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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선택과 자기합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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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시간의 기억』은 복잡다단한 개인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노인들의 은폐 132) 앙투안 베르고트,『죄의식과 욕망』, 김성민 역, 학지사, 2009, 94~96면.

133) 정진성, 같은 책, 72면.

근대 심리학 이론들은 정체성을 주로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 채 마치 고정된 실체처럼 취급해 왔다. 그러나 정체성이란 ‘타자’에 대한 체험과 그로 인한 능동적인 변화 과정 없이는 형성될 수 없다. 또한 정체성이 객관화된 기억의 산물이라기보다 권력관계가 반영된 기억과 망각의 특 수한 결합의 산물에 불과하다.

와 자기합리화의 욕망과 충동 그리고 알리바이적 책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에 그 문학 적 효과가 더 의미 있어 보인다. 소설은 노인을 인격완성이나 통합적 존재로 파악하는 우리들의 인식이 사실은 허구적 이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이 소설은 삶의 막바지 혹은 소멸의 고비에 도달한 인간의 다양한 ‘비극’을 예리하게 서술한 노인 소설 의 훌륭한 성과임이 분명하다.”134)「나는 나를 안다」에서 초정댁은 남편과 일찍 사별 하고 혼자 자녀 셋을 키운 후 기로원에 입소한다. 끝없는 자기 자랑의 욕망을 지닌 그 녀가 말하는 것들은 실로 다양하다. 한 점 부끄럼 없다는 듯, 당당하게 발화한다. 삶에 무척 집착하는 인물인 그녀는 일백 살 생일까지 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쪼콜레또와 아스필링을 복용한다. 그러면서 “십 년을 더 버텨내면 백이십 살까지도 살 수 있다.”고 도 생각한다. 인간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는 자신만큼은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착각한다. 죽음이란 늘 삶 안에 존재하며, 삶 전체에 지대한 영향 을 주고 있지만 그녀는 이것을 외면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천당에 계신 예수님께 죄 많은 여종을 구원해달라며 회개했으니 자동으로 천당에 가게 되겠지.”라고도 인식한다.

아니야, 난 백 살까지는 살아야 해. 십 년을 더 버텨내면 백이십 살까지도 살 수 있다 는데, 기껏 일흔아홉 살에 저승길로 떠나다니.(148면)

십 년만 그럭저럭 지금 상태로 버텨낸다면 새로운 약이 속속 나와 엔간한 병은 다 고 쳐주고 백 살까지는 너끈히 살게 된다니 앞으로 좋은 세월만 남았어요. 운이 좋다면 백이십 살까지 살 수도 있게 된대요. 오래 살다 보니 정말 꿈같은 세상이 오잖아요.(93 면)

그러던 어느 날, 초정댁은 노쇠현상으로부터 죽음이라는 운명을 자각하게 된다. 신 체장애, 대소변보기, 언어 장애와 같은 노화현상이 그녀를 두렵게 만든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 눕혀져 ‘나’동으로 실려 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러다 자는 잠에 송장이 되는 게 아닐까 겁도 난다. 죽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다만 불안이 생겨나지 않도록 억누를 뿐이다.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일상적인 삶 으로 도피하지만, 결국 불안이 대두되지 못하게 억누를 뿐이다. 불안이란 죽음 앞에서 드는 기분이다. 이것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부정’이라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부정의 단계에서는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실제로 죽음이

134) 양진오(2001), 같은 논문, 234면.

닥치기 훨씬 이전에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낫다. 좀 더 건강하 고 좀 더 기력이 있는 사람이 죽음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 쳤을 때보다는 ‘저만치 멀리’ 있을 때 죽음이 덜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135)이다. 이처 럼 무의식의 세계에서 죽음을 인정하는 것은 공포나 불안에 대한 체감을 더디게 만들 수 있다.

내가 왜 이래. 내가 말을 잘 하지 못하다니. 그렇게 잘 놀리던 멀쩡한 내 혀가 왜 이 지경이 됐지? 초정댁은 눈앞이 캄캄하다. 마니, 내 마이 저어 이사하오? 초정댁이 냉장 고 문을 열다 돌아보며 묻는다. 이상하다말다. 아기 말 배우듯, 말더듬이 같다니깐. 내 가 어디 말 같잖은 말 하는 것 봤는가. 당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차관마 님 말에 초정댁이 틀니로 혀를 잘근잘근 씹어본다. 분명 혀가 굳었고 잘 놀지 않는 다.(146면)

어지러운 취기가 몰려온다. 네모난 천장이 각을 세워 빙그르르 맴을 돈다. 이러다 자 는 잠에 송장이 되는 게 아닐까 겁이 난다. 그렇게 죽을 수는 없어. 죽더라도 유언장은 작성해놓고 죽어야지. 아니야, 난 백 살까지는 살아야 해. 십 년을 더 버텨내면 백이십 살까지도 살 수 있다는데, 기껏 일흔아홉살에 저승길로 떠나다니. 천당에 계신 예수님 께 죄 많은 여종을 구원해달라며 회개했으니 나는 자동으로 천당에 가게 되겠지. (중 략) 자고 나면 혀가 어제 낮처럼 멀쩡해질 거야. 그래, 잠이나 자고 봐야지. 어서 자야 해. 그네가 속말을 고시랑거린다. 잠시 뒤 중얼거림조차 취기에 말려들고 혼곤한 잠에 빠진다.(148면)

잠결에 똥까지 싸는 늙은이가 되어버리다니. 초정댁은 절망감에 정신이 아득하다. 침 대에 눕혀져 나동으로 실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난 안 가. 나동으로 갈 수 없 어. 난 아직 노망들지 않았다고. 난 정신이 말짱해. 몸 닦고 빨래를 해야지. 그네가 입 속말로 부르짖는다. 온몸에 진땀이 솟는다.(156면)

그런 초정댁은 서방이 눈감을 때 자기를 쏘아보던 마지막 눈길을 지금도 잊지 못한 다. ‘내 비록 방구석에 들어앉아 사는 병든 맹추지만 임자가 한 짓은 다 알아. 차마 말 을 못하고 죽어도 그쯤은 짐작한다고.’라고 입은 다물었지만 서방의 눈빛은 분명 그런

135)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죽음과 죽어감』, 이진 역, 2018, 87~92면.

부정은 예기치 못했던 충격적인 소식에 대한 완충 장치 역할을 하고,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벌 어주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보다 덜 과격한 방어 기제를 동원한다는 점도 있다.

말을 하고 있었다. 평소 멍청한 눈길이 그때만은 가슴팍에 마치 비수를 꽂는 듯했다.

초정댁은 전쟁 전 토지개혁 때 많이 털렸다지만 서방 대신 나서서 전답을 따로 챙겨둘 만큼 부지런했으며, 그 땅으로 세 자식을 남부럽잖게 키웠다. 죽는 날까지 인감도장 뿔 끈 쥐고 있겠다고 단언했던 그녀는 논 이천 평이 진짜 금싸라기 땅이라 값이 천정부지 로 올랐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런 그녀는 남편에게서 좋은 유전자를 가진 아들을 낳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학식 많은 양반인 우씨를 유혹하여 아들 정필을 얻는다. 또한 욕정 의 대상으로는 방앗간 집 머슴이었던 이씨를 만난다. 그러나 이씨가 우씨와의 만남을 질투하게 되자 이씨를 강물에 빠트려 죽게 하고, 아들 정필을 낳고나서는 우씨마저 경 찰에 고발하여 죽게 만든 과거가 있다.

장터댁은 손에 쥔 주전자로 사내의 가슴팍을 힘껏 밀었다. 아이쿠, 하는 비명이 터지 고 이씨 두 팔이 허공에서 버둥거려 몸이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네 는 그의 옆구리를 주전자째 다시 밀어 내쳤다. 이씨의 자태가 순간적으로 주전자와 함 께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그네는 다리 끝에 털버덕 주저앉아 가쁜 어깨숨을 쉬며 이 씨가 사라진 굽이치는 흙탕물을 내려다보았다. 이씨의 손끝과 주전자가 소용돌이치는 흙탕물 위에 잠시 희미하게 나타났다 금방 사라지곤, 사내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강물 에 멀리 실려가버려 흔적조차 없었다. (중략) 한사코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지며 부산으 로 내빼자고 악을 쓰던 악귀 같은 사내를 영원히 떨쳐낸 홀가분함이었다. 이씨는 영원 히 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쾌재를 불렀다.(151~152면)

장터댁은 다시 버들내 살래다리를 찾았다. 그네는 다리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고 쫑알 거렸다. 내가 살인을 했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난 아무 죄가 없어. 서방 있고 자식 둔 아녀자를 협박한 그 자식이 죽일놈이지. 애시당초부터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내가 왜 서방과 자식 버리고 백수건달을 따라 낯선 대처로 나서. 그놈 따라 내가 만약 대처로 도망질 갔다면 자식새끼 둘과 자궁 속에 터를 잡은 자식 또한 어떻게 되었겠어.136) (152~153면)

“어떤 역사든 은폐와 합리화의 속성을 띤다. 그리고 역사를 은폐하고 합리화하는 인 간의 책략은 생각처럼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그 책략은 죽어가는 그 순간에 반성되기 보다는 오히려 굳건하게 고정되기도 한다.”137) 초정댁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감추고자

136) 김원일, 같은 책, 152~153면.

137) 양진오(2001), 같은 논문, 234면.

한 추악한 사건을 생생한 현재적 과거로 기억하게 된다. 물욕과 육체적 욕망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추구했던 그녀는 살인을 저지른 40여 년 전 기억을 지니고 살아왔다.

아들 박정필이 ‘박씨 집안’이라는 것을 확언하는 그녀는 시아버지의 “종부로서 책임을 다하라”는 당부를 합리화로 삼는다. 시아버지에게 자신의 죄악을 떠넘기고자 한다. 그 말씀을 좇아 이날 이때까지 “박씨 집안 종부로서의 사명을 다 했”고, “맡겨진 일을 완 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바쳤다.”는 것이다.

이 집안의 재산과 후대는 며늘아기 네 손 하나에 달렸으니 종부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한시도 잊지 말 것이며…… 시아버지의 그 당부 말이 끝내 유언이 되고 말았다. 초정 댁이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심장이 바늘로 찌르듯 아파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눈앞은 깜깜한 어둠만 들이찼는데, 무수한 별이 명멸한다. 정신이 몽롱하다. 사람이 죽 을 때 이런 과정을 거쳐 숨이 끊어지겠거니 싶다. (중략) 아버님, 저는 아버님의 그 말 씀을 좇아 이날 이때까지 박씨 집안 종부로서의 사명을 다 했습니다. 아버님이 집안을 일으키셨듯, 저는 시아버님 말씀대로 종부로서 제게 맡겨진 일을 완수하겠다는 일념으 로 평생을 바쳤습니다.(154면)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의미 부여는 “그 삶의 존재와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는 중요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한 개인에게 의미의 완성은 그 자신의 인생 도정에서 그 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일 수도, 그의 행위 혹은 업적일 수도 있다. 만일 죽어가는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 데도 자 신이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진정 외로운 것”138)이다. 한 개인은 다른 개인들과 더불어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고, 자신의 삶에 다른 사람들 역시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초정댁은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고 여긴다. 자신의 한 몸 보신하자면 살인인들 대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런 그녀는 늘 세상과 절묘하게 타협하고 살아왔다. 특히 전쟁이 그렇다는 입장에 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유한성 앞에서 일회적인 삶을 자각 하지만 초정댁은 끝내 비본래적인 삶에 대한 욕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러다, “임자 가 죽고 사는 건 내 말 몇 마디에 달렸어!”라는 이씨의 고함 소리에 놀라 눈 뜬 새벽, 혀가 돌덩이처럼 굳는다.

138) 노르베르트 엘이아스, 같은 책, 62~71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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