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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일상성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71-80)

「사진」에서 초점화자는 가능한 한 관혼상제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관혼 보다 상제 쪽에 더 끌리는 편이다. 무엇보다도 결혼식은 청첩장을 받고 가는데 비해, 초상집은 그것 없이도 간다. 상대적으로 상갓집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느 때 는 결혼식장이 의외로 초라한 반면 병원 영안실은 장 속처럼 붐벼, 즐비한 조화행렬에 매달린 이름표나 훑다가 발길을 돌릴 때도 있다. 그가 죽음 쪽에 무게를 두는 건 확실 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문에 촘촘히 박힌 부음 기사를 보다 가까운 곳이면 그날 밤 안으로 지체 없이 찾아 나선다. 그런 그가 아침마다 신문 부음란을 공들여 읽다보 면 느끼는 것은 이승을 뜬 사람들의 익명성이다. 돌아가신 이가 아무리 무명의 보통인 이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암울하고 불투명 한 것이다. 노년에 이르거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선고받게 되면, “그러한 죽음풍토가 얼 마나 황량한 것인지를 스스로 느끼게 된다. 자신의 죽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고 그래 서 결국 살아온 자신의 삶이 무시되고 무화(無化)되어 버린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낀 다.”160) 그는 친지들의 빈소를 찾을 때마다 주인공에 관한 최소한의 이야기나마 챙겨 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최근 입회한 죽음들이 촉구한 일이다. 기왕에 만난 많은 죽음을 사무적으로 처리한 것이 뒤늦게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다. 그러다 친구 아버지 의 장례식장에서 장례절차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화장하시겠대.”

상주인 친구는 남 말 둘러대듯 성의 없이 대답했다.(112~113)

“자네 어머님이 살아 계셨대도 아버님의 화장을 허락하셨을까.”

“그야 모르지. 하지만 화장 자체를 말리시지는 못했을 걸. 납골당에 안치하는 선에서

160) 정현채 외, 같은 책, 50면.

타협했기 쉽다구. 그것도 사후에 몰래.”

“하면? 유골을 납골당에 모시지도 않는다 이 말인가.”

그는 친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타고 남은 재를 강에 흘려보내라고까지 하셨어.”

“저런. 대단하시다. 화장할 때 하더라도 봉분은 봉분대로 만드는 게 예사 아닌가. 아 주 흔적마저 없애다니.”

“누가 아니래…… 화장에 관한 연구까지 꽤 하셨더라구.”

“화장에 대한 연구라.”

“내가 좀 과장했나 본데, 어디서 들으셨는지 아는 게 많더라는 뜻이야. 이를테면 말이 네. 유체(流體) 화장은 천오백 도에서 태우는 것이 가장 알맞다든가, 장기간 병을 앓은 사람은 등뼈와 허리뼈로 곧 식별이 가능하다는 식이었어. 그 부분이 무르기 때문이래 나 어쨌대나. 금니는 팔백 도에서 녹아내리니까 사전에 빼야 한다는 둥, 하여간 상당하 시더라구.”(114~115면)

친구 아버지는 사후에 화장을 하고 “타고 남은 재는 강에 흘려보내라”는 구체적인 처리까지를 당부했다. 하지만 집안 대소가들의 의견이 딱 둘로 갈라지는 판에 “화장을 하되 묘는 묘대로 쓰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친구의 말에 실망스러워 몇 마디 하려다 곧 마음을 거두고 만다. 친구의 고뇌를 헤아리자니 장례문화에 대한 조언 같은 건 언 감생심이었다. ‘반반의 결정’을 내리기까지 중간에서 꽤나 부대꼈을 친구의 고뇌를 헤 아리자면 더 그러했다. 그는 요즘 노인치고 살아생전 그만한 결단을 내리기 드물다는 생각에 끌려 귀동냥했던 대화에서, 결국 산 자들의 엉거주춤한 체면치레를 기어코 보 고야 말았다. 산 사람의 죽은 사람에 대한 회고는 더구나 혈육지간이 아닐 경우 엉성 하고 무책임한 법이다.

“일단 화장을 하되 묘는 묘대로 쓰기로…… 어떡하겠어. 남의 눈도 눈이지만 집안 대 소가들의 의견이 딱 둘로 갈라지는 판이니. 잘하는 짓인지 못하는 짓인지, 내가 큰 불 효를 저지르는 것이나 아닌지. 힘들어.” (중략)

산 자들의 엉거주춤한 체면치레를 기어코 보았다. 남의 마지막을 자기의 종신 처리와 연관시켜 어떤 요량을 굳히려던 그는 자신의 속단을 도리없이 거두고 괜히 장례절차만 복잡하겠구나 여겼다. 하지만 그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반반의 결정’을 내 리기 까지 중간에서 꽤나 부대꼈을 친구의 고뇌를 헤아리면 더욱 그랬다.(115~116면)

친구는 “장례는 결국 산 사람들의 분탕질”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화장 수장에 따른 구설수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도, 아버님 살아생전 “사후의 문제는 남 은 가족들의 일로 놔두셔야 옳다.”고 막말까지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 은 사람이라도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게 죽음이다. 그는 친구 아버님 역시 죽음이 무서 웠을 거라는 추론을 해본다. 돌아가시는 분은 그 일만으로도 힘겹고 벅차다. 무서운 감 정의 또 다른 분식이 화장을 요청했을 거라고 보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대다수가 표 현하는 유일한 관심 역시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뿐이다. “마음의 평화를 느끼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진 행되지 않는다면, 권력만 성공만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의 허세는 공허”161)해지는 것이 다. 어떤 자세로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대하느냐는 남은 사람들에게는 과제이 다.

산 사람의 죽은 사람 회고는 더구나 혈육지간이 아닐 경우 엉성하고 무책임한 법이 다. 하지만 도리없지 않은가.

“장례라는 것은 결국 산 사람들의 분탕질이라고 보네.”

“화장 때문에 집안 간에 트러블이 있었다는 겐가.”

“맞아. 잘 짚었는데 자질구레한 입씨름이야 자네의 상상에 맡기기로 하고…… 생전의 저 양반 당부에 왜 반대를 안했겠나. 했지. 내가 장자 아닌가. 화장 수장에 따른 구설 수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도 아버님 사후의 문제는 남은 가족들의 일 로 놔두셔야 옳다고 막말까지 했다구.”

“한데도 끄떡을 않으셨다?”

“바로 그 대목이 미묘해.”

“……”

“사실이 그렇잖은가. 돌아가시는 양반은 그 일만으로도 힘겹고 벅찬 거야”(119~120면)

“아버님 역시 무서웠던 거야.”

“뭐가?”

“죽음이.”

“그런 분이 어째서 이승의 흔한 법도를 훌쩍 뛰어넘었느냐, 이런 의문인가?”

“음.”

“무서운 감정의 또 다른 분식이야.”

161) 오진탁, 같은 논문, 445~446면.

“갈수록 헷갈리는군.”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도, 아무리 이 세상 인간사에 도통한 현인도, 이거다 하고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게 죽음 아닌가. 관념적으로야 무슨 말을 못 해. 너무 넘쳐 걱정일 지경이지. 그러나 정작 죽음과 맞닥뜨리면 까짓 지식이 무슨 소용인가. 눈곱만 큼도 도움이 안 돼. 자신이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나락처럼 캄캄한 것이 죽음이라고 했을 때, 천만년 전이나 오늘이나 저마다 최초이자 최후의 실험자로 떠밀릴밖에 없다 고 했을 때, 어느 누가 본능적인 공포에 휘말리지 않겠나. 과정이 아니라 죽음 자체에 대해서.”(121면)

직접 당하는 죽음은 “나락처럼 캄캄한 것”으로, 죽음 자체가 주는 본능적인 공포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관념적으로야 무슨 말을 못할까만 그것은 막상 죽음에 임박한 자 에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천만년 전이나 오늘이나 저마다 최초이자 최후의 실험자로 떠밀릴밖에” 없다. 그는 못 이기는 척하고 아버님 의견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수 있지 않았느냐고 친구에게 반문해본다. 사별할 순간에 이른 노인으로선 무엇을 남 기고 무엇을 안 남길까를 심각하게 궁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우 역설적인 죽음희구의 문화를 우리는 살고 있다. 죽음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한 복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다만 부수적인 사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무감각하게 실천하고 있다. 그러다가 스스로 죽음과 직면하게 되면 비로소 그러한 죽음문화”162) 에 물음을 던진다. 설령 친구 아버지처럼 구체적인 처리까지 당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고인에게는 권한이 없다. 복지 차원에서 논의하는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편 리를 위한 것이 되었다. 오직 체면이 시켜 발걸음하고 유족과 눈도장을 찍기 위해 틈 을 낼 뿐이다.

깊은 내력이야 어떻든 아버님이 이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다면, 못 이 기는 척하고 곧이곧대로 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어? (중략)

“세상과 사별할 순간에 이른 분들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안 남길까를 두고 한 번씩 은 심각하게 궁리를 해볼 거라고 믿네.”

“한다고 뭐가 나와? 소용없어. 것도 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일 거야. 무엇엔가 의지해서 자기 위안으로 삼으려는 빌미에 지나지 않아.”

“남은 사람들이 어련히 알아서 할 거란 말이지. 없으면 그만이고 있으면 챙기고.”(122 면)

162) 정현채 외, 같은 책, 49면.

친구는 “쓸데없는 허영일랑 집어치우고 어떡하면 식구들에게 마음고생 돈고생 시키 지 않고 조용히 갈 것인가”를 마음에 두는 게 좋다고 했다. 아버지의 장례절차에서 얻 은 통찰이라면 통찰일 수 있다. 이어 친구는 어느 노인은 실제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혼자 죽음 연습을 한다고 들려줬다. 이에 그는 “왜 죽는 문제에 대해 서로 의 견 나누고 토론하는 모임은 없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죽음 연습이랄지 트레이닝 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죽어본 사람이 있어야 실감나게 질의응답하면서 결론 내릴 것 아닌가.”라는 친구의 말처럼 그는 이런 현실이 못내 아쉽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대 개 고립된 주체로 남는다. 개인의 기억에서 죽음 이미지는 그 사회에 만연한 죽음 이 미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매일 신문 부고란에서 만나는 모든 죽음처럼 간단하게 타 자화되는 ‘그들의 죽음’인 것이다. 일상성에서 빈번하게 만나는 모든 죽음문화는 그러 한 형태를 띤다. 노인이 다른 노인에게서 듣는 죽음의 비중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 나지 못한다. 따라서 죽음과 함께 죽음 이후 어떤 기억을 남기는지는 중요하다. 바로 이런 기억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지는 접점이 ‘애도’이다. 애도에서는 죽은 자와 애도하 는 자 사이에 진정한 관계가 드러나며, 그것은 애도의 공동체라 불릴 수 있다.

“두말하면 잔소리. 자네나 나나 그 따위 쓸데없는 허영일랑 집어치우고, 어떡하면 식 구들에게 마음고생 돈고생 시키지 않고 조용히 갈 것인가를 마음에 두는 게 좋아. 우 리는 그럴 나이 아닌가. 요전에 만난 어떤 노인은 그러대. 자기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혼자 죽음 연습을 한대. 이대로 가뭇없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말이야. 죽을병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그랬어. 아침에 멀쩡한 자기 모습을 거울로 대하고는 간밤도 무사 했구나. 그렇다면 오늘은 열심히 살아야겠구나.”(122면)

“누구 맘대로. 근데 말이네. 뻑하면 여는 세미나나 심포지엄이 좀 많은가. 하루가 멀 다고 법석들을 떨면서 왜 죽는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모임은 없을 까. 자네가 만났다는 분 말대로 죽음 연습이랄지 트레이닝을 하는 곳은 어째서 한 군 데도 없느냐 이 말이야.”

“트레이닝 좋아하네. 세미나라는 것은 사회적 경험에 입각하여 실체적 진실에 웬만큼 접근하거나 합의에 도달하려는 전문가 집단의 토론장 아닌가. 마지막엔 사회자가 여러 의견을 참작하여 나름의 평가를 하고. 한데 죽어본 사람이 있어야 실감나게 질의응답 을 하든가 결론을 내리지. 아무도 없잖아. 그보다도 장소조차 빌리기 어려울 걸세. 재 수 없이 죽음을 가지고 따따부따하기냐면서 건물주가 당장 밀어낼 게 뻔해. 부정 탄다 고 소금이나 뿌리지 않으면 다행일걸. 터부 중의 터부야 그건.”(1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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