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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와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는 어쩌면 누구보다도 독일 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892년 베를린에서 열렸던 뭉크의 전시는 당시 굉장한 사건을 일으켰다.

주제의 과격함과 표현 방식에서의 왜곡을 이유로 전시를 거부당할 정도였다. 뭉크는 주제로서 현대사회에서 느끼는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 소외감, 여인의 생애와 남녀의 절박한 사랑과 갈등 등을 주로 다루었다. 바로 이와 같은 주제는 이후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다리파에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 예로서 1893년 제작한 뭉크의 <절규>도판5)는 경악스러운 배경과 공명하는 듯한 색, 그리고 비명소리가 전체 화면을 뒤흔들 듯한 선의 표현으로 인간의 절망감과 불안한 의식을 표현한 그림이다. 화면 속 소리를 지르 고 있는 사람은 마치 만화 그림처럼 왜곡되어 있다. 부릅뜬 눈에 작게 줄어든 동공, 홀쭉하게 꺼진 볼과 해골 같은 형상은 죽은 사람을 연상시키며, 흔들린 듯한 배경 색 과 겹쳐져 뭔가 불길한 기운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뭉크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는 형태의 왜곡이나 과격한 주제 때문이 아니라, 이전 미술에서와 다른 어떤 추를 보였다 는 점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은 표현주의자들이 예민하게 느꼈던 인간의 고통, 가난과 폭력, 삶의 격정에 대한 연민의 표현에 걸 맞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뭉크에 대해 특별히 눈여겨 볼 점은 그가 직접적이고 극적이며 강렬한 이미지를 통하여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놓음과 동시에 강한 호소력을 지닌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이다.21) 표현주의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화가 중 또 한 사람인 고흐 역시 그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통해 표현의 다양성의 폭을 넓혔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 란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흐를 인상파 화가들에게 처음 소개시켜 준 사람은 동생 태오였다. 이러한 연유로 젊고 성실한 화가 고흐는 남국의 강렬한 햇살과 색체가 맴도는 남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화상인 동생의 도움으로 그림에 몰두한 고흐는 스스 로 선택한 고독한 여정 속에서 가난한 삶을 이어간다. 고흐는 당시 자신의 생각과

21) 욘 우베 스테이하우그, <에르바르드 뭉크> 컬쳐앤 아이리더스, p.17

삶을 낱낱이 동생 태오에게 편지로 썼는데, 그 글이 전해져 와 고흐의 작업에 대한 개략 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편지에서 고흐는 화가로서의 사명감, 삶에서의 투쟁과 승리, 절 망적인 고독, 타인과 사귀고 싶던 간절한 열망 등을 느낄 수 있다.22)

고흐 역시 고갱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 판화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효과에 매료되어 그러한 느낌을 자신의 그림 속에서도 표현될 수 있기를 바랐다. 반 고흐는 강렬한 색 체와 터치가 강한 붓놀림으로 왜곡된 공간 구성을 통해 자신의 격동하는 감정을 표출 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는 바로 자신의 주관적 정서의 표현으로도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붓놀림 하나하나를 색채를 통해 화면을 분할하기 위한 것으 로서가 아닌,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감정기복에 따라 글씨체의 변화를 목격할 수 있듯이, 그의 그림에서도 붓 터치에 따른 그때그때의 심리상태를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고흐의 붓놀림은 이와 같이 그의 격양된 정신 상태를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정서를 충분히 살릴 수 있을만한 관목들이나 밀밭, 올리브 나무, 사이프러스 나무 등을 소재로 작품 활동 을 전개한 것 또한 유사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흐는 동생 태오에게 남긴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대상을 묘사 할 때 정확한 형태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신 대상에 대해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질 수 있도록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고자 했다. 자신의 감정을 그림을 통해 전할 수 있다고 믿은 고흐는 사물의 형태를 과장하거나 변형 시키는 데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같은 시기 세잔이 도달했던 것과 비슷한 지점에 세잔과 전혀 다른 길을 통해 도달한 셈이 되었다. 세잔과 고흐 두 화가는 다 같이 자 연의 모방이라는 그림의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첫 발 을 내디딘 것이다. 23) 고흐는 격렬한 붓놀림과 원색 톤의 강렬한 색채의 사용으로 색 채를 보다 강화하고 형태의 특징을 강조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자기 내면의 해석을 표 현하고자 했다. 고갱의 그림이 감동적인 색채와 평면화 된 형태들로 이국적 환상으 로 보였다면, 고흐 그림은 그의 개인적 삶의 일대기처럼 열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고 흐에게 있어서 표현이란 조형적인 명확함을 추구하거나 지적인 합리성을 추구한 것이

22) 곰부리치, 백승길 이종숭 옮김,<서양미술사> .P544 23) 위의 책 p.54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의 소리를 표현하려했고, 이를 통해 원초적인 생명력을 느낄 수 있도록 추구한 점이 엿보인다. 고흐의 대담한 시각적 표현과 순수하면서도 고양된 리듬 속에 격렬한 붓 터치는 자아의 고뇌를 잘 표현해주는 듯하다. 고흐는 분명 시 각적인 현실 이면의 정신세계까지도 표현 할 수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방법으로서 색채가 가지는 새로운 조형성에 주목했고, 색채라는 구성요소가 가지는 표현력을 인지했던 것이다. 그는 색채를 통해 내면의 감정과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고, 색채의 고유 성격을 통해 정신적인 내용을 더욱더 은유적으로 표현 할 수 있 다고 여겼다. 따라서 고흐는 점점 더 대상에서 벗어나 화가의 주관적 느낌을 도드라지 게 그리게 됐는데 <밤의 카페>도판6) 가 그 한 예일 것이다. 1888년에 그려진 이 그림 은 원근법이 과장되어 나타난다. 천정에 매달린 전등의 노란 불빛은 비현실적인 분위 기를 나타내며, 흐릿하게 묘사된 카페 안의 사람들, 그리고 두꺼운 물감의 터치 등으 로 뭔가 불안정한 묘사와 비현실적인 왜곡, 현실과 달리 보이는 색채의 사용을 통한 고흐 자신의 정서적 동요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얼마 전 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 역시 두터운 붓놀림과 어둡고 밝은 색의 대비를 통한 밤하 늘이 요동치는 표현은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 지 관람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인상주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절대적 객관성을 초월하여 좀 더 명확 한 것을 추구하려 했던 화가는 고갱이었다. 가시적 세계를 넘어 회화적 독자성을 중요 시한 그는 캔버스를 하나의 장식적 표면으로 이해한 화가였다. 증권회사에서 주식중개 인으로 일하던 고갱은 뒤늦게 전업화가로 나서게 되는데, 1888년대 프랑스의 서구문 명을 떠나 부르타뉴 지방으로 이주해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이국적인 원시미술과 접 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고갱은 원주민 특유의 원시미술과 민속미술의 독자성을 발견 할 수 있었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게 된다. 사실상 고전주의에 밀착되어 있던 고갱은 대담한 평면의 색채면과 화화면을 가르는 강렬한 선, 그리고 명암과 원근법까지 무시한 그림을 통해 고전주의 기반을 공격했다. 물론 당시 놀랍도록 단순하게 처리한 형태의 표현은 일본 판화의 영향에서 비롯된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이 열망했던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의 표현으로 일본 판화로는 적합하지 못하 다는 걸 깨달았다. 고갱의 전기를 보면 고갱은 이후 농민의 삶을 연구하며 힘차고 때

묻지 않은 열정의 양식을 찾아 농촌에 머물며 작업도 해본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던 예술의 목표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그가 찾은 곳이 부르타뉴 지방이었다.

고갱은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미술을 원시미술과 조화시키려 애썼다. 그는 타이티 섬에 머물면서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 시키고,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사용함으로서 원주민의 원시성을 오히려 순수한 정신으로 받아들였다. 고갱은 자신의 캔버스를 물감이 발라진 평면으로 생각했다. 이로서 중요한 것은 고전주의서 강조되는 주제의 중요성 보다, 그림 자체 내에서 선과 색의 조합으로 이뤄내는 미적 효과를 통해 관념과 현실 을 아우를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정확한 드로잉을 통한 전달보다는 표현적 묘사를 우선시 했고, 사실적 색체의 사용보다는 보다 강렬하고 감동적인 색채를 선택함으로서 고갱은 이후 유럽 미술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이다. 고갱의 이러한 점에 직접적인 영향 을 받은 미술이 바로 표현주의 미술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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