죽음과 육신의 치열한 전쟁”이라는 것. 일 대 일 결투 같은 이 것은 “죽음은 가자 울고 육신은 더 놀다 가자 늘어지”는 치열한 전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친구는 “죽음을 허락하기”로 했다. ‘허락’은 능동태일 때 가능한 이야기다. 소멸되는 순간까지도 주체로서의 의지를 놓지 않겠다는 인식인 셈이다. 생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도 진지할 수 있다. 지저분한 잔재들 을 남은 사람들에게 떠맡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친구는 죽음을 준비했다. 죽음까지 가 는 과도적 프로세스에는 자신만의 신변정리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 지점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노년의 시의성’으로서의 죽음 인식이다.

“내가 내 죽음을 허락하기로 했다네.”

“?”

허락 안 하면 어쩔 것이여. 눙치고 싶었으나 그런 때는 제풀에 이야기를 끌어가도록 잠자코 있는 게 낫다고 여겼다.

“아무리 죽을 때는 혼자라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아. 언제 죽음에 대비한 연습이 있 었어야지. 서양에는 그런 종류의 시설이 있다대. 들었나? 죽는 자와 산 자, 또는 죽음 을 앞둔 자들끼리 죽음을 테마로 실컷 떠들고 토론하는 곳이 있다 이거야.”

“들은 것 같애. 자기 사망 기사를 제 손으로 쓰게 하는 둥, 두려움을 잊고 죽음과 친 해지도록 꾸민 프로그램이 여러 가지라지 아마. 객관적으로 본 나의 업적,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거나 슬펐던 일, 제일 다정하게 지낸 친구와 주위 사람들, 남은 제한시간을 어떻게 유익하게 보낼까 등등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맞장구를 쳐도 될까 저어하면서 아는 대로 주워댔다. 어쩌면 엊그제 친 구 생각과 비슷할까. 이상한 우연도 있구나 싶었다.

“옳거니. 그런데 우리는 없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감당해야 한다구. 얼마나 외롭 고 힘들겠어. 최근의 내 체험에 의하면 그중에서도 가장 버거운 것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야. 즉 내 안에 있는 죽음과 육신의 치열한 전쟁이라구.”

“일 대 일의 결투.”

“바로 그거야.”

“죽음은 가자 울고 육신은 더 놀다 가자 늘어지고.”(130~131면)

친구는 처음에는 죽음과 죽도록 싸울 수 있지만 “도저히 가망 없다고 판단될 때는 빨리 결단을 내릴수록 좋다고 했다. 그것은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미적거리다가는 “주변 정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지저분한 잔재들을, 남은 사람들에게 떠맡길 염려”가 많기 때문이다. 지병인 심장병을 앓고 있는 그 역시, 자신 도 “웨이팅 리스트에 끼어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을 건넨다. 대기자 명단, 이것은 죽 음이 가까이 와 있음을 객관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을 목격 하는 모든 노년은 웨이팅 리스트에 있다. 노년은 ‘죽음까지 가는 과도적 프로세스’ 상 태에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의 길고 짧음만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계기는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이다. 종종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죽음은 슬픈 일 이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기억들 때문이다. 죽음은 그 기억으로부터의 단절이며, 더

이상 함께 소통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알고 보면 헛짓이지. 병세가 악화되어 더 견디지 못할 형편이 되면 둘 다 한순간에 꼴깍 가는 거니까. 웃자고 해보는 소린데 거기까지 가는 기간이랄까 과도적 프로세스 가 문제는 문제야. 물론 처음부터 백기를 들면 곤란해. 말이 이상하지만 죽도록 싸워야 지. 그러나 도저히 가망이 없으면 빨리 결단을 내릴수록 좋다고 생각하네.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잖아. 마냥 미적거리다가는 주변 정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지저분한 잔 재들을 남은 사람들에게 떠맡길 염려가 많다구. 목숨이 붙어 있는 사이에 그거라도 청 소하겠다는 의지를 꼭 사치스럽게만 볼 수 있을까.”

“알 만해.”

“알다니 뭘 알아.”

“나도 웨이팅 리스트에 끼어 있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나 전부터 심장병 앓고 있는 거 몰라?”(131면)

노년에는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살아남은 자는 문득 지나 온 삶 을 되돌아본다. 이렇듯 ‘애도’를 하면서 자신도 죽음을 준비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타 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죽음 성찰이다. 그 역시 친구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몇 장의 사진과 꼭 필요한 물품만 남기고 주변정리에 들어간다. 사용하던 물품과 기념될 만한 것들 몇 가지 것들을 제외한, 진지하고도 엄숙한 혼자만의 의식을 치른다. 비장암으로 죽은 친구 때문에라도 신변정리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 남빛 상자에 넣은 갖가지 기념 패를 결딴내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하나하나에 담긴 칭찬과 격려의 자구들이 암전 (暗轉) 끝에 반짝 명전(明轉)했던 삶의 어떤 마디를 감싸는 듯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 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마저 혼자 안고 지워야 했다. 자신이 죽은 다음엔 모두 처치 곤란한 쓰레기로 처질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살아가는 동안 형성되기 때문에 삶과 관련 깊다. 죽음은 삶의 끄트머리, 마침표 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탄생이 삶의 시작이라면 마지막엔 죽음이 있다. 그 ‘끝’을 생각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시작과 끝 사이 ‘삶’이라는 ‘내용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작 과 끝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삶 전체에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준비되지 않 은 죽음은 타자화된 삶이 되고 만다. 작가는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고, 죽음은 삶 이 무화(無化)되는 것이라고 현존으로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김 선생과 정 선생 이야기」는 지난 과거에 대해 용서받고 정리하고자 하는 서사 이다. 김 선생에게는 세월과 함께 커지는 회한이 몇 가지 있다. 인생 말년에 뉘우침을

안고 살고 있다. 그는 곧 도래할 죽음을 앞두고 회자정리에 들어간다. 당산에 산 기간 은 삼 년 살았던 정 선생에 비해 김 선생은 달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향은 같기에 다시 만났을 때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지하철역에서 해후한 이래 더러 동행 하곤 했다. 김 선생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앞두고, 인생 회한을 덜어내고자 한다. 많은 경우, 노인의 미래는 한정적으로 닫혀져 있어, 그들을 더 과거 속으로 밀어 넣는다. 노년에 들어선 김 선생은 정 선생에게 지난 시간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자신 의 잘못에서 생긴 과거에 대해 화해를 청하고자 정 선생에게 털어놓는다.

말꼬리를 모나게 비트는 정 선생도 언뜻 짚이는 데가 있는 눈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그게 아닐세. 내 구변이 서툴러 이런가 보네. 다름 아닌 자네 형님 사건, 바로 그 건 을 꺼낸다는 것이 초장부터 꼬였구먼.”

“하항. 그거…….”

“내 힘든 기분 이제사 알겠는가.”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잖나. 언젯적 얘기라고.”

그걸 가지고 이 친구는 내내 속앓이를 했는가. 멀리 귀양 보냈다가 나를 보자마자 새 삼스럽게 가위 눌렸던가.(58면)

“우리가 닷 만난 지 얼마나 되지?”

“글쎄.”

“기십 년이 좋이 될 걸세.”

“그리 길어? 이따금 상면하지 않았나. 노상에서 스치기도 하고.”

“그게 한 동네에서 함께 살게 된 것과 같은가. 앞으로는 줄곧 이웃으로 지낼 건데.”

“그러네.”

“해서 말인데, 나 자네가 당산으로 이사 온 걸 안 날부터 솔직히 심사가 편치 않 아.”(58면)

전쟁 전야, 좌우익으로 갈린 고향 청년들끼리 쌈질을 벌이던 무렵이다. 김 선생네는 중학교 뒷문께에 살았다. 어느 날 밤 심한 설사병에 시달리던 중 1짜리 김 선생은 우 연한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엉성한 측백나무 울타리를 뚫고 불빛이 새나오는 숙직실 쪽으로 다가가 안을 기웃거렸는데, 몇몇 선생님을 포함한 대여섯 청년들이 바삐 움직 이고 있었다. 폭 넓은 두루마리에 붓글씨를 쓰고 등사판을 미는 등 어수선했다.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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