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다움의 시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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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홍 선생은 안팎으로 단단하고 물샐틈없는, 모든 면에서 독보적인 노 인이다. 그런 그에게는 항상 혼자 다니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진짜로 독보적인 홍 선 176) 강손근,「늙음과 돈으로 보는 플라톤의 정의론」,『哲學論叢』제57권, 2009, 14~18면.

생다움의 진수는 사고방식에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노인들이 말하는 “과거는 모조리 아름답고 현재는 하나같이 못돼 먹었다는 한탄에 신물 낼 뿐”이다. 그는 독백의 형식 으로 세상사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거나, 레스토랑에 앉아 음식을 시켜놓고, 죽은 아내 에게만 속내를 드러낸다. 시도 때도 없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소곤소곤 진 술을 한다. 아내는 비실존적인 인물이지만 홍 선생은 마치 산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말 한다. 특히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자신도 심장병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 다는 ‘에토 준’이 감동적이라고 토로한다.

“여기가 어딘고 하니 에스뽜르라는 양식집이야. 당신과도 한 번 왔던가. 이탈리아 요 리 전문집인데 상호를 왜 희망이라는 프랑스어로 붙였는지 모르겠어. 그야 어쨌건 메 뉴가 다양해. (중략) 혼자 식사하는 모습이 쓸쓸해 뵌다구? 몸에 붙은 습관인데 어때.

나는 이게 편해. 참 최근에 읽은 일본의 문학평론가 에토 준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오 더군. ‘서양요리라는 것은 남자 혼자 먹고 있더라도 그런 대로 모양이 이상하지 않은 유일한 요리겠구나’ 생각했다는 게야. 똑 나를 두고 하는 소리 같앴어. 그이 역시 아내 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자신도 심장병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군. 감동이 커.(69~71면)

이에 김윤식177)은 “홍 선생의 총명성이랄까 기질적인 특성이 단연 최일남적이자 문 학적”이라고 본다. 에토 준 책178)을 읽지 않았더라면 홍 노인의 독백은 성립될 수 없 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싫든 좋든 작가 최일남의 맨얼굴과 대면할 수밖에 없는 지점 이라고 본다. ‘죽음 끼고 살기’에서의 대화와 독백을 문제 삼을 때 다섯 명의 노인 중 홍 선생의 경우 작가 최일남의 글쓰기의 근거(혼)에 관련되었는가를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홍 선생은 노인에게 강요하는 사회적 합의 내지 강요를 거부하는 데, “과거에 똬리를 튼 채 개개인의 타락까지 정당화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하기 때문 이다. 그렇기에 과거를 재탕하면서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한다. 번듯한 직함을 떨어내기는커녕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니는 위인들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냄새 나도록 낡은 그 망토를 벗는 날로 자기는 볼장 다 본다.”고 믿고 있다.

177) 김원일, 같은 책, 287면.

178) 특히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자결한 에토 준과 홍 노인 스스로를 완전 동일시하고 있었음 이 판명된다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과 직간접의 관계로 설명되고 있거니와 아내의 죽음을 지켜 보며 그가 쓴 글(책)이『처와 나』(1999)이다. 이 책 속에 바로 홍 노인이 인용한 서양요리 대 목이 들어있다.

음식도 노인은 노인답게 한식으로만 먹어야 하고, 몸가짐도 그런 선에서 벗어나지 말 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 내지 강요를 못 참겠어.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그것으로 오 늘의 잘못을 바로잡자는 미덕을 누가 마대. 안 그러고 일정 테두리에 정지시킨 과거에 똬리를 튼 채 개개인의 타락까지 정당화하는 것이 못마땅해. 나쁜놈 좋은놈을 분간하 지 않고 과거의 시제로 죄 녹이다니 말이 돼? 극복은 언제하고. 아무런들 과거를 볶아 먹거나 재탕하면서 살지는 않을래. 번듯한 직함을 시원섭섭하게 떨어내기는커녕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니는 위인들 있지? 사실은 불쌍한 사람들이야. 냄새 나도록 낡은 그 망 토를 벗는 날로 자기는 볼장 다 본다고 믿기 때문일 거야. 그냥 이렇게 있다는 확신이 나는 좋아. 사는 것이 어차피 별거더냐 생각하면 편하고, 거기서 꾸역꾸역 고개를 쳐드 는 용기를 확인하는 순간이 더 좋아. 매사를 뒤집어 보는 용기, 그게 진짜라고, 아까 그 사람도 말했어.”(72면)

대부분 퇴직은 “뿌리 깊은 단절을 가져온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자유롭게 자기 일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일이 자기 자신의 성취일 때,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사 실 일종의 죽음과도 같다. 사람들은 퇴직을 긴 휴가로 혹은 폐품 처리로 간주”179)할 수도 있다. 이때 어떤 말년의식을 지니느냐에 따라 죽음까지의 여정은 다른 색채를 띤 다. 크로노스 시간으로부터 카이로스 시간으로의 전환은 말년의식으로부터 파생된다.

죽음으로부터 거꾸로 시간을 역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절박한 현존이 된다. 최일남 소설에 드러나고 있는 특징은 “노년의 삶과 회한 그리고 추억을 매개로 삶의 의미를 되새김질할 뿐 아니라 건강성을 회복하는 노년”180)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건강성이란 노년에 따른 시의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람직한 과거를 갖기 위해 현재 안에 서 과거를 응시하는 일이다. ‘끝’에 대한 유한성을 인정하는 홍 선생은 현재를 물고 늘 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년에 “무슨 일을 일구면 얼마나 일구고 정리하면 얼마나

179)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책, 366면~367면.

일이란 예속이며 피곤인 동시에 관심의 원천이며 균형의 요인이고, 우리를 사회에 통합시켜주 는 요인이다. 이러한 두 가지 시각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이 두 시각을 어떻게 결합시키 느냐를 좌우하는 요인은 많다. 헤밍웨이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죽음은 자기 삶의 중심, 진실로 그를 현재의 그로 만들어주는 것을 상실하는 것이다. 퇴직이란 말은 모든 말 중에서 가 장 혐오스러운 단어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든, 혹은 운명적으로 강요당해서이든 퇴직한다는 것,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어주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라고 썼다. 헤밍웨이 자살에는 다른 이류들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신이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없다고 느낀 순간 죽음을 선택했다. 실제로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 일이 일종의 제약이었을 경우, 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해방이 되기도 한다.

180) 전흥남(2011), 같은 논문, 168면.

정리할까” 싶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으로 남은 앞날을 꾸려갈 작정이냐고 묻겠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무슨 일을 일구면 얼마나 일구고 정리하면 얼마나 정리하겠소. 파이팅을 외치기엔 힘이 부 치고 새로 시작하기엔 어지빠른 시간 아닌가. 하지만 용을 써야지. 죽이 되든 밥이 되 든 현재를 물고 늘어져야지. 당신 있을 때부터 손보아온『서양요리 이입사』가 거진 끝나가. 그 방면의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당돌하기 짝이 없다고 손가락질받겠지만, 세 상은 나 같은 돌출이 많아야 하는 것 아닌가. 성원과 박수를 보내들라고.

(중략)

그냥 이렇게 있다는 확신이 나는 좋아. 사는 것이 어차피 별거더냐 생각하면 편하고, 거기서 꾸역꾸역 고개를 쳐드는 용기를 확인하는 순간이 더 좋아. 매사를 뒤집어 보는 용기, 그게 진짜라고, 아까 그 사람도 말했어.”(72면)

현대인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태어나는 과정과 죽어가는 과정은 너무도 허술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생명의 탄생은 세상에서의 삶이 시작됨을 뜻하고, 죽음은 삶의 종결을 의미한다.”181) 특히 ‘끝’으로서의 죽음을 잘 정리할 수 없다면, 그 내용물 인 삶마저도 잘 살았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죽음의 질이 낮은 사회에서 성숙한 말년의식을 보여줌으로써,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 한다. 노년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노년의 시의성이 전제 될 수밖에 없다. 말년의식은 죽음으로부터 역산한 과정이 얼마나 다른 차원으로 승화 되느냐 하는 것이다. 노년은 잉여의 시기 또는 소극적인 타자의 시간이 아니라는 말년 의식으로부터 죽음 인식이 시작된다.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어가는 과정과 그 마지막 모습은 같지 않다.

「힘」에서 이 소장은 여전히 청년이라고 주장하는 노인이다. 일흔셋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체력을 과시하며 동민체육대회의 턱걸이 시합에 나간다. 그러다 결국 갑작스럽게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청장년을 제치고 50회의 엄청난 턱걸이를 하다 쓰 러지고 만다. 이 소장은 칠십 노인이라고 얕보았다간 큰 코 다칠 정도로 선망의 육체 를 지녔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건강론 설교가 때때로 거북하리만큼, 실제 육체는 견고 하고 매끈하다. 특히 몸매는 옷을 벗었을 때, 그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런 이 소장은 김 선생과 단짝이다. 김 선생의 얼굴은 이 소장과는 달리 완연한 노색을 띤다.

181) 오진탁, 같은 논문, 446면.

이 소장은 자아통합성을 이루고자 하는 노인이 아니라 몸이라는 특성에 매혹된 외적인 젊음만을 추구하는 노인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자기 이 미지마저 상실하여 더 이상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노인들은 자연히 바깥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찾고자 한다. 노인들의 헛된 명예욕은 바로 이러한 심리”182)에서 생기는 것 이다. 김 선생에게는 이 소장의 이런 육체가 “때때로 탐나고 때때로 싫다.” 작가는 김 선생과 이 소장에게 일어난 사건의 대비를 통해 노년의 시의성과 비시의성을 드러낸 다.

약수터에서 바벨을 들어올릴 때 본 두 다리의 탱탱한 근육질이라니……. 김 선생에겐 이 소장의 그런 육질이 때때로 탐나고 때때로 싫다.(80면)

이 소장은 출전 종목이 철봉이었다. 고난도 기술을 요구하는 종목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이 턱걸이 하는가 등수를 매길 따름이었다. 이 소장은 대상을 탄 적도 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방면의 기록보유자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턱걸이는 마흔 번을 넘어섰다. 관중들의 눈빛은 저마다 빛나고 있었고, 일제히 수를 헤아리는 함성이 합창 처럼 울려 퍼졌다. 이때 이 소장의 몸통은 어느 덧 축축 처지고 안색도 흉하게 우그러 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층 왁자하게 외쳤다. 오직 김 선생만 이 소장의 낯빛이 안 쓰러워 미리 만세 부르듯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말라는 중지 신호이 자 안도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소장은 계속 철봉에 팔을 걸고 버둥거렸다.

기어코 쉰을 채울 셈이었다. 드디어 절정을 기어오른 이 소장을 향해 사람들은 야단이 었다. 하지만 영광은 찰나였다. 승리는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 소장이 가까스로 턱 을 철봉에 괴인 순간, 이내 미끄러져 모래 바닥에 널브러졌기 때문이다.

“마흔아홉!”

할 수 없이 수효를 세는 사람이 더 많다.

“쉬인!”

드디어 절정을 기어오른 이 소장을 향해 와 와 야단이다. 하지만 영광은 찰나였다. 그 의 승리는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 소장이 가까스로 턱을 철봉에 괴었는가 하자 이 내 스르르 미끄러져 모래 바닥에 덜퍽 널브러졌기 때문이다.

“앗!”

182)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책, 770~771면.

In document 저작자표시 (Page 95-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