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미국 싱크탱크의 전통적 역할

문서에서 ❙연구진❙ (페이지 13-18)

1) 정책의 제안자 : 아이디어 브로커(Idea Brokers)로서의 싱크탱크

미국 싱크탱크 연구의 고전적 저작은 미국 싱크탱크(와 그 소속 연구자)를 “아이디어 브로커(Idea Brokers)”로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Smith, 1991). 브루킹스연구소나 헤리 티지재단, 미국기업연구소와 같이 규모가 큰 싱크탱크들은 거의 매일 한두 개씩의 공개 세미나와 포럼을 개최하여 현안에 대한 다양한 정책적 견해가 소통하도록 한다. 특히 정치적 관심이 집중되는 시기,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인 시점, 대통령직 인 수위원회가 가동되는 시점, 정권 출범 직후 등의 시기에는 훨씬 높은 집중력이 발휘된 다. 싱크탱크들은 자신들의 정책 아이디어를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후보자나 당선자들에게 전달하려 하며, 아예 선거 캠프 멤버나 인수위원, 임명직 관료로 참여하여 영향력을 극대화하려 한다.

1991년 선거에서 클린턴(Bill Clinton)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외치며 백악관 입 성에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클린턴을 지지하던 몇몇 싱크탱크들은 1980년 레이건 대통 령에게 제출되어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헤리티지재단의 「리더십에 대한 요구 : 보수적 행정부에서의 정책 관리」 (Mandate for Leadership : Policy Management in a Conservative Administration)를 모델로 하여 건강보험과 교육개혁에서부터 국제무역협 정, 방위획득프로그램에 이르는 다양한 정책프로그램들을 담은 보고서들을 인수위원회 시점에 제출하였다. 이때 가장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싱크탱크가 진보정책연구소였 고, 이들이 만들었던 「새로운 경제정책 보고서」 (The New Economy Policy Report)는 클 린턴 행정부의 중요 정책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Abelson, 2006 : 37~38).

텍사스 주지사에서 백악관의 주인으로 등극한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역시 화려한 명성의 싱크탱크들의 조력을 받아 자신의 정책구상을 구체화해 나갔다. 특히 외 교정책에 무지했던 조지 W. 부시는 후버연구소와 미국기업연구소로부터 막대한 정책 적, 인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인적으로 상당히 중첩되면서도 조직적으로는 구분되는 독특한 싱크탱크인 새로운 미국의 세기 프로젝트(Project for New American

4) 이 절은 홍일표(2009a : 289-293)의 내용을 주로 재구성한 것이다.

Century, PNAC) 역시 중요하다. 1997년 창립된 이 작은 싱크탱크는 딕 체니(Dick Cheney),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 스쿠터 리비 (Scooter Libby), 젭 부시(Jeb Bush), 윌리엄 크리스톨(William Kristol), 로버트 케이건 (Robert Kagan) 등 ‘네오콘’의 총집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이 2000년 9월 발 표했던 『미국 방위의 재건설』(Rebuilding Americaʼs Defenses)은 부시 행정부 1기의 성 격과 구성을 여실히 보여준 핵심 보고서로 평가된다(Abelson, 2006 : 214~215)5).

2) 인물의 공급자 : 회전문(revolving door)과 싱크탱크

미국 싱크탱크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인물의 공급’이다. 흔히 ‘회전문 (revolving door)’이라 불리는 싱크탱크와 정․관계의 인적 연계구조는 미국 싱크탱크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Abelson, 2006 : 23~42). 한국이나 일본과 같이 국가고시 를 통과한 엘리트 직업 관료가 행정부처를 주도하는 나라들과 달리, 미국은 정권교체에 따라 수천 명의 중간간부급 이상 연방공무원이 교체된다. 이들 중 많은 숫자가 싱크탱크 에서 “때를 기다려 오던” 연구원들로 채워지게 된다(Ricci, 1993 : 39~43). 미국 싱크탱 크들은 선거운동 기간 선거캠프의 멤버, 인수위원회 인수위원, 다음 정부의 핵심 각료를 배출하는 ‘인적 자원의 마르지 않는 풀(pool)’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최형두, 2007 : 49~57).

워싱턴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의 당선 과정에 삼각위 원회(Trilateral Commission)의 역할이 컸음은 카터 본인의 진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Abelson, 2006 : 27).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정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즈 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ew Brezinsky)는 삼각위원회의 초대 사무총장이었고 카터의 국 가안보자문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또한 삼각위원회와 깊이 연결된 외교관계평의회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회원 가운데 적어도 54명이 카터 행정부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카터 대통령의 가장 큰 인적 제공자 역시 브루킹스연구소였다(Abelson, 2006 :

5)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새로운 미국의 세기 프로젝트> 팀조차도 자기 아이디어를 듣도록 만드는데 힘들었다고 할 정도로 “매우 폐쇄적 시스템”으로 작동했다는 특징을 보였다(Abelson, 2006 : 41).

28~29).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 또한 워싱턴 입성 이후 헤리티지재단, 후버연 구소, 미국기업연구소 등에서 약 200명 이상의 연구진들을 행정부 곳곳에 중용하였다.

후버연구소에서 55명, 헤리티지재단에서 36명, 미국기업연구소에서 32명, 현존위협위원 회(Committee on the Present Danger)에서 32명, 전략 및 국제문제 연구센터(Center for Strategy and International Studies)에서 18명이 참여한 것으로 조사되었다(박영호, 2005 : 50).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의 인수위원회 시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은 역시 헤리 티지재단이었다. 이들이 제출한 「리더십에 대한 요구」는 워싱턴 정가의 정책의제를 순 식간에 확정하였고, 헤리티지재단은 곧바로 워싱턴의 ‘기득권 집단’으로 등장하게 되었 다(Abelson, 2006 : 33~35).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기는 미국기업연구소 출신들의 약진이 확연하였다. ‘대통령보 다 더 대통령 같은’ 부통령이라 불렸던 체니(Dick Cheney) 부통령, 부시 행정부 1기 당 시 재무장관을 지낸 폴 오닐(Paul O'Neill), 경제고문 로렌스 린제이(Laurence B. Lindsey),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글렌 허바드(Glenn Hubbard), 국방자문위원회 위원장 리 처드 펄(Richard Perle), 그리고 가장 대표적 네오콘으로 알려져 있는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존 볼튼(John Bolton)까지 모두 미국기업연구소 출신이다. 2001년 부시 정권이 출 범했을 당시 미국기업연구소 연구원 가운데 24명이 정부 요직에 임명되었다(橫江公美.

2004 : 65~67). 헤리티지재단 소속 가운데서도 중국계 미국인인 엘린 챠오(Elain Chao) 가 노동장관으로, 대표적 보수계 시민운동가라고 불리는 아프리카 아메리칸인 케이 콜 스 제임스(Kay Coles James)가 인사부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박영호, 2005 : 51).

3) 정치적 동원자 : ʻ헤리티지 모델ʼ의 성립

1964년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의 참담한 패배 이후, 미국 보수파들은 자신들 의 참패가 자유주의적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전국적 재단들, 일부 신문, 아이비리그 대학 들, 뉴욕의 출판사들로 구성된 소위 ‘자유주의적 기득권 세력(Liberal Establishment)’ 때 문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래서 그것에 대항하는 ‘지적 하부구조’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 렸고, 그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싱크탱크였다(Smith, 1991 ; Ricci, 1993 ; Rich, 2004).

이후 미국기업연구소와 후버연구소와 같은 기존 보수 싱크탱크들의 보수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고, 미국 싱크탱크 세계와 워싱턴 정가를 뒤흔든 헤리티지재단이나 케이토연구 소의 창립이 뒤를 잇게 되었다. 그 후 30여년이 지난 2000년 대통령 선거는 칼 로브라는 걸출한 선거 전략가의 진두지휘 하에 남부 복음주의 교회와 보수적 풀뿌리 운동조직, 전국적 이익단체, 보수적 싱크탱크들이 긴밀한 협력하에서 전개되었고, 이러한 운동의 구조는 2002년 중간선거, 2004년 대선에까지 변치 않는 위력을 발휘하였다(Ryan Sager, 2006 ; 吉原欽一 編, 2005). 이 일련의 정치 과정의 핵심에 헤리티지재단이 서 있었다.

헤리티지재단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미국 싱크탱크 세계의 혁명을 이끌었다. 이들 은 그저 워싱턴 정가만 쳐다보거나 재단 프로젝트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지난 수십 년 간 풀뿌리 대중들에게 귀를 열고 손을 내밀며 성장을 거듭해 왔다. 헤리티지재단의 회원 숫자는 25만 명을 넘는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 프로젝트를 수주하지 않으며, 기업 후원 금이나 재단 조성금 지원을 얻기 위해 연구원들이 동분서주하지도 않는다(홍일표, 2008 : 90~92). 지역의 사회운동조직과 싱크탱크, 언론들과의 협력관계를 한층 강화해 나가 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한 대중들과의 접촉 또한 적극적이다6).

실제 국내 정치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 ‘지역’의 위력은 대단하다. 지난 수 십여 년간 미국의 보수세력과 공화당이 ‘풀뿌리운동’을 장악해 왔었던 것은 이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Critchlow, 2007). 그리고 이처럼 드넓은 미국 전역에 산재해 있는 ‘풀 뿌리’들을 서로 엮어주고 이어주는 역할을 헤리티지재단이 수행해 왔던 것이다. 이들은 자체 라디오 방송시설과 지역 라디오 방송국을 연결하여 전국과 지역, 지역과 지역을 서로 연결하였다. 또한 헤리티지재단 자신들이 확보한 인적 자원을 지역과 공유하는데 아낌이 없었다. 이들이 매년 개최하는 ‘자원은행(Resources Bank)’ 행사에는 보통 500명 이상의 지역 싱크탱크 대표들, 변호사, 정책 전문가, 선출직 관료, 활동가들이 모여 ‘자 유시장’과 ‘제한된 역할의 정부’라는 보수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전략과 수단을 토론한다.

미국 전역의 각 주에는 하나씩의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들이 설립·운영되고 있고,

6) 헤리티지재단은 “나의 헤리티지”(http://www.myheritage.org)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헤리 티지재단의 회원과 지지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충성도 높은 대중들에 대한 공격적 정책 마케팅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애틀란타, 시카고, 댈러스, 뉴욕 등 미국 각 지역의 헤리티지 지역공동체위원회가 구축한 웹사이트가 서로 연결되어 지역 회원 간의 상호접촉은 물론 보수적 의제의 전국적 확산을 시도한다.

이들은 지역정책네트워크(State Policy Network)라는 이름으로 묶여 정책생산과 조직운 영에 대한 정보와 자원을 공유해 나가고 있다. 1992년 설립된 이후 이들은 전미입법교환 평의회(American Legislative Exchange Council)와 협력하고, 다른 한편으로 헤리티지재 단과 협력하여 보수적 가치와 쟁점들이 각 주의 정책에 반영되고, 시민사회 내에서 확산

이들은 지역정책네트워크(State Policy Network)라는 이름으로 묶여 정책생산과 조직운 영에 대한 정보와 자원을 공유해 나가고 있다. 1992년 설립된 이후 이들은 전미입법교환 평의회(American Legislative Exchange Council)와 협력하고, 다른 한편으로 헤리티지재 단과 협력하여 보수적 가치와 쟁점들이 각 주의 정책에 반영되고, 시민사회 내에서 확산

문서에서 ❙연구진❙ (페이지 1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