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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조작과 죄의식

「나는 누구인가」에서 한 여사는 “천당이나 극락을 믿지 않는다. 숨 끊어지면 한 생명체의 영혼은 세상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하직하고, 육체는 썩어 흙이 되고 마 는 게 불변의 진리”119)라고 믿고 있다.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고 권해도 소용없다. 그녀 의 생사관은 몇십 년 전부터 흔들림 없다. 한 여사는 오늘 또 ‘나’동에 “송장 다 된 늙 은이 하나가 구급차에 실려 나가려니 짐작하며 치를 떤다. ‘가’동 노인들이 제 힘으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게 되면”120) 구청 보건복지과가 운영을 맡은 ‘나’동으로 옮겨가 야 하고, ‘나’동에서 자원봉사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다 끝내는 자기가 누구인 지 모르는 상태에서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한 여사는 ‘나’동 쪽엔 눈길조차 주기 싫다.

침대에 웅크리고 앉았거나 누워 있을 ‘나’동 노인들은 숨을 쉬니 살아 있긴 한데, 자신 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고 수족을 놀려 기동하는 인간들이 아니다. 어느 날 앰뷸런 스에 실려 홀연히 ‘나’동을 떠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지상에서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이 다. ‘가’동 원생들이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며 얼마나 죽음의 공포로 슬퍼하는지, 그 속내를 알 리 없다. ‘나’동이란 말을 듣기만 해도 무섭다.

여성 화자인 한 여사는 일생동안 서너 개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이름이 바뀔 때마

117) 알라이다 아스만, 같은 책, 134~135면.

118) 정진성, 같은 책, 47~75면.

119) 김원일,『슬픈 시간의 기억』, 문학과 지성사, 2009, 22면.

120) , 같은 책, 33면.

다 이전과는 다른 삶이 펼쳐졌다. 방물장수를 따라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날 때의 본 명은 한점아가였지만 제과점의 종업원이 된 후에는 게이꼬로 개명을 한다. 이어 정신 대에 끌려갔다가 한국전쟁 후에는 한안나로 불리며 양공주로 전락한다. 아들 토미의 아버지인 윌슨 대위가 떠나자, 토미를 미국에 입양하기 위해 친자권리를 포기하고 부 산 국제시장에서 미제 물건을 판다. 이후 제과점을 운영하며 혼자 살다 양로원에 몸을 의탁한 상태이다. 한 여사와 같이 여성 화자를 내세운 고백적 기법은 자전적 글쓰기와 도 연관된다. 이것은 “완결된 서사의 원리를 뒤집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자아의 내면을 드러내는 글쓰기의 방식으로, 은폐된 억압을 드러내는 효과적이다. 때론 기억은 현실의 실제적 증거와는 관련 없는 환영이나 망상이 되기도 한다. 꿈과 현실, 사실과 거짓, 선 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백적 세계의 탐구를 통해 작가는 객관적 기록으로 포착하 기 힘든 한 개인의 실존적 내면”121)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년아, 넌 한경자도, 게이코도, 한안나도 아니야. 넌 한점아가야. 이름을 그렇게 바꿔 갈 동안 네 인생길은 깊이깊이 수렁으로 빠져들었어.(54면)

한 여사는 자신의 얼굴을 본다. 스스로가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교양 있는 ‘귀부인’

이라고 여긴다. 귀족 신분으로 인정받기 위한 그녀의 욕망은 외모 치장하기로 드러난 다. 팔순의 나이에도 짙은 화장을 하려는 이유는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십대, 오십대는 싱싱하고 아름다웠다고 회상을 한다. 어떤 땐 화장 을 끝내고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아이들이 “할머닌 만화영화에 나 오는 요술할멈 같아요.”라고 외쳐 놀림감이 되기도 하지만, 화장하기 전 얼굴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속임을 당하고자 하는 그 욕망에 따라 ‘나’는 ‘나’

의 말을 들을수록 ‘나’ 자신과는 다른 타인이 된다. 거울 앞에서 ‘나’는 ‘현실의 나’와

‘나라고 믿고 싶은 나’로 분리된다. ‘나라고 믿고 싶은 나’는 화장으로 주름의 골을 메 우고 거울 앞에 선 ‘나’이다.”122) 거울을 향한 ‘나’의 시선은 이미 타인의 시선을 내재하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십대, 아니 오십대까지의 모습은 싱싱하고 아름다웠어. 모두 그렇게 말했으니깐. 종 씨였던 생물학자 한교수, 클라리넷을 잘 불던 동그란 무테안경 낀 음악 선생, 사십에

121) 백지연, 같은 논문, 77면.

122) 우은진, 같은 논문, 300면.

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성씨도 잊어버린 산부인과 전문의, 전국 곳곳에 별장을 둔 땅부 자 주먹코, 그들 면면이 빠른 화면으로 스쳐간다. 서로 몸을 섞으며 한때를 즐긴 얼굴 들이지만 그들은 즐길 때 그때뿐이었고, 마음에 감미로운 추억으로 남아 머물지는 않 았다. 지금은 어디에 살아 있는지 벌써 죽어버렸는지 소식조차 모른다.(25면)

어쨌든 할머닌 나이도 많은데 화장을 너무 많이 하셨잖아요? 화장을 했기로서니 내 화장이 어때서 그래? 처녀 적엔 화장을 안했어도 얼마나 예뻤는데, 할머닌 만화영화에 나오는 요술할멈 같아요. 난 귀부인일 따름이지 요술 같은 건 부릴 줄 몰라. 그러자 아 이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외친다. 만화영화에서 할머니 닮은 마귀할멈을 봤어요. 눈이 찢어지고 턱이 뾰족했어요. (중략) 놀림감이 된다고 아이들을 혼내줄 수도, 그럴 힘도 없다.(42면)

한 여사의 화장 과정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대로 만들어가려는 일종의 ‘의식’이 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얼굴을 단장하고 시를 읽고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스 스로가 만든 가면이고 실제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정신대, 양공 주, 혼혈아 출산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아픔을 지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그 상흔들을 부정해버린다. 실제 한 여사에게 정신대의 기억은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것 이었다. 노 회장에게 말했던 미 군사고문관 남편과 유학 간 아들 이야기는 외부로부터 인정받고자 만들어낸 귀부인다운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의 독백은 모두 가짜 기억이었던 셈이다. 한 여사는 이미지가 실제라고 믿으며 그 믿음대로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아비 없는 외동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고이 키웠던 시절이며, 초등학교 적부터 전체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아들이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나자, 그리움에 애태웠던 마음을 헤아려보기도 했다. 아들이 끝내 미국에 주저앉아 그곳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는 편지를 받자, 키울 때 자식이지 성년에 이르면 어미는 안중에 없고 제 갈 길 찾아 떠난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끓던 물에 얼음덩이가 들어차듯, 내 인생은 외로움을 타기 시작했지.(43면)

한 여사의 고백은 자신이 누구라고 인식하는 ‘이미지’에 갇힌 서술이다. 그러한 모 든 행동은 과거의 기억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왜곡된 기억이 실제 기억이라고 강하게 믿고 의식적으로 거짓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가장한 고백을 통하여 사건

을 진실로 만들고자 한다. “기억을 자신의 임의대로 왜곡하여 재구성하고, 그 재구성된 기억을 편향된 상태로 유지하는 행동을 보인다. 이러한 기억의 편향은 타인에게 자신 의 과거를 속이는 역할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그 편향된 기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 성”123)해간다. 그런데 한 여사가 잊고자 했던 기억은 치매 상태가 되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지금까지 애써 억압하고 있었던 일제강점기 군위안부의 기억이 괴롭게 떠오 른다. 게이코와 한안나로 불리던 불행의 시간들은 상흔으로 남아 그녀로 하여금 “귀부 인으로 가장(假裝)한 발설만을 하게 했다. 가장한 발설을 통해 은폐하고자 했던 진실은 무의식 속에서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발설로 무참히도 까발려진다.”124) 귀부인으로 가 장했지만 그 참혹했던 순간들은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고 만다. 그것은 너무도 참담했 던 과거였다. 그런 그녀는 “편안히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게 행복”이라고 죽음을 인식하 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원통해서, 그 원한 때문에 도저히 눈감 을 수 없다고도 인식한다.

편안히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게 행복이지. 송진처럼 질기게 살아온 인생 끝장에 아무 고통 없이 죽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52면)

전 이 땅에서 더 살 테야요. 살아온 세월이 너무 원통해서, 그 원한 때문에 이쯤에선 도저히 눈감을 수 없어요. 향기가 다시 내 몸속으로 스며들잖아요. 이 이승의 향기가 얼마나 좋아요.(52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에 가서 교양 있고 돈 많은 젠틀맨을 만나 귀부인으로 영 영세세 뾰족탑 있는 궁궐에서 행복하게 살 거예요.(58면)

폭력적인 사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에 그 사건의 폭력성의 핵심이 존재한다. 그와 같은 사건에 대해 어떻게 하면 그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125) 그녀는 도래한 폭력의 기억에 대해 “나만 살아남았어. 남양서, 그 찜 통 속에서 난 살아, 악몽 같은 기억을 끊지 못한 채 살아서 돌아왔”다고 회상한다. 회 귀하는 압도적인 기억의 힘에 철저하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당했던 폭력의 깊

123) 김은정,「질병의 의미를 통한 노년소설 연구」,『국제어문』제77집, 2018, 333면.

124) 마혜정,「노년의 욕망: 발설과 은폐, 김원일의 슬픈 시간의 기억을 중심으로」,『現代文學理 論硏究』제49권, 2012, 114면.

125) 오카 마리,『기억·서사』, 김병구 역, 소명출판, 2004, 56면.

이를 타인들이 짐작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치매에 걸려버림으로써, 그 상처를 공유할 기회마저 잃게 되었다. 억압되었던 기억이 일시적인 폭력의 형태로 도래하자 사건 속에 갇힌 형태가 되고 만다. 폭력에 의미를 새겨 넣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폭 력의 이중성인 것이다. “사건의 기억이 타자에게 공유되지 않고 사건의 기억과 그 기 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가 세계의 외부에 방치되어 온 것 자체가, 말하자면 그들 사건이 타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위치지어지고 이야기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 사건을 체험하고 그 사건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건의 폭력을 지금도 계속하 여 겪고 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자들”126)이 있다. 무질서하게 혼돈 된 의식은 작품 전체에 나타나며 죽음 직전까지 계속된다. 사건의 폭력 속에서 살아 온 한 여사에게 과거는 다시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억이 현재적 삶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다. 한 여사는 과거, 현재라는 시간성의 성찰로부 터 자아를 찾고자 하지만 그것들은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지 않는다.

난 안 갈 테야. 난 다시, 그런 곳에, 안 살 테야. 제발, 제, 발 날 그런 곳에, 보내지 마. 한여사가 울부짖는다. 그네의 눈에 눈물이 고랑을 이룬다.(64면)

한여사가 가느다랗게 신음을 흘린다. 나, 난 야, 양갈보가, 아니에요. 귀, 귀부인이라니 깐.(64면)

슬퍼하지 마. 인생은 말이다, 다 그렇게 늘, 늙고, 짐승도 사람도 늙어, 결국에는 죽잖 니. 다들 그렇게 죽고 슬픔이 얼마나 끈질기던지 그걸 끊지 못하고, 나, 나만 살아남았 어. 남양서, 그 찜통 속에서 난 살아, 악몽 같은 기억을 끊지 못한 채 살아서 돌아왔 지.(73면)

기억이 이와 같이 갑자기 도래하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무력하며 수동적이게 된다.

기억이란 때때로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신체에 습격해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건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기억의 회귀란 근원적으로 폭력성을 숨기고 있다.”127) 한 여사의 기억은 무질서하게 혼재되어 더듬더듬 말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고백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와 진짜 내 면의 자아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기억은 정리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언어로 서술된다.

126) 오카 마리, 같은 책, 147~149면.

127) , 같은 책, 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