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관과 노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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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관과 ‘삶의 질’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언젠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다 96) 조영아,「노년의 정체성 정립을 위한 해석학적 모색」,『현대유럽철학연구』제47호, 2017, 65~67 면. 노화의 여정에는 또한 살아온 자신과의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불일치에서 오는 혼돈뿐만 아니라 연령주의에 기반한 사회적 시선으로 규정되는 자신과의 불협화음이라는 경험도 들어있 다. 노년의 삶에서 드러나는 타자적 모습은 시간의 본질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97) 박대현, 같은 논문, 185면.

98) 김미영(2015b), 같은 논문, 241면.

는 것에 대한 수용은 “삶의 초점을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으로 전환하게 만든 다. ‘소유’ 대신 ‘존재’로서의 삶을 살게 하고, 집착에서 벗어서 자유를 누리게 한다. 죽 음의 인식과 태도는 개인이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와 관련 있고, 이것은 생사관”99) 에도 반영된다. 따라서 말년에 생사관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시간은 크로노스에서 카이 로스100)로 변환된다. 그것은 존재가 스스로 시간을 열고, 삶 전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노년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말한다. 카이로스는 1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을 선사하는 주관적 시간으로, ‘죽음’과 연관될 경우 삶의 지평을 새롭게 열 수 있는 개념이다. 생사관을 지닌다는 것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해석하는 측면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인간은 시간성의 지평에서 영원성을 순간으로 앞당기거나 순간을 영원성 으로 되돌릴 수 있다. 순간과 영원성이 하나가 된다면, 노년은 다른 차원이 된다.

죽음에 대한 해석은 문화나 종교마다 다양하다. 특히 생사관에 따라 문화나 종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국의 경우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와 전통 적으로 내려온 무교, 현대의 기독교까지 다양하게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도교의 불사 관, 기독교의 천당과 지옥, 불교의 내세관, 유교의 입장에서 본 귀신관, 무교의 생사관 등은 죽음에 대한 한국인들의 다양한 견해를 말해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한국인의 대표적 생사관을 몇 가지로 나누어본다.101) 첫 번째, 영혼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범신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생사관으로, 죽음으로써 육체는 흙으 로 돌아간다. 인간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성과 소멸은 자연현상에서 발생한다는 관 점이다. 인간 생활이 자연의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때 자연은 신의 섭 리가 충만한 범신론적 사상으로 파악된다. 무한히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진리를 깨 달으며,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생사관에서는 자연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순응하여 일체를 이루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세계에 순응한다는 것은 곧 죽음의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므로, 죽음에 저항하고자 하는 주체 는 세계와 타협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도교는 한국에서 종교화되지 못하였고, 거의 무교(巫敎)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여전 히 한국인의 삶에서 하나의 ‘근원종교’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자연과의 조화

99) 김명숙(2011), 같은 논문, 66면.

100) 김정섭,「장애인 평생교육의 시간적 의미」, 단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5, 85면 참조.

시간에 관한 인식은 크게 두 가지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이다. 크 로노스는 무한히 흘러가는 수평적이고 직선적인 측정 가능한 물리적인 시간 개념이라면, 카이 로스는 적절한 순간을 의미하는 주관적이고도 심리적인 시간 개념을 말한다. 특별한 시간으로 존재가 스스로 그 시간을 열고, 의미에 이름 붙일 수 있는 시간이다.

101) 김명숙(2011), 같은 논문, 94~95면. 본고는 김명숙 연구자의 생사관 유형을 참고로 한다.

로운 삶을 추구하고, 그 이상으로 자연과 합일이라는 인생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도 교적 생사관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으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관점 이다. 따라서 죽음은 자연의 이치일 뿐 아니라, 인간은 자연의 대전제 앞에 순응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주장한다.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도교는 “진정한 본질적 자아인 덕의 회복이 곧 멸절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믿지만, 본래적 덕의 회복은 오로지 자연으 로의 복귀(順物自然, 無爲自然)를 통하여 가능하다.”102)고 믿는다. 이와 같은 도교적 세 계관이 한국인에게 정신과 신체의 수련을 통해 자연과의 완전한 조화를 추구한다는 이 상을 갖게 만들었다. 노자의 이상은 “자연적인 인간, 즉 외부로부터 부과된 도덕법이 아니라 자연적 본성을 따라 사는 삶”103)이다. 따라서 도교에 있어 자연은 정신적, 도덕 적 교사이다.

한국인의 생사관에 농경생활이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농경생활에서는 논과 밭에 씨앗을 뿌리고 재배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식물이 열매 맺고 죽은 뒤에 또다시 되 살아나는 과정을 관찰한다. 겨울에는 잎이 다 떨어져 죽어 버린 듯한 나무에서 봄에 다시 푸른 잎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생명체의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를 경험한다.

농경문화 속에서 형성된 시간관은 순환적 시간관이다. 이런 순환적 시간관에서는 시작 과 끝을 알 수 없듯이 생과 죽음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처럼 죽음을 자연의 섭리로 인식하면 죽음이 가진 두려움과 위협을 기꺼 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삶의 집착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죽음을 준비하도록 해주 기 때문이다. 죽음은 다만 개체의 생명이 종결되어 대자연으로 다시 귀향하는 것이라 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것은 만물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알고 순리에 의탁함으로써 그 것을 초월할 수 있게 만든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슬픔과 고통으로 다가오지만, 자연의 섭리와 같은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이해한다면, 상실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생사관이 박완서가 변화하는 자연의 질서 가운데 하나로 죽음을 이해하 고자 한 시도와 연동된다. 작가에게 있어서 ‘죽음’은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라고 볼 수 있다. 네 살 때 이미 친아버지의 사망과 6․25를 겪으며 친오빠의 사망을 경험했고, 35년간 결혼생활을 했던 남편과의 임종을 지켜봐야 했으며, 같은 해 스물여 덟 청년인 아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이후 치매로 고생하던 시·친어머니의

102) 이정석,『세속화시대의 기독교』, 이레서원, 2000, 271면.

도교의 도사(道士)가 되려는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면서 수련을 한다. 심산유곡과 명경수가 흐르는 곳에 살면서, 자연과의 완전한 조화(以天合天)의 성취를 위 한 수련을 한다.

103) 이정석, 같은 책, 266~269면.

사망까지 작가에게 죽음은 겪어내야 할 고통이었다. 죽음의 현상만을 보게 되면 괴로 움을 느낄 수 있으나, 자연의 질서 한 가운데 놓고 보는 생사관은 삶을 지탱할 뿌리가 되어준다.

두 번째, 기독교 혹은 불교적, 유교와 같은 세계관에 기초한 생사관이 있다. 이것은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간다’,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한다.’ 또는 삶 속에 죽은 이의 자리 를 마련해놓고 제사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난다’는 인식이다. 인간에게 유한성 과 무한성의 경계선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유한성은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한계성이며, 무한성은 죽음에 대한 극복, 죽음 이후 문제인 것이다. 이에 인간은 “죽음 이전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성을 죽음 이후 영원한 시간성과 공간성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간성과 공간성의 극복이 바로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관”104)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생사관은 죽음 이후 있을 죄에 대한 심판과 부활교리에 내재된 영생과 영 벌이 엄중하다. 선·악 개념이 분명하고 죄와 벌에 대한 과보가 엄중한 것이 기독교의 내세관인 것이다. 기독교적 생사관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영생으로 들어가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사탄과 함께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간다. 구원이란 “죽음으로부 터의 구속이며 죄를 이기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자들이 구원을 얻게 되 는 것이며, 그것은 영생복락(永生福樂)이다.”105) 기독교인 관점에서 볼 때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서 대면하는 하나님”106)인 것이다. 죽음은 인 간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이해되고 있다. 성경은 육신의 죽음 이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생명이 보존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이유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음으로 써 죽음을 주관하는 하나님과 결합한다. 일회적 생명의 포기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 는 것이다. 신앙인은 죽음 속에서 예수와 더 가깝게 만난다는 확신을 갖게 되며, 이 확 신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죽음 속에서도 결정적인 희망을 찾는 근거가 되어왔다. 이 러한 신앙에 근거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불교의 생사관은, “현세에서 저지른 업에 따라 죽은 뒤에 다시 여섯 세계 중의 한 곳에서 내세를 살게 되며, 그 내세에 사는 동안 저지른 업에 따라 내내세(來來世)에

104) 김남희,「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죽음에 대한 인식」,『인간연구』제19호, 2010, 236면.

105) 조재국,「인간의 생명과 존엄한 죽음에 관한 기독교적 이해」,『신학과 실천』제24호, 2010, 143~181면.

106) 한국종교학회 편,『죽음이란 무엇인가』, 창, 2001, 214면.

태어나는 방식으로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윤회의 여섯 세상에는 절대적인 영원이란 없기 때문에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면 지옥에서 다시 인간도로, 천국에서 아귀도로 몸을 바꾸어서 태어나며, 육도의 세계에서 유한의 생을 번갈아 유지한다는 것”107)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업이 잠재적 에너지 상태로 그 존재 속에 축적되었다가, 그 존재가 죽으면 축적된 업 력이 작용하여 다음 존재를 만든다. 이것이 업이 윤회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생사의 진실을 체득하게 되면 번뇌의 원인인 무명이 사라지므로 더 이상은 번뇌가 있을 수 없 고, 업을 형성하지 않는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불교의 대응은 죽음을 불가피한 현실로 서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기 때문 에 죽음이라는 범위가 넓다.

한편 유교의 생사관은 ‘조상제사’가 핵심이다. 그것은 현세와 죽음 이후 내세가 하 나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을 표현한다. 유교의 인생관, 가치관, 윤리관은 과거 한국 사 회를 지배해왔다. 제사의식은 조상을 공경하는 효에 대한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조상을 기리면서 자신의 현재적 역사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상제사는 단절된 조상들 과 영적 교통을 가능하게 한 종교의례였다. 그 의식 속에는 영혼, 즉 혼백이 불멸한다 는 믿음이 있다. 그것은 성스러운 시간으로, 혼령들과 영적 감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존재원리가 조상으로부터 나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경건한 확 인 행위였던 것이다. 유교는 죽음 자체 의미나 죽은 다음 천당이나 극락과 같은 세계 를 설정하지는 않는다.

주로 김원일의 작품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생사관과 연동된다. 그의 작품 에서 나타나는 임종 전 ‘죄의식을 동반한 고백’이 그것이다. 노인들은 모두 죽어가는 과정에서 죽음 의식을 치르는데, 그것은 죄의식과 연관된 과거이다. 그들은 기억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관문과 마주친다. 결국 임 종 전 ‘고백의 화법’은 절대자인 ‘신’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게 만든다. 이에 작가는 천 국이나 지옥을 믿는 기독교적 생사관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노인들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발화한 텍스트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세 번째, ‘무’나 ‘끝’이라는 과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생사관이다. 대부분 오늘날의 죽 음은 세 번째의 죽음에 속한다. ‘자연’의 영성이나 초월적인 ‘신’이 개입되지 않은 물리 적인 ‘끝’으로써의 죽음이다. 근대 특유의 직선적 시간관에는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

107) 구미래,「불교 내세관의 특성과 현대적 함의」,『불교평론』제13권 제3호, 2011, 171~17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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